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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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병력
3. 해방 초기
7. 그 이후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를 성명한 문서.


2. 병력[편집]


연도
육군
해군(해병 포함)
공군
총계
1945. 11. 11.[1]
-
70
-
70
1946. 1. 15.[2]
21[3]
70
-
91
1946년 말
5,273
1,000명 이상
-
약 6천
1948년 말
50,000
3,000
1,000명 이하
54,000
1950[4]
94,000
7,000
1,800
102,800
1953
550,000
14,863[5]
11,461
약 600,000
1959
568,000
40,000
22,000
630,000
1970
570,000
52,000
23,000
645,000
1980
520,000
48,000
32,000
600,000
1985
520,000
45,000
32,600
597,600
1990
533,000
60,000
40,000
633,000
1995
520,000
60,000
53,000
633,000
2000
560,000
60,000
63,000
683,000
2010
520,000
69,000[6]
65,000
654,000
2021
395,000
70,000
65,000
530,000


3. 해방 초기[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이 지난 뒤인 1949년 8월 병역법이 만들어지면서 징병제가 자리 잡았다. 이 법에 따라 1950년 1월 첫 번째 징병 검사가 이뤄졌다. 그런데 그 검사를 끝으로 징병제가 없어졌다. 남한의 최대 원조국이었던 미국이 대한민국의 무장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8.15 광복 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3년 동안 군정을 편 뒤 이승만 정부에게 정권을 넘겼다. 그러면서 남한의 군 병력 규모가 10만 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해 군사행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징병제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병력 10만 명을 쉽게 넘길 수 있다고 본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정부는 마지못해 징병제를 폐지해야 했다.

남한이 다시 징병제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8월 대구 징병사무소. 신병들은 짧은 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정부는 전시 동원체제를 갖추면서 징병제를 다시 들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 제 발로 스스로 군대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를 강제로 데려가고, 집을 뒤져 데려가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모인 국민방위군이 70만 가까이 됐다.

하지만 이들을 통솔하던 일부 군 간부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과 군복을 빼돌려 암시장에 내다 팔아 배를 불렸다. 그로 말미암아 5만 명(일설에는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잃은 사람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의 80%가 신체적, 정신적 상처 탓에 전투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이 비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승만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문제의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은 총살형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비극을 쉽게 잊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병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65~66.

국군은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된 해방병단1946년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로 시작되었다. 해군의 기원인 해방병단은 민간상선사관 출신들이 모인 곳이었고, 육/공군의 기원인 국방경비대는 만주군, 일본군, 중국군, 독립군 등 당시 한국인들이 종군했던 군사조직 및 무장단체 출신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군의 뿌리를 구한말 의병대한제국군, 한국광복군[7]이라고 보고있으며, 이들을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긴다. 자세한 것은 각 항목을 참조.

4. 6.25 전쟁[편집]


파일:attachment/korean_war.gif

조선인민군 병사를 포로로 잡은 국군 병사들.[8]

이후 1950년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될 때 부족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워낙 전면적인 비상이 풀린상황에서 당한 기습이었기 때문에 국군은 상당히 고전할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휘부간의 갈등(채병덕이형근의 갈등등)이나 국군통수권자였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인 신성모는 서울에서 도망칠 궁리나 하는등의 문제라든지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오직 미군의 개입의 희망 한가닥만을 안고, 소련의 지원을 업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현대화된 군대인 북한군과 싸워야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제멋대로 한강 인도교 폭파로 국군 서부전선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되어버리는등 사실상 그때가 국군의 최고의 위기였으며 북한군에게는 도망칠수 없는 포로들을 대거 획득하게 도와주는 형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실제 6.25 전쟁초기 북한군 홍보영상에서의 한국군 포로들 대거 획득에 대한 선전을 하고 있다.) 한강을 도하하는 국군 병사들도 중화기는 없고 오로지 개인화기 하나만 들고 온 것이 태반이었다.

