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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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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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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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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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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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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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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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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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궁 4대 궁주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덕안군 이재덕 | 德安君 李載悳


조선 장종의 현손
덕안군 이재덕 | 德安君 李載悳

봉호
덕안군(德安君)
이름
이덕주(李悳周) → 이재덕(李載悳)[1][2]
양부
익평군 이희
양모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
생부
이계[3]
생모
안동 김씨
부인
정부인 달성 서씨
자녀
2남[4]
출생
1852년 3월 18일
사망
1877년 6월 5일 (향년 25세)

1. 소개
2. 생애
2.1. 사망과 이후
2.2. 후손



1. 소개[편집]


조선의 방계 왕족(정확히는 방계 현손) 출신 문신.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양증손자, 상계군의 양손자, 익평군양자이다.

2. 생애[편집]


1852년(철종 3년) 3월 18일 덕흥대원군의 11대손이자, 충정공 이홍술의 6대손인 이계(李烓)와 진사 김운순의 딸 안동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왕족의 범위는, 대군 후손의 경우 5대손까지, 의 후손은 4대손까지였다. 그런데 이재덕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중종이기 때문에[5] 덕안군이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1863년(철종 14년) 9월 철종의 4촌 형 익평군양자입적하여 왕실 종친이 되었다.[6]

1867년(고종 4년) 3월 고종창덕궁 후원에서 소현세자인평대군의 자손들을 만나고 이 중 춘당대에서 유생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해 응하게 하여 시를 짓게 했다. 이를 응제시라 하는데 이 때 이재덕이 좋은 점수를 얻어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상중이라 응시하지 못했다.# 1871년(고종 8년) 1월 성균관에서 전주 이씨 출신 유생들의 응제시 때도 좋은 결과를 내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別試文科)[7]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그 해 5월 30일 홍문관 교리에 제수 되고, 이후 부사과(副司果)[8]를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9]을 역임하였다. 1873년 홍문관 부수찬[10]을 거쳐 지평[11]이 되었고, 1876년 홍문관 응교[12]를 지내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2.1. 사망과 이후[편집]


26세이던 1877년(고종 14년) 6월 5일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13]에 안장되었다.

1899년(광무 3년) 법적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손은 황족으로 대하는 예법에 따라 같은 해 9월 '덕안정(德安正)'에 추증되었고 1903년(광무 7년) 11월에 덕안군(德安君)으로 승격되었다.[14]

1910년(융희 4년) 8월 21일 순정효황후가 덕안군의 부인 서씨에게 훈 2등 서봉장을 서훈하였다. 이후 덕안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록은 없다.


2.2. 후손[편집]


부인 달성 서씨(1850 ~ 1919) 사이에서 아들 이언용[A]을 두었다. 이언용은 덕안군 사후 은언군의 종손(宗孫)으로서 제 역할을 다 했고 휘경원[15]참봉도 지냈으나 1893년(고종 30년) 후사 없이 사망했다.[16] 이처럼 대가 끊긴 경우에는 이언용의 아들 대에서 양자를 골라 입적시키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는지 특이하게 이언용을 대체할 덕안군의 새로운 아들로 덕흥대원군 12대손이자 부사과 이재경의 아들 이완용을 입적시켰다.[17][18]

이완용