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팔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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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中大姓有八族

나라 안에 큰 성씨 여덟 가문이 있다.

수서》 〈동이전〉 백제

1. 개요
2. 종류
2.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
2.2. 해씨(解氏)
2.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
2.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
2.5. 백씨(苩氏)
2.6.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
2.7. 국씨(國氏)
3. 예씨(禰氏)?
4. 백제 멸망 이후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사서
등장하는 성씨
수서
사씨(沙氏)
연씨(燕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협씨(木劦氏)
백씨(苩氏)
신당서
통전
진씨(眞氏)
북사
묘씨(苗氏)[#]
《한원(翰苑)》
협씨(劦氏)
수씨(首氏)[#]

백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7개[1]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 대성팔족이라는 단어고유명사가 아니라 《수서》에서 비롯된 말이다.

삼국사기》와의 교차 검증 결과 《통전》의 기록이 가장 신뢰받고 있다. 한국 사서에는 7개의 귀족 성씨가 등장하는데,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사씨(沙氏), 연씨(燕氏), 진씨(眞氏), 해씨(解氏)이다.

중국 사서에만 등장하는 성씨들 중 정씨(貞氏)는 진씨(眞氏)의 오기로[2], 묘씨(苗氏)와 수씨(首氏)는 백씨(苩氏)의 오기로 여겨진다. 한편 협씨(劦氏)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등장하긴 하나 단독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성팔족을 비롯해 백제에서는 성씨가 공식적으로는 2글자이지만 1글자로 줄여 쓰는 관습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중국 기록에는 대성팔족이 모두 1자의 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사서나 금석문에서는 사씨(沙氏)는 사택씨(沙宅氏), 목씨(木氏)는 목협씨(木刕氏) 등 복성으로 등장하기도 하므로, 일부 성씨가 축약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도 복성이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주로 단성인 여(餘)씨로 축약 표기되었다.[3] 중국이 멋대로 줄여쓴 게 아니라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서부터 이미 축약 표기가 사용됨이 확인되는데, 중국 측과 교류할 때는 이처럼 축약 표기를 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부여의 국성으로 추정되는 해씨(解氏)는 온조왕위례성에 십제를 세웠을 때부터 동행했을 만큼 상대적으로 오래된 귀족이며, 한강 유역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다. 진씨(眞氏) 또한 웅진성 천도 후의 신진 세력보다는 연원이 깊은 구 귀족 세력이며, 진씨(眞氏)와 해씨(解氏)를 '남래(南來) 귀족'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반면 신진 호족들은 마한계 세력과 연관이 깊다. 목씨(木氏)는 목지국과 연관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 중후반부터 활약하게 된다. 백제가 근초고왕 재위기 시절 마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마한의 목지국과의 연관성을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苩氏)는 백제가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면서 상대적으로 부흥했던 세력에 속한다.

2. 종류[편집]



2.1. 진씨(眞氏)/진모씨(眞牟氏)[편집]


백제가 전부(前部)의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내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8년(547년) 4월

위 기록은 26대 성왕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왜국에 병력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진모선문은 6년 전인 541년 가을에 안라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내솔 선문(宣文)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서기》 〈흠명기〉 4년조에는 전부 사람으로 내솔 관등의 진모귀문(眞牟貴文)이 등장한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발굴되어 국보 제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香徒)가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고 돌에 기록하니, 이는 국왕과 대신 및 칠세 부모, 법계의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의 이름은 미차내(彌次乃) 진모씨(眞牟氏) 대사 등 250명이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계유년은 673년으로 추정되며, 불상이 발굴된 충청남도 연기 지방이 한때 백제부흥군의 활동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옛 백제 귀족 진모씨가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사람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이 참수되자 백제 왕실이 웅진성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이때 22대 문주왕을 보필해 웅진 천도를 도운 사람으로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가 등장한다. 이때 《삼국사기》는 ‘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復姓)이다.’라고 명시하기에 조미걸취가 조미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조미씨는 《일본서기케이타이 덴노 7년(513년)에 나오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동일한 성씨로 유력시되고 있다.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도 저미근이라는 이름을 줄여 부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4] 한편 《일본서기》가 기록한 ‘저미’의 독음은 ‘사미(さみ)’인데, 이는 당시 고대 일본어에서 [ts] 음가가 존재하지 않아서 [ts] 음을 さ행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대성팔족 중에서도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 깊은 세력이었다. 삼국사기상 기년 서기 37년 우보에 임명된 북부(北部)의 진회(眞會)와 213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말갈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한 북부의 진과(眞果)가 등장함에서 백제 초기부터 있었던 씨족일 개연성이 어느 정도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북부라고 명시되는데, 하남 위례성을 기준으로 북부는 한강 이북이다. 즉 진씨의 본거지는 하남 위례성의 기준에서 북쪽인 한강 이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이북의 경기도 및 황해도 일대가 본거지였다고 비정할 수 있다.

진회와 싸웠다는 말갈은 흔히들 생각하는 퉁구스계 말갈이 아니라 강원도, 황해도 등에 있다가 기리영 전투결과 목지국을 저버리고 낙랑-대방군에게 복속하기로 한 옛 마한 거수국들이다.[5]

8대 고이왕 대에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등이 당시 우보나 좌장(左將)의 고위직에 오르면서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13대 근초고왕이 진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좌장 진무(眞武)를 비롯한 집권층이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면서 잠깐 꺾인다. 부여설례의 난 이후 한성백제에서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이때 부여설례를 도왔던 것 같다.

