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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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제국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여 세워진 전제군주제 국가이자 한국의 마지막 군주국이다.
대조선국의 대군주인 고종이 건양 2년(1897년) 칭제건원하여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이전 조선국의 영문 국호이던 Korea에서 따 와 국제적으로 Empire of Korea로 불렸다.[10] 과거 고려왕조가 역성혁명으로 무너져 조선왕조가 개국했던 것과 달리 대한제국의 국체는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졌다.[11]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고 이후 친러내각을 수립한 뒤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오르고 대한제국을 건국하였다. 동시에 광무개혁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으로부터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후 외교권과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군대해산을 거쳐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됐다. 일본은 1904년 7월 20일에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은 데 이어 1904년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았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멸망하였다.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옛날에 봉(封)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후부터 국호는 예전 것을 답습한 경우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바로 기자가 옛날에 봉해졌을 때의 칭호이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그 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대한'이라는 칭호는 황제의 계통을 이은 나라들을 상고해 보건대 옛것을 답습한 것이 아닙니다. 성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하니, 감히 보탤 말이 없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정식 국호는 '대한제국(大韓帝國)' 또는 '대한국(大韓國)'으로, 대한은 삼한을 일컫는 다른 말로써 한반도 전역을 이르는 말이다.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군주가 한(韓) 씨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후 건마국의 군주가 될 때 한왕(韓王)을 자처한 대서 한(韓) 국호의 유래가 있다. 이후 한반도 중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은 삼한으로 불렸다. 마진변한이 사라진 지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시대 후반부 당시에는 의미가 변형, 확장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셋을 삼한이라고 불렀고,[12] 이것을 통일신라와 고려가 통일할 때 스스로 삼한일통이라 했기 때문에 '한'은 한민족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는 별칭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삼한이 원래 삼국시대 초반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여러 나라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밝혀졌지만, 관용적 용법은 계속 이어져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 때까지 삼한이란 단어는 삼국=삼한일통=한국이란 의미였다.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삼한 문서 참조. 고종은 이 한을 정식 국호로 정한 것이다. 신하들도 韓이 기존 국호였던 조선의 아침 조(朝)와 같은 변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면서 이 이름을 지지했다.
화이론(華夷論) 사상에 따라 국명은 외자로 고려되었다.[13] 그리고 '대(大)'는 대원제국, 대명국, 대청제국, 대월국 등 동아시아 제국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별칭은 '대한국'이다. '대한국 국제'에서 보이듯이 혼용되었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는데, 현대의 대한민국과 약칭이 같다. 나라 이름은 '대한'이고, '제국'과 '민국'은 각각 황제국과 공화국이라는 정체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체가 달라졌을 뿐, 국호는 같은 이름을 쓰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서 대한제국을 구한(舊韓)이나 구한국(舊韓國)이라 하기도 하며, 흔히 쓰이는 구한말(舊韓末)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반대로 대한제국을 기준으로 보아 대한민국을 신한국(新韓國)이라 하기도 한다.
영어명인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가 초기에 잠시 내세웠던 명칭이지만, 결국에는 Korean Empire나 Empire of Korea가 통용되었다. Korea의 어원이 고려인데 바로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 했다. 그래서 영문 명칭으로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으로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미 고려가 한국을 뜻하는 말이 된지 수백년이 지난터라 바뀌지 않았다. 결국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를 수용하여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명칭은 당시 발행한 여권이나 우표에도 반영되어 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후 대한 및 한국이라는 용어를 금지하는 한편, 한반도와 부속도서에 대해 전 국호인 조선으로 통칭하고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했다.관련 기사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한제국은 잊혀 갔으나 3.1 운동을 통해 대한이라는 국호가 널리 알려지고[14]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15]
2.2. 국기[편집]

2.3. 국가[편집]

민영환이 작사하고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하였다. 1902년 7월 1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사용되었다. 국권 피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남북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했다.
2.4. 국장[편집]
2.5. 국제[편집]

大韓國國制. 1899년 8월 17일 대한제국에서 공표한 국제. 두산 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헌법이 아닌 국제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황제가 제정하고 반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3. 역사[편집]
3.1. 제국 선포[편집]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게 경복궁을 두번이나 점령당하고 건청궁에 감금당해 감시받던 고종은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얻어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구성한 대신들을 잡아들이고 일본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 중앙과 지방조직의 개편 등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 대신들을 유럽과 북미에 파견시켜 각국의 외교에 힘을 쏟으며 정무를 해나간다. 특히 러시아 공사인 카를 베베르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교류가 잦아지며 일본을 견제할 힘을 가진 러시아에 매력을 느끼고 국가를 변모시킬 것을 구상한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에 힘을 쏟았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17] 또한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추구했는데,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고,[18] 근대 사회의 후발주자인 조선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가 수반되어야 했기에 고종의 황제 즉위가 고려되었다. 반면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황제 즉위를 준비하면서 주변국이 반발할까 고심하기도 했다.
