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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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해방기
(1941~1982)선감학원A C / (1946)정판사 위조지폐 사건F T P / (1946)대구 10.1 사건R M / (1947~1954)제주 4.3 사건R M

1공화국기

3공화국기

4공화국기

5공화국기


6공화국기

A: 납치, C: 강제수용, F: 누명, M: 민간인 학살, R: 폭동적 시위진압, P: 정치탄압, S: 검열, T: 고문, H: 서브컬처 관련



파일:dae.jpg

1. 개요
2.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한 학살
2.1. 국가의 조사
2.2. 피해자
2.3. 민간의 조사
3. 조선인민군이 자행한 학살
3.1. 국가의 조사
3.2. 기타 관련 학술 기록
4. 이후
4.1. 유해 발굴
4.2. 국가배상 판결 사례
4.3. 유전자 감식
5. 대중매체
6. 관련 자료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6.25 전쟁 도중 대전형무소(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목중로 34, 출입국 관리사무소 위치)의 수감자들을 상대로 일어난 학살을 말한다.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발생했고, 두 번째 학살은 1950년 9월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발생하였다.

참여정부인 2005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북한군에 의한 학살 사건은 2008년,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2010년에 진실규명이 되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별칭이 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최소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까지 학살돼 묻힌 곳으로 한국전쟁 시기 대한민국 내 단일지역 최대 규모 희생지이다.[1]

2.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한 학살[편집]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6일까지 대한민국 군경[2] 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사범, 재소자, 미결수, 보도연맹원들 등을 인근 산내면 야산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충청도 지역 일부 보도연맹원과 4.3 사건, 여순 사건 당시 일부 수감자들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4.3 사건 관련자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한다.

희생규모는 첫 번째 시기인 7월 1일까지 1,400명, 두 번째 시기에 1,800명, 그리고 마지막 시기에 1,700명이 희생되어서 4,9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외에도 여러 주장이 있어서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3]


2.1. 국가의 조사[편집]


1949년부터 대전 형무소에 좌익사범들이 상당히 수감되기 시작했는데 북한의 남침 이후 보도연맹원이 잡혀 들어와서 수감자가 너무 많아졌다. 이후 한국 전쟁의 전개로 대전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정부에서는 재소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4쪽)

당시 대전 형무소에 있었던 교도관의 증언으로, 윗선의 지시에 따라 사형수, 무기징역수부터 대한민국 육군 헌병대나 경찰에 이첩하여 육군 헌병, 경찰들이 트럭에 사람을 싣고 인근 야산에 데리고 가서 무더기로 사람을 처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7쪽)

이후 1950년 7월 1일, 교도소 수용 능력의 한계로 일반 단기사범들을 석방한 후(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5쪽) CIC헌병들이 재소자 인도 요구를 하였다. 7월 2일부터 재소자를 주먹구구식으로 분류하여 헌병은 보도연맹원, 좌익사범, 장기형 기결수, 미결수, 심지어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까지 모조리 낭월동 골령골로 끌고 가서 처형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6쪽)

파일:보도연맹학살사건.png

당시 집행 참관인이었던 사람의 증언으로, 처음에는 사람을 막대기나 나무에 매달거나 묶어 총살했지만 나중에는 청년방위대가 판 50m 길이 구덩이 앞에 끌려온 사람들을 일렬로 구덩이 쪽으로 눕게 한 뒤에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2쪽) 이런 짓을 국군이 대전에서 후퇴하기 전인 7월 16일까지 지속하였다. 증언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 및 군경 당국의 형무소 재소자, 기결수와 미결수 살해는 법적 요건의 측면에서 많은 위법성이 드러난다고 판단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6쪽).

학살의 원인은 전쟁 발발 이후 보도연맹원이 북한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본 이승만과 수뇌부들의 판단이다. 상부에서는 보도연맹원을 모조리 붙잡아 처단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 당시 전국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동네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인근 형무소에 집어넣거나 바로 학살했다.

