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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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선사 시대
2.2. 고대 ~ 중세 시대
2.3. 조기대만시기
2.4. 청나라의 통치
2.5. 일제 식민지 시절
2.6. 현대


1. 개요[편집]


본 문서는 타이완 섬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타이완 섬은 근세 이후에야 역사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지방이므로 지구상에서 신대륙을 개척한 다른 여러 나라와 흡사한 면이 있다. 물론 이 섬에는 그 이전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문자도 없는 미개인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남긴 문자기록이 없어서 원주민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오늘날 대만인의 주류인 한족 중심의 역사관으로 타이완 섬을 보면 고작(?) 400여 년 남짓한 역사의 섬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한족 및 중국 대륙 중심의 역사관에 반대하여 조영화(曹永和) 같은 대만의 학자들은 '대만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타이완 섬(대만)을 중국 대륙에 종속되는 섬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보는 역사관도 확립하였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영상을 참고해보자.(한국어 자막 있음)


2. 상세[편집]



2.1. 선사 시대[편집]


최초의 인류 흔적은 3만 년 전 쯤에 나타난다. 이들은 키작은 흑인계통의 네그리토로 추정되며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8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타이완 섬으로 이동해 왔다. 네그리토 종족들은 이후로 서서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종족들에게 점차적으로 동화되었고, 마지막 네그리토 종족은 사이시얏 족 거주지 근처에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대만해역의 풍부한 어장을 바탕으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대만 원주민은 미국-캐나다와 남미 동부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마냥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루지 않고 부족별로 흩어져 살았으며, 현재도 크고 작은 부족집단으로 나뉘어 있고 부족별로 언어도 다르다. 고산족(高山族), 일제강점기 때는 생번(生蕃: 날야만인이란 뜻)[1]따위 이름으로 불렸으며, 대만 제어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와 태평양 지역의 많은 언어들이 같은 남도어족계 그룹이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이 섬에 살아온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 고대 ~ 중세 시대[편집]


고대에는 그냥 원주민들만 사는 섬이였다. 삼국지에서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라 불렀는데 관련 사건도 언급된다. 230년에 이르러 오나라 황제 손권위나라와의 잦은 전투 등으로 인하여 인구가 감소 추세에 놓이자 위온제갈직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고 이주와 단주 등에 건너가서 징발을 명했다. 하지만 위온과 제갈직은 이주에 도착했으나 그곳은 미개한 원주민들만 있었고 위온과 제갈직은 그들이라도 1천 명을 징발해서 손권에게 돌아갔으나 태풍 등에 의해 8천이나 되는 많은 병력을 잃어(...) 분노한 손권에 의해 교수당했다.

이후 송나라부터 원나라 시대 때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해양무역이 발달하였다. 타이완 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러 해금정책이 실행되자 타이완 섬의 해양무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몽골인들이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점령해서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타이완섬 서쪽 저지대로 피난와서 거주했다. 한편 타이완 섬 중서부[2]에서는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스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을 건국하었다. 그 후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조선이나 일본은 물론 옆에 있는 오키나와 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다.


2.3. 조기대만시기[편집]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제국의 타이완 섬 통치 시대부터 동녕 왕국 통치 시대까지를 보통 조기대만시기(早期臺灣時期)라고 한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타이완 섬은 원주민들의 부족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였다. 한편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구권 열강들도 세계 각지에 세력을 뻗기 시작했고 이들은 동아시아에도 당도했다. 이 과정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시아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 제국의 항해사들이 유럽인 중 처음으로 타이완 섬의 존재에 대해 알렸고, 이들은 이 섬을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라 하였다. 이 명칭은 현재에도 타이완 섬을 이르는 별칭으로 쓰인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서양 세력에게도 원주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타이완 섬을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들인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국가 역량 한계로 인해[3] 이 지역을 식민화할 생각은 없었고, 대신 그곳의 원주민들이나 한족들과 약간의 교역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다 1624년에는 네덜란드 제국펑후 열도와 타이난에 당도하였다. 이들은 타이난에 질란디아 요새를 쌓고, 펑후에는 포대를 구축해 거점으로 삼고자 했는데 펑후의 포대에 대해서는 명나라가 자국 영토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밀려났다. 지역 원주민들은 이들에 호의적이지 않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지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고, 이내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 등을 세력권 안에 넣어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수출하여 이득을 얻었으며[4]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명나라 복건 지역에서 한족 노동력을 수입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첫 한족의 타이완 섬 진출 및 한족과 원주민의 첫 공생이 되었다.[5] 네덜란드인들은 일부 한족들을 하급 관리로 기용해 원주민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한편 네덜란드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 등을 세우고 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스페인 제국 역시 1626년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단수이 등에 당도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타이완 섬 북부를 지배했다. 그렇게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에서 몰아낸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무찌르는데 성공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두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다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해서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 분(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다두 왕국에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다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반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하자,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다두 왕이자 파포라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에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사이먼 반 브린(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 무릎을 꿇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한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고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다두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다두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6][7]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1644년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이 몰락하자 정성공이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한때 명나라의 고도 남경(南京)까지 진격하여 포위하는 등 잘 나가다가, 결국 청군에 패하고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 금문도로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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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대만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8],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고[9]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명정)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 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10] 강희제는 이에 맞서 해안의 5개 성 백성들을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내륙으로 옮기고 그 이상 넘어서 바닷가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한다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대응했지만[11] 그래도 대만 섬에는 한족들이 개간한 차밭에다가 원주민들이 재배한 사탕수수를 가공할 공장도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한편으로 네덜란드, 스페인, 동녕 왕국 모두 타이완 섬 전부를 지배하던건 아니고 서남부나 항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다두 왕국을 비롯한 원주민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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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의 타이완 섬. 연두색이 스페인 제국, 분홍색이 네덜란드 제국, 주황색이 다두 왕국의 영역이다.

