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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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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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구[편집]


야구대만국기라 할 만큼 명실상부 대만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1999년 새로 제정된 대만 달러 500달러에 원주민 학생들로 구성되어 전국대회를 제패한 리틀야구팀을 도안의 상징으로 삼은 것만 봐도 그 인기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1] 다른 웬만한 모든 구기 종목들로는 전부 거의 다 중국에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야구 만큼은 아주 완벽히 확실하게 실력으로 중국을 압도한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야구는 일본인의 스포츠라고 해서[2] 대만 사람들이 배척하던 스포츠였지만 문화와 스포츠를 통한 동화작업을 진행함에 따라 야구를 대만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31년 대만의 가의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 현 국립자이대학의 전신) 야구단이 고시엔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대만에서의 야구붐은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고시엔에 참여하던 내지 밖의 조선, 만주, 대만 팀과 달리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의 주전/비주전 차별이 없었기에 이러한 붐이 일게 된 것이다.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는 KANO[3]라는 영화로 2014년 제작되어 히트를 쳤다.

일제가 패망하고 중화민국이 대만을 통치한 이후로 일본의 스포츠였던 야구는 자연스레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었다. 대신 장제스국민당은 축구와 농구를 '중국인의 스포츠'라면서 대대적으로 밀어줬다. 원산야구장이 미군에게 공여가 되면서 1959년까지는 타이베이 시내에 야구장이 없는 상태가 지속될 정도로 야구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며 1960년대부터 FIFAFIBA에 심한 간섭과 압박을 가해 결국 대만이 국제 대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4]

그런 상황에서 1968년 타이둥의 한 초등학교 야구팀을 주축으로 한 팀이 일본 간사이 대표를 꺾으면서부터 장제스 정권은 야구를 프로파간다로 삼기 시작한다. 또한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여기에는 설마 소년체육에 정치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불참을 강요하겠냐는 계산도 있었다. 대만의 리틀야구 실력은 아시아 최강의 수준을 자랑했었다. 한때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17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5] 야구 종주국 미국 리그팀에 이어 대만은 역대 2번째 우승국으로 만만치 않은 성적을 거뒀었다. 그러나 1996년 대회 이후 2009년에 오랫만에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거뒀던 것이 2000년대 와서 거둔 이 대회 결승 진출 기록이고, 1996년 이후 20년째 우승을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과거 일이긴 해도) 리틀리그 강호였으며 왕젠민이나 천웨이인 같은 메이저리거도 배출했고, 국제대회에서 나름 내세울 수 있는 성과라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우승[6]이 있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도 리틀리그 우승은 1996년이 마지막이고 올림픽도 1992년 이후로 다시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시안 게임 역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이후 금메달을 딴 적이 없다. 아시안 게임만 나가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밀려 매번 은메달 아니면 동메달을 땄는데 2006년 대회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심하게 삽을 푸는 바람에 대만이 금메달을 땄다. 그래도 실력으로는 대한민국,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 빅3 수준에 들기는 한다.

야구가 인기종목이라 프로리그(CPBL)도 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야구계의 대규모 승부조작사건으로 인기가 크게 떨어졌으나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2013 WBC에서 사상 첫 8강에 오르며 자국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대만 동부 지역에는 프로야구 팀이 없어서 주로 전국구 인기를 지닌 퉁이나 중신을 응원한다.