이후 유족들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7쪽)

1999년 미합중국 법무부에서 미합중국 육군 장교가 남긴 사진을 공개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8쪽,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해당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2010년에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2. 피해자[편집]


이관술이 가장 유명한 피해자이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중앙에 양복 차림)

대전형무소 학살 당시 가장 먼저 살해당한 피해자는 독립운동가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던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고문 후유증을 앓는 몸으로 해방의 날까지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던 투사 중의 투사였다. 따라서 1945년 10월에 중도우익성향 잡지 ‘선구’에서 진행한 최초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렸다. 김일성, 김규식, 김원봉보다 높은 순위였다.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학술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판명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는데도 월북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았다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된다. 독립운동만 하고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이 합법 정당이었을 때만 활동했으며 아무런 이적행위를 하지 않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전혀 관련 없고 국가보안법을 어긴 적도 없는 무고하고 결백한 사람이다.


파일:반곡초공적비.png

반곡초등학교 공적비.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했다고 적혀 있다.

이관술은 광복 후에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하는 등 한국사회에 기여했다.

이관술은 감격의 해방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처형된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좌익사범과 보도연맹 가입자 등 수천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기결, 미결, 잔여 형기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된다.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박현주,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대전형무소 학살 조사로 이관술 학살 당시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세로 1m80cm, 가로 50m 구덩이 앞에서 이관술이 마지막으로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한 뒤 "조선...."까지 외치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심용현 중위가 이관술의 후두부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 사살했다.[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과거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골령골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그 어떤 것도 적법한 과정을 밟은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짐작되는 ‘탑 레벨’에서 내려온 명령이 법적 명분의 전부였다.

이관술이 포함된 7월 3일의 첫 번째 총살이 집행된 후 심용현 중위는 직접 권총을 뽑아 뒤통수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


독립운동가 송언필도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 송언필은 이관술과 마찬가지로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당했다.

제일 먼저 트럭에 실린 이들은 4사(倽)에 구금되어 있던 주요 정치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이관술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라 짐작한 이관술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명령에 응했다.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이었던 송언필은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실은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박만순, 골령골의 기억전쟁#


또한 <만다라>, <국수>로 유명한 소설가 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도 이 때 학살당했다.

박만순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 유명한 활동가이니 학살에 관심이 있으면 저서와 기사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대표적으로 심용현의 범죄를 밝혀냈다. 이관술김성동의 부친 김봉한의 기사를 링크하며, 다른 피해자의 피해내용도 맨 위 링크의 시리즈 기사로 볼 수 있다.


2.3. 민간의 조사[편집]


첫 번째 학살은 독재정권 시기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의 학살이라 많은 국민을 구덩이 파는 데 동원했다 보니 구덩이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들과 군인들이 학살 현장을 증언하여 조사 시작 후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사격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지요. …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지휘자가 또 다시 확인을 합니다. … 그 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92년 2월 월간 「말」지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기사#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익명)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말도 마. 파낸 흙을 구덩이 앞에 쌓아 놨었는데 가서 보니 흙이 전부 질컥질컥해. 장마철에 진흙길 걷는 것 마냥.. 비도 안 왔는데 왜 그런 줄 알아? 마른 흙이 피로 반죽이 돼서 그런 겨. 피 곤죽이 된 흙이 여기 무릎 아래까지 빠지더라고..아이구…."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또는 군인)로 보이는 높은 놈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더미를 발로 힘을 줘 꽉꽉 누르더라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꿈틀거리면 다시 시체 더미를 헤집고 권총을 빵빵빵 쐈어. 말도 마. 새우젓 담가 놓은 것하고 똑같았어."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이규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중에 확인 결과, 학살현장은 폭이 1.8m, 깊이가 2m, 전체 길이가 200∼250m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당시 학살현장에는 독경하는 스님과 미군도 있었다. 열흘쯤 재소자들을 옮기는 트럭을 목격했다. 지금도 이 밭을 조금만 파면 이런 인골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다. 한때는 사람뼈가 밭 주변에 널려 있었다.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은 다음과 같다.