한강 방어선에서 김홍일 중장이 이끄는 시흥전투지구사령부에서 한강 방어를 하는동안 징집한 신병들은 전시임을 감안해도 고작 2~3일 동안 훈련 같지도 않은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어서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채명신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신병들은 제식 소총인 M1 개런드 소총을 장전하는 법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총알이 날아오면 참호속에서 숨어서 장전되어있는 총알을 다쓰고 나서 고참병에게 다 쐈으니 장전해달라고 전투 중에 들고 올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야간경계도 몰라서 수하절차도 안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시 한 에피소드로 한신 대령이 주둔지 경계중에 이와 같은 일이 나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를 꾸짖자 병사가 하는 말이..

서있으라니까 서있는거 아닌가요?


한마디로 미군 등을 통해서 군복과 총 정도나 지급했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신병들을 전장 한 가운데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강 방어선 이후의 낙동강 방어선으로 가기 전까지만해도 한국군은 개인화기조차도 보급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고 덕분에 북한군이 쓰던 PPSh-41 기관단총과 PPS-43 기관단총과 같은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을 보급하여 사용하는 지경이었다. 개인화기마저 부족한 상황에서 다른 것의 보급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고 6.25 전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M1 철모에 미군 전투복에 미군 군장이 잘 갖추어진 국군 장병은 실상 1948년 창설 이후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거의 없었다.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철모도 부족해서 전투모(군모)에 보따리 행상인 수준의 모습을 하고 전투를 해야했다. 식사며 편의제공 역시 그야말로 인간의 최하의 조건에서 싸워야했다. 특히 식사 문제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해결이 안되었는데 북한군 포로들이 국군 병사들보다 더 잘먹는 모습에 국군 병사들의 충격은 대단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경비를 하는 한국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먹었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

이후 미군과 UN군이 오면서 급속히 세력과 장비가 팽창한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돕기 위해 투입된 이후로 급속히 세력의 팽창한 문제의 결과를 초래했던 2군단의 붕괴 3군단의 붕괴인 한국군 최악의 흑역사로 평가되는 현리 전투등은 전선을 정체 혹은 후퇴시키기게 된다. 군단급 병력이 녹아내렸다는 이야기는 국군이 그만큼 장교단-부사관단-사병집단 전부가 프로의식과 훈련도 조직력이 매우 낮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현리전투이후 사단재편성등으로 사단에 대한 사단훈련등을 집중시킴으로서 그 이후로는 사단-군단등이 한꺼번에 괴멸되는 사태는 피할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제한전으로 결정되어서 북진을 제대로 하지 않던 1952년 이후의 일이다. 결국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휴전협정에 조인한다. 그 이후 한반도 평화 선언을 하는 등, 여러번 종전노력은 있었으나 언제나 말로만 그칠 뿐 위협이 멈춘 적은 한 번도 없다.


5. 간첩공작원[편집]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수히 많은 소규모 전투가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전투에 휘말리기도 했다. 1950년대말에 한국 인구가 3천만이 안 되던 시절에 국군은 60만에 달했다. 한국 정부는 일부 군축을 하는데 당시엔 설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중위 8년차나 9년차까지 즐비했다고 한다. 전쟁 통에 이 사람들보다 선배인 건군기의 인원들이 장성과 영관급에 포진했기 때문이었다. 조영길 전 국방장관의 인터뷰에 나온다. 관련기사

또한 북한에서는 무장공비가 넘어오고, 한국도 북파공작원을 보내는 등 서로 치열하게 비정규전을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다.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길러진 군기의 결과는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가 한창이던 60~80년대 대간첩작전 사례에서 잘 드러났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잠입하다 초병에게 발각되어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간부 행세를 하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지나가게 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렇게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후방에서 작전을 끝마치고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해당 초병도 살해했다. 이른바 군기를 열심히 잡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9]

6. 월남 파병[편집]