대만 출신의 유망주들은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던 일본으로 어릴 때부터 유학을 가는 케이스가 많다. 야구가 인기종목인 데 반해 프로리그가 생긴 게 1989년으로 늦어서 그 이전 시대에는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해서 이름을 날린 선수들도 꽤 있었고, 2000년대 승부 조작으로 자국 리그가 크게 인기가 떨어지자 선수 유출은 과거보다도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닛폰햄 파이터즈를 거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 양다이강도 청소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후쿠오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렇게 고교/대학 시절에 유학을 나온 선수 외에도 대만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다.[7] 이런 케이스의 선수로는 궈쥔린, 쏭자하오, 천관위, 왕이정 등이 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 선수 보유제도와 관련이 있다. 일본프로야구는 외인 선수 보유가 무제한인데다가 대만 출신 선수들을 저렴한 비용에 스카우트해서 육성하는 것이 가성비 좋고 검증된 방식이다. 고교시절 유학을 떠난 선수들까지 포함하면 대만 유망주들의 유출이 심각한 편이다. 또한 일본 말고 메이저에 도전하는 선수들도 한국에 비해서 많은데 이 역시 고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일본, 직행파와 자국 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가는 파가 모두 존재하는 한국과는 달리 대만에서 자국 리그를 뛰다가 상위 리그에 도전한 자국 선수는 왕보룽이 유일하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고. 의외로 대만 야구 팬들은 한국 야구에도 관심이 많으며 대만 프로팀과 아시아 시리즈 등의 대회에서 붙었던 은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만 출신으로는 최초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던 왕웨이중이 2018년에 KBO 리그 NC 다이노스에서 활약했을 때 KBO 리그 경기가 대만에 중계되기도 했다.


2. 축구[편집]


일본과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고 대만에 밀려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눈에 야구는 그저 일본의 스포츠였을 뿐이다. 정부는 일본 색채를 지우기 위해 축구와 농구를 적극 장려하였다. 1950~60년대에는 세계구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1954년 필리핀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을 5:2로,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도 대한민국을 3:2로 이기고 금메달 2개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대만축구협회는 중국과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아시아 축구 연맹(AFC)에서 축출되었고, 1975년에는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까지 오세아니아에서 지역 예선을 치렀다. 그러다가 1989년이 돼서야 다시 AFC로 복귀했다. 이 기간 동안 대만 축구는 경기수가 급속히 줄어들며 실력이 급속히 퇴보했고 AFC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아시아의 동네북 신세로 약해져 있었다. 한때는 실력이 비등비등했던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중위권 국가들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9년 들어서는 요르단, 쿠웨이트 등 중하위권 중동 팀들에게 각각 5-0, 9-0으로 시원하게 박살나고, 2021년에는 무려 네팔에게 2-0으로 깨지는 등 사실상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로 봐도 최하위권 수준. 게다가 최근에 출전한 국제대회인 2023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2-0으로 박살나, 키르키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4-1로 아주 시원하게 개박살이 나버렸고 결국 3전 1승 2패로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자국 농구 대표팀이 국내에서 매회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꾸준히 실전 감각을 익혀갔던 반면, 축구 대표팀은 아시아 각국에서 열리던 국제축구대회에 불참한 것도 컸다. 태국 킹스컵이나 코리아컵 등 소위 아시아 3대 대회 참가 기록이 전무하다. 므르데카컵에 참가 기록은 있으나 홍콩 프리미어 리그 선발팀이나 홍콩리그에서 뛰던 홍콩 태생 중화민국 국적 선수 선발팀[8]이 1968년까지 중화민국으로 참여한 기록이다. 대만이 원하기만 했다면 현재도 민간교류가 아주 활발한 말레이시아나 아시아 유일의 수교국인 대한민국에 요청하여 해당국에서 개최하는 국제축구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이 꾸준히 구정컵을 연 것이나 자국 농구협회를 보면 대만 정도의 경제력이면 스스로 국제 축구대회를 충분히 개최할 수 있었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국제정세 탓만 할 수도 없는 법.

