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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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1기: 1939년 ~ 1940년 6월
3. 제2기: 1940년 6월 ~ 1941년 2월 : 첫 번째 행복한 시간
4. 1942년
5. 1943년 5월 이후
6. 번외 : 이탈리아군의 대서양 전투
7. 말말말
8. 뒷이야기
9. 창작물



1. 개요[편집]


대서양 전투(Battle of the Atlantic, Atlantikschlacht)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 대 영국 해군(로얄 네이비)과 미 해군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사실 전투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사냥꾼과 사냥감이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힌 전투로, 초반에는 U보트를 앞세운 크릭스마리네가 영국과 미국 호송선단을 보이는 족족 물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본궤도에 오르며 어마어마하게 찍어낸 리버티쉽, 초계함, 대잠초계기, 호위항공모함 등이 대서양에 집중되면서 크릭스마리네의 총체적 궤멸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2. 제1기: 1939년 ~ 1940년 6월[편집]


2차 대전 개전 후 지상전에서 일방적으로 발린 끝에 유럽 본토를 독일이 석권하자 영국은 1차 대전의 악몽, 즉 "무제한 잠수함 작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이 재현되리라는 공포에 떨었다.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와 식량의 절반을 해상 보급에 의존하는 영국에게는 사실상 나라의 운명이 썩어가는 동아줄에 매달린 것에 다름 없었다.

그러나 독일로서도 대해군국 영국의 함대를 물리치고 해상봉쇄를 추진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1차 대전 패전 후에 잠수함은 아예 보유가 금지되었고, 나머지 해군 전력은 무늬만 남을 정도로 제한받았으며,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해군 재건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아 재무장을 시작할 때도 우선 수상함 전력부터 확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개전시 U보트 전력은 고작 56척, 게다가 그중 일부는 실제 전투에 써먹기 어려운 실험용 잠수함이나, 항속거리가 절망적으로 짧고 어뢰는 고작 몇발밖에 싣지 못해 나막신이라고 불린 연안용 잠수함이었다.

개전 후 대서양 전투의 첫 포성은 독일측이 열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직후 마침 대서양에서 초계 활동 중이던 U-30이 그 사실을 무선으로 통보받은 직후 무장상선으로 추정되는 영국 선박을 발견,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시킨다. 그러나 이 배는 무장상선이 아닌 캐나다로 향하던 여객선 아테니아(Athenia)호였으며 사망자 중에 아직 중립이던 미국인까지 있었던 터라 루시타니아 호 격침 사건의 악몽이 있던 독일은 사건 초기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국측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을 오래도록 괴롭힐 대서양 전투의 서막이었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9월 17일, U-29가 영국 해군 항공모함 커레이져스를 격침시켰고, 10월 14일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귄터 프린의 U-47이 영국 해군의 모항 스캐퍼플로우에 잠입하여 리벤지급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다.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의 아픈 기억을 씻어내며 동시에 영국에게 모항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 위협적인 일격이었고 영국은 충격에 빠진다. 이후로도 유보트들은 영국 동해안의 항구와 해안에 기뢰를 부설하는 등 공격적인 공세를 취했다.

반면,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는 굴욕을 면치 못했다. 개전 당시 해외에 있던 포켓 전함 그라프 쉬페가 남대서양에서 통상파괴전에 나서며 SMS 엠덴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쓰려했으나, 상선 9척을 격침시키고 영국군에 의해 쫓겨 중립국 우루과이로 내몰린 뒤 자침하고 만다.

결국 크릭스마리네는 기존의 수상함 주류에서 잠수함을 주력으로 삼게끔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노르웨이 침공에서 무리하게 동원하다가 잃어버린 U보트 숫자도 20여 척에 육박했기 때문에 U보트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3. 제2기: 1940년 6월 ~ 1941년 2월 : 첫 번째 행복한 시간[편집]


독일 전쟁 지침서 154[1]

아무도 구조하지 말것.

날씨, 육지에서의 거리는 상관하지 말것.

