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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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파일:예장통합_로고.png
영문명칭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한문명칭
大韓예수敎長老會(統合)
약칭
예장통합
설립연도
1884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총회장
이순창 목사[1]
부총회장
김의식 목사[2], 김상기 장로
표어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
(시편50:5, 롬12:1)
[제107회기]
교인 수
1,706.049,578명(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2021년#)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3길 29 (연지동)




파일:홈페이지 아이콘.pn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비미오 아이콘.jpg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이야깃거리
5. 교세
6. 사건 사고
6.1. 노회 목록
6.2. 소속 교회
6.3. 전국 분포
6.4. 산하 학교
6.5. 이사, 교목 파송 대학교
6.6. 소속 교회가 설립한 학교
6.7. 가톨릭에 대한 입장
6.9. 광주 안디옥교회[3] 방역 조치 비협조
6.10. 장로회신학대학교 무지개기 사건
6.11.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
7. 파생 교단
8. 분열된 교단
8.1. 최종 분열 당시의 교단들



1. 개요[편집]


1884년 설립된 조선장로교공의회를 모태로 하는 대한민국장로회 양대 교단 중 하나. 한국 장로회의 시초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칭의 시초이다. 합동, 고신 등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의 다수가 통합측에서 에서 탄생했다. 약칭은 예장통합이며 일반적으로 (신학적) 중도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중도 성향이라는 것은 기계적, 산술적 의미의 중립이 아니라 같은 교단 내에서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포용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역사[편집]


대한민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조선장로교공의회가 독노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1912년에 목사 96명과 장로 125명의 총대로 첫 총회를 치르게 된다. 1949년 총회 명칭을 현재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하였다. 이후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과 WCC와의 문제로 1959년 연동교회에 모인 찬성파, 이른바 연동측은 대한기독교장로회 일부 온건파를 흡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을, 승동교회에 모인 반대파, 이른바 승동측은 1951년 독립해 나갔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과 합동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을 결성, 분립하였다. 합동측과 분열 당시 평안북도 출신들이 주로 통합측에 가담하였다. 1967년에는 성결교회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던 목사들이 1952년에 설립한 임마누엘 예수교 소속의 대다수 교회들을 흡수하였다.[4] 1979년 이후 120개 이상의 교단으로 사분오열된 예장합동과 달리 통합은 일부 개교회와 목사들의 개별적 탈퇴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별다른 분열 없이 단일 교단으로 유지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 장로회 분열사 문서 참고.


3. 특징[편집]


  • 대한민국 장로회 교단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5] 실제로 1884년에 공식적인 장로교 선교가 알렌 선교사를 통해 시작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시초가 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장로교뿐만 아니라 전체 개신교 교단 중 교인 수가 가장 많은 교단이며, 대한민국 장로회의 모교단이라고 할 수 있다.[6][7]
  • 개혁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연합을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8]
  •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옛 문서화하고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만을 사용하며 대 요리 문답은 사용하지 않는다.
  • 한국기독교장로회만큼은 아니지만 성서비평학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9]
  • WCC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한다.[10]
  • 장로회 교단답게 장로 정치 체제를 취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창립 회원 교단이며, 수년 전에는 한기총에 가입하였으나 한기총의 파행으로 한기총을 탈퇴하고 현재는 한국교회연합한국교회총연합회에도 가입해있다.[11]


4. 이야깃거리[편집]


  • WCC, NCCK에 가입된 교단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한다. 2013년 WCC 부산총회 유치를 위해 가장 많은 지원을 하는 등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12]
  • 교인, 목회자 개개인들의 성향 스펙트럼은 넓은 편으로, 진보적인 성향부터 보수적인 성향까지 다양한 성향의 교인들이 존재한다.[13] 신학적으로 신정통주의를 중심점으로 해서 자유주의 성향, 복음주의 성향 교회 모두 있으나, 진보적인 교회보다는 복음주의적인 교회가 훨씬 많다.[14] 신학적으로 중도 보수 정도. 이 때문에 일부 인사들로부터 '진보와 보수에 양다리를 걸치는' 교단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나,[15] 진보와 보수를 모두 포용하는 교단의 특성상 한국 개신교 내에서 진보 교단과 보수 교단 사이에 의견이 대립할 때 중재자로서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16]
  • 예배 전통을 비교적 철저히 지키는 교단으로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강단에 십자가를 걸고 있으며,[17] 강단보와 성찬대를 갖추고 있다. 또한 기독교대한감리회와 더불어 국내에서 주일 대예배시 찬송가 반주로 오르간을 사용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교단이고,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예복(가운)과 스톨을 착용하며 영락교회, 주안장로교회 등 일부 교회에서는 클러지 칼라(또는 목회자 셔츠. 로만칼라를 개량한 와이셔츠)를 착용하기도 한다.[18]
  •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교단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편이며,[19] 사회복지기관 위탁운영, 미션스쿨 설립 및 운영[20], 생태·환경운동, 인권운동, 기타 사회운동 등 사회선교에도 가장 적극적이다. 기독교 좌파로 이름 있는 진보적 인사들도 없지는 않는 편.[21]
  • 2003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산하 신학교인 평양신학원 건물 건축을 지원하여 완공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전까지 운영 자금도 지원했으며 총회나 노회 임원이 여름방학마다 계절학기 강의 형식으로 평양신학원에서 특강을 했다.
  • 소속 교회 중 가장 신도 수가 많은 교회는 명성교회다.[22]


5. 교세[편집]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수도권, 호남권, 경상북도 북부[23]동해[24], 울산, 충청북도 남부[25], 제주도 지역에 상대적으로 교세가 크며 대전을 제외한 충남[26][27]강원도[28][29], 인천[30][31] 지역은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한 편이다.