2014년까지는 지금은 폐지된 대회들인 AFC의 최하위 수준 대회인 AFC 챌린지컵(국대)과 AFC프레지던트컵(클럽)이나 나가고 있는 신세였다. 2011년에는 처음으로 프레지던트컵에서 자국 클럽인 타이완전력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대회를 개최한 이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축구 약체들이 대부분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대만이 축구에서는 미래의 발전 가능성 면에서 나은 게 없다. 과장 좀 보태서 대만에서 태어난 사람이 축구선수가 되길 원하면 대만 해협 건너 중국으로 이민가서 거기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거나, 본인이 대륙이 영 꺼려진다면, 홍콩 프로축구 리그나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 등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의 다른 리그로 가서 선수로 뛰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제 와서 대만에 프로축구리그가 출범하고 유소년 축구인재 육성 시스템을 만든다고 해도 미래의 발전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는 게 거기서 훌륭한 선수들이나 발전 가능성이 있는 유소년 유망주가 나온다고 해도, 중국 슈퍼 리그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에[9] 대만 자체의 축구 리그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2017년 새로운 실업리그인 대만 축구 프리미어 리그(Taiwan Football Premier League)가 출범했다. 프로 리그는 중국어로 職業이라는 명칭이 붙는 반면, 이 리그는 台灣企業甲級足球聯賽라고 칭한다. 실제로 대학팀들도 기업들의 스폰서를 받아 참가하고 있다. 축구 뿐만 아니라 대부분 종목의 실업 리그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것은 대만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을 참고할 것. 2009년부터는 타이베이 시립경기장가오슝 국립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A매치 관중 수는 적은 편인데 가오슝 국립경기장이 규모가 큰지라 주로 타이베이시립경기장을 사용하는 중.

여자축구는 남자축구에 비해 조금 나은 편이다. 월드컵에 1회 출전한 바 있으며 아시안컵에도 단골로 출전했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아시아에서 꾸준히 4강에 들어가는 나름 강호였으나 이후로는 남자축구처럼 실력이 퇴보하는 모습으로 최근 3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한국과의 역대 경기를 보면 빠르게 몰락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대만에 0-7로 대패하였고, 1991년 아시안컵 조별 라운드에서는 0-9로 대패를 당할 정도로 대만은 아시아에서 상위권이었으나, 1997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에게 1-0으로 승리한 이후 한국에게 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아시안컵에서는 대만이 한국에게 첫 패배를 당하게 되었고, 2017년 동아시아 축구 대회 예선에서는 대만이 9-0으로 제압당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10]

1999년 아시안컵에서 준우승 한 이후 조별 예선에만 머물더니 2010년대부터는 지역 예선에서 미얀마, 태국에 밀려 본선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 축구 대회는 일본과 북한이 최다우승 국가에 중국과 한국이 고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북한이 불참하는 대회에만 출전하고 있다. 그래도 아시안 게임에는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2001년에는 아시안컵을 유치하여 개최한 바 있다. 대부분의 경기는 반차오에 위치한 반차오경기장에서 열렸으나 홈 개최라는 이점에도 한국에 밀려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국이 대만과 맞붙은 대만 대회 1라운드가 한국이 처음으로 대만에게 승리한 경기다.

예전 국가대표팀 홈 그라운드는 1989년 개장하여 2008년 폐장한 20,000석 규모의 타이베이 중산축구전용구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구장이었다가 1945년 이후 미군기지로 사용되었으며 미군 철수 후 축구전용구장을 세웠다. 구장의 외관 자체가 중국 전통양식을 차용해서 스포츠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독특한 구장이며 전광판마저도 중국식 기와를 얹혀놓은 특이한 모습이다. 조명탑 또한 관중석 바깥이 아닌 코너 플래그 쪽에 위치해 있던 여러가지로 독특한 구장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20년된 경기장이라기에는 관리상태도 안 좋았고, 무엇보다도 쑹산공항에 착륙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심판의 호각소리조차 잘 안 들리는 문제가 있었다. 막상 이 문제는 구장 폐쇄시점에는 고속철도 개통으로 국내선이 대거 사라지면서 문제가 해결되긴 했다. MRT 위안산역 플랫폼에서 바로 보이는데 현재는 위안산엑스포공원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라운드를 철거한 거 외에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독특한 외관을 구경할 수 있다. 2007년 아시안컵 예선 경기 때 이 곳에 원정응원 갔던 후기들이 아직도 인터넷에 제법 있으니 궁금하면 검색해 볼 수도 있다.