웅진백제 시기인 477년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난으로 문주왕이 시해되자 덕솔이었던 진로(眞老)가 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대두성에 있던 해구를 격살해 진로는 병관좌평이 되었고, 진씨의 권세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24대 동성왕은 금강의 사씨, 연씨, 백씨를 끌어들여 진씨를 견제했는데, 497년 진로의 후임 병관좌평으로 신진세력 연씨인 연돌을 임명한 사건은 진씨의 권세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한국의 서산 진씨(西山 眞氏)가 대성팔족 진씨(眞氏)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등록된 진씨(眞氏)의 숫자는 1,600명 정도 되어 굉장히 희귀한 성씨이다. 진씨 외에도 능성 구씨 또한 백제계 진씨(眞氏)의 후예로서 남북국시대에 개성(改性)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향이 과거 백제 영토에 위치하고 시조인 구존유(具存裕) 이전 인물들이 고려신라가 아닌 백제의 후신인 후백제에 대거 출사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진씨(眞氏)와 구씨(具氏)의 획 간 유사성으로, 이는 왕씨(王氏)와 옥씨(玉氏), 대성팔족의 목씨(木氏)와 임씨(林氏), 대성팔족의 백씨(苩氏)와 백씨(白氏)가 서로 연원이 같거나 성씨가 서로 유사함과 같은 맥락이다.

  • 진회(眞會): 2대 다루왕 대의 인물이다. 진씨(眞氏) 가문의 인물 중 기록상 보이는 첫 번째 인물로, 37년 10월에 우보로 임명되었다.
  • 진과(眞果): 5대 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214년 9월 초고왕의 명을 받아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말갈족의 석문성을 습격해 뺏았다.
  • 진충(眞忠): 8대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40년 4월 좌장에 임명되어 중앙 및 지방의 병마의 일을 맡은 인물로, 246년 8월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한 틈을 타 고이왕의 명을 받고 낙랑군의 변경을 급습하여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나 고이왕은 후환이 두려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247년 2월 우보로 승진했다.
  • 진물(眞勿):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47년 2월 진충의 뒤를 이어 좌장에 임명되었다.
  • 진가(眞可): 고이왕 대의 인물이다. 261년 내두좌평에 임명되었다.
  • 진의(眞義): 11대 비류왕 대의 인물이다. 333년 7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한때 비류왕과 소원한 관계였던 진씨(眞氏) 가문이 다시 정계에 뛰어들었음을 의미한다.
  • 진정(眞淨):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외척 출신으로 347년 조정좌평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어질지 못하고 사나우며 까다로워서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에게 존경받지 못했다고 한다.
  • 진고도(眞高道): 14대 근구수왕의 장인이다. 376년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 진가모(眞嘉謀): 16대 진사왕 대의 인물이다. 387년 1월 달솔에 임명되었고, 390년 9월 고구려를 공격,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포획한 공으로 병관좌평에 올랐다.
  • 진무(眞武): 17대 아신왕 대의 인물이다. 아신왕의 장인이자 심복으로, 성품이 침착하고 용기가 있으면서도 뛰어난 지략까지 갖춰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393년 1월에 좌장에 임명되어 군사를 통솔했고,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398년 2월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여 병권을 장악한다.
  • 미귀(麋貴):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이다. 458년 개로왕의 요청에 의해 남조 유송으로부터 영삭장군(寧朔將軍)을 제수받았다. '미(麋)'라는 글자는 여기서만 보이기 때문에 '추미(麁米)'로 파자해 진씨의 일족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 조미걸취(祖彌桀取): 개로왕, 22대 문주왕 대의 인물이다. 475년 9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함께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 천도를 도왔다.
  • 진남(眞男): 23대 삼근왕 대의 좌평이다. 478년 봄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은솔 연신(燕信)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의 명을 받들어 2,000명의 군사로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 진로(眞老): 삼근왕,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덕솔로서 478년 봄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은솔 연신(燕信)의 반란을 진압하고, 해구를 사살했으며 연신의 처자식을 처형하였다. 482년 1월에는 병관좌평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이로 인해 진씨(眞氏)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저근(姐瑾): 24대 동성왕 때인 490년 1월 관군장군·도장군(冠軍將軍·都將軍) 도한왕(都漢王)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 찬수류(贊首流):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목간나(木干那), 사법명(沙法名),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490년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에 제수되었다.[6]
  • 저미문귀(姐彌文貴):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513년 6월부터 515년 2월까지 케이타이 덴노 치하의 왜국에서 지내면서 백제가 대가야로부터 기문, 대사의 땅[7]을 떼어내는 데 기여했다.
  • 진모귀문(眞牟貴文):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관등은 전부(前部) 나솔.
  • 진모선문(眞慕宣文): 성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관등은 전부(前部) 덕솔.

