대막리지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관직

파일:고구려 삼족오.png
고구려의 관직


[ 펼치기 · 접기 ]
초기
중기
후기
1등
상가(相加)
폐지
2등
대로(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태대형(太大兄)
막하라지(莫何羅支)
3등
대형(大兄)
7등
대형(大兄)
힐지(纈支)
4등
소형(小兄)
10등
소형(小兄)
실지(失支)
5등
주부(主簿)
5등
의후사(意候奢)
3등
울절(鬱折)
6등
우태(于台)
6등
오졸(烏拙)
7등
(승)사자((丞)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알사(謁奢)
8등
대사자(大使者)
6등
대사(大奢)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
계달사자(契達使者)
을사(乙奢)
10등
욕사(褥奢)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
유사(儒奢)
8등
조의(皂衣)
11등
예속(翳屬)
5등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
11등
제형(諸兄)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
12등
과절(過節)
13등
불(과)절(不(過)節)
9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4등
선인(先人)
실원(失元)
서인(庶人)

지방
욕살(褥薩)




1. 개요
2. 칭호와 별칭
3. 상세
4. 역임자
4.1. 막리지
4.2. 태대대로
4.3. 대막리지
5. 여담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구려보장왕 시기에 연남생이 역임하였고 연개소문 역시 지냈을 것으로 생각되는 관직이다. 동시기 신라태대각간이나 중국상국과 비슷한 전설의 관직 같은 특별한 이미지가 있다. 후대에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정이대장군과도 유사하다.

영어권에서는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라는 의미에서 대막리지를 대원수(Generalissimo)로 번역한다. 영어권에서 대원수로 칭하는 인물들은 중화민국 특급상장 장제스, 스페인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이 있다.


2. 칭호와 별칭[편집]


대막리지는 기록마다 칭호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선 막리지와 동일시되는 기록이 있고, 대막리지라는 칭호가 나온다. 한편 <묘지명>에서는 태막리지, 태대막리지가 등장한다. 등장하는 수를 따져보면

  • 대막리지(大莫離支): 1번(《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 태막리지(太莫離支): 1번(<천남생 묘지명>)
  •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太大莫離之): 2번(<천남산 묘지명>, <천헌성 묘지명>)

또한 대체로 막리지에 태(太), 대(大) 자를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1]


3. 상세[편집]


《구당서》에는 막리지가 병권과 인사권에 관여하는 최고위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막리지는 본래 고구려 '태대형'(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이후 막리지에 권한과 권위가 더해져 등장한 것이 대막리지이다.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역임한 관직이 태대대로(太大對盧)로 나타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태대형은 원래 부족장급의 직위였으나 국왕 중심의 관료화가 이루어지면서 최고위 귀족들의 관직으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제가회의에서 선출되었던 3년 임기의 수상이 '대대로'(1품)였다고 하는 기록과 무관 최고위직이었던 '대모달'(이명은 '막하라수지'이다.)이 대형의 일종인 '조의두대형'(5품) 이상의 매우 높은 직위를 가진 자만이 역임할 수 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더불어 보면 직위가 분명하게 분화되지 않았던 귀족사회의 특성상 대대로(1품)의 경우도 고위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후기 고구려 사회의 최고위직인 태대형(2품)들 중에서 주로 선발되었기에 혼동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연개소문 집권기에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에 실권을 잡을 때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막리지가, <묘지명>에 따르면 태막리지가 되었다고 나온다. 그 후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동생 연남건의 경우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고 《삼국사기》에 막리지가 되었다는 기록만 있다.

이의 경우 연개소문 관련 기록을 보면 대막리지를 그냥 막리지라 줄여서 부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연남건이 연남생의 자리를 탈취했다는 것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 연남건과 함께한 막내 연남산의 경우는 태대막리지를 역임했다고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연남산이 막리지 계열의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 잠깐 추론을 해보자면 첫 번째 경우 만약 연남생이 연개소문의 대막리지보다 높은 자리를 신설했던 것이라면 고구려의 일반적인 관직 작명법에 비춰볼 때 정확한 명칭은 태막리지가 아닌 태대막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연남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차례로 태대막리지를 역임한 것이 된다. 연남산이 태대막리지를 역임했던 때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의 해인 668년 쯤으로 보이는데 보장왕과 연남산이 함께 항복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장왕이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연남건의 관직을 삭탈하고 연남산에게 넘겼던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경우 태막리지나 태대막리지 같은 관직명이 묘지명에 기록되었던 시기가 연남생과 연남산이 중국으로 넘어간 뒤였다는 걸 고려해볼 때 <묘지명> 기록시에 혼동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연개소문 때부터 연남산 때까지 그냥 쭈욱 대막리지였던 것이 된다. 이 추론이 맞는다면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남건은 관직을 삭탈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경우 태막리지는 대막리지의 오기가 맞으나 태대막리지는 실제로 존재했던 관직이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보장왕이 연남건의 의견을 찍어누르고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연남산에게 대막리지보다 높은 태대막리지라는 자리를 내린 것이 된다. 물론 어느 경우이든 연남산은 최고위직이 되자마자 항복한 것이므로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4. 역임자[편집]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대막리지


[ 펼치기 · 접기 ]
보장왕조
태대대로*
연개소문
태대막리지*
연남생
막리지*
연남건
태대막리지*
연남산
* 추정을 제하고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연헌성 묘지명, 연남산 묘지명 원문 기준 각각 가장 높은 관직명 기술.
연씨 집권자
고구려 (좌우보 · 국상 · 대막리지) · 백제 (좌우보 · 상좌평)
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대한민국 국무총리







4.1. 막리지[편집]




4.2. 태대대로[편집]




4.3. 대막리지[편집]




5. 여담[편집]


연개소문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런지 막리지는 연개소문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으며 먼 훗날 고려시대에 당시 몽골제국의 우승상이던 사천택이 '너희 나라에서는 재상을 막리지라 부른다지?' 라고 물어봐서 고려 사신으로 온 이장용(李藏用)이 뻘쭘해 했다 한다. 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실제로 몽골측에서 고려를 고구려라고 착각한 것에서 기인한 듯하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에 따르면, 몽골의 황족 중 한 명인 만주 쪽 군벌 나얀이 고려 북부와 만주를 다스리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어 의아함을 자아내는데, 당시 몽골인들이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했다고 보면 고려가 점유하지 못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고려 북부'로 칭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6. 같이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02:26:35에 나무위키 대막리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신라 태대각간도 고구려와 유사하게 각간에 태자 대자를 추가한 것이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