파일:attachment/Vietnam_war_ROK_Army.jpg

그러다 1960년대 중반에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국제전을 처음 경험했으며, 전쟁 당시 2개 사단, 1개 여단 병력으로 미군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보이며 "한국군이 정말 강하더라."라는 인상을 남겼다. 베트남에서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 특히, 같은 아시아권에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는 점 이 겹쳐 베트남과 문화적 동질감이 높았다. 때문에, 대민지원과 민사작전에 크게 집중하여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미군이나 다른 동맹군이 크게 실패한 부분이기도 해 더욱 높게 평가 받는다.[10][11] 이는 제주 4.3사태를 경험했고 6.25 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친 채명신 장군이 파월군 사령관이 되어 게릴라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그 대비가 철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물류는 당시 손실에 대해 전부 보상하겠다는 조건으로 한진물류에서 했는데(이래저래 베트남 전쟁이 한국을 먹여살린셈) 게릴라에 의해 자주 손실이 발생해 빡친 나머지 이쪽도 무장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미국 측에서는 민간인에게 어떻게 무장을 시키냐, 또한 호위를 철저히 하겠다고 했으나...대한민국 남자는 전부 군대를 다녀와서 상관없다 식으로 밀어붙여 무장(그것도 당시 미군에도 많이 없던 M16으로)을 했으며 이송 중 게릴라와 많은 교전을 별여 이긴 적이 많다고 한다. 출처는 이코노미스트.

70년대 중동 특수 당시 국내 건설업체와 경쟁이 붙은 일본 건설사가 한국 근로자 전원이 군 출신이며 그 중 상당수는 베트남 전쟁으로 실전경험까지 가진 자들이라 함부로 고용했다간 근로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지간한 중동 국가 정부나 군대는 하룻밤 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해버릴 수 있다는 흉흉한 루머를 퍼뜨려 입찰에서 이긴 적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전설이 있다.

또한, 당시 국군은 미국의 어려운 사정을 이용,[12] 상대적으로 안전하거나 민사작전에 주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지역을 골라 배치되도록 미국과 베트남을 구워삶은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당시 국군은 미군만큼이나 위험지역에서 작전을 할수 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만큼 위험에 노출된 지역에서 활동했던것이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베트남의 핵심 도로였던 1번 국도를 타고 국군이 집중배치되어있었던 사실에 기인할수 있다.)

정권기반이 아직 충분히 튼실하다 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베트남 파병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꼼수와 더불어 현장에서 탁월한 민사작전능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모든 연합군 부대를 능가하는 뛰어난 전투능력을 과시해 보였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과 무기 등등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하게 된다.


7. 그 이후[편집]


6.25 전쟁 이후 50년이 넘게 한국과 북한, 양측이 서로 전투력을 강화한 결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고도의 군사력 밀집구역이 되었다. 전쟁 발발시 남북을 합쳐 현역과 예비역까지 총 1000만에 달하는 병력이 전쟁에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과거 독소전쟁 당시 있었던, 인류 최대의 작전 중 하나인 바그라티온 작전에 동원된 양측 병력이 합계 약 500만 가량이다. 그런데 러시아 대평원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는 한반도 횡단면에 천만명이 몰려있는 것이다!

사실 남북한처럼 주변 신경 안쓰고 전력을 한쪽에만 집중하는게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지금도 사람수 많기로 유명한 중국이나 러시아도 현재는 이렇게 못한다.[13] 특히 수가 많은 만큼 지킬곳도 많은 법이라서 중국이라도 한번에 한국, 일본 방면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아야 7개 군구 중 3개 정도로 절반도 채 안된다. 이 부분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사정도 있지만 지리적으로도 남북 양측이 서로 뒤를 보지않아도 되기때문. 특히 한국은 후방이 같은 진영인 일본을 제외한다면 한국으로 치고 들어올수있는 국가가 사실상 없다. 심지어 중국도 서해의 특수한 환경을 생각하면 해군 함정을 밀어넣는데 한계와 부담을 느끼고 공군 정도만이 한계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방면에 투입할 군 자체가 가용병력이 떨어진다. 북한은 최근 들어 관계가 악화되었다곤 하지만 동맹국들과 국경을 마주보고 그 동맹국들을 제외하면 한국밖에 근처에 없기때문에 남북이 서로 전력을 한쪽에만 집중하는게 가능한 케이스이다.