즉위를 준비하면서 고종은 환구단을 지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은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시도했다 못한 것이기도 했다.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러시아 장교의 훈련으로 양성한 1천여 명의 호위병력인 시위대를 갖추고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과 매우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그로부터 약 8개월 뒤인 10월 12일 (화요일) 그동안 구상했던 대한제국을 건국한다. 또한 당일에 을미사변 이후 국장을 미뤄왔던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로,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3.2. 국제 반포[편집]
초기 대한제국의 체제는 고종이나 독립협회나 독일식이냐 영국식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입헌군주제가 고려되었다. 하급 관료와 황실 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제국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 제국이 채택하고 있었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 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시위와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보부상들의 지지를 받았다.[19] 독립협회의 실력도 권력을 인수하기엔 부족했다.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 내 여론을 등에 업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20] 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행정심의회)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고종의 반발을 사는 독립협회 임원들의 무리한 행동으로 해산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중추원이 가지게 되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명성황후 암살 모의 사건[21] 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박영효나 국외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22]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23]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해산시켰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급진적이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었다.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
3.3. 근대화 추진[편집]

대한제국 시기에 급속도로 근대화가 추진됐다. 정부 기관과 제도를 개편하여 13도를 골자로 하는 지방행정도 개편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도와 시군의 구역과 명칭이 이때 탄생하였다.[24] 외국자본에 각종 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을 주고 세금을 부여하였고 도로망과 등 기간시설을 구축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이전에 비하여 세수를 크게 늘렸다. 광무양전으로 경작지에만 국한되던 토지측량을 임야와 해안 등 모든 국토에 대해 호구조사 지질조사와 병행해 측량하여 종래의 토지결수를 늘리고 집세를 부과하였다. 서울 시내와 인천 간에는 전철이 다니며 대로변과 시가지가 정리되고 수많은 유럽풍의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전기회사와 발전소를 설립하여 전신,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고 밤에는 가로등이 시내를 밝혔다.
복식도 크게 변화하여 1895년에 일본이 시행했던 1차 단발령은 실패한 반면 대한제국이 시행한 단발령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하였고, 중앙정부 관료들만 입던 서양식 복식도 지방관과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25] 상공업을 장려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수많은 기업과 가게가 들어서고 많은 서양 문물이 전파된다. 오늘날의 많은 대학교 등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대폭으로 설립되어 근대식 교육이 시행되었고 공문서의 국문화 또는 국한문화와 함께 12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군사력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고 평가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식생활에서도 서양 문화가 많이 도입 되었다. 대한제국 곳곳에 경양식 식당들이 개업했고 여전히 밥, 국, 반찬으로 먹었지만 한국인들도 서양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양 음식을 먹는 한국인들 사진이 찍히기도 하였다. 황제인 고종은 아예 궁전 내부에 카페를 만들어서 커피, 홍차, 디저트를 즐겨먹었고 수라상에도 사이다, 디저트, 커피, 홍차, 파스타, 스테이크, 돈까스 같은 서양 요리들이 차려졌다.
군사적으로도 많은 개혁을 진행하여 근대식 군대인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고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였으며 기관총, 서양식 대포 같은 최신무기들을 도입했고 비록 사기당했고 무장이 빈약했지만 양무호라는 순양함을 도입했으며 초계임무 수행이 가능한 등대순시선 광제호, 현익호와 민간에서도 상선으로 쓰인 증기선을 도입했다. 계급체계도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재정과 지지세력의 한계[26] ,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과 외국 자본의 침투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제국 치곤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를 탈피하지 못했고 재정은 황실비자금인 내탕금을[27] 통해 운영되는 비중이 컸다. 고종의 직권으로 정책의 추진력은 높았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다.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국외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 부산, 마산, 원산 등지에 군대를 상륙 후 서울을 점령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며 자주적 개혁은 끝나고 일본의 개입을 받게된다.
3.4. 순종 즉위와 멸망[편집]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미국과 영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통해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해주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1910년이지만 사실상 이 시기에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고종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빌헬름 2세는 "한국의 황제께(Kaiser von Korea)"라고 쓴 답장을 써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 냥(500억 상당)을 독일 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독일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안됐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이미 눈치를 챈 일본이 손을 써서 특사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다.