대만은 생활스포츠로서의 축구도 인기가 매우 떨어지는 편인데 학교 운동장에도 축구장 대신 농구장을 만들어 놓은곳이 허다하고[11] 공원에 축구장을 만들어 놨더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3. 농구[편집]


농구 또한 장제스가 적극적으로 밀어준 종목 중 하나로 전반적인 성적이나 인기는 축구보다 좋다. 현재도 고교 농구와 대학 농구 리그가 스포츠 채널의 주요 겨울 컨텐츠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농구에 대한 인기는 좋은 편이다.

올림픽 본선에도 출전했으며 1959년 FIBA 월드컵에서 출전국 13개 중 4위를 차지했다[12]. 1989년 ABC컵에서도 15개국 중 3위를 기록할 정도. 농구의 인기가 저하된 현재도 윌리엄존스컵 대회를 매회 개최하는 정성을 들이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아시아 동네북 수준이다. 중국에게 101-50 정도로 선전했지만 카타르에게 98-37, 요르단에게 102-35 로 진 적까지 있다. 필리핀과 친선전에서도 81-42로 졌다.

2010년대에는 농구에도 투자를 해서인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아시아 18살 청소년 농구대회에선 중국-한국 다음으로 3위에 올랐는데, 만만치 않은 상대인 이란을 이기기도 했으며 한국과도 9점차 패배라는 선전을 벌였다. 그리고 윌리엄 존스 컵에서 한국을 이겼으며 2013년 필리핀 아시아 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압도적 응원을 받던 안방팀 필리핀을 조예선에서 84-79로 이겼으며 예상을 뒤엎고 중국을 96-78로 8강에서 탈락시켰다. 비록 준결승전에서 우승팀 이란에게 60-79, 3-4위전에서 한국에게 57-75로 패배했지만, 확실히 예전 동네북 시절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겨우 2년만인 중국에서 열린 2015 남자 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카타르, 카자흐스탄, 레바논에게 모두 져서 13-16위 순위 결정전으로 나가 13위를 차지하면서 부침이 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여자농구 쪽은 과거 중국, 한국과 비등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며, IMF가 터져 여자농구팀이 반토막이 나던 시절에 대만리그로 진출한 유망주들이 몇몇 있었다. 요즘은 일본이 급부상한 상태에서 중국, 한국 그 다음 위치에 있다. 그런데... 아시아 여자 선수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4강에 오른 1986년 이후로 30년동안 14번동안 연이어 4강에 오르고 있긴 한데 3위가 최고성적으로 1번도 결승에 올라본 적이 없다. 게다가 2007년 대회부터 5회 연속 4위를 차지하는 중. 참고로 한국이 12번으로 최다 우승, 중국이 11번, 일본이 3번(1970년 우승 이후로 2013, 2015년 우승)하면서 3나라가 우승을 차지하는 가운데 대만은 우승이 없는 유일한 4강팀.


프로리그인 P.LEAGUE+(PLG)와 T1 LEAGUE(T1)가 있으며 세미프로리그인 SBL(Super Basketball League)이 있다.

본래 1994년에 출범하여 2000년 까지[13] 운영된 프로리그인 중화직업농구리그 CBA가 있었는데 리그 해체 후 2003년 세미프로리그인 SBL이 출범했다. CBA의 경기 시간은 48분이었고 SBL은 40분이었다. SBL은 외국인선수도 기용하고 있다. SBL은 7개 구단으로 출범하였으나 2018년 시즌 직후 푸방브레이브스가 아세안농구리그에 참여를 선언하고 다싱 타이거즈가 순수 아마추어인 사회인(실업)팀으로 전환 및 팀 해산을 통해 현재는 4개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까지는 세미프로리그인 SBL이 최상위리그였으나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프로리그인 PLG와 T1이 출범하게 되었다. 두 리그 모두 NBA와 동일하게 경기시간이 48분이다. PLG와 T1은 현재 각각 6개팀이 참여하고 있는데, 무려 5개 도시에서 두 리그간 연고가 겹친다. 과거 야구가 리그를 두 개 돌렸다가 둘 다 망한적이 있어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2022년 시범경기 격으로 프로팀인 PLG, T1 및 세미프로인 SBL이 참여하는 인터리그를 출범하였으며, 현재는 두 리그의 합병 이야기가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동아시아 슈퍼리그에는 PLG 우승팀이 참여한 바 있다.