배와 자신의 안전만 고려할것.

우리는 이 전쟁에서 꼭 이겨야 한다.

적군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문제될 건 없다.


1940년 6월, 대서양 전투의 근본을 뒤바꿔버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스의 항복이었다. 프랑스 항복 직후 독일은 즉시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을 모두 군정지역으로 독일군 관할하에 두기로 비시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다. 그동안 함부르크, 브레멘, 빌헬름스하펜 등 독일의 북해 연안에서 출발하여 북해를 지나 영국 북부를 빙 돌아서 대서양으로 나가야만 했던 U보트였다. 이제는 로리앙, 보르도 등 프랑스 항구에서 출격하여 바로 대서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1차 대전 당시의 U보트 작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변화였다. 기술적 발전 없이도 U보트의 작전반경 및 작전기간이 혁신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이 대서양 전투에서 이탈한다는 점도 무시못할 요소였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에 기반하여, 그 때까지 긴급 건조한 것을 합쳐도 겨우 40척에 불과한 U보트[2]들이 당시 잠수함 전대 사령관이던 칼 되니츠가 도입한 울프팩 전술(Rudeltaktik)[3]을 통해 수십배의 연합군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울프팩 전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기존의 잠수함 전술: 잠수함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정 수역에서 매복했다가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면 단독으로 습격하는 것. 홀로 다니는 배를 습격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상대방이 호송선단을 조직할 경우 대다수의 잠수함은 놀게 되고, 어쩌다가 호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도 고작 1-2척의 손해를 가하거나 역으로 호송선단 호위함에게 격침당하는 약점이 있다.

  • 울프팩 전술: 육상에 있는 지휘소가 미리 잠수함들을 호송선단이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수역에 분산해서 배치한 후, 배치된 잠수함 중 하나가 호송선단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지휘소에 알리면, 지휘소는 제한시간 내에 해당수역에 갈 수 있는 모든 잠수함을 소집해서 호송선단을 잠수함 떼가 습격하는 방식이다. 이러면 호송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으며, 호송선단의 호위함 숫자가 적으면 호위함까지 같이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덕분에 영국은 물자 부족으로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얼마나 당시 상황이 심각했는지 윈스턴 처칠이 전쟁중 가장 두려운 적은 U보트였다고 회고했던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그래서 유보트 노이로제에 걸린 처칠은 이른바 빙산 항공모함이란 희대의 엽기적인 아이디어(하버쿡 프로젝트)를 내놓기도 했다.

게다가 영국은 소나의 전신인 ASDIC[4]의 성능을 믿고 구축함 등 대잠전력 확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수면 위로 부상한 후 어뢰를 날려대는 유보트를 상대로 ASDIC만으로는 잠수함 탐지와 추격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유보트 승조원들은 "Happy time", 소위 말해 잘 나가던 시절이라 불렀다. U보트 에이스 오토 크레치머(Otto Kretschmer)와 요아힘 셰프케가 국가적 영웅이 된 시기가 이 시점으로 특히 오토 크레치머는 빈약한 호송선단의 외곽을 뚫고 중앙에서 부상하여 함수와 함미에서 어뢰를 연달아 발사하는 대담한 전술과 함께 어뢰 한발에 배 한척(Ein torpedo, ein schiff)이라는 구호로 유명했다. 영국은 대전 이전부터 영연방을 포함한 대규모 상선단을 조직했지만 효과적인 대처법을 마련할수 없었고, 월평균 30만 톤 이상의 귀중한 물자가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은 금쪽같은 카리브해 군항들을 미국에 넘기고 1차대전 때 만든 구식 구축함을 받아오는 등 대잠전력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이건 상당한 희생이었는데 영국은 17세기 이래로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엽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효율적인 수송선단 편성, 독일 해군 암호체제의 해독 성공으로 1941년 말이 되면 영국과 독일의 입장은 서서히 역전, 영국의 구축함, 초계함 등의 대잠함선에게 격침당하는 U보트가 늘어나는 반면 독일군의 영국 수송선단 격침 전과는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된 상태였다. 개전 전에 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군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최소한 300척의 U보트가 있어야 대서양 전투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상태였다. 왜 300척인가 하면 통상적인 함대 운용으로는 현장 배치 100척, 이동중 100척, 수리 및 보급 100척이 되기 때문에 항시 100척이 북대서양에 출격하는 상태가 되며, 이렇게 되면 진짜로 대서양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용 잠수함이 40척인 데다가, 운이 좋아도 출격한 잠수함이 10척이면 대박이고, 어떤 경우에는 1척도 출격하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도 엄청난 성과가 났는데, 그것보다 10여 배 이상 많은 잠수함이 출격했다면... 영국을 말려죽이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되니츠와 300척의 유보트