6. 사건 사고[편집]


  •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이단 사면 취소 사태 - 과거 이단으로 규정된 몇몇 기독교계 신흥종교 교단들을 2016년 통합 교단이 사면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철회한 사건. 교단 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스펙트럼이 넓은 상황에서 교단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취합하지 않은 상태로 성급하게 사면을 진행하는 바람에 발생한 사태로 교단 내부나 타 교단, 그리고 사면 대상 교파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소속 광주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IM선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원인이 되어 코로나에 감염되었음에도 검사를 거부하며 의료진과 문재인이 교회를 죽이려고 한다고 남탓으로 돌리기만 해 논란이 일고 있다. # 특히 한 교인이 '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쩌라고'라는 자세로 자기 때문에 코로나가 퍼지든 말든 배째라는 태도로 버티고 있다. 이후 1월 29일 안디옥 관련 확진자가 30명이나 나와 광주광역시의 총 일일 확진자가 54명으로 늘어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안디옥교회는 벌금형이 나왔음에도 대면예배를 강경하게 고집하였다. # 단, 위 항목에서도 나왔듯이, 광주 안디옥교회는 교단 차원에서 지원하던 부산 WCC 총회를 전교회적으로 비난하는 등, 10년 넘게 통합 측 보다는 합동 측에 가까운 극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온, 교단 내에서 독특한 교회였었다.


6.1. 노회 목록[편집]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노회 현황 (가나다순)
강원 노회
강원동 노회
경기 노회
경남 노회
경동 노회
경북 노회
경서 노회
경안 노회
광주 노회
광주동 노회
군산 노회
김제 노회
남원 노회
대구동 노회
대구동남 노회
대구서남 노회
대전 노회
대전서 노회
땅끝 노회[32]
목포 노회
부산 노회
부산남 노회
부산동 노회
부천 노회
서울 노회
서울강남 노회
서울강동 노회
서울강북 노회
서울강서 노회
서울관악 노회
서울남 노회
서울동 노회
서울동남 노회
서울동북 노회
서울북 노회
서울서 노회
서울서남 노회
서울서북 노회
순서 노회[33]
순천 노회
순천남 노회
안양 노회
여수 노회[34]
영등포 노회
영주 노회
용천 노회
울산 노회
익산 노회
인천 노회
인천동 노회
전남 노회
전북 노회
전북동 노회
전서 노회
전주 노회
제주 노회
진주 노회
진주남 노회
천안아산 노회
충남 노회
충북 노회
충주 노회
충청 노회
평남 노회
평북 노회
평양 노회
포항 노회
포항남 노회
함해 노회


6.2. 소속 교회[편집]


  • 개봉교회
  • 거룩한빛광성교회
  • 거룩한빛운정교회
  • 경남광염교회
  • 경주제일교회
  • 경주중앙교회
  • 고척교회
  • 공주원로원교회
  • 과천교회
  • 광양교회
  • 광장교회
  • 광주금호벧엘교회
  • 광주남광교회
  • 광주동광교회
  • 광주무등교회
  • 광주본향교회
  • 광주빛내리교회
  • 광주서림교회
  • 광주안디옥교회
  • 광주양림교회
  • 광주월광교회
  • 그루터기교회
  • 구파발교회
  • 기쁜소식교회
  • 김포중앙교회
  • 나눔의교회
  • 남대문교회
  • 남원동북교회
  • 높은뜻연합선교회
  • 노원한나라은혜교회
  • 다사교회
  • 다일교회
  • 대구남덕교회
  • 대구남산교회
  • 대구내당교회
  • 대구동로교회
  • 대구봉산교회
  • 대구삼덕교회
  • 대구삼영교회
  • 대구삼일교회
  • 대구제일교회
  • 대구충성교회
  • 대구칠곡교회
  • 대구칠성교회
  • 대전금성교회
  • 대전대덕교회
  • 대전문창교회
  • 대전빈들교회
  • 대전새문화교회
  • 대전선창교회
  • 대전성지교회
  • 대전세계로교회
  • 대전영광교회
  • 대전오정교회
  • 대전유성교회
  • 대전인동교회
  • 대전제일교회
  • 덕수교회
  • 도림교회
  • 동막교회
  • 동숭교회
  • 동신교회
  • 동안교회
  • 든든한교회
  • 마포교회
  • 명선교회
  • 묘동교회
  • 명성교회
  • 목민교회
  • 무학교회
  • 미암교회
  • 보배로운교회
  • 복대교회
  • 봉안교회
  • 부산동래중앙교회
  • 부산백양로교회
  • 부산산정현교회
  • 부산산성교회
  • 부산새날교회
  • 부산연제로교회
  • 부산영락교회
  • 부산진교회
  • 부산초읍교회
  • 산정현교회[후암동]
  • 산성교회[불광동]
  • 삼양제일교회
  • 새노래명성교회
  • 새문안교회
  • 새은혜교회
  • 서소문교회
  • 서울교회
  • 성문밖교회
  • 성석교회
  • 세상의소금염산교회
  • 소망교회
  • 수서교회
  • 수색교회
  • 수송교회
  • 수원성교회
  • 순천동부교회
  • 순천북부교회
  • 순천제일교회
  • 순천중앙교회
  • 신당중앙교회
  • 신일교회
  • 신촌교회
  • 안강영락교회
  • 안동교회[종로구]
  • 안동교회[안동시]
  • 안산제일교회
  • 안양제일교회
  • 약수교회
  • 양곡교회
  • 여수성광교회
  • 연동교회
  • 연신교회
  • 열방교회
  • 영등포교회
  • 영락교회
  • 영암교회
  • 영은교회
  • 영주제일교회
  • 예능교회
  • 예산장로교회
  • 오창대교회
  • 온누리교회
  • 완도성광교회
  • 울산구영교회
  • 울산병영교회
  • 울산송정교회
  • 울산호계교회
  • 울산주성교회
  • 울산사랑선교교회
  • 울산삼산교회
  • 울산제일교회
  • 울산하늘빛교회
  • 월드드림교회
  • 원흥새소망교회
  • 이리신광교회
  • 이촌동교회
  • 인천석천제일교회
  • 인천제일교회
  • 인천주안장로교회
  • 일산동안교회
  • 자양교회
  • 장석교회
  • 전주덕일교회
  • 전주동신교회
  • 전주시온성교회
  • 전주신일교회
  • 전주전성교회
  • 주님의교회
  • 주하늘교회
  • 진중교회
  • 창동염광교회
  • 천성교회
  • 천안중앙교회
  • 청운교회
  • 청주강서교회
  • 청주상당교회
  • 청주서남교회
  • 청주서원경교회
  • 청주은광교회
  • 충무교회
  • 충신교회
  • 치유하는교회
  • 평촌교회
  • 평택동산교회
  • 포항기쁨의교회
  • 포항장성교회
  • 포항제일교회
  • 포항중앙교회
  • 하늘빛광성교회
  • 한국맹인교회
  • 한영교회
  • 한소망교회
  •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 항서교회
  • 현대교회