1907년 7월 19일 순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일본은 《정미7조약》, 《기유각서》 등의 조약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 등의 국가 권력을 뺏어갔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의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고, 연호 또한 융희 4년에서 메이지 43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다.
3.5. 3.1 운동 이후[편집]
융희 황제가 삼보(영토, 인민, 주권)를 포기한 경술년(1910)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하략)
경술국치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에 고종의 죽음과 민족자결주의의 확산으로 한반도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3.1 운동이 한반도의 전역에서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창립하게 된다.
임시정부를 창립하는 과정에서 국호에 대하여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신석우는 '대한민국'을 주장했는데 여운형 등은 망한 국호를 다시 쓰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대한이 아닌 '조선'[29] 을 주장했다. 그러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 보자."라고 했고, 이 말에 다들 찬성하며 만장일치로(혹은 다수결의 투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임시 헌장(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본법)에서는 대한제국의 황족에 대하여 우대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임시 헌법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대한제국의 판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서 새로운 국호(대한민국)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고, 북한과 남한에 대하여 지금도 '북조선'이라고 호칭하거나 '남조선'이라고 호칭하면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북한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기도 하고. 그 밖에도 한국민주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하였다.
4. 조선과 대한제국의 연속성[편집]
대한제국 시대에는 공문서는 물론 모든 신문·잡지를 비롯한 모든 사적인 출판물조차 국호를 엄격히 지켜 '대한국', '대한', '한국'으로 사용하였다. 황제가 바꾸어 공포한 새 국호를 무시하고 예전의 국호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불충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하다. 일본도 대한제국을 공문서 등에서 경술국치 전까지 '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었으며(남한대토벌작전 등), 한일병합조약문에서까지 '한국'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과 조선의 실체가 동일하다고 하여 대한제국 시대를 다룬 미디어에서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역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대한 및 한국이라는 용어를 금지하는 한편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해 전 국호인 조선으로 통칭하는 등 대한제국이 잊히도록 철저히 작업하였다. #
이 때문에 대한제국을 구한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시대는 언제까지냐는 물음에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로 오랫동안 대중에게 역사상의 비중은 낮은 편이었다. 한국사 교과과정 때만 접할 뿐이었으나 2010년대 이후 학계와 언론의 대한제국의 재조명과 〈미스터 션샤인〉 등의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 등이 방영되면서 대중들에게 크게 인식된 편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역성혁명이 아닌 원래 있던 왕조의 국명만 바뀌었고, 군주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과 그에 맞게 묘호·존호·관제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것이 단절 없이 그대로 계승된 점 등을 연속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 때에도 왕실에 관련된 몇 것을 제외하면 과거제도의 효력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것들이 그대로 이어졌다.
궁예의 태봉의 경우 '고려'나 '마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취급하며, 심지어 조선마저 극 초창기(1392년 ~ 1393년)에는 이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때의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조선의 건국 연도를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며 이의 사용 기간 역시 '대한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고려'라는 호칭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지 국호 변경만을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 시기를 장수왕 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구려'로 불리든 '고려'로 불리든 700년 역사 전체를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지. 백제도 '십제'나 '남부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신라 또한 '사로국' · '서라벌' · '계림'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의 통치기인 503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전체 역사를 통칭해서 '백제'나 '신라'로 부른다. 이름만 바꾸었을 뿐 왕조 교체 없이 국체가 조선에서 물 흐르듯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과 대한제국을 칼로 무 베듯 생판 별개로 취급하여 조선이 1897년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되레 이상하다고 할수도 있다.
한 예로 1900년 10월 14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안에 있던 어진들이 소실되자 '정묘년과 병자년의 오랑캐 난리말고는 이처럼 큰 재앙이 없었다.'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매우 비통해한 고종은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비(= 내탕전(內帑錢))까지 털어 가며 선원전 복원 및 어진 모사 작업을 추진했으며, 모사를 위해 함경남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도 대규모의 화려한 행렬을 꾸렸을 만큼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종이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조선과 대한제국이 동일한 국체(國體)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이 외에 대한제국 시대에도(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황실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으며, 순종 역시 즉위 교서에서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준 분은 태조 고황제'라고 똑똑히 명시해 놓았다.