설상가상으로 전쟁 초기에 이미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를 잃고 노르웨이에서 대부분의 구축함이 격침되거나 반파된고, 취역한지 6개월도 안된 블뤼허를 잃은데다가 차례로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 등의 대형함들을 영국군과의 교전으로 잃어가면서 독일 해군 수상 전력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간다. 나중에 그나이제나우티르피츠마저 영국 공군에 의해 각기 대파와 격침이라는 최후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독일 해군의 대형함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독일 해군이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밀리기 시작했지만 유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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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대서양전투 전역. 검은색 라인이 지상발진 항공기의 작전반경, 푸른색 점은 격침된 영국 수송선의 위치이다.초록색 점선은 당시 연합국의 주요 수송 루트이다. (위키피디아 출처)

4. 1942년[편집]


1942년에 이르러 전황이 다시 독일로 기울게 되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연합국, 미국의 참전이었다. 독일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을 지원하기 위해 1941년 11월부터 지중해에 유보트를 투입했고, 아울러 소련에 대한 연합국의 물자 수송을 막기 위해서 북극해에도 잠수함을 분산 배치했다. 이는 연합국의 노르웨이 상륙을 우려한 히틀러의 입김도 작용했다. 소설 여왕폐하의 율리시즈호의 모티프로 유명한 PQ-17 호송선단의 비극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 이 북극해의 유보트들인데, 활약이 인상적인만큼 전력도 만만치 않아서 1941년 10월 이후 북극해에 상시 20척의 유보트가 배치되었다. 따라서 이듬해 1월 미국 동부해안을 공략할 수 있는 잠수함 척수는 부족했다.

하지만 북치기 작전(Operation Drumbeat)[5]으로 명명된 미국 동부해안 타격작전은 불과 5척의 잠수함이 17만톤을 격침시키는 엄청난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이 해역은 유보트의 풍요로운 사냥터로 떠올랐다. 이에 독일 해군은 작전지역을 영국 근처인 북해와 북대서양 동부지역에서 미국 근처의 북대서양 서부로 옮기고, 아직 호송선단의 개념도 없었던 미국은[6] 초기에 뉴욕 같은 본토 항구 앞에서 무수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당시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전쟁이 터진 뒤에도 전쟁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미국 시민들이 해안에서 유보트에게 공격받아 불타는 상선들을 구경하려 모일 지경이었다.

6월 초 미국이 연안방어를 서서히 강화하자, 되니츠는 신형 보급잠수함(일명 젖소)인 14형 U보트를 이용하여 해상보급을 이용하도록 명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잠수함 작전 기간이 2주 정도 늘어나면서 이제는 7형 U보트로도 카리브해까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되니츠의 작전구상은 이런 항속거리 연장을 통해 미국 연안과 같이 아직 대잠방어가 미약한 연합군의 연약한 부분을 직접 강타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U보트들은 카리브해와 멕시코만, 남아프리카, 그리고 캐나다 연안에서 기존보다 몇 갑절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U보트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독일 해군이 암호통신기 에니그마의 로터를 네 개로 바꾼 신형 에니그마, 이른바 트리톤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의 암호 해독률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3개 회전자에 바탕을 둔 방식으로 암호를 해독하던 연합국은 이로 인해 1년여간 암호 해독 공백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1942년 한해에만 1160척 600만톤의 선박이 대서양에 가라앉었다.