6.3. 전국 분포[편집]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수도권, 호남권, 경상북도 북부[35]동해[36], 울산, 충청북도 남부[37], 제주도 지역에 상대적으로 교세가 크며 대전을 제외한 충남[38][39]강원도[40][41], 인천[42][43] 지역은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한 편이다.


6.4. 산하 학교[편집]


국내 개신교단 중에서 가장 미션스쿨이 많다. 그리고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모두 신학대학으로 승급시킨 유일한 교단이다. 게다가 통합 소속이 아니더라도 평택대학교같은 다른 장로회 교단의 미션스쿨이나 부산외국어대학교, 아신대학교, 한동대학교 등 초교파 성향 미션스쿨의 설립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션스쿨을 많이 설립한 만큼 계명대학교, 예수대학교 등 미션스쿨 경영권 분쟁이나 교단 탈주[44] 같은 아픈 기억도 많아서 요즘은 시큰둥한 편이다. 서해대학도 폐교하기 전에 한일장신대학교와 통합을 시도하다가 안 되자 그냥 포기해버렸을 정도.
  • 신학대학교
    • 장로회신학대학교(서울 광진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신학대학교이자, 평양신학교(1901년)와 조선신학교(1939년)의 적통을 이어받은 역사깊은 신학대학교이다.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인 마포삼열의 무덤 역시 장신대 교정에 위치한다.[45]
    • 서울장신대학교(경기 광주시)
    • 부산장신대학교(경남 김해시)
    • 호남신학대학교(광주 남구)
    • 영남신학대학교(경북 경산시)
    • 대전신학대학교(대전 대덕구)
    • 한일장신대학교(전북 완주군)
    • 경안대학원대학교(경북 안동시)
  • 종합대학
    • 계명대학교: 원래 예장 통합 경북노회 산하 학교였으나 경북노회와 신일희 계명대 총장의 갈등 때문에 사실상 독립하였다.
    • 연세대학교: 개신교 초교파 학교로서 예장통합은 기감, 기장, 성공회와 함께 이사회 임원 파견 학교이다.[46]
    • 숭실대학교
    • 서울여자대학교
    • 한남대학교
  • 전문대학
  • 원격대학
  • 미인가 학교


6.5. 이사, 교목 파송 대학교[편집]



6.6. 소속 교회가 설립한 학교[편집]


예장 통합 소속 교회에게 설립되었지만 예장 통합과 분리되어 있는 학교이다.
  • 신학대학교
  • 종합대학
    • 경성대학교 - 김길창 목사(당시 부산 향서교회 담임목사)가 설립: 김길창 목사는 경성대학교의 전신인 경남사범대숙을 1955년 설립했다. 1963년 통합과 합동이 분열할 때, 김길창 목사는 합동으로 소속을 변경했지만 부산 향서교회는 통합에 잔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길창 목사는 1966년 소천할 때까지 부산 향서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역사 때문인지 형제학교였던 부산신학교가 합동과 인준하여 확실한 보수 성향을 띄었지만, 경성대는 어차피 신학대도 없었기에 교단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1998년 부산신학교를 흡수하여 신학대학을 신설하자 합동과의 인준 관계를 끊어버렸고, 2021년 학부 신학대학을 폐과해버렸다.


