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동 국교생 살인 누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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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반전
3. 국가 손해배상 판결
4. 여담



1. 개요[편집]


1991년 9월 30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거주하던 9살 권모 양이 자택에서 칼에 찔리고 불에 타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범인을 성인으로 추정하였으나, 경찰은 범인을 1살 위인 오빠 권모 군이라고 발표하여 전국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당시 언론에서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권모 군이 부모의 여동생 편애에 앙심을 품고 폭력적인 비디오물에 심취해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1] 또한, 어른이 살인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방화까지 저지르는 지능적인 수법을 썼다고 혀를 내둘렀다.[2] 해당 사례는 10월 12일자 MBC <생방송 여론광장> '누가 동생을 죽였나' 편에서도 다루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라 부르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라 당시 언론에서는 권모 양을 국민학교생의 약칭인 국교생으로 보도하였고, 이 문서의 제목도 국교생으로 표기하였다.


2. 반전[편집]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경찰이 어린 권 군을 협박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10월 29일에는 MBC <PD수첩> '되짚어 본 마포 어린이 살인사건(최삼규 취재)' 편에서 해당 사건을 재검토했고, 대한변호사협회의 주장을 12월 12일시사저널에서 자세히 소개했다.[3]

수사당국에서 ‘마포 국교생 살인사건'이라고 부르는 이번 사건은 지난 9월30일 발생했다. 부모가 모두 일하러 나간 새에 집을 보고 있던 남매 중 오빠는 가느다란 줄로 목이 졸린 상처와 화상을 입고 불난 집에서 빠져나오고 동생은 목에 전기줄이 감긴 상태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경하군의 진술대로 외부인[4]

이 침입해 저지른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곧이어 수사방향을 급선회해 사건 발생 5일만에 경하군으로부터 “동생과 다투다 화가 나서 칼로 복부를 찔러 죽였다는 자백을 받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권군이 부모에게 "경찰관 아저씨들이 강요해 할 수 없이 있지도 않은 얘기를 꾸며댔다"라고 밝히며 자백사실을 번복하고 이를 <중앙일보>와 MBC가 보도함으로써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이어 대한변협 인권위가 진상조사에 들어가 지난 18일 "경찰의 판단이 너무 성급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검찰에 재수사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사건 재수사를 촉구했다.[5]

결국 재수사 이후 중앙일보에 의해 경찰이 강압적인 태도로 권 군에게 거짓 자백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결과가 밝혀졌다.[6]

서울 대흥동 국교생피살·방화사건을 수사하면서 뚜렷한 물증없이 국교4년생 오빠를 범인으로 단정,발표했던 경찰이 뒤늦게 친구인 10세된 증인을 일요일 낮 경찰서로 불러 증언내용을 강제로 번복시킨 사실이 밝혀져 말썽이 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사건당시 현장에 외부인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있었다』라고 경찰수사결과와 다른 증언을 했던 노모군(10)이 23일 중앙일보기자에게 폭로함으로써 밝혀졌다.


또한 경찰과 검찰의 수사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이 추가로 드러났다.[7]

◇검찰결론=검찰은 ▲권군자백 ▲권군과 숨진동생 미경양이 다투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노군의 번복된 진술 ▲권군의 얼굴과 배에 난 상처 ▲일관성없는 권군 진술 등을 증거로 들고 있다.

『권군이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동생과 말다툼 끝에 전기줄로 동생의 목을 감고 부엌칼로 배를 찌르고 이불로 덮어 질식사망케한 뒤 현장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다』라는 것이 검찰의 범행과정 결론이다.

정황증거로는 ▲밖에 노군이 있었는데도 비명등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권군 목둘레의 색흔은 실신할 정도가 아니며 ▲화재시 권군이 신발까지 신고 나오는 여유를 보인 점 등을 들어 외부인의 범행가능성은 없다고 설명했다.

피살된 미경양이 당시 옷을 입고 있지 않았었다는 대한변협 조사단의 지적에 대해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실수로 의복성분감정을 빠뜨려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미경양의 사인이 칼에 찔려 숨졌다는 경찰발표와 달리 부검결과 질식사로 나타나자 검찰은 『칼에 찔려 가쁜 숨을 쉬다 이불을 덮어 씌우는 바람에 질식사했다』라고 얼버무렸다.

외부인의 것으로 볼 수 있는 낯선 신발이 사건현장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인정하면서도 출처·행방 등에 대한 추적수사를 하지 않아 역시 수사미진이란 지적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의문점=가장 큰 논란은 노군 진술.

검찰은 싸움장면을 목격했다는 노군진술이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지난해말 노군은 본사기자에게 스스로 이같은 진술이 『경찰의 강압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밝혀 신빙성에 의문을 남기고 있다.

검찰은 또 미경양이 칼에 찔렸다고 했으나 장기 손상이나 복부에 칼에 찔린 흔적이 없다는 국과수의 부검결과에 대해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

검찰은 권군의 배에 있던 송곳에 찔린 모양의 상처 13곳이 외부인 침입으로 위장키로 위한 권군의 자해흔적이라고 주장하나 급박한 상황에서 10세짜리 어린이가 그토록 치밀할 수 있을까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는 게 중론.

특히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권·노군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경찰의 협박 ▲외부인의 범행가능성 등은 철저히 외면해 수사의지를 의심케하고 있다.

또 권군이 범인이라면 화상은 왜 입었으며 사건직후 병원에서 권군에게 산소호흡기를 써야할 정도로 가스를 많이 마셨겠는가에 대해서도 명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3. 국가 손해배상 판결[편집]


1992년에 권 군 측 변호인인 신기남 변호사는 "수사과정에서 사실을 부인하는 권 군을 협박과 회유로 허위자백을 끌어냈다"라며 "증거추론과정에서도 상식에 반하는 정황증거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라고 주장하고 민사와 함께 수사기관을 상대로 고소·항고 등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는데, 결국 1993년에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손해 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와 8,000만 원을 받았다.[8]


4. 여담[편집]


기사에도 나오지만,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문제 삼은 것은 피의사실 공표였다. 아직 결론이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사람이 범인이요"라고 크게 떠들었으니, 애먼 사람을 범인으로 단정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를 협박하여 짜맞추기식 수사를 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인권 침해인데도 이 사건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가난한 맞벌이 가정이라는 점,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학습부진아라는 점 때문에 문제아 낙인이 찍히기 쉬웠으니, 어찌 보면 편견의 무서움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경찰과 검찰이 권 군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다른 각도에서의 수사를 허술하게 진행했던 탓에 현재까지도 진범은 잡히지 않았고,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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