2.2. 해씨(解氏)[편집]


우보 을음(乙音)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인인데 그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었으며 70세가 넘어서도 체력이 강하여 등용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1년(서기 23년) 1월

백제 역사에서 해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해루(解婁)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北部) 출신이며 시조 온조왕 대에 우보(右輔)의 벼슬을 지냈다. 친족 세력인 족부(族父) 을음이 죽자 해루를 후임으로 내세워 재상 격의 관직인 우보를 맡긴 것은 해씨가 강성했음과 더불어 백제 건국의 주역인 온조왕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해루가 '부여인'이라는 것인데, 해씨는 부여의 왕가였으며 일흔이 넘었다는 것을 통해 백제 건국 세력 중에서도 오래된 세력이었음을 증명한다. 다만 초기 한성백제 지배층은 적어도 고고학적으로 보기엔 부여와는 무관하고 고구려하고만 관계가 있기에, 당연히 여기서 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송양 집단, 기원전 1세기 주몽 집단이 갈라져나온 그 부여가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송양 집단이 요동 동부 고조선 잔민들과 연합해서 세운 졸본부여가 될수밖에는 없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진씨와 더불어 대성팔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었으며, 17대 아신왕이 16대 진사왕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을 때 최초로 중앙 정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신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왕제(王弟)들 간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왜국에 있던 전지왕을 즉위시켜 왕비족(王妃族)으로서 권세를 떨쳤다. 웅진백제 시절 그 권세는 더더욱 커져 477년에는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22대 문주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실이 진씨와 결탁하여 이를 진압하면서 그 세가 꺾였다.

그러나 24대 동성왕 대에는 장군 해예곤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으며, 25대 무령왕 대에는 한솔 해명이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여전히 중앙에서 활동했다. 이후 30대 무왕 때 좌평 해수(解讎)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가 참패한 이후로 해씨는 더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무왕이 패전의 책임을 물으며 해씨 세력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왕권을 넘보던 귀족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였다는 추측이 있다.

  • 해루(解婁): 온조왕 대의 인물이다. 23년 1월 나이가 70이 넘었음에도 지식이 많고 기력을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을음의 뒤를 이어 우보에 임명되었고, 90세로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해씨(解氏) 출신으로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며 본래 부여인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 해구(解仇): 11대 비류왕 대의 인물이다. 312년 4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 해충(解忠): 한성 사람으로, 405년 9월 왜국에 있던 전지왕이 아버지 아신왕의 부고를 듣고 귀국할 때 한성에 들어가는 것을 잠시 지연시켜 피살을 막았다. 그 공로로 406년 9월 달솔이 되고 한성의 벼 1,000섬을 받았다.
  • 해수(解須), 해구(解丘): 18대 전지왕의 외척으로서 407년 2월 각각 내법좌평, 병관좌평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해수는 20대 비유왕 때인 429년 10월 죽은 부여신의 뒤를 이어 상좌평이 되었다.
  • 해구(解仇): 22대 문주왕~23대 삼근왕 대의 인물이다. 476년 8월 병관좌평으로 임명되었으나 477년[8] 9월 도적들을 시켜 문주왕을 시해했다. 이듬해인 478년 봄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덕솔 진로에게 사살되었다.
  • 해예곤(解禮昆):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목간나(木干那),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와 함께 490년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에 제수되었다.
  • 해명(解明):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한솔로, 502년 1월 백가의 난을 진압했다.
  • 해수(解讎):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602년 8월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4개 성을 공격했는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막성 전투에서 끝내 참패하여 단신으로 복귀했다.


2.3.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편집]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에서는 목(木)과 협(劦)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9월

목라(木羅), 목협(木劦)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목협(木劦)은 목리(木刕)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목리(木刕)와 목라(木羅)가 《일본서기》에서 별도의 훈 없이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목라씨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刕'의 음은 네이버 한자사전으로 검색해보면 '가를 리' 하나만 나오지만 다음 한자사전에 의하면 '가를 리, 가를 례'의 2개가 나온다. # 오자인 '목협(木劦)'이 목례라 표기된 경우는 후자를 따른 경우이다. 刕는 현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냥 '리'로 읽힌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야 관련 기록이 특히 많은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라근자는 369년 3월 근초고왕의 남정에서 가야 7개국[9]을 평정했고, 그의 아들 목만치는 아예 가야 태생으로 신라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금관국을 도우라고 파견됐던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10]가 오히려 금관국을 침공해 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원해주었다는 기록 역시 목씨가 근초고왕의 남정에 적극 참여하며 가야 소국들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같은 마한 내부에서 한성백제의 마한 맹주국 자격에 여전히 이의를 제기하던 소국연맹체 침미다례의 정벌에도 성공하는데, 기록에는 따로 목씨가 참여했다는 내용이 안 나오지만 정황상 역시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전성기에는 20여 거수국을 거느리고 중국 서진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 위상을 자랑했던 침미다례 연맹은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별 수 없이 백제를 맹주국으로 승인하게 되고 그 간접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420년, 18대 전지왕이 사망하고 19대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국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다 왜국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475년 고구려 대군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을 비롯한 부여씨 왕족들이 살해되어 웅진성으로 남천할 때 문주왕을 보좌하던 사람이 목협만치였다.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목라씨의 출신이 마한 목지국(目支國) 지배층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의미가 통하므로[11], 목라씨는 천안 청당동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 지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가설은 아니다. 또한 국명을 씨로 삼은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목지국의 유력세력, 더 나아가 아예 왕족이었을 가능성도 유력하다.[12]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키씨(紀氏)에서 목씨가 유래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13] 키(紀)씨가 기록에서 목씨로 표기된 사례로는 키노 츠노노 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가 있다.[14]