다른 동네는 사람수는 어찌해서 채우더라도 무기가 없을 확률이 상당히 높지만, 남북한은 최소한 총이라도 들려줄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예비군 전원에게 새 k-2소총을 들려줄 수 있을만큼 많은 총기를 비축중이다. 게다가 동시에 특이하게도 의무병역제 인력에 절대적인 의존도가 높은 군대로 성장하는 형태가 지속되었다.(단기인력에 의존하는 형태.) 특히 그 인력들이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이상 혹은 대학교 재학중인 고도의 고학력 군대로 변신하게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지구방위대 미군도 일반 사병 중에 고학력자는 많지 않다.

그에 맞추지 못하고 군대문화와 병영문화의 개선 즉 군기문화 개선은 잘되지 못했고 군대 내의 폭력이 심각했다가 2010년대, 2020년대에 들어 빠른 속도로 진보중이다.

베트남전 이후로 1980년대 전두환이 집권한 이후 국군은 특히 당시 대통령(체육관에서 관제간접선거로 선출되었지만)을 하던 전두환이었던 탓에 특히 특수부대가 육군에서 대량창설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조직이 바로 특공여단과 특공연대와 같은 조직이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사실상 군에 유동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 파병활동이 사실상 없었으며 동시에 문민개입이나 관심의 여지또한 되지 않았고 실전경험이 많았던 참전인력들이 비전투경험세대와 교체타임을 겪으면서의 국군은 조직문화나 조직적 형태가 매우 경직되어버린다. 특히 12.12 쿠데타로 인하여 주요 정책결정권자들이 하나회 출신들이 들어가면서 사실상 야전경험이 매우 부족한 지휘관들 세대의 교체가 궁극적으로 국군의 조직능력을 결여시켰다. 이는 나중에 국군의 국방개혁이나 상부구조 개편에서의 논란에서도 군의 문제점이 바로 들어나게 된다.

국군은 박정희 정부시절 백곰 전술탄도탄을 만들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쏠수 있는 탄도미사일에 대한 확보를 강조한바 있기도 했다. 실제로 백곰 미사일에 놀란 미국은 한미미사일협정을 체결하여 한국군의 탄도미사일을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형태를 만들고 말았다.[14]

하지만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문제를 미국의 뜻대로 처리함으로서 ADD 즉 국방과학연구소를 해체하고 탄도탄 개발을 완전중지한바 있다. 하지만 아웅산 사태이후에 뒤늦게 다시 부활했지만 이미 어렵게 모은 연구인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었기에 개발에 어려움을 겪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출발로 오늘날 한국군은 사거리 300km급의 탄도탄을 보유하고 있으며[15] 2011년 최근 북한의 계속되는 무력도발로 800~1000km급의 사거리 확보와 1t의 탄두중량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미사일협정 개정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에 협정 개정으로 탄두중량 제한을 없애는 쾌거를 이루어냈으며 2021년 마침내 미사일 협정이 폐지되어 미사일 개발을 제한하는 장애물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순항미사일의 경우 현재 1500km급인 현무3C형이 실전배치된 상황이며 앞으로 3000km급 순항미사일이 개발되어 배치될 예정이다.