대한제국이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나라라는 사실은 대한제국 스스로 '500년간' 전래되어 왔음을 밝힌 대한국 국제 제2조로도 확인 가능하며, 대한제국 수립 이후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도 '500년 종묘 사직'라는 문구가 다수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대거 신원한 것도,[30][31] 박지원과 정약용 등 조선시대의 명신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린 것도 조선과 대한제국은 동일한 국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수립 후 일반적인 추존 대상인 고종의 4대조뿐 아니라 한참 옛날의 인물인 조선 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까지 그 범위에 포함시켜 '태조 고황제'로 추존했다.[32]
5. 대한제국의 근대성 논쟁[편집]
대한제국은 흔히 한반도 최초의 근대 국가로 평가되나 이에 대한 논쟁이 있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을 펴내면서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근대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황태연 교수는 근대성(modernity)을 논할 때 종교에서 분리해 세속화된 정치, 신분적으로 차별이 없는 국민, 국민개병제에 바탕을 둔 군대의 정예화, 시장화와 산업화 등을 두루 살피자고 제안했으며, 대한제국은 이를 모두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이 비록 전제군주제 국가였지만 독일 제국, 일본 제국 등의 예를 들어 근대성과 전제군주제는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군사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군사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근대성이 오랫동안 대한제국을 끝장낸 일제에 의해 폄하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복권을 주장한다. 황태연 교수 이전에도 이태진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은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강하게 옹호한 바 있다. "대한제국이 제정한 헌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무한한 군권과 전제정치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제국을 근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면 메이지 시대 일본 역시 헌법에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메이지 시대 일본도 봉건왕조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대한국국제에는 대일본제국 헌법과 같은 민선 입법회의 규정이 없지만, 황제와 독립협회의 추천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켜 이에 법률 칙령의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해왔고, 갑오개혁 때 없어진 신분제를 되살리지 않으면서 만민이 평등한 근대 국민국가가 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에서는 식민사관에 폄훼된 대한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대한국국제에서 나타나는 전제군주제의 유지와 왕권에 집착하는 고종의 태도, 광무개혁의 문제점으로 미루어볼 때 대한제국은 제대로 된 근대 국민국가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전제군주제가 근대성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하나 서구의 근대식 전제군주제는 절대왕정에서 계승된 것으로써 그를 지지할 사회적 계층(부르주아)이 있었는데 고종은 그런 사회적 계층 없이 친위세력으로만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한국국제의 전근대성(premodernity)은 전제군주제적 성격이 강한 청나라의 흠정헌법대강과 일본의 대일본제국 헌법과 비교해도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근대 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개병제인데,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실제 대한제국 군대는 대내적으로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에게만 충성하는 왕의 사병일 뿐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만 군대를 사용했지 정작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김재호 전남대 교수는 아예 대한제국을 고종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던 반동적 시도로 보고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부정한다.
이태진 교수와 김재호 교수는 대한제국 및 고종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며 논쟁한 바 있고, 이는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이태진, 김재호 공저)에 잘 정리되어 있다.
6. 외교[편집]

대한제국은 사실상 조선의 연장선 그 자체였기 때문에 조선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다음 국가들은 대한제국이 수교한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괄호 안의 날짜는 태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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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 조일수호조규 (1876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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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년 5월 22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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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조영수호통상조약 (1883년 11월 26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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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 조독수호통상조약 (1883년 11월 26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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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 조이수호통상조약 (1884년 6월 26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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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 조로수호통상조약 (1884년 7월 7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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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조불수호통상조약 (1886년 6월 4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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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조오수호통상조약 (1892년 6월 23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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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 한청통상조약 (1899년 9월 11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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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 한백수호통상조약 (1901년 3월 23일~190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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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 조정수호통상조약 (1902년 7월 15일~1905년 11월 17일)
이 가운데 일본제국만 1910년 국권 침탈 때까지 수교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나라들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모두 단교하였다.
미수교국 중 스페인(西班牙)과 네덜란드(荷蘭)는 차기 수교국으로 고려되어 조약 초안 단계까지 진행되었으나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인해 혼란한 정세로 인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33]
이 중 미국, 영국(이탈리아도 관할), 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도 관할)과 러시아에는 현지 한국 공사관이 세워졌으나 을사조약으로 인해 모두 폐쇄되었다.[34] 다만 주러공사 이범진은 홀로 현지에 남아 개인자격으로 외교를 계속하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인 1911년에 자결하였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은 강제합방 이후 일본의 손에 넘어가 민간에 매각되었고, 21세기 들어 한국 정부에서 매입하여 전시관으로 활용중이다.