이와 별개로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의 '하야시노무라지씨(林連氏)'[15]백제인 목귀(木貴) 공의 후손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하야시씨(林氏)가 목씨에서 유래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표기인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기록 뿐이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결과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문휴(汶休)씨의 음이 '몬쿠'이기 때문에 발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목씨의 다른 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삼국시대는 아직 고려나 조선처럼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표기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김복순 교수는 백제 유민 중 승려 경흥의 성씨라고 기록된 수(水)씨가 한자 모양이 비슷한 목(木)씨의 이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수씨는 전후 문헌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데다가 전근대에는 한자 표기를 오독해서 잘못 옮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16]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다.

현재는 목씨가 남아 있지 않지만[17] 목씨 후손으로 추정되는 나주 임씨(羅州 林氏)가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목라근자(木羅斤資):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369년 정복활동을 벌여 특히 한반도 중남부 방면으로 크게 영역을 넓혔다. 목만치(木滿致)의 아버지이다.
  • 목만치(木滿致): 19대 구이신왕 대의 인물이다.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적 덕에 가야에서 전횡하다가 420년 백제에서 나이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백제의 국정을 쥐게 되었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며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나, 결국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는지 왜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 목금(沐衿):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이다. 458년 개로왕의 요청에 의해 남조 유송으로부터 용양장군(龍驤將軍)을 제수받았다. 목(木) 자가 아닌 목(沐) 자를 썼다.
  • 목협만치(木劦滿致): 개로왕, 22대 문주왕 대의 인물이다. 475년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으로 천도하는 걸 도왔다.
  • 목간나(木干那):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490년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겼는데 특히 북위군의 선박을 뺏은 공로를 세웠다. 495년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제수되었다.
  • 목리마나(木刕麻那): 25대 무령왕~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04년 10월 마나군(麻那君; 마나 키시)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부레츠 덴노에 의해 억류되었는데, 이듬해인 505년 4월 그가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순타태자로 추정)과 교대했다.[18] 529년 3월에는 마나 갑배라는 이름으로 목윤귀,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고, 543년 12월 중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불마(木刕不麻):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전부 목리불마 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19]'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516년 5월 왜국이 보낸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를 기문 땅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백제 땅으로 인도했다.
  • 목윤귀(木尹貴): 25대 무령왕~26대 성왕 대의 장군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29년 3월 장군군(將軍君; 이쿠사노 키미)으로서 목리마나,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고위관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당(高堂) 위에 있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543년 12월 하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미순(木刕眯淳):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541년 7월(나솔)과 543년 12월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며 가야의 복국을 위해 노력했다. 543년 12월 덕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금돈(木刕今敦): 26대 성왕 대의 인물로,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552년 5월 8일 중부 덕솔로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백제와 가야를 쳐들어오려 한다고 알리며, 선제공격 진행을 위한 원병을 요청했다. 이듬해 1월 15일에 왜국을 떠났는데, 특이하게도 출발할 때의 덕솔(德率)에서 한 단계 격하된 한솔(扞率)의 관등으로 바뀐 채 등장한다.
  • 목리문차(木刕文次):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가야 일대를 놓고 신라와 경쟁이 벌어진 554년 1월 왜국에 파견되어 원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왜국의 우치노 오미(有至臣)가 원병을 이끌고 왔다.
  • 목소귀자(木素貴子): 31대 의자왕, 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목소귀자는 목소씨였던 걸로 보이는데 목소정무(木素丁武)라는 다른 인물에 대한 기록도 있기 때문. 목소씨는 목씨의 분가일 가능성이 커보이는데 근초고왕의 후손이라는 억례복류(憶禮福留)가 부여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흑치상지로 유명한 흑치씨 같은 경우는 대놓고 백제 부여씨 왕가에서 분가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백제사회에서는 촌수가 멀어질 때마다 분가가 활발했던 것 같다.


2.4. 사씨(沙氏)/사택씨(沙宅氏)[편집]


일본서기》에는 사택기루가 등장하고, 국내에 소재한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이, 〈부여 사택지적비〉에서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등장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대좌평 사타천복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사택천복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또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사타상여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명칭을 보아 백제왜국에서는 주로 '사택(沙宅)'으로, 중국에서는 주로 '사타(沙咤)'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택(宅)'은 금석문에서는 '탁(乇)'으로 나온다.

남제서》에는 24대 동성왕 대에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백제 장수로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목라근자와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여 남정을 주도한 사사노궤(沙沙奴跪)[20]와 사백개로(沙白蓋盧)를 거론하고 있으며, 17대 아신왕 대에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사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성씨가 여러모로 '사탁' 계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소 애매하다. '사(沙)'라는 글자가 딱히 성씨가 아닌 단순 음차로도 쉽게 쓰였기 때문이다.