(골령골) 능선에는 경비헌병이 지키고 있었고 미군하고 사회 유지들도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트럭에 실린) 죄수들이 도착하면 억지로 돼지 새끼 끌어내리듯 끌어내린 겁니다. 소방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엎어서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죄수) 발을 밟고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냥합니다. '사격 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참, 사람이 못할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골이 튀어나와 온몸에 튀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기관단총으로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확인사살을 합니다. 구덩이가 차면 소방대원들이 매장하게 되는데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에요.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밤 9시가 넘었는데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다시 흙을 제치고 사수들이 소리가 안 날 때까지 M1 소총으로 마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산내면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현장 근처가 온통 피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들 중엔 20세 미만의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1992년 <월간 말>(2월 호)가 인터뷰(글쓴이 소설가 노가원)한 당시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증언#


학살현장을 목격한 또 다른 주민은 “당시 의용소방대 소속 젊은이들이 ‘악질분자들을 묻을 구덩이를 파야한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끌려가 부역을 했다”며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학살로 인해 한동안 골령골에는 땅에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근처 냇물은 붉게 변했으며 물에서는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2차선 도로를 만들 때 포크레인 기사가 무수히 바뀌었다고 한다. 하도 유골이 나와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 또 전쟁 직후 보따리 장사라도 하기 위해 이 길을 다녀야 했던 주민들은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대전 골령골에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기사는 "학살은 미국 고문관의 감시 하에 진행됐다"고 썼다. 최근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로 미국이 학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지고 있다.심규상, 미국이 '흉악한 조작'이라던 대전 골령골에서 쏟아져 나온 유해

위 기사를 쓴 심규상 기자는 90년대부터 학살을 조사한 유명한 활동가이다. 다음은 진실위 조사관들이 직접 한 말이다.

진실위는 왜 미국 희생사건에 인색했나. '대한민국'이 완전히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걸 목숨 걸고 막아준 그 고마운 미군에 대해, 절대로 고의로거나 실수로라도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눴을 리 없는 그 미군에 대해 당신들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조사관들이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 내외에서 '좌익 반미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사기간이 만료돼도 40~50%밖에 해결 못한다, 자신도 9명의 상임위원 중에 한 명에 불과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는 “보수정권으로 바뀌니 변명으로 일관하고 기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려 진실규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부산·대구·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됐다고 유족회는 덧붙였다.

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전원 사퇴하라"#



3. 조선인민군이 자행한 학살[편집]





3.1. 국가의 조사[편집]


1950년 7월 21일에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였고, 이날 일부 인민군은 곧장 산내 골령골의 집단 희생을 인지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한국군 포로, 우익 인사, 군인,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을 모조리 찾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대전 경찰서, 대전 형무소에 분산 수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3쪽)

수감 과정에서 북한 정치보위부는 수감자에게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내용을 쓰도록 강요했다. 자술서를 쓰지 않는 사람은 구타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98쪽). 끝까지 자술서를 쓰지 않았던 사람은 사건 발발 며칠 전 석방됐다고 한다. 북한군은 국군 장교와 판사, 검사는 모조리 사형시키고, 경찰, 군인, 면장, 동장, 반장 등은 면밀히 조사하여 사상검증을 하였다. 이후 수감자인민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하려고 했으나 UN군과 한국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급변한다.

1950년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급히 후퇴하게 된 북한군이 UN군 및 한국군에 이로운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사람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이윽고 9월 25일 밤부터 9월 26일까지 대전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사람을 모조리 인근 야산이나 우물에 끌고 가서 학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3쪽) 총살 이외에도 곡괭이 등으로 찍어 죽이거나 산 채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는 아일랜드인 수도자, 우익 인사들이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7쪽). 대전 경찰서에서는 포로, 부상자들이 주로 수감되었고, 9월 27일에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에는 시간이 급박한 관계로 경찰서 앞마당으로 모조리 끌고 와서 남아 있던 국군 포로들을 벽에 묶어놓고 모조리 총을 쏘아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20쪽)

조사 결과 학살된 인원은 총 1,557명이다. 두 번째 학살은 1960년대에 진상 규명을 많이 한 편이라 비교적 조사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23쪽)