5. 1943년 5월 이후[편집]


U보트 함대의 우위는 1943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 연합군은 1942년 11월,호송선단 호위임무를 맥스 호튼 경(Sir Max Kennedy Horton)의 서부 접근해역사령부(Western Approaches Command)로 통합하고, 핼리팩스(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항구)와 아이슬란드에서 출격 가능한 B-24 리버레이터 항공기를 증강하여 대서양 중앙의 항공 암흑구역, 이른바 에어 갭(air gap)을 메꾸고자 했다. 동시에 중립국이던 포르투갈을 설득하여 중부 대서양에 위치한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의 군사적 이용권을 획득, 이곳에도 항공기를 배치하여 Air Gap을 크게 줄였다. 이런 조치로 인해 대서양 전투의 연합군 전력은 체계화되었는데, 총지휘관인 맥스 호튼부터 잠수함장 출신이었으므로 유보트의 강·약점을 간파하여 호송선단에 소형 경계진함을 배치하고 소형 항모가 중심이 된 지원부대를 구성하였으며, 장거리 공격항공기를 활용한 ‘Hunter-Killer’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영국을 유보트 위협에서 구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스 호튼 제독은 양차대전에서 그의 조국과 영국 해군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을 정도니 유보트 입장에서는 진짜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 상대가 된 셈이다.

이런 연합군의 조치에 불구하고 U보트의 마지막 대활약이 벌어졌다. 1943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에 걸쳐, 동진하는 HX-229와 SC122과의 교전에서 22척 147,196톤을 격침시킨것이였으며 불과 두달동안 연합군은 172척 83만톤의 상선을 손실하여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물론 되니츠와 독일 잠수함 사령부는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다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의 이면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1943년 2월 발생한 SC-118 선단 전투를 두고 되니츠는 “가장 힘겨운 전투였다”라고 후에 회고했는데, 대규모 유보트들이 울프팩에 투입되었지만 전투 초반 내내 유보트들은 호위함들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결국 대규모 호송선단 전투 경험이 있는 포어스튜너 함장의 U-402가 방어선을 돌파해 선단을 휘집은 후에야 다른 유보트들도 전과를 낼 수 있었고, 유보트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분명 1943년 초는 유보트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전과를 올리던 시기였지만, 서서히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베테랑 함장들에 비해 연합군의 대잠능력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체계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5월을 기점으로 전세는 거짓말같이 급격히 연합군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사실 1943년에는 독일 잠수함 세력도 전쟁 초에 비해 확장되었지만, 이미 영국 해군이나 미 해군은 소나 뿐 아니라 항공기용 레이더(ASV)를 장비한 초계기를 활용하여 원거리에서 공기와 축전지 충전을 위해 물위로 떠오른 독일 잠수함을 탐지, 회피하거나 격침시키게 되었다. 독일 또한 Metox, Naxos 등의 레이더파 탐지기를 개발하여 장착하였지만 연합국의 레이더 기술은 독일에 비해 한 걸음씩 빨랐으며, 그전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야간 수상 항해 중에도 격침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위협인 항공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출격시부터 잠수 항해를 해야 하므로 속도가 느려지고 연료 소모량이 많아지는 등 유보트의 항속거리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되며, 앞서 말했듯이 잠항한 상태에서는 소나에 잘 걸리므로 위험성까지 높아진다.