PLG와 T1 뿐만 아니라 SBL 그리고 대학농구, 고교농구까지 모두 스포츠채널을 통해 중계되고 있다. 여자 실업리그는 2004년 새로 출범한 WSBL이 4개팀으로 근근히 운영되고 있다.

현재 PLG에 참여하고 있는 포모사 드리머스는 최초 창단시 대만 리그가 아닌 아세안 농구리그(ASEAN Basketball League)에 참여했으며 2019/20 시즌에는 푸방 브레이브스가 SBL을 탈퇴하고 ABL에 참여했다. ABL은 대만, 홍콩, 마카오,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클럽이 참여했고 전부 홈앤어웨이로 진행됐다. 정규리그 경기수는 20경기 정도에 불과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2019-2020 시즌 중 중단된 후 아직까지 리그를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WKBL 부산 BNK 썸에 대만 출신의 진안(秦安) 선수가 뛰고 있다. 대만 협회로부터 2년간 출전정지라는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날 중징계를 받고 고등학생 때 한국으로 귀화하여 WKBL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으며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대만 T1리그의 타오위안 시노펙은행 레오파즈로 오면서 다른 나라에도 어느정도 알려진 상황이며 코로나로 부침을 겪는 중국리그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4. 배구[편집]


배구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있다. 배구 리그로는 2004년에 출범한 TVL(Top Volleyball Leauge)가 있다. 2004년 출범해 남자부와 여자부에 각각 4개씩의 구단이 참여하고 있으며 농구와 마찬가지로 지역연고 없이 몇몇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가 치뤄진다. 아직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리그 레벨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로 리그로 전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017년부터 대만 FOX스포츠에서 경기를 중계한다.

2019 대통령배 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대한민국, 여자부) 여고부에 대만 타이중시의 동산고등학교(臺中市立東山高級中學)가 출전했다. 동산고는 전 경기에서 목포여상과 제천여고를 3:0으로 이겼으나, 전주근영여고에 2:3으로 패배했다(7월 20일) . 경기 직후 대만 동산고의 감독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기 팀 선수의 뺨을 때렸다.

2023년 7월 13~20일에 전남 영광군에서 개최한, 제56회 대통령배 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에, 대만 타이중시(臺中市)의 배구 명문 풍원상업고등학교(臺中市立豐原商業高級中等學校) 배구부가 출전했다. 19세이하 남자부 A조에서 3개 학교와 3세트 2선승으로 친선 경기에 임하여 2승 1패를 기록했다.

5. 태권도[편집]


태권도가 제법 인기가 있다. 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천스쉰 선수가 태권도로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덕분이라고 한다. 최초로 천스쉰 선수가 금메달을 땄음에도 국가연주와 국기 게양이 되지않아 해당선수는 물론이고 대만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태권도에 관련된 드라마도 만들고, 태권도 물품 수입도 많이 한다고 한다.

아시안 게임 태권도에서도 강호로 금 11, 은 9 ,동 15개로 한국(70개), 이란(39개), 중국(금 9개, 10개, 동 18개로 37개)에 이어 태권도 아시안 게임 메달 4위이다.[14]


6. 골프[편집]