6.7. 가톨릭에 대한 입장[편집]


교리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무조건 배척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 예장통합은 가톨릭에 대해 "로마교회가 이단적인 요소는 있으나 반사회적이라거나 반윤리적인 다른 이단집단과 같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장로회)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정리하자면, 예장합동, 침례회 등 비에큐메니컬 보수 교단과 다르게 가톨릭을 이단 내지 이단에 준하는 것으로 단정짓지 않지만, 보수적 에큐메니컬 개신교 교단 답게 가톨릭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6.8.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이단 사면 취소 사태[편집]


- 과거 이단으로 규정된 몇몇 기독교계 신흥종교 교단들을 2016년 통합 교단이 사면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철회한 사건. 교단 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스펙트럼이 넓은 상황에서 교단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취합하지 않은 상태로 성급하게 사면을 진행하는 바람에 발생한 사태로 교단 내부나 타 교단, 그리고 사면 대상 교파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6.9. 광주 안디옥교회[47] 방역 조치 비협조[편집]


교인들이 IM선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원인이 되어 코로나에 감염되었음에도 검사를 거부하며 의료진과 문재인이 교회를 죽이려고 한다고 남탓으로 돌리기만 해 논란이 일고 있다. # 특히 한 교인이 '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쩌라고'라는 자세로 자기 때문에 코로나가 퍼지든 말든 배째라는 태도로 버티고 있다. 이후 1월 29일 안디옥 관련 확진자가 30명이나 나와 광주광역시의 총 일일 확진자가 54명으로 늘어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안디옥교회는 벌금형이 나왔음에도 대면예배를 강경하게 고집하였다. #

6.10. 장로회신학대학교 무지개기 사건[편집]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공식 채플 시간에 소위 '무지개 깃발'을 몸에 두른 채 예배를 드려 논란이 되었다. 채플이 끝난 직후에는 무지개색 깃발까지 든 채 단체사진을 촬영해 SNS에 게시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지지자는 신학대에 입학할 수 없다고 결의하였었고 또 헌법개정을 통해 동성애자가 교회 항존직과 임시직, 유급종사자가 될 수 없도록 하며 동성애와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성명도 발표했던 102회 총회의 입장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6.11.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편집]


교계 내 영향력이 매우 큰 명성교회 세습관련 논란이다. 해당항목참조


7. 파생 교단[편집]


분가한 순서 순으로 서술. 예장 합동이 분가한 이후로 별다른 분열의 역사가 없다는 관점도 있지만, 통합도 이런저런 이유로 꾸준히 목사들이 이탈하여 파생교단이 생기고 있는 중이다.[48]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평신도 최태용을 제명하여 탄생한 교단이다. 최태용은 일본 유학을 하면서 우치무라 칸조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실상 퀘이커의 분파로써 활동했으며, 당시 장로회를 비판하며 신정통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최태용은 복음교회를 창립하며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태용 목사도 무교회주의에 큰 한계를 느껴서 무교회주의를 폐기해버리고 민족주의로 신학 노선을 변경하여 그냥 한국 토착 교파가 되었다. 그래서 교세는 매우 작지만 엄연한 주류 교파이다. 최태용의 탈퇴 당시 오늘날의 수도권과 호남지역 교회에서 동조자들이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해당 교단 교세가 형성된 원인이며, 최태용의 신학적 이단성[49]을 정정한 지동식 박사 역시 호남에서 남장로회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믿은 인물이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중앙) : 1970년 여자목사 안수에 찬성하는 목사들이 백기환 목사를 필두로 탈퇴하여 세운 교단이다. 과거에는 여성목사 안수를 두고 통합과 대립한 적도 있으나 근본적인 신학 성향은 큰 차이가 없고, 1990년대 들어 통합측도 여성 목사 안수를 시작하면서 지금은 관계가 개선되고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상태. 산하에 온석대학원대학교를 두고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피어선) : 1993년 피어선대학 동문들이 아서 T. 피어선 목사의 신학을 기리기 위해 탈퇴하여 세운 교단이다. 딱히 껄끄러운 문제로 갈라진게 아니다보니 예장 통합과 신학적 성향이 비슷하며 교류도 활발한 교단이다. 피어선대학은 평택대학교로 개칭한다.
  •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 : 1997년 장로회 헌법에 의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사 결정과정에 얽매이기 싫었던 자유교회 성향 목사들이 탈퇴하여 세운 독립교단이다. 원래 목사를 자체적으로 양성하지 않았던 연세대, 서울여대, 한남대, 전주대, 계명대, 김천대 등 예장 통합 소속 종합대학에 개설된 신학대학원과 인준하였다.[50]

8. 분열된 교단[편집]


각자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여 호헌총회임을 주장한 교단들이며 시간 순으로 정리.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본 문서의 고신 관련 단락 참조. 분열 이전 예장의 경남노회. 신사참배에 저항한 목회자들을 당시 예장 지도부가 퇴출시킴에 따라 신사참배 저항 목사들이 고신을 세웠다. [51] 그렇다보니 예장 고신 측에서는 고신 목사들을 주도적으로 퇴출한 예장 통합과 기장의 수뇌부에게 큰 원한과 증오를 품고있다.[52] 예장 통합이 현재까지도 비판받고 있는 흑역사. 다만, 2016년 통합이 과거 신사참배 및 저항파 목회자들의 제명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서로 화해하였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본 문서의 기장 관련 단락 참조. 성서비평학을 수용한 김재준 목사와 그 제자들을 퇴출시켜서 파생된 교단이다. 후술할 예장 합동이 생겨나자 장로교 통합을 위해 기장과 통합을 시도하였고 기장의 온건파를 상당수 흡수한다. 2016년에 예장통합 총회는 김재준의 제명을 철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동년 10월에는 기장 총회 측에 이를 알렸다.#