웅진백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484년 남제의 사신으로 파견된 내법좌평 사약사는 이런 배경으로 좌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이르러 강성해진 사택씨는 사비백제 시절 왕비족으로서 최강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수서》 등 중국 사서들이 사택씨를 한결같이 먼저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30대 무왕미륵사를 창건할 당시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었던 무왕의 왕비가 창건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31대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사택씨가 갈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멸망전에서 백제 대좌평은 사택천복(沙宅千福)이었기에 최후까지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21]

사비백제 시절에 최고 권력을 쥐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이 본거지로 추정된다. 〈사택지적비 명문〉에 따르면 사택지적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로 숙청되어 자기 고향인 내기성(奈祇城)으로 돌아가 비를 세웠는데, 그곳이 현재의 부여읍 관북리에 해당한다는 점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사(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사씨와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의 관계는 불명이다.

  • 사백개로(沙白蓋盧):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369년 3월 진행된 백제의 한반도 서남부 공격에 참여하였다.
  • 사두(沙豆): 17대 아신왕 대의 인물이다. 398년 2월 진무의 뒤를 이어 좌장으로 임명되었다.
  • 사약사(沙若思):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내법좌평으로 484년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고구려군에 막혀서 도중에 돌아왔다.
  • 사법명(沙法名):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목간나(木干那),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490년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겨 495년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에 제수되었다.
  • 사오(沙烏):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달솔로,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더불어 한강 이북 지역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고 한다. 이 행적 때문에 무령왕 때 한강 일대를 일시적으로 수복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사택기루(沙宅己婁):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29년 안라회의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543년 12월 상좌평으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사택적덕(沙宅積德):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서 확인된 인물로 30대 무왕의 장인이며, 사택왕후(沙宅王后)의 아버지이다. 관등은 좌평이었다.
  • 사택왕후(沙宅王后): 무왕의 왕후이다.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서 확인된 인물로,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다.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 사걸(沙乞): 무왕 대의 인물이다. 627년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사택지적(砂宅智積): 무왕, 31대 의자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좌평 지적(智積)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무왕-의자왕 교체기에 파직된 것으로 보인다.
  • 사택천복(砂宅千福): 의자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660년 당시 관등은 대좌평이었으며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사타상여(沙咤相如): 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이다. 662년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별부장(別部將)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 지수신(遲受信) 등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을 왕위에 세우고, 백제부흥운동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 사택손등(沙宅孫登): 의자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갔다가 671년 11월 일본으로 망명했다.
  • 사타충의(沙咤忠義): 중국 기록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서 활동했다.


2.5. 백씨(苩氏)[편집]


5대 초고왕 48년(213년) 7월에 등장한 회회(茴會)가 백씨(苩氏)라는 주장이 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회(茴)'라는 글자는 오직 여기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에서 나오듯 백씨가 24대 동성왕 때부터 등용되어 시기상 맞지 않는데다가 회(茴)가 성씨인지 그냥 이름의 일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24대 동성왕 대에 사택씨(사씨), 연비씨(연씨)와 함께 등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백가(苩加)였는데, 백가는 동성왕 8년(486년) 2월 위사좌평(衛士佐平)[22]이 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23년(501년) 8월 가림성(加林城)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백가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백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501년 11월에 동성왕이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馬浦村)에 유숙하게 되자, 백가는 그 틈을 노려 동성왕을 칼로 찔러 시해했다.

치명상을 입은 동성왕이 12월에 승하하고 무령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백가는 503년 1월에 가림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윽고 토벌군이 성 앞에 나타나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지만, 결국 참수당한 뒤 시신이 백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말다왕(末多王)[23]이 포악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하였다"고 했기 때문에 원래는 귀족들이 다 같이 손잡고 동성왕을 죽였으면서, 무령왕이 즉위하자 모두 백씨에게 뒤집어씌웠고, 백가는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무령왕동성왕을 제외한 부여곤지의 세 아들들 중 한 명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30대 무왕 대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한 달솔 관등의 백기(苩奇)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백씨가 대성팔족으로 거론된 걸 보면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유지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거지였던 웅진성은 중국에서 건너온 예씨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분노한 예식진초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거점은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성(熊津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웅진성에서 떨어지라는 명령에 반발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들이 백씨라는 추측이 있는데, 수촌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장식이 달린 대도를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발굴된 바 있다. 이게 백씨가 맞다면 백씨는 이미 한성백제 시절부터 토후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수가 가장 많은 수원 백씨를 위시한 여러 본관의 백씨들[24]이 있으나 대성팔족 백씨와의 관계는 아직 불명이다. 그러나 대종(大宗)이자 주류인 수원, 대흥, 남포 등의 백씨들의 관향이 과거 백제 내지(內地)에 위치하고,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에 잔류한 대성팔족들이 성씨를 바꾸거나 숨겼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25]

  • 백가(苩加):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왕의 경호를 담당했던 위사좌평(衛士佐平)이었으나 왕을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 백가(白加): 27대 위덕왕 대의 인물이다. 은솔(恩率) 수신(首信)과 함께 왜국으로 파견되었던 화공(畫工)이다. 그냥 이름이 백가라서 성씨는 아예 없거나 전혀 다른 성씨일 수도 있다. 만약 백씨(白氏)라면 한자의 자형으로 볼 때 백씨(苩氏)인 게 거의 확실할 듯하다.
  • 백기(苩奇):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했다.