2011년 1월 대만의 22세 여자골퍼 청야니가 15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지키던 신지애를 제치고 LPGA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를 차지했다. 한국선수가 바글바글한 LPGA에서 한국선수를 제치고 차지한 1위라 한국에선 공공의 적 포지션[15]이었고 그 뒤로 무려 109주 동안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를 지켰던 여자 골프 최강자였다. 그러나, 2013년 미국에서 열린 LPGA 13개 대회서 10위권에 단 2회 올라갔을 뿐…커트 탈락도 2번이었으며 50위 바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부진 속에 청야니는 2년만인 2014년 7월에는 세계랭킹 46위까지 떨어졌다. 당시 청야니와 2위 최나연의 랭킹 판정 포인트 차이는 최나연과 랭킹 180위 선수의 차보다 컸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2014년 6월까지는 한국 여자선수 박인비가 58주 넘게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하면서 이제 청야니는 한국에서도 듣보잡으로 전락했고 대만 여자골프계는 그 뒤를 이을 다른 선수가 아직은 없다.


7. 바둑[편집]


파일:baduk_test3.png 대만의 주요 바둑 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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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바둑현황

한때는 한중일과 더불어 바둑도 꽤 하는 나라였던 적이 있었다. 대만기원이 있으나 대만의 바둑 밑바닥은 정말 씨가 말라버렸다. 대만 기업들이 여력이 없어 대만 바둑대회 후원을 거의 끊어버려서 대만의 바둑 기전은 1년에 12개(1달에 1개)도 안 되는 8개 대회에 불과하다. 한 나라의 바둑 기전은 1달에 1개 대회 정도는 결승전까지 열려야 유지될 수 있는데 대만의 바둑은 정말 급속도로 퇴화해버린 것. 그래서 대만기원에 있는 프로 기사들은 세계 랭킹 상위권에서 드물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대만기원과 해봉기원 간의 갈등이 오래되어 서로 갈등을 빚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대만 바둑계가 전부 망해버리고 난 다음에 두 단체 간 통합이 의결되어 양 기원이 전부 해산하고 신 대만기원을 결성하고 대만기원(구)과 해봉기원이 지부로 내려갔다.

우칭위안, 린하이펑중화민국대륙에 있던 시절부터 일본에 건너간 바둑 기사들이 있고, 2000년대에도 자국 바둑 현실에 절망하고 일본기원이나 한국기원으로 이민가는 대만 바둑기사가 엄청 많다. 왕리청, 왕밍완, 장쉬 九단도 대만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셰이민 같은 여류기사들도 당장 지네 나라를 등지고 일본으로 가서 성적을 내고 있다. 셰이민은 현재 후지사와 리나일본 여류바둑계 1인자를 다투고 있다.

대만 내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났던 기사는 남자에서는 저우쥔쉰 9단, 여자에서는 헤이자자 7단이다.

2016년 현재에는 위리쥔 初단을 대한민국유학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키워서 바둑 광고에 써먹으려는 등의 노력을 하고있다.

2020년대는 왕위안쥔쉬하오훙 등이 세계 대회에서 조금씩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8. e스포츠[편집]


몇몇 게임에서 세계적으로 최상위급의 실력을 보인다. 자체 스타크래프트 2 프로리그도 있고(TeSL), AVA가 인기가 높기 때문에 AVA 리그도 매년 열리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 클랜 및 게임단을 초청하기도 한다.

대표 프로게임 구단으로는 스타크래프트 2 플레이어 강초원, 이동녕, 원이삭이 있는 yoe Flash Wolves리그 오브 레전드 시즌2 월드 챔피언십 우승팀 Taipei Assassins리그 오브 레전드 2015 시즌 월드 챔피언십 8강에 진출한[16] ahq e-Sports Club와 앞서 언급한 yoe Flash Wolves의 LoL팀이 있다.