한족들은 동녕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세우는 것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동녕 왕국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12]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녕 왕국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

또한 정성공은 동녕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타이완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 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战)에서 동녕 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 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2.4. 청나라의 통치[편집]


청나라동녕 왕국을 멸망시키고 타이완 섬을 통치한 시대를 지칭한다. 정성공이 죽은 후 동녕 왕국은 3대를 가면서 삼번의 난 때도 적극 동조하는 등 계속 반청정책을 펼쳤지만 결국 청에게 정벌당해 청의 영토가 되었다. 동녕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청나라는 타이완 섬에 지속적으로 진출했다.[13] 1732년 옹정제 통치 시기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 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을 한족의 군사작전을 통해 그대로 토벌하여 타이완 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그 영토까지 청나라에 편입하였다. 여담으로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른다.

이때 본격적으로 한족들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저항하는 토착민들은 산으로 쫓겨나서 고산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평지의 나머지 원주민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족에 동화되었다.

한편 한족들도 청나라의 지배에 저항하여 1720년에는 주일귀의 난이 벌어진다.

2.5. 일제 식민지 시절[편집]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지고 일본의 영토로 할양되었다. 이때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들이 청나라의 할양조치에 반발, 타이완 민주국이라는 정부체계를 세우고 일본에 대한 항전의지를 불태웠으나 5개월간의 항쟁 끝에 끝내 일본에 의해 무력점령되어 타이완 섬에서 대만일치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일본의 총독부인 대만총독부 치하에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고생한 것은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였지만, 대만총독부는 조선총독부보단 유화적인 통치를 했다. 게다가 일본과 다른 민족이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수백 년간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던 조선과 달리, 청이 싫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주해온 한족과 토착민족들이 청의 무관심 아래 살아온 대만은 중국 본토에 대한 소속감이 미약했고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강도도 자연히 약했다. 박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청이나 일본이나 외부에서 들어와 상전 노릇한 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였고, 일제 내각은 조선과는 달리 1920년대에 대만총독부를 휘하에 두는 데 성공하면서[14] 문관 총독도 임명할 정도였다.

허나 본질적으론 결국 식민 지배였던 건 사실이라, 대만에도 일본군에 의한 모란사 사건이나 대만 원주민의 저항(우서 사건), 한족의 저항(타파니 사건) 등이 벌어진 점에서 보듯 마냥 순탄한 통치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 시절 초기에도 타이완 민주국 같은 대만 독립운동이 있었고, 1930년대 이후부턴 전쟁통이라 대만 역시 징병과 수탈에 시달렸다.


2.6. 현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역사/대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대만에서 물러나며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런데 대륙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중국 국민당의 패배가 역력해지자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 섬으로 옮겼고, 그 후 타이완은 중화민국과 사실상 동의어가 되었다.

[1] 염상섭의 '만세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생번보다도 못하게 산다' 따위의 표현이 나오는데 생번이 바로 이들을 말한다. 그 정도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2] 영토는 현재의 타이중시 · 장화현 · 난터우현 일대라고 한다.[3]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 인구는 200-250만 명에 불과했다.[4] 1653년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조선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이 타고 있던 선박 스페르베르호에는 대량의 설탕이 화물로 실려 있었다고 하여 당시 타이완의 주 교역 상품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다른 화물로는 목향(약재의 일종), 명반, 용뇌, 사슴·산양·영양 등의 가죽 등이 있었다고 한다.[5]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6]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7] 그러나 아슬라미에는1645에 우강(烏溪)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다자시(大甲溪) 남쪽 기슭에서 동루어시(東螺溪)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며 여전히 다두 왕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다두 왕국을 반독립 왕국으로 계속 통치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아슬라미에의 사후, 다두왕국의 세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8] 프로빈티아 요새, 제일란디아 요새[9]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10]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11] 이 천계령을 제의한 것이 정성공의 부하로 청에 투항한 황오(黃梧)라는 사람이었다.[12]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13]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14] 조선총독부는 내내 천황 직속의 무관총독들이었다. 천황이 명목상 절대군주인데 실권을 행사해오지 않던(혹은 못하던) 일본의 전통적인 왕정 체계가 악용되어 천황 아래에 내각과 군부가 따로 노는(즉, 내각이 군부를 통제 못함) 개막장 구조다 보니 이런 일도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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