탄도-순항미사일 개발을 제외하고도 국군의 기갑전력등의 대외중장비전력들은 1988년을 기점으로 상당한 전력증강의 성공을 보인바 있다. K-1전차와 같은 일명 88전차 K200 장갑차등과 같은 국산 중장비들의 개발및 공개를 통한 한국군의 전력증강이 가장 크게 빛을 내보였던 시기이며 2011년 현재까지 K2전차-K21 보병전투장갑차가 차세대 기갑장비로 배치될 예정이며 동시에 AH-X사업등으로 신형공격헬기, F-15K 전투기, 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보라매 사업), 조기경보통제기 사업, KDX사업 등과 같은 육해공 전력증강의 중장기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이후 해공군 전력의 증강도 두드려져 공군 전력의 경우 KC-330 공중급유기와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F-35 전투기, 패트리어트 미사일 개량형 도입, 천궁 대공미사일 등의 도입이 이루어져 첨단화를 이루어냈으며 해군 전력의 경우 세종대왕급 구축함,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으로 제7기동전단을 구성하고 해역 함대의 경우 자체적인 대공 방어 성능을 지닌 인천급 호위함대구급 호위함으로 강화하고 있다. 잠수함 전력의 경우 잠수함사령부가 구성되었고 도산안창호급의 전력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대에는 정조대왕급 구축함, 충남급 호위함, KDDX, KF-21 등의 해공군 전력의 전력화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는 90년대 이후 주변국에 비해 매우 약한 해공군력의 실태가 조명되면서 여론에서 해공군력 증가에 크게 힘을 실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21세기 이후 국방비 지출 비율이 크게 늘어서 해공군에 투자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취약했던 정보정찰 감시 전력도 크게 증가될 예정이다. E-8과 동급인 ISTAR-K 합동정찰기를 도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425 사업으로 5개의 정찰위성을 2020년대에 발사할 예정이다. 그리고 초소형 정찰위성들을 발사해 30분 단위의 '언 블리킹 아이' 감시체계를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 일본에 비해 약했던 정보-정찰 감시전력들을 크게 증가시키면서 독자적인 정보전력을 크게 갖추려는 의도이다.

육군의 경우 천무 다연장로켓 도입,K-9 자주포의 전력화 완료를 통해 이전보다 매우 막강한 화력을 지니게 되었고 AH-64E 공격헬리곱터와 수리온, K806/808 장갑차, 그리고 다수의 무인정찰기들을 통해 이전보다 확장된 작전범위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무인전투체계들의 개발과 도입이 진행중이다. 이외에도 KTSSM 등의 화력체계들의 도입은 물론이고 워리어 플랫폼으로 군 장구류의 현대화를 추진중이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비무기체계 전력증강사업은 지지부진한 형태를 맞는 문제에 비관심병과인 군수-의료-공병등의 분야에도 투자가 낮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저출산으로 인해 입대병력이 해마다 감소하면서 군 병력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으며 간부 인력까지 부족하여 인력부족이 군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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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 창설[2] 현 육/공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3] 전원이 장교였다.[4] 한국전쟁 발발 직전[5] 이 인원은 해병 제외이다.[6] 해병대는 약 28,000명. 해군은 약 41,000명이다.[7] 일단 광복군 총참모장이었던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이었다.[8] 국군 병사도 체포된 인민군 병사도 군복바지를 마치 한복(...)바지에 데님으로 맨 것마냥 펑퍼짐하게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베트남전쟁 항목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나는 부분이다. 서양식 군제의 적용 과정이 복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셈.[9] 이런 군기는 보여주기(쑈)다. 그런데 이런걸 좋아하는 놈들이 높은 자리에 많다는게 문제.[10] 미국이 게릴라전에 대한 개념이 미흡한 탓이다. 게릴라를 완전히 소탕하려면 민간인과 게릴라 부대의 사이를 갈라놓아야 하는데 미군은 언제나 그랬듯이 양키 소리를 듣는 등 현지인과의 마찰이 많았고 그 외의 대민지원이라든가 민사작전도 미흡했다.[11] 단, 주월미군사지원부 사령관이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50년대 후반부터 대 게릴라전 지원 비율이 정규전 지원 비율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협정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역시 70-71년 재무보고서에서 68년 구정 공세로 베트콩들이 대부분 전멸되었으므로 이제는 민사심리전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미군도 민사심리전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있었으나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지 몰랐었다.[12] 한국에 파병나왔던 병력 등 평상시의 병력 분포를 무시할 정도였다. 이게 왜 대단한 거냐면 미군의 배치는 미국의 영향력이나 정책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쉽게 바뀌는게 아니다.[13] 단, 이 두 나라는 각각 국경을 접하는 나라가 한두개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14] 원래 백곰미사일에 대해서 미국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공개 이후엔 기겁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의 관계문제 때문에 그렇기도 하며 이는 오늘날 이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중 하나이다.[15] 2001년인 김대중 정부 때 개정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