또한 미국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공업능력으로 피해를 초과하는 톤수의 함선과 물자를 찍어냄으로써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함선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당장 1일에 1척은 꼭 리버티선이 건조되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서 영국 해군의 작전을 본받아 호송 선단을 구성하는 한편 초계기와 호위 항모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일 해군을 압박한다. 연합군은 U보트 한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15척의 구축함과 100대의 대잠기를 동원했고, 본격적인 보그급 호위항공모함이 대서양에서 작전을 개시하자, 이후 수상에서 공격위치를 점거하려는 유보트의 활동을 크게 제한을 받아 호송선단에 대한 공격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재래식 전력의 역전과 함께 독일 병과중 가장 뚫기 어려웠던 독일 해군의 신형 암호통신기도 해독하여 5월에만 40척의 U보트가 손실을 입었다. 당시 대서양에서 가용한 U보트가 200척 남짓한 시점에서 이러한 대손실은 더이상 기존의 U보트로는 대서양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결국 되니츠는 북대서양에서 U보트를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44년이 되면 사실상 독일 잠수함 전대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소수의 잠수함들이 출격하기도 하지만, 연합군에게 별다른 손실을 끼치지 못한다.

이후 독일 해군은 대서양 전투의 우위를 다시 되찾기 위해 수중속력 17노트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고성능 잠수함인 21형 U보트를 건조하여 첫 양산형이 1944년 중순에 건조됐지만 정작 첫 실전 투입은 1945년 4월 30일에 이루어져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실전 투입되지 못하고 항복시에 남아있던 21형 U보트가 118척이었다.

하지만 종전 직전까지 U보트 부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잠수함대가 활동을 정지할 경우, U보트를 잡기 위해 깔아놓은 엄청난 양의 연합군 해군 전력과 항공 전력이 지상전을 지원하기 위해 전환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서양 연안 기지를 연합군에게 잃고 노르웨이로 후퇴한 후에도 U보트 부대는 수중에서 축전지 충전이 가능한 스노클을 이용해 활동을 지속했다. 처칠은 항복 직전까지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가 40척이 넘는다는 사실을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들로부터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고 감탄했다.

1945년 5월 4일, 전 해군총사령관이자 2대 독일 대통령 칼 되니츠는 U보트 부대의 항복을 지시하고,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들은 각자 가까운 임의의 항구에 입항하도록 함으로써 처절한 6년여간 해전은 막을 내렸다.


6. 번외 : 이탈리아군의 대서양 전투[편집]


개전 초, 독일이 가용한 유보트가 부족한 틈을 타 베니토 무솔리니는 대 영국전에서의 입지 강화를 위해 잠수함대의 파견을 제안, 동맹국의 지원병력 파병을 무시할 수 없었던 독일 정부, 그리고 당장 운용할 잠수함 부족 문제에 시달리던 크릭스마리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에 1940년 8월에 27척의 이탈리아 잠수함대가 보르도에 전개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1943년 5월까지 109척 593,864톤을 격침시키고 잠수함 17척을 잃었다. 이탈리아 잠수함들은 대양작전능력이 떨어지고 이리떼 전술에 적합하지도 않아 되니츠로부터 혹평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단독으로 항해하는 배들을 공격해 어느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 유보트의 혁혁한 전과에 비하면 초라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전과를 올리긴 했다. 같은 이유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투입된 이탈리아 공군이 영혼까지 털리고 아무런 전과도 못 올린 것에 비교하면 양반이다.

이탈리아 해군의 대표적인 수훈함으로는 17척, 120,243톤을 격침시킨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18척, 96,165톤을 격침시킨 엔리코 타촐리가 있다. 두 배 모두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에서 작전했고, 독일 잠수함들처럼 카리브해나 남미 일대까지 진출하여 전과를 올렸다. 엔리코 타촐리의 함장 카를로 카사토는 이 전공으로 인해 외국인으로서는 받기 힘든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7. 말말말[편집]


1942년 여름에 초계선에 있는 U-보트들이 각기 상선을 딱 한 척씩만 더 격침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제2차 세계 대전의 경과가, 어쩌면 결과까지도 달라졌을 것이다.