2.6. 연씨(燕氏)/연비씨(燕比氏)[편집]


연비씨(燕比氏)의 경우, 《일본서기》 〈흠명기〉 4년(543년) 12월조에서 백제 성왕가야의 재건을 위해 신하들을 모아 회의할 때 내솔 관등의 연비선나(燕比善那)가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서는 성과 이름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인명들과 비교해볼 때 성이 연비(燕比)이고 이름이 선나(善那)였을 가능성이 높다.[26]

연씨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연신(燕信)으로, 478년 22대 문주왕을 시해한 병관좌평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이를 지지했으나, 23대 삼근왕의 명령을 받든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반란군이 패배하자 고구려로 도망갔다. 연씨는 24대 동성왕 대에 사씨 및 백씨와 함께 등용되었는데 연돌(燕突)은 이 정세의 흐름을 타고 490년 제2관등인 달솔이 되었으며, 497년 진씨의 대표인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왕이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의 병권이 동성왕에게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세력 거점은 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해당하는 대두성(大豆城) 혹은 탕정성(湯井城)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전주 연씨가 내려오고 있지만 대성팔족 연씨와의 관계는 불명이다.

  • 연신(燕信): 23대 삼근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은솔로 478년 봄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해구(解仇)가 잡혀 죽임을 당하자 고구려로 도망갔고 그 처자식은 처형되었다. 연씨(燕氏) 중에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연돌(燕突):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490년 9월에 달솔로 임명된 후 497년 5월 진로의 뒤를 이어 병관좌평직을 제수받았다.
  • 연모(燕謨):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등은 좌평이었으며 529년 10월,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북쪽의 혈성(穴城)이 함락당하자 왕의 명령을 받고 30,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막으려다 2,000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오곡원 전투).
  • 연회(燕會):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0년 9월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 정예부대 5,000명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 연비선나(燕比善那):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12월 나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연문진(燕文進):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607년 3월 관등은 한솔로서 좌평 왕효린(王孝隣)과 함께 수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2.7. 국씨(國氏)[편집]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덕솔 국수다, 30대 무왕 재위기에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 국지모(國知牟)[27] , 《일본서기》와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등장하는 좌평 국변성이 전부이다. 사비백제 시절에 두각을 드러낸 것 이외에는 알 수 없다. 등장시기가 늦은 것을 보면 대성팔족 중 가장 신진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이씨(古爾氏)가 국씨(國氏)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거가 빈약해 거의 폐기되었다.

  • 국수다(國雖多):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543년 12월 덕솔로서 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국지모(國知牟): 30대 무왕 대의 인물이다. 611년 2월에 수나라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국씨(國氏) 가운데 유일하게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 국변성(國辨成): 31대 의자왕, 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이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예씨(禰氏)?[편집]


대성팔족 외에 백제 후기의 유력한 귀족으로는 의자왕 대의 배신자인 예식진(禰寔進)으로 유명한 예씨(禰氏)가 있다. 예씨는 무령왕 대의 반란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몰락하게 된 백씨(苩氏)를 대체해 요충지인 웅진성을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의 지방 구분인 5방 중 하나인 북방을 관할하는 북방령을 역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볼 때 '대성'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타 성씨와 달리 예씨에게는 반란으로 조국을 아예 망하게 했다는 큰 오점이 있다.

여담으로 예식진의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에 의하면 예씨의 선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명한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한다. 예씨의 묘지명들끼리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28]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유물을 통해 볼 때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적어도 중국계와 깊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예씨를 친위세력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의 경우, 왕릉의 양식도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양식을 차용했을 만큼 중국계를 대거 등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9]

예씨 일족 대부분은 예색돈, 예식(예식진과 동일인?), 예군을 제외하면 2000년대 이후 발견된 예씨 묘지명에서 확인되었다.

  • 예색돈(禮塞敦): 26대 성왕 대의 인물이다. 관위는 간솔로, 553년 1월 12일 왜국에 가서 고구려와 신라에 맞설 원병을 요청했고, 같은 해 윤11월 4일에 백제로 복귀했다.
  • 예숭(禰嵩): 예복의 아버지이자 예식진의 고조부.
  • 예복(禰福): 예예다의 아버지이자 예식진의 증조부. 〈예식진 묘지명〉에 의하면 관등은 좌평이었다고 한다.
  • 예예다(禰譽多): 예식진, 예군 형제의 조부이자 예사선의 아버지.
  • 예사선(禰思善): 예식진, 예군 형제의 아버지.
  • 예식(禰植):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만 등장한다. 예식진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 예식진(禰寔進): 의자왕 시기에 웅진성을 담당하는 백제 북방령 겸 웅진성주였다. 항목 참조.
  • 예군(禰軍): 예식진의 형제. 항목 참조.
  • 예소사(禰素士): 예식진의 아들이다.
  • 예인수(禰仁秀): 예소사의 아들로, 예식진의 손자다.

4. 백제 멸망 이후[편집]


660년 백제멸망전으로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 국민을 비롯한 한민족 중에는 족보에서 대성팔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집안이 없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의 사이가 매우 나빴던 신라 정권에게는 완전히 눈엣가시였을 테니 새로운 통일신라 사회에서 옛 백제의 중앙 귀족층이었다고 자칭해봤자 좋을 게 없었던 건 분명하다.