현대 한국 정부는 일본[35] , 중국[36] , 러시아[37] 를 제외하고 대한제국(및 조선 왕조)의 외교관계를 현대 대한민국이 계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예로 2001년 한국과 벨기에는 한-벨기에 수교 100주년 행사를 치렀는데 대한제국과 벨기에의 수교년도인 1901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관련 기사
7. 군대[편집]
7.1. 편제[편집]
8. 황사[편집]
8.1. 대한제국 황실[편집]


8.2. 대한제국 계보도[편집]

9. 한국통감부[편집]
9.1. 역대 통감[편집]
10. 행정구역[편집]
11.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편집]
일반적으로 내각을 포함한 산하 관청 및 궁내부, 사법 기관 등의 관청들로 칭제건원 후부터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이 있기 이전의 관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2. 대한제국 시기 유입된 근대 문물[편집]
- 가로등[39]
- 수도: 1908년 9월 1일 뚝도정수장 준공을 시작으로 수도가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 야구: 1905년에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전파하였다. 또한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웠다.
- 농구: 1907년 질레트가 농구를 소개하면서 농구를 전파하였다.
- 육상: 1896년 최초 근대 운동회인 화류회 개최
- 증기선/근대식 군함
- 만화: 1909년 ~ 1910년까지 출간한 대한민보가 한국 만화의 시초이며 일본제국의 기득권층의 탄압에 대한 풍자 만화다.
- 활명수
- 한국은행
- 노면전차: (청량리 ~ 서대문) 운행을 1898년부터 시작하였다.
- 철도
- 인력거 / 인력거꾼
- 자동차(어차)
- 포경 수술
- 유관순 교복
- 서양 의복
- 소총
- 우체국
- 사진
- 전화
- 전신
- 전보
- 종교
- 전구: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 성냥
- 신문
- 대한적십자사
- 동양척식주식회사
- 서대문형무소
- 경운궁 양관
- 서양 요리
- 청나라 요리: 사실 중국요리는 임오군란때 청나라군과 함께 청나라 상인들이 청나라군을 지원해주는 임무로 왔다가 주둔 기간이 길어지자 조선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하면서 들어왔지만 대한제국이 더 많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더 많은 청나라사람들이 인천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에 정착하고 한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집을 차리는 청나라 사람들도 많아졌다.
- 가든파티: 이 당시 황실에서는 궁궐 내의 후원이나 전각에 수천 명의 손님을 초대해 '원유회'라는 이름으로 가든파티를 개최했다. 원유회가 처음 실행된 것은 1895년 6월 6일 창덕궁 연경당에서 였는데, 청일전쟁 직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초청되었다. 1904년부터는 원유회가 빈번히 이루어졌으며, 창덕궁 후원과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후원 등에서 주로 열렸다. 참석자는 원유회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부터 통감, 부통감, 각국 영사와 공사, 고문관, 외국인 교사, 상인, 신문사 사장,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유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이나 탁자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차려진 음식은 한식 뿐만 아니라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맥주, 탄산수, 샴페인, 위스키 등 서양식 주류도 함께 제공되었다. 또 과자와 각종 담배도 준비되었다. 이러한 원유회는 궁중에서 시작되어 점차 민간으로 퍼져나갔고, 일제강점기에는 야유회의 형태로 발전했다.
- 과학사
13. 대한제국의 오악(五嶽)[편집]
천자국은 악해독(嶽海瀆)과 같은 중요한 자연물에 깃든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관례에 따라 지정했다.[42] 악은 오악이라 하여 다섯 곳을 꼽았지만 바다와 하천은 각각 사해(四海)[43] , 사독(四瀆)[44] 즉 네 곳을 꼽았다.
14. 대한제국의 공휴일[편집]
대한제국 선포 이전인 1896년 을미개혁 당시 서양식 주7일 요일제가 도입되면서 이미 공휴일 제도도 함께 도입되었다. 이 당시에는 조선의 건국일인 개국기원절(음력 7월 16일), 고종의 생일인 대군주 탄신일(음력 7월 25일), 고종의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서고일(음력 12월 2일)이 공휴일이었다. 또 연말연시인 12월 30일부터 1월 3일까지도 5일 연휴로 지정되었다. 공휴일에는 주요 관공서와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전국에서는 축하 행사가 개최되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계양되었다. 순종이 즉위한 후인 1908년부터는 총 5개의 공휴일이 있었다. 사계절 중에는 봄과 가을에 1일, 여름에 2일, 겨울에 6일 있었다.