8.1. 최종 분열 당시의 교단들[편집]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 WCC 가입에 반대한 박형룡 목사와 그 제자들이 탈퇴하여 파생한 교단이다. 이 때 먼저 갈라져 나간 예장 고신과 뜻을 같이하며 통합했으나 신학교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불거졌고 1963년 결국 결별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 김치선 목사[53] 가 광복 후 대한신학교가 박정희 정부에게 캠퍼스를 뺏겨서 폐교할 위기에 처하자 ICCC의 도움을 받고 새 캠퍼스를 마련하며 계약에 따라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며 탈퇴한다[54]. 이때 합동측과 통합측은 잠시 재연합을 위해 1968년까지 합동원칙에 합의하는 등 과도기에 있었는데, 대신측은 제3의 길을 간 교단이라 할 수 있다. 설립자와 학교, 해당 교단을 형성한 목회자들도 합동측과 분열 전 예장 출신들이었다. 대한신학교는 안양대학교로 개칭한다.
  • 중도파라 불리던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 계열 교단들: 이 교단들은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신측)이 된다.

[1] 연신교회 담임목사[2] 치유하는 교회 담임목사[제107회기] 이순창 목사는 총회 이번 회기 주제의 선정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기본과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신앙적 결단과 의지를 담아내려는 총회의 방향성과 교회 정체성의 표현라고 밝혔다.[3] 박영우 목사 시무.[4] 이때 교단 소속 신학교였던 대구신학교는 예장합동으로 넘어가 오늘날 대신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예장통합 합류에 반대하였던 대구 칠성동교회 등 소수의 교회들이 지금까지도 임마누엘 예수교 교단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5] 미국의 PCUSA와 같이 간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미국의 장로회는 PCUSA가 장로회의 모교단이다. 이후 PCA(미국 장로교회), OPC(정통장로교회)가 나온 것을 이해하면 쉽다.[6] 개교회 수는 예장합동이 30% 가량 많으나, 교인 수는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매년 1~2위를 다퉈왔다. 2005년 예장개혁 3,425개 교회의 합동 복귀 & 흡수 이후 예장합동 교단이 교인 수에서도 앞서나가 1위를 차지했으나, 2014~16년 이래 예장통합 교단이 예장합동 교단보다 8~10만명 정도 더 많아 교인 수 1위를 차지했고 2017년에 잠깐 순위가 바뀌어 예장합동이 약 3만명 가량 더 많았으나 2017년 재차 예장통합이 3000명 이상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는 등,4:1 근래에는 예장통합이 다소 앞선 가운데 유동적이다. 그러나 예산이나 신자 비율, 목회자 비율, 신학대학원 입학생 비율로 비례해서 봐도 대한민국 장로회에서 제1의 교단, 즉 가장 최고인 것은 지극히 명약관화하고 당연한 사실이다.[7] 2020년 기준으로 보면 장로회 제2 교단인 예장합동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예산 비율이 가장 많은 편이다. 전체 예산은 약 130억 정도이며, 교인 수 1위, 장로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생 및 신학대학원 학생 수도 총신대에 비해서 제법 많다. 참고로 예장합동의 경우에는 2020년 기준으로 예산이 약 110억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8] 미국 장로교회(PCUSA)의 바르트주의적 신학 변화에 맞춰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과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을 작성하였고 현재 통합은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따르는 제한속죄론에서 벗어나 바르트의 '초월론적 변증신학'을 따르는 통전적이며 성서적인 복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9] 물론 모든 신학자가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비평학에 부정적인 보수 성향 신학자들이 통합 교단에도 존재한다.[10] 이것 때문에 예장이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교회 일부는 WCC와 교회일치운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특히 광주 안디옥교회.[11] 그러나 근래 몇 년간 총회에서 동성애자 문제 관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행보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표출되고 있는 실정이다.[12] 교단 지도층 인사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13] 부산 WCC 총회 개최 문제라든지, 가톨릭과의 직제 일치 합의 문제 등에서 예장통합 내 일부 보수파들에 의한 잡음이 일어난 적 있다.[14] 다만, 예장통합의 경우 예장합동의 영미 복음주의보다 진보적인 유럽(광의적) 복음주의와 신정통주의 성향을 띠고 있어 같은 복음주의 성향이라 해도 예장합동 교회들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리버럴하다. 물론 예장합동과 비슷한 수준의 영미 복음주의 성향을 가진 교회나 목사들도 있기는 하다.[15] 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서 교단 산하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도 이 사안을 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의견이 양쪽으로 갈렸다. 신학교인만큼 교단보다는 진보적이지만 기감이나 성공회와는 다르게 보수측이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16] 아무래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교단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고, 장로회신학대학교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17] 과거에는 예장통합 역시 예장합동처럼 강단 십자가를 교단헌법으로 금지하였으나, 1980년 정기 총회에서 새로운 보고서를 채택하면서 강단 십자가 거치를 권장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변경하였다. 