같은 시기의 예시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은 실제로 김씨를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적어도 국사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실은 신라가 백제 고위층들에게 처음에는 높은 신라식 관위를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상당한 조직적인 거부 및 백제부흥운동을 마주쳤던 일이 있었다.[30] 신라가 이 일을 겪은 뒤로 구 백제 지배층에게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었음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으며, 그 사건 이후로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는 6두품, 그 나머지는 5두품 이하로 고정되어 버린다.

최고위층이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설령 대성팔족이 관위를 받았어도 기껏해야 4~5두품이 확실하며, 신라계통의 성씨가 대체로 6두품부터 쓰는게 일반적 분위기였으므로 백제계통 성씨 자체를 공개적으로 쓰기 대단히 어려워졌다고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후대의 조선 왕조 초기에 개성 왕씨 멸족이 조직적으로 시행된 사례가 있다. 고려의 왕가였던 데다가 사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왕씨가 자연적인 인구 감소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기에 인위적인 멸성이 가해졌던 정황이 존재하며, 직접 멸성이 진행되었던 기록도 남아있다. 실제 죽은 사람은 직계 왕족 200여 명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그냥 변성했던 걸로 보인다.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제작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는 백제 진모씨(眞牟氏)가 계유년에 문무왕과 7세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성팔족의 일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이 입증된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또 다른 불상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전씨(全氏)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같은 해에 비슷한 글귀가 적힌 불상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없지만, 전씨(全氏)는 수십만 명의 후손들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남아 있다. 두 집안의 운명이 갈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31]

전씨 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계 성씨로는 한씨(韓氏), 마씨(馬氏) 등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한편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 발굴로 진(眞)씨와는 다른 진(陳)씨 또한 백제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진법자는 현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로 추정되는 품달군(稟達郡)[33]의 군장(郡將)을 역임했다고 하며 현 한국의 여양 진씨의 본관인 옛 여양현 또한 현재의 홍성군 지역을 가리킨다.

사서가 아닌 족보 상 기록이긴 하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거쳐간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아찬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된다.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이벌찬 벼슬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고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왕국이 두 개나 멸망하는 혼돈 속에서 고구려백제의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새로운 당나라, 발해, 또는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듯이,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 후백제, 또는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처신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들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의 후예들이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음이 드러난다.

대성팔족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이 몇몇 있긴 한데 안타깝게도 정황만 있을 뿐 물적 증거는 없다. 백제에 관한 기록들이 늘 그렇듯 국내에서는 소실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같은 한자를 쓰는 해당 성씨들은 후대에 사성된 성씨거나, 집계 때 한자를 잘못 표기해서 그냥 그 이후로도 해당 성씨로 살았거나,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씨(國氏)와 진씨(眞氏)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금석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사칭이라기보다는 실제 대성팔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외에도 사씨(沙氏)와 연씨(燕氏)의 경우, 워낙 드문 성씨인데다가 본관이 구 백제 지역과 관련이 있기에 대성팔족과 연관이 있을 정황은 크다. 보통의 경우 나라가 멸망한 판에 이들이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으니 가문의 생존을 위해 변성(變姓)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한자에 부수를 더해서 발음을 바꾸거나, 발음만 같은 전혀 다른 한자로 변성하고는 철저히 다른 가문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문맹률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 유효한 수단이었다. 대표적으로 목(木)씨가 임(林)씨로 변성한 것으로 추정된다.[34]