- 건원절(양력 3월 25일, 음력 2월 8일): 순종의 탄신일
- 개국기원절(양력 8월 14일): 조선의 건국일
- 즉위예식일(양력 8월 27일): 순종의 즉위일
- 계천기원절(양력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일
- 묘사서고일(양력 12월 18일): 순종의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
- 신정연휴: 12월 30일 ~ 1월 3일 중 5일
태상황인 고종의 탄신일인 만수성절[45] 과 황후 순정효황후의 탄신일인 곤원절, 황태자 이은의 탄신일인 천추경절은 국가 경축일이자 궁중 내 기념일이었으나, 공휴일로 선포되지는 않았다.
15. 대한제국의 인물 목록[편집]
16. 역사적 사건 목록[편집]
대한제국 선포 후에 일어난 사건 목록이다.
-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 12일)
- 신축민란(1901년)
-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
-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
- 을사의병(1905년)
- 국채보상운동(1907년 2월)
- 정미7조약(1907년 7월 24일)
- 대한제국군 해산(1907년 8월 1일)
- 서울진공작전(1908년)
- 남한대토벌(1909년 9월)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1909년 10월 26일)
-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17.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같은 왕조이자 직전 국가였던 조선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다 못해 넘쳐 흐르지만 정작 대한제국을 제대로 다룬 창작물은 거의 없다시피하며 있어도 조선 말기를 다룬 작품에 곁다리로 나오거나, 단막극 및 특집극으로 짧게 나오거나, 실제보다 훨씬 부강한 대체역사 속의 강대국 혹은 열강으로 성장한 대한제국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시대도 짧은 데다 나라가 망해가는 우울하고 슬픈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뤄야 하고[46] 제국 선포 직전에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이라는 좋은 소스거리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후반부터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다수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은 정말 간만에[47] 대한제국기를 메인으로 다루었고 대박을 터뜨렸다. 대한제국기를 다루어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앞으로 기대해 봐도 좋을 듯.
대체역사물/소재/군주제 현대 한국의 경우 대한제국이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이름이 '대한민국'으로 되어있는 작품도 있으나,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국호 자체가 공화국, 즉 임금이 없는 나라임을 의미하므로 왕/황제가 존재하는데 이렇게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왕이 있다면 일반적으론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처럼 왕국으로 불려야 한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인 건 아니라서, 군주가 있음에도 왕이라 불리지 않는 말레이시아나 천황이 있음에도 제국이라 불리지 않는 일본(일본국)도 있다. 또한 캐나다나 호주 등 다른 영연방 국가들은 실질적 독립국이며 순수하게 명목상으로만 영국 군주를 국가 원수로 모시는 나라들은 공화국 명칭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영연방의 경우 36개 국가들이 공화국인데, 이들은 영연방에 속하긴 하지만 명목상으로도 국왕이 국가원수가 아니다. 하지만 포인트는 국왕이나 황제가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국가의 수장인 국가는 공화국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
1980년대 들어 국호에 '제국'을 쓰는 국가는 전부 없어졌으므로[48]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이란 국호가 유지됐을 가능성은 낮지만,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세계 유일의 제국이라면서 홍보거리로 삼았을지도? 만약 대한제국이 현재까지 이어졌을 경우 대한제국 말고 대안을 찾는다면 전제군주제건 입헌군주제건 왕이 헌법에서 국가의 수장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우는 '대한왕국(Kingdom of Korea)', 일본처럼 '국가의 상징'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우는 '대한국(Korea)'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높으며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49]
상기한 이유로 이 항목의 상당수는 조선/창작물 및 구한말/창작물, 개화기/창작물과 겹친다. 단, 문서가 문서이니만큼 조금이라도 대한제국이 나온 작품에 한해서만 올리고 개화기를 다뤘어도 대한제국 배경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면 등재하지 말 것.
17.1. 드라마[50] /뮤비[편집]
17.1.1. 가상의 대한제국을 다룬 드라마[편집]
17.2. 영화[편집]
- YMCA 야구단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 그림자 살인
- 대장 김창수
- 도마 안중근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 마지막 황후 윤비
- 요화 배정자
- 영웅(2022)
- 이재수의 난
- 인플루언스
-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7.3. 소설/만화[편집]
- 대한제국 연대기(소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문피아 웹소설) -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 한성 1905(다음 웹툰) - 대한제국(한성 1905)
- 회랑식 중정(순정만화)[52]
- 1904 대한민국(소설)
- 대한제국 3077(소설)
- 조선, 혁명의 시대(소설)
- 대한제국이 이미 너무 강함(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