물론 강제적인 의무사항은 아니다. 지금도 부산 대지교회 등과 같이 통합 교단 소속이면서도 강단에 십자가를 거치하지 않는 교회들이 일부 존재한다.[18]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도 그렇다.[19] 물론 어디까지나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달고 있는 교단 중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독교대한감리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편이며, 상술한 바와 같이 교단 내부적으로도 보수적인 목사나 교인들이 결코 적지 않다.[20] 국내 장로회 계열 미션스쿨 중 기장 계열(서울 정의여자고등학교, 청주 세광고등학교, 수원 영생고등학교 등), 예장합동 계열(서울 영훈고등학교, 부산 이사벨고등학교, 대구 성광고등학교, 광주 숭일고등학교, 대전 동방고등학교 등) 장로회 계열 초교파 (부산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예술고등학교)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예장통합 계열 미션스쿨이다.[21] 1960~70년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지역에서 산업 노동자 운동을 주도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가 바로 통합 교단 소속이며, 지금도 서울 성문밖교회, 대전 빈들교회 등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진보성향 교회들이 통합측에 여러 곳이 존재한다. 2019년 9월 통합측 총회장으로 선출된 부산 백양로교회 김태영 목사는 독도지킴이 활동으로 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22] 한국 교회 신도 수 기준 5대 교회 중 유일한 예장 소속이다.[23] 안동시, 영주시, 예천군, 영양군 ,봉화군 등.[24] 특히 포항시영덕군의 경우 관내 교회 중 절반 이상이 통합 교단 소속이고 노회가 2개 있을 정도로 통합측의 교세가 압도적이며, 경주시도 고신측 교회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관내 장로회 계열 교회 중 통합측의 비중이 가장 높다. 영천과 합하여 노회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경북 남부지역 중에서도 포항시, 경주시, 영천시나 경북 북부지만 포항시 생활권에 가까운 영덕군은 통합 교단의 교세가 센 편이다. 영천시의 경우 경산시, 청도군, 대구광역시와 달리 통합 교단이 주를 이룬다. 단 과거 강원도 관할이었던 울진군만은 감리회침례회의 교세가 강하고 통합 교단의 교세는 매우 약한 편이다.[25] 특히 청주시의 경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통합 교단이 양대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통합 교단의 교세가 강하다. 보은군은 충북 남부 3군중 개신교 교세는 가장 약하지만, 관내 전체 개신교 교회 중 통합 교단이 압도적으로 많다.[26] 이전에는 충청권 전체가 통합교단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2016년 기준 통합 교단의 충청+강원권 전체 교인 수는 20만명 정도(충청권만으로는 약 17만명)로 각각 46만명의 호남권, 43만명의 영남권에 비해 인구수로 비교해도 적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출처 특히 충청남도 지역은 감리회, 구세군, 성결교회 등 타 교단에 소속된 개신교인들이 많아, 약 3만여명의 통합 교인에 비해 약 13만명(대전을 포함한 충남권 전체는 약 20만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감리회가 뚜렷한 강세를 보인다. 참고로 전국적인 교인 수는 통합 교단이 감리회보다 2배 이상이다.출처1출처2 그러나 부여, 서천, 금산 등과 같이 충남권 내에서도 장로회가 감리회보다 우세한 지역이 존재하며, 충청북도는 충남과 달리 관내 개신교 인구 중 통합 교단 신자가 약 9만명으로 약 4만명에 불과한 감리회 신자의 2배를 넘어 오히려 장로회가 감리회보다 교세가 우위이다.[27] 대전광역시의 경우 평양노회 등 이북지역 노회 소속 교회를 합친 교인수가 약 7만명, 교회수 262개로 충남권의 다른 지역과 달리 통합 교단이 감리회(교인수 약 7만명, 교회수 341개)나 성결교회(교인수 약 2만5천명, 교회수 138개)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교세가 강한 편이다.출처 이는 한국 선교 초기 대전 지역이 감리회와 장로회의 선교 구역 경계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충남권 최초의 장로교회(현 대전제일교회. 현재도 통합 교단 대전노회에 속해 있다.)가 대전에 세워진데다 해방 후 38선 이북 지역 장로회 신자들의 대거 유입과 한남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의 설립, 1949년 기독교연합봉사회 및 1952년 대전시기독교연합회 발족 당시 회원 교단으로 참여하는 등 대전에서 통합 교단의 활동이 활발한 영향도 있고, 타지역 출신 주민이 많고 특정 교파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대전 지역 개신교인들의 특성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전 5개 자치구 지역자활센터 중 대덕구, 유성구 등 2개 구의 지역자활센터, 서구 월평동정림동의 사회복지관을 통합 교단 대전노회 유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28] 장로교 교단 중 강원도에서는 통합 측 교회가 가장 많다. 한편, 강원도는 보수 교단인 예장합동예장고신 측 교회를 상당히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수도권과의 교류가 활발한 춘천과 원주는 강원도에서 이전부터 예장합동이 그나마 선전하는 편에 속하며, 2020년 기준으로 예장합동 교회는 영동 남부권(영월, 평창, 정선)이나 강릉, 속초 쪽에 그나마 약간씩 생기고 있다. 강원도의 예장통합예장합동 측 교회가 생겨났다 해도 기존의 예장통합에 다니고 있는 교회 신도 수가 예장합동보다 훨씬 많은 편에 속한다. 