다만 한국사에서는 김씨, 박씨 등을 비롯한 일부 신라계 중앙귀족 유래 성씨를 제외하면 중류층도 대부분 성씨를 사용하지 않다가, 고려 초기 사성정책광종과거시험 응시 자격으로 성씨 사용을 내걸게 된 연후에야 성씨가 제대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조선 이후로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조상에 대한 윤색과 미화가 유행했기에 족보 기록 상의 출자는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조상의 내력과 성씨의 한자를 몰라서 그냥 발음만 알고 내려오다가 나중에 잘 알려진 성씨를 따라 적은 경우도 흔하다. 때문에 원래 대성팔족의 성씨였으나 중국식 성씨로 형태가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경우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까지 대성팔족의 가문이 내려왔는지는 대다수의 기록이 실전된 만큼 확실히 알 수 없다. 삼국시대에도 번성했던만큼 그 후손들이 여기저기 섞이며 내려와 현대 한국인의 유전자 풀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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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B 백씨(苩氏)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1] 8개가 아닌 이유는, 하나의 가문인 목협씨를 중국 측에서 목씨와 협씨로 따로 집계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술된 《한원》에서는 목씨를 제외해 7개로 정정했다.[2] 정확히 말하자면 貞은 眞의 오기가 아니라 뜻과 발음이 비슷한 통자이다.[3] 성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한 글자로 축약되었다. 일례로 본명이 부여초고(扶餘肖古)였던 근초고왕과 본명이 부여아화(扶餘阿華)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신왕은 《진서》에서 각각 여구(餘句)와 여휘(餘暉)로 등장한다.[4] 전부 자음이 ㅈㅁ이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로 '참[眞\]'에 해당하는 단어를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당시 고대 국어에서 '참'에 해당하는 단어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추측에 그칠 뿐이다.[5]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6] 찬씨의 경우는 '참'과의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진씨의 이표기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지만 백제의 한자표기가 일원화된 이후로도 찬수류를 비롯해 찬파라, 찬불 등의 인물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그냥 찬씨였다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7] 오늘날 섬진강 유역의 지명이다.[8]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은 이 해를 문주왕 4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478년에 대응한다. 그러나 연표에서 문주왕의 재위 기간은 3년까지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기에서 3년을 4년으로 잘못 적었다고 봄이 정설이다.[9] 비자발(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10] 사지비궤(沙至比跪)라고도 한다.[11] 다만 '라(羅)'가 평야나 성을 뜻하는 맥락으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으므로 유의하여야 한다.[12] 목지국 일대는 백제 때는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라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 목천(木川)이 되어 현대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게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13]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物部)씨의 경우처럼 키(紀)씨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는 키씨가 그대로 키씨로써 정착한 경우이지 정착하며 목씨로 바꾼 것은 아니다.[14] 이 이름을 '목각씨(木角氏)'라고 오독하기도 하지만, '키(木)'가 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며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목각씨가 기록에 등장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15] '하야시(林)'는 우지(氏)이고 '무라지(連)'는 카바네(姓)이다.[16] 당장 목리씨(木刕氏)의 경우 목협씨(木劦氏)로 잘못 읽혀져 중국 사서에 그대로 기재되기도 했다. 또한 한자는 모르고 발음만 알고 있거나 사용한 한자가 벽자라 필기가 힘들었을 때는 그냥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대체해서 적는 일도 흔했다.[17] 현재 존재하는 목씨는 木씨가 아니라 睦씨다.[18]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왜국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19]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20] 일본식 독음으로는 '사사누코(sasanuko)'에 가깝게 읽었다. 백제 사람이라고 명시된 목라근자와 다르게 출신 국가에 대한 설명이 없어 그가 정말 백제인인지는 다소 불명확하다.[21] 반대로 사택씨가 두 부류로 갈라져 은고부인을 위시로 한 친위 쿠데타를 사택천복을 비롯한 사택씨 일부가 도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집안 싸움에서 패배한 쪽이 사택지적이고, 승리한 쪽이 사택천복이 된다.[22]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직위로, 내신좌평과 더불어 왕의 친위세력이나 측근이 차지했던 요직이었다.[23] 훈은 '마타'.[24] 상당 백씨, 남포 백씨 등[25] 수원 백씨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처하고 있지만 어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이는 모화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6] '연(燕)'이 제비를 뜻하고 뒷 글자가 '비(比)'이기 때문에 훈독으로 '(비'라고 읽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당시 백제어로 제비를 가리키는 명사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추측에 그칠 뿐이다.[27]삼국사기》와 《수서》에서 등장한다.[28] 전근대 한반도에서는 정당성과 역사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문의 선조를 윤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본래 흉노의 왕족이었다가 전한으로 귀순한 김일제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윤색이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당숙종이라고 주장하였다.[29] 무령왕은 동성왕 대 후기의 혼란을 틈타 정변을 통해 즉위한 뒤 왕권 강화에 몰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고려 제4대 광종이 그랬던 것처럼 기성 귀족들을 신뢰하긴 힘들었을 것이다.[30]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31] 신라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 전씨와 함께 전씨의 양대 분파인 정선 전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 선조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전씨 전체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충청도 토착 백제계 전씨는 진모씨와 함께 절멸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신라 땅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했던 전씨의 극히 일부분이 살아남아 현재 모든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정선 전씨 족보》는 7세기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32] 전씨 족보에 의하면 전씨와 마씨, 한씨 모두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속한다.[33] 흑치상지가 군장을 역임한 풍달군(風達郡)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34] 이런 사례는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된다. 일례로 일본의 유명한 중화요리사 친 켄이치(陳 建一)는 본명이 아즈마 켄이치(東 建一)인데, 중화민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아버지 천젠민(陳建民)의 옛 성을 그대로 예명으로 쓴 것이다.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진(陳)에서 좌측 변을 빼면 그냥 동(東)이 된다. 중국사에서 유명한 사마(司馬)씨의 경우, 현대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풍(馮)씨 등으로 변성한 경우가 많았다. 역시 자형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사마를 축소한 형태이다. 아예 조상의 이름을 성씨로 쓰는 식으로 변성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서촉 명씨의 일부가 명승의 이름인 '승'에서 따와 승씨로 변성한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아예 한반도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여야만 했다. 이에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은 오히려 일본에 많다. 그리고 그 쪽은 진짜로 백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고대와 중세 역사에서 도래계 성씨의 지위(가문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참칭을 할거면 후지와라씨 계통의 공경(귀족) 가문(가문의 격에 따라 승진 제한이 있었다.)의 방계 후손을 칭하든지 무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씨)의 방계를 칭한다든지 미나모토씨에 의해 겐페이 전쟁에서 몰락한 무가의 대성인 헤이케(타이라씨)의 후손을 칭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지 멸망한 백제의 후손을 참칭한다고 해서 굳이 일본의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이득볼 것은 없었다. 또한 일본으로 이주한 경우도 역시 원래 성씨를 그대로 쓴 경우는 없고 모두 변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