- 존 키건, <제2차세계대전사>[7]



8. 뒷이야기[편집]


2차대전 기간 보이지 않는 주역인 수송작전에 대한 무용담(?)은 수없이 많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승리의 원동력이 된 라도가 호수의 얼음길,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의 레드볼 익스프레스, 악명높은 버마 통로 등... 그러나 전투 규모나 치열함, 그리고 전세에 끼친 영향력 면에서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서양 전투가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독소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에 비하자면 화려함은 덜하나 잔혹함만큼은 그에 못지않았다. 상선이 일단 격침당하면 탈출이고 뭐고 없이 승무원 모두가 배와 함께 운명을... 아니 끔살을 같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8], 최종적으로는 1,450만톤에 이르는 화물, 3,500여척의 상선, 32,000여명의 선원들을 잃었다. [9]

설령 구명보트로 탈출한다고 해도 혼자 다니는 배에서 나온 선원들이라면 구조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침몰 좌표를 무선 연락한 뒤 탈출하도록 되어 있었다만 배 가라앉는 와중에 그럴 겨를이... 지금처럼 라디오 비콘이나 GPS가 도입된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 거친 파도에 보트와 함께 삼켜지거나 바다를 떠돌다 고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17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 겨우 구조된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북극 항로 같은 해역은 바닷물의 온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 배가 침몰했다 하면 물에 빠지면 여름에도 30분 내, 겨울에는 즉시(!) 동태가 되고[10], 구명보트를 탔다고 해도 추운 날씨로 인해 3일 뒤면 얼음덩이로 변하므로 침몰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 통용될 지경이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와 영국 서해안에는 해안에 떠내려온 수많은 상선 선원들의 시신을 묻은 묘지나 위령비가 곳곳에 서 있다. 그렇다고 선단이라고 나은 것도 아니었다. U-보트 울프팩에게 습격받은 상선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호위로 붙은 구축함도 피격을 무서워해 침몰선을 내버려두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간이라면 나중에라도 발견될 확률이 높았지만 야간에 기습을 받았다면 동튼 이후 침몰 좌표로 가봤자 생존자들은 파도에 떠내려가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연합군의 해군 전력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비록 대서양 전투의 향방이 연합국 승리의 궁극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대가는 비쌌다. 치열했던 6년간 175척의 연합국 군함이 침몰하였고 36,200여명의 해군이 전사하였다, 태평양 전쟁을 제외한다면 HMS 후드나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 같은 몇몇 사례를 뺀 나머지 연합군 군함의 손실은 유보트에 의한 것이었다.[11] 당장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손실한 항공모함이 총 8척(정규항모 5척, 호위항모 3척)이었는데, 그 중 5척(정규항모 3척, 호위항모 2척)이 유보트에 의해 격침당했다.[12] 해군력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항모가 이 정도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 그 중 각각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타란토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HMS 아크로열과 HMS 이글의 경우엔 모두 몰타섬에 물자를 공급하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던 중 지중해에서 격침되었다. 아크로열의 침몰지점은 불과 지브롤터에서 5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항모 외에도 전함 2척(로열 오크, 버럼)도 역시 유보트에 의해 잃었다.

이건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망률'은 타 병과의 수치를 아득히 초월한다. 대전기간 U보트 783척과 해군함정 47척 격침되었으며 그와 함께 30,000명의 병사가 전사하였다.[13]


9. 창작물[편집]


2차 대전 유럽전을 다루는 소설, 영화 등에서 상당히 많이 언급되고 연관되는 전투이다.

순수하게 이 쪽을 다룬 작품으로는 1981년작 독일 영화 특전 U보트가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1950년대야말로 대서양 전투가 대중매체에서 가장 자주 다뤄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아직까지 회자되는 고전으로는 동명의 자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한 1953년작 영국 영화 "잔인한 바다(The Cruel Sea)"나 1957년작 미국 영화 "상과 하(Enemy Below)"가 대표적이다. 대서양 전투 소설 중 고전으로 꼽히는 제목부터 오역인 여왕폐하의 율리시즈호도 1955년 출간작이다. 율리시즈의 경우 북극해 항로를 다루고 있어서 묘사가 유난히 처절하다. #