대만의 리그 오브 레전드 대회인 LMS는 5대 리그 중 하나로 높은 위상을 가졌었다. 특히 LMS 최강팀인 플래시 울브즈는 독보적 최상위 리그인 LCK 팀들에게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하는 천적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특히 고평가를 받았었다. 다만 오히려 다른 대륙들에는 약하며 특히 중국에게 너무 약한 게 약점. 이후 비공식 세체정 취급을 받던 Karsa가 RNG로 탈출하면서 몰락이 시작됐고 LCK의 몰락과 함께 대만 리그 자체의 승부조작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해 지금은 동남아시아 리그와 통합되어 PCS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15년 대만 정부에서 e스포츠를 정식 스포츠로 인정하였다. 2018 스타크래프트2 WCS 프리미어 써킷에 대만 프로게이머 최초로 커유펑이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인기투표를 통하여 대만 프로게이머 최초로 GSL VS the world를 참여한다.

한때는 카트라이더도 프로팀과 리그가 존재했으나 현재는 아마추어 리그만 열린다. 이때 대만 카트라이더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실적을 쌓았던 리우창헝은 2022년 한국 팀에 입단하면서 해외 카트라이더 선수 최초로 한국 프로팀에 진출하였고 개인전 우승 커리어를 만들어냈다. 이외에도 2014년에 리우창헝 이외의 대만 선수들이 중국 카트라이더 프로팀에 입단한 사례도 있다.

e스포츠 경기장 시설은 열악하여 한국의 초창기 e스포츠가 생각나는 PC방 수준의 경기장이 대부분이며, 때문에 상설경기장 보다는 특설경기장이 활성화되어 있다. 대형 경기장으로는 싱가포르 가레나[17]에서 2014년 타이베이 네이후에 설립한 관람석 120석 규모의 가레나 스타디움과 미국 블리자드에서 2017년 타이베이 시내에 설립한 e스포츠 전용 경기장[18]이 있었으나 둘 다 2019년 폐쇄되었다.(블리자드 스타디움은 대만 합작사가 몇 개월 더 운영하다가 건물 자체가 재건축으로 폐쇄) 현재는 공식적으로 가레나 스타디움을 계승하여 2019년 타이베이 시내에 설립된 로지텍 아레나와 2018년 가오슝 영광부두 내에 건립된 TeSL 가오슝 경기장이 유일한 대형 경기장이다.

9. 기타 스포츠[편집]


동계 스포츠에서는 올림픽은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처음 참여하여 꾸준히 참가 의의만 두고 있는 상태이며, 동계 아시안 게임은 1990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부터 참여하여 아직까지 메달조차 없다.

인라인 스케이트 강국이다. 아시안 게임 전체 메달 15개 중 6개가 대만이 차지해갔다. 2위는 일본으로 금메달 4개. 참고로 우리나라가 3위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바 있다. 심지어 2017 유니버시아드는 개최국 버프로 금메달 16개중 10개가 대만이 휩쓸어 갈정도로 실력이 좋다. 한국에서도 정철원의 어이없는 세리머니 은메달 당시 금메달을 따낸 나라가 되며 주목받게 되었다.


10. 전국운동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전국운동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주요 경기장[편집]


경기장 인프라는 한국에 비해 확실히 부족하며 대형경기장은 아래 목록에 나온 게 전부인데다 대도시인 타이난 시립경기장은 20,000석 규모도 되지 않는다. 국제대회를 많이 유치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경제규모를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종합경기장은 가오슝에 있는 국립경기장과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리모델링한 타이베이 시립경기장을 제외하면 수원이나 대전의 종합경기장보다 아쉬운 수준이다. 경기장 수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활용도가 낮아 주요 시설들은 공연장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한국의 경우 88올림픽을 치룬 후 오래되고 사용 빈도가 낮은 구장들이 공연장으로 전환된 반면 대만은 최신식 경기장들에서 공연 활용빈도가 높은 편. 월드 게임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55,000석의 가오슝 국립경기장은 대만 내의 유일한 대형경기장임에도 활용 실태를 보면 스포츠 행사가 전무하며 콘서트가 더 많이 열린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실내스포츠경기장은 1993년 타오위안 아레나가 최초의 현대식 실내스포츠 시설로 개장한 이후 콘서트 등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많은 수의 대형실내체육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타이난과 타이중에도 조만간 대형체육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종합운동장
가오슝 국립경기장
55,000석
가오슝시
타오위안종합경기장
35,000석
타오위안시
타이완성립경기장
30,000석
타이중시
반차오종합경기장
30,000석
신베이시
가오슝중정경기장
30,000석
가오슝시
윈린현립경기장
30,000석
윈린
타이베이 시립경기장
20,000석
타이베이