3.2. 기타 관련 학술 기록[편집]


로이 애플먼과 맥스 헤이스팅스가 쓴 한국전쟁 관련 서적들에 따르면 북한군이 대전에서 5,000~7,000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집단 매장지에 묻었다고 한다. 이에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된 영국 사절 앨버리 개스코인은 믿을 만한 기자들이 남한 군대의 수감자 학살을 거듭 이야기했다고 말했지만, 미군 전쟁포로사절단의 J. 언더우드라는 사람은 "영국의 관계 당국에게 대전 감옥에 채 2,000명도 갇혀 있지 않았는데 과연 7,000명의 수감자를 대전에 끌어 모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반박했다.[4]

4. 이후[편집]



4.1. 유해 발굴[편집]



2021년 9월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 집단 매장된 천여 구가 발굴되었다.

희생자들의 유해 1천441구가 발굴된 것으로 집계됐다.#


4.2. 국가배상 판결 사례[편집]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관술의)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임경석,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이관술 유족은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은 가장 유명한 피해자라 모든 골령골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주목했고 축하해 줬다.

이번 소송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던 산내학살유족회 회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저도 다른 분들을 돕고 싶고, 유족회에 힘을 보태고 싶다.

손옥희(이관술 유족)박현주, 전쟁 발발이유로 총살은 불법 부당


4.3. 유전자 감식[편집]


유전자 감식 예산이 2022년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2023년부터 그동안 발굴된 1,361명의 희생자 유해에 대한 검체 수집과 유가족의 유전자 신원확인정보자료 구축 사업이 본격화될 예정이다. 유족들은 “내 평생, 최고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토록 반가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라며 기뻐했다.#


5. 대중매체[편집]


  • TBS 대전방송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해빙의 조건-냉전의 그늘, 2004
  • 신순란, 눈물의 1949, 2005
  • 전숙자(전미경), 진실을 노래하라, 2011
  • 뉴스타파 목격자들 11회 골령골 이야기, 2015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 2016
  • 최범영, 빨간 의자, 2017
  • 임재근, 콘크리트 기억, 2019
  • 김성동, 눈물의 골짜기, 2020
  • 김영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한국전쟁 70주년 기념 특별판, 대전산내민간인학살사건 현장문학 앤솔로지, 2021
  • 박현주, 랑월, 2021책 소개 기사
  • KBS 6.25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 1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2부 감춰진 이름들, 2021
  • 김희정, 박소영, 김성장, 서사시 골령골, 2022
  • 류이경, 붉은 나무의 언어, 2022
  • 최참치(최경인), 종말의 소년책 소개 기사
  • 대전 MBC 한국전쟁 72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상중이오, 2022
  • 무저갱, 2022
  • 팟캐스트 아는 것이 힘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2018
  • 팟캐스트 아는 것이 힘이다, 70년만의 나들이, 2019
  • KBS대전 시사N대세남, 현지인-골령골의 진실을 파헤치다
  • 마당극패 우금치, 적벽내전(공연)
  • 마당극단 좋다, 묘꽃(공연)
  • 어썸시어터, 골령(뮤지컬)
  • 극단 노들, 전쟁연작 침묵(공연)
  • 청흥가야금연주단, 그 여름 붉은 꽃(공연)
  • 심유나, 골령골, 2020(그림)
  • 전해주, 드러난 땅은 기억이 없다
  • 대전작가회의, 붓글씨 만장
  • 김홍한, 골령골 십자가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지역리서치 프로젝트, 멈춘 시간 산내 골령골
  • 이정성, 물꽃이 일렁이는 밤
  • 자식 잃은 어머니 눈물(노래)
  • 골령골 산허리(노래)
  • 삶의 한켠에서 시를 노래하다(노래)

6. 관련 자료[편집]



7.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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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대전 골령골 73년간의 진실, 골령골》[2]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제2부링크에 의하면, 관여병력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등이다.[3] 출처:임영태의 ‘한국 현대사, 망각과의 투쟁[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