그 뒤로는 자주 다뤄지진 않는데, 그나마 최근에 나온 영화로는 2000년작인 U-571이 있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에니그마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2020년에는 톰 행크스 제작, 주연으로 대서양 전투 당시 미국 해군 구축함대를 다룬 영화 그레이하운드가 공개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그레이하운드의 원작인 C. S. 포레스터의 굿 셰퍼드도 1955년 출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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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틀러가 되니츠에게 U보트로 무자비한 공격을 허락하고 지시한 내용이다.[2] 칼 되니츠 제독이 항상 아쉬워 할 정도로 숫자가 적었다.[3] 울프팩전술을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볼 수 있는 곳은 영화 그레이하운드(영화)이니 궁금하다면 꼭 보도록 하자.[4] 1916년부터 개발되었으며 1918년 정도부터 보안을 위해 이름을 모두 ASD(Anti-Submarine Division; 대잠탐색부서)로 바꿔부르면서 붙은 이름이다. 예를 들어 핵심부품인 석영(quartz)은 ASDivite(-ivite는 광물에 붙는 이름), 장치는 원래 supersonics 라고 불렸으나 보안상 모든 문서에서 ASDics로 바뀌었고 이후로 그냥 아예 장치의 이름이 ASDIC이 되었다(이니셜인 것처럼 만든 이중보안). 이후 1939년에 옥스포드 사전에서 해군에 ASDIC이 뭐냐고 물어봤을때 연합군 대잠 탐지 수색위원회(Allied Submarine Detection Investigation Committee)라고 대답하여 이렇게 사전에 실려버렸다.[5] 이 작전에서 9척을 격침하여 가장 좋은 전과를 올린 U-123 함장 라인하르트 하데겐(Reinhard Hardegen)은 2018년까지 브레멘에서 생존하여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된 2차세계대전 다큐멘터리 중 대서양 전투 파트의 고증을 맡기도 했다.[6] 사실 그 실상을 잘 들여다보면 호송선단의 개념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나치군이 미국 국적의 수송선을 파괴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7] 현대까지도 유보트가 올린 전과 자체는 엄청났으며 영국의 보급 라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인정되는 부분이지만, 물량이 지나치게 모자랐으며 영국도 지지 않고 여러 차례 반격했기 때문에 "유보트가 영국을 잡을 뻔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평이 다수다.유보트 100척이 더 있었다면 모를까[8] 이에 관해, 화물이 곡물(또는 광석)인 배의 선원은 밤에 구명조끼를 입고 자고, 화물이 잡화인 배의 선원은 밤에 구명조끼를 꺼내놓고 자지만, 화물이 탄약이나 연료유인 배의 선원은 밤에 마음 놓고 푹 자도 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유명하다. 다른 배들은 피격당하면 몇 초에서 몇 분 동안 허겁지겁 탈출해야 살 수 있는데 탄약이나 연료유 운반선은 어뢰에 맞는 그 순간 그대로 대폭발로 끝장나기 때문이다![9]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전 동안 (군인도 아니면서) 그 어떤 군종보다도 가장 사상자 비율이 높았던 것이 바로 상선 선원이었다. 미국의 경우 약 4.5%, 영국의 경우 약 25%(!)이다.[10] 이 전쟁으로부터 30여 년 전 겨우 북위 42도 정도의 중위도에서 항해하다 침몰한 배의 경우, 수온이 오르기 시작하는 4월 중순인데도 영하 2도까지 내려갔었고, 탈출한 승객들의 대부분은 10분 이내에 동사했다.[11]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크릭스마리네가 들이밀만한게 유보트 말고는 없었다.[12] 손실한 항모중 아크로열을 제외하면 구식함정이라 성능의 한계가 많았던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13] 당시 독일 해군 잠수함대의 병력이 약 40000여명 이였으니, 해군함 전사자들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거의 70% 이상의 잠수함 승조원이 대서양 전투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