야구장

실내체육관
타이베이 아레나
15,000석
타이베이시
가오슝 아레나
15,000석
가오슝시
국립체육대학체육관
15,000석
신베이시
타오위안 아레나
15,000석
타오위안시
신주현립체육관
8,000석
신주현
먀오리아레나체육관
7,789석
먀오리
신좡체육관
7,125석
신베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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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 사람들도 이 지폐 도안의 모델을 타이둥 출신의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폐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1986년~1987년생으로 프로 2군까지 진출했었거나 실업야구팀에서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는 선수가 있다.[2] 물론 야구는 엄연히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제에 의해 대만에 야구가 이식되고 정착했기에 이런 이미지가 붙었다.[3] 가의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의 준말 嘉農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4] 축구는 1989년이 되어서야 AFC에 복귀하게 되었고 FIBA 산하의 농구 대회에는 Formosa라는 이름으로 참여해야만 했다.[5] 대만이 마지막 우승하던 9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미국이 무려 25번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2017년 대회까지 미국은 무려 35번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은 각 지역을 별개로 집계한다. 가령 '미국 동부'와 '미국 남부'의 우승을 따로따로 계산한다. 미국 각 지역 리그팀이나 학교 팀이 거둔 우승기록을 합치면 미국이 최다 우승이다.[6] 우승은 7전 전승을 거둔 쿠바. 결승에서 9회까지 1-11로 참패[7] 외국인 선수로 분류되기 때문에 야구유학을 가는 것에 비해 불리하다.[8] 1965년 대회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공동 우승 처리인데 이 대회에 참여한 선수들도 모두 홍콩 태생으로 홍콩 리그에서 뛰던 중화민국 국적 선수들로 초창기 중화민국(대만) 대표팀이 강호로 자리잡는데 공헌한 선수들이다. 1965년 대회 참가선수 명단(중국어) [9]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 1차예선에 소집된 대만 대표팀의 23명 중 8명이 1차예선 당시 기준으로 중국 슈퍼 리그 또는 중국 슈퍼 리그의 하위리그 소속 선수들이고, 14명은 대만 리그 소속, 1명 무적이다. #[10] 실제로는 한국이 대만을 대파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고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이 1-0, 2018년 아시안게임 조별 리그에서는 2-1로 신승했을 정도로 한국이 대만보다 한 발짝 앞서는 차이다.[11] 대만 학생들은 축구 대신 농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12] 결승 라운드에 올라간 7개팀 중 4위였는데 소련과 불가리아가 대만과의 경기를 거부해 몰수패 당해서 2승을 거뒀다. 우승국 소련의 유일한 패배고 3개팀이 2승을 거뒀으나 득실 차가 앞섰던 대만이 4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도 정치적 압력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Formosa로 참여.[13] 외환위기의 여파로 98-99시즌을 마치지도 못하고 99년 초 중단되어, 실질적으로는 97-98 시즌이 마지막 시즌이다.[14] 타국의 금메달이 많아진 이유는 한국의 독주가 예전보다 약해진 이유도 있지만 남녀 각 8체급 중 한 나라가 6체급씩만 참가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은 아무리 잘해도 금메달 4개를 다른 나라에 줘야 한다.[15] 공공의 적 포지션이었다지만 그와 별개로 청야니는 어릴때부터 국제대회에서 한국 선수들과 여러번 만나면서 사적으로는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16] 4대리그라고 불리는 북미, 중국보다 나은 성적이다.[17] 가레나는 대만의 리그 오브 레전드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18] 블리자드, 공식 e스포츠 경기장 ‘블리자드 스타디움’ 대만서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