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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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념
3. 설립 계기
4. 주요 인사
4.1. 교사
5. 교육 과정
6. 평가 및 의의
6.1. 당시
6.2. 의의


파일:대성학교.png



1. 개요[편집]


도산 안창호윤치호평양에 세운 교육기관으로 신민회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9월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존재한 교육기관이다.

1909년 일장기 불게운동, 105인 사건 에 발이 묶여 안창호는 망명을 가게 되었고, 일제의 눈초리를 받은 대성 학교도 19명의 졸업생을 남긴 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 이념[편집]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 방침을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3. 설립 계기[편집]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적 원조로 설립하였으며,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4. 주요 인사[편집]


교장 : 윤치호
대변 교장 : 안창호 [1]
교무 책임 : 장응진

4.1. 교사[편집]


교장에 윤치호(尹致昊),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홍현주(洪顯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형식(金瀅植)의 글에 의하면,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5. 교육 과정[편집]


중등학교 과정이었으나 수학을 중심으로 한 4학년 과정은 전문학교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 설비도 중등학교로는 드물게 완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군사관(軍事官)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6. 평가 및 의의[편집]



6.1. 당시[편집]


대성 학교 개교 당시 김형식 이라는 학생의 글에 따르면, 당시 대성 학교가 전국적 지지를 받았다고 하며, 지원자가 수백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6.2. 의의[편집]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함께 평안도 지방 교육구국, 계몽운동을 앞장선 대한제국기 중등교육기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이 학교의 정신을 대성고등학교(강원), 대성고등학교(서울) 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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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질적인 교장 역할은 안창호가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