특히 동해, 삼척, 태백 등지의 장로교회는 지금도 예장통합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29] 다만 원주시의 경우 개운동에 있는 원주제일장로교회 오인근 목사 사태, 문막벧엘교회 사태, 태장감리교회 사태로 인하여 개교회가 늘어나기는커녕 감소세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도 수도 계속해서 감소하여 불교로 이탈하고 있어 복음화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고 원주시의 한 통합 측 장로교회 성도가 언급해 주었다.[30] 인천은 강화군을 포함하여 감리회성공회의 교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 그 다음이 강원도이다.[31] 그래도 인천에는 인천을 대표하는 대형 장로교회인 주안장로교회가 있긴 하다. 주안과 부평에 예배당을 두고 있다.[32] 1997년 10월 21일 목포 노회에서 분립.[33] 1985년 11월 13일 서울남노회와 자매결연으로 자립대상교회는 지금까지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며, 2016년 5월 3일 평양남노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도움을 받고 있다.[34] 순천 노회에서 분립.[후암동] [불광동] [종로구] [안동시] [35] 안동시, 영주시, 예천군, 영양군 ,봉화군, 청송군 등. 이 지역을 관할하는 경안노회가 설치되어 있으며 경안노회는 통합 교단 내에서도 상당히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예천군의 경우 통합 교단과 더불어 침례회(기침)의 교세 또한 강하다.[36] 특히 포항시영덕군의 경우 관내 교회 중 절반 이상이 통합 교단 소속이고 노회가 2개 있을 정도로 통합측의 교세가 압도적이며, 경주시도 고신측 교회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관내 장로회 계열 교회 중 통합측의 비중이 가장 높다. 영천과 합하여 노회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경북 남부지역 중에서도 포항시, 경주시, 영천시나 경북 북부지만 포항시 생활권에 가까운 영덕군은 통합 교단의 교세가 센 편이다. 영천시의 경우 경산시, 청도군, 성주군, 대구광역시와 달리 통합 교단이 주를 이룬다. 고령군 역시 경북 남부의 대구 생활권이면서도 통합 교단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단 과거 강원도 관할이었던 울진군만은 감리회침례회의 교세가 강하고 통합 교단의 교세는 매우 약한 편이다.[37] 특히 청주시의 경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통합 교단이 양대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통합 교단의 교세가 강하다. 보은군은 충북 남부 3군중 개신교 교세는 가장 약하지만, 관내 전체 개신교 교회 중 통합 교단이 압도적으로 많다.[38] 2016년 기준 통합 교단의 충청+강원권 전체 교인 수는 20만명 정도(충청권만으로는 약 17만명)로 각각 46만명의 호남권, 43만명의 영남권에 비해 인구수로 비교해도 적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출처 특히 충청남도 지역은 감리회, 구세군, 성결교회 등 타 교단에 소속된 개신교인들이 많아, 약 3만여명의 통합 교인에 비해 약 13만명(대전을 포함한 충남권 전체는 약 20만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감리회가 뚜렷한 강세를 보인다. 참고로 전국적인 교인 수는 통합 교단이 감리회보다 2배 이상이다.출처1출처2 그러나 부여, 서천, 금산 등과 같이 충남권 내에서도 장로회가 감리회보다 우세한 지역이 존재하며, 충청북도는 충남과 달리 관내 개신교 인구 중 통합 교단 신자가 약 9만명으로 약 4만명에 불과한 감리회 신자의 2배를 넘어 오히려 장로회가 감리회보다 교세가 우위이다.[39] 대전광역시의 경우 평양노회 등 이북지역 노회 소속 교회를 합친 교인수가 약 7만명, 교회수 262개로 충남권의 다른 지역과 달리 통합 교단이 감리회(교인수 약 7만명, 교회수 341개)나 성결교회(교인수 약 2만5천명, 교회수 138개)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교세가 강한 편이다.출처 이는 한국 선교 초기 대전 지역이 감리회와 장로회의 선교 구역 경계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충남권 최초의 장로교회(현 대전제일교회. 현재도 통합 교단 대전노회에 속해 있다.)가 대전에 세워진데다 해방 후 38선 이북 지역 장로회 신자들의 대거 유입과 한남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의 설립, 1949년 기독교연합봉사회 및 1952년 대전시기독교연합회 발족 당시 회원 교단으로 참여하는 등 대전에서 통합 교단의 활동이 활발한 영향도 있고, 타지역 출신 주민이 많고 특정 교파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대전 지역 개신교인들의 특성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전 5개 자치구 지역자활센터 중 대덕구, 유성구 등 2개 구의 지역자활센터, 서구 월평동정림동의 사회복지관을 통합 교단 대전노회 유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40] 장로교 교단 중 강원도에서는 통합 측 교회가 가장 많다. 한편, 강원도는 보수 교단인 예장합동예장고신 측 교회를 상당히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수도권과의 교류가 활발한 춘천과 원주는 강원도에서 이전부터 예장합동이 그나마 선전하는 편에 속하며, 2020년 기준으로 예장합동 교회는 영동 남부권(영월, 평창, 정선)이나 강릉, 속초 쪽에 그나마 약간씩 생기고 있다. 강원도의 예장통합예장합동 측 교회가 생겨났다 해도 기존의 예장통합에 다니고 있는 교회 신도 수가 예장합동보다 훨씬 많은 편에 속한다. 특히 동해, 삼척, 태백 등지의 장로교회는 지금도 예장통합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41] 다만, 2021년 기준으로 원주시의 경우 개운동에 있는 원주제일장로교회 오인근 목사 사태, 문막벧엘교회 사태, 태장감리교회 사태로 인하여 개교회가 늘어나기는커녕 감소세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도 수도 계속해서 감소하여 불교로 이탈하고 있어 복음화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고 원주시의 한 통합 측 장로교회 성도가 언급해 주었다.[42] 인천은 강화군을 포함하여 감리회성공회의 교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 그 다음이 강원도이다.[43] 그래도 인천에는 인천을 대표하는 대형 장로교회인 주안장로교회가 있긴 하다. 주안과 부평에 예배당을 두고 있다.