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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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해 온 결과가 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아 정식으로 수립된 사건. 일제의 지배로 벗어난 지 딱 3년, 일제의 의해 국권이 피탈된 지는 38년 만의 일이었다.
정부수립 일자를 8월 15일로 잡은 것은 3년 전인 1945년 8.15 광복의 3주년 기념을 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은 당일 오전 11시에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중앙청에서 열렸으며, 이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취임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2. 배경[편집]
2.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편집]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지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경성에서는 한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며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며 기세가 대단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항일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구심점 역할을 할 정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창설되었는데, 1919년 3월 17일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군명, 문창범,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가,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안창호, 신익희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23일에 경성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성정부가 창설되었다. 이 단체들은 1919년 9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점차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모여들었다.
사실 1919년 이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골자로 하는 노선이었는데, 3.1운동을 기점으로 왕정복고가 아닌 새로운 공화국의 건국으로 노선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2.2. 연합국의 한국 독립 논의[편집]
2.2.1. 카이로 선언[편집]
애당초 중국 방면으로의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가장 먼저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31년 9월 18일을 기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완전히 석권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협력하던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에 경제제재를 경고하며 만주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 등을 일으키며 계속해서 국제사회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미·영·프와는 어긋나게 된다. 일본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미·영·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독일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였다.
일본은 결국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와 마찬가지로 금방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일본은 생각보다 거센 중국의 항전으로 인한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어서 동남아시아 방면으로의 진출을 획책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은 미·영·프로부터 사실상의 적국 취급을 받았고, 경제제재와 전략자원의 수출을 금하는 등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1941년에는 미·영·프·중의 4개국이 일본에 석유를 포함하여 전략물자의 수출을 봉쇄하면서 전쟁 물자 보급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벌였지만, 미국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중국 점령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결국 협상을 포기하고, 1941년 12월 7일을 기하여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에 공습을 감행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다. 당시 일본은 빠른 속도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석권하여 국제사회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에 부여된 제재들을 해제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전쟁 초반부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거의 석권하였으나, 만성적인 물자 보급난과 길어진 전선 등의 악재가 겹치기 시작하였다.
미국·영국·중국·소련은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추축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 1942년 6월 7일에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며 태평양에서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탈환하기 시작하였고, 1943년에 이르면 이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1943년 6월에 미·영·중·소 4개국 정상이 만나 전후 처리를 놓고 회담을 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7월 즈음이 되어서 장제스가 전후 처리 문제로 회담에 참석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고, 7월 26일에 김구가 장제스를 찾아가서 한국 독립 의제를 거론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의 처리를 놓고 미국과 영국 사이에 미·영·중·소 4강의 공동 관리 정도로 이야기가 오갔고, 장제스도 김구와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 독립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제스는 김구와의 만남 이후에 한국의 완전 독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 영국과 소련은 중국이 4강에 끼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며 급기야 소련은 중국이 회담에 나오면 자신들은 나가지 않겠다며 빠지기까지 했는데, 장제스는 영국과 소련이 중국을 배제하려 하자, 한국 독립을 강하게 밀어붙여 영국의 기를 꺾고 싶어 했다.
마침내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소련을 제외한 미·영·중 3국 정상이 만나게 되었다. 다음 날인 11월 23일 저녁, 미중 정상 간의 만찬이 있을 때,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를 즉각 동의하며 만찬에 동석했던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즉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초안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내용인즉,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노예상태를 기억하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이 나라가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하였다."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처칠은 그 초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사실, 영국 입장에서 한국의 독립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문제였던 것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주게 되면, 영국 치하의 식민지들도 전부 독립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영국 정부의 입장은 한국 독립에 대해 최대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역시 장제스의 말에 일단 동의는 하였으나, 뒤로는 중국의 의도를 상당히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두고 루스벨트는 다음 날 열린 영국과의 합동 참모회의에서 "아무래도 쟤네가 일본 대신에 한국을 꿀꺽하려고 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튼 중국과 영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결국 미국의 중재 하에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구절이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로 수정되었고, 거기다 영국 측 주장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문구도 추가되었다. 최종적으로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로 되어 있었고, 이는 '즉각 독립'에서 '신탁통치'를 내포하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선언을 통해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승만의 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고 난 후, 임시정부는 "사의를 표한다."는 말을 보냈다.
2.2.2. 포츠담 선언[편집]
2.3. 8.15 광복과 신탁통치[편집]
2.4. 좌우합작운동[편집]
2.5. 5.10 총선거[편집]
2.6. 제헌[편집]
2.7. 정부 수립[편집]
1948년 8월 15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를 치르고, 7월 17일에 헌법 제정, 7월 20일에 대통령 선거, 그리고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을 하기까지 겨우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의 실로 숨가쁜 여정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3개월 남짓한 시간에 한반도의 향후 80년 운명이 완전히 판가름이 난 것이다.
3. 의의[편집]
한국사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다.
4. 이후[편집]
5. 건국절 논란[편집]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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