[44] 특히 정관 변경으로 경북노회의 감찰 권한을 무력화시키고 사실상 교파를 변경해버린 계명대학교의 사례는 전례가 없던 사례라서 종교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다른 개신교 교단들이나 타종교 교단들도 산하 미션스쿨 단속에 경각심을 높였을 정도이다. 이때 계명대가 사용했던 방식(이사 과반수의 찬성을 통한 학교법인 변경)을 훗날 안양대학교 김광태 17대 이사장이 벤치마킹하여 아예 다른 종교에게 안양대학교 매각을 시도하다가 종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온다.[45] 이는 예장통합 적통론에 따른 것으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장로교 교단사를 살펴보았을 때 1901년 평양신학교의 적통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중 누가 이어받는지에 대해서 다툼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1년 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속칭 평양신학교 혹은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가 개교된다. 이 신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폐쇄되었고, 이에 따라 1939년 3월, 이 학교의 적통을 잇는 조선신학교가 서울에 개교한다. 여기까지는 기장 측과 예장 측 사이에 역사가 동일하다. 그러나 조선신학교가 오늘날 장신대로 이어지는지 한신대로 이어지는지가 문제의 요점이다. 광복 후 1940년대에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 등 일부 신학자들이 고등비평(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을 가르치는 것을 문제삼아 교단 내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본 문서의 교단 분열사에서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교단내 보수파는 1953년 궁극적으로 김재준 교수의 파문을 이끌어내지만, 그 전에 보수파는 이미 조선신학교와 독립적인 보수신학교의 설립을 추진해왔고,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라는 '정통' 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1953년까지 양립하였다. 이후 김재준이 파문되면서 조선신학교가 아닌 장로회신학교가 교단신학교로 재지정되었고 이후 조선신학교는 한신대로 개명한다. 따라서 통합의 입장에서 보면 1953년 조선신학교가 자신들의 교단 신학교에서 지정해제됨에 따라 그곳은 껍데기만 남은 곳이 되었고 그게 나중에 한신이 되었건 어쨌건 안중에 없는 것이다. 한편 기장과 한신대학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조선신학교의 물리적인 학교 시설이나 교수 및 교직원들은 단절되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이어져왔기 때문에, 특정 교단의 일방적인 파문과는 상관없이 1901년 평양신학교 역사는 조선신학교에서 이어지는 것이 옳다. 한신대 역사 항목 참조. 즉 기장의 입장에서는 예장이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인 선교사 마포삼열의 유해를 인질삼아 장신대가 적통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포삼열의 유해는 현재 광진구 장신대 교정에 묻혀있다.[46] 연세대 이사회 정관 상 '기독교계 인사' 2인을 배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파송하는 임원을 이 4개교단에서 파견한다. 2008년 이전까지는 4개 연합교단에서 각1명 이사를 파견하였으나 정관이 개정되어 교단과 무관하게 합쳐서 2인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의 교단규모를 고려하여 기감과 예장통합에서 주로 목사를 파송한다.[47] 박영우 목사 시무.[48] 다만 합동 탈퇴 이후의 교단들은 대부분 분열이 아니라 탈퇴 후 창설로 세워졌고 예장 통합과 교류가 활발한 경우가 많아 통합 계열 교단이 아닌 독자적인 교단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하지만 다른 장로회 계파도 합신, 합동보수, 브니엘처럼 파생 교단들이 탈퇴 후 창설로 세워진 경우도 더러 있으며, 탈퇴 후 창설이라도 어쨌든 예장 통합 출신 목사들이 세웠기에 예장 통합에서 분가한 것은 마찬가지라 이들 교단의 창설 과정에서 통합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이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한다.[49]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 것이 대표적이었다.[50] 다만, 출범 당시부터 박조준 등 통합측 목사들뿐 아니라 합동측 목사인 김준곤 등도 함께 참여하였으며, 현재의 KAICAM은 통합측 뿐만 아니라 기장, 합동, 고신, 기감, 기성, 예성, 기침 등 다양한 교파와 교단 출신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51] 고신의 의미는 고려신학대학교를 교단 대학교로 하는 예장교단이라는 뜻[52] 물론 한때 WCC 반대를 내걸고 연합했던 예장 합동 역시 이 당시 김길창 등 수뇌부의 다수 인물들이 저항파 목회자들의 퇴출에 가담한데다 연합 후 신학교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고려신학교부산신학교에 흡수, 소멸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에장 고신이 갖는 원한과 증오에서 자유롭지는 않다.[53] 원래 예장 소속이었고, 캐나다 장로교회 영재형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믿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영재형 선교사가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고, 연합교회의 고등비평학을 당연시하는 선교사들과 대립하며 한반도를 떠났기에 예장 소속이 아니라는 오해에서인지, 광복 후 예장에 가입했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한신학교도 엄연히 분열 전 예장총회의 야간 신학교였으며 당시 주간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였다.[54] 이때의 흔적으로 부산장신대학교가 대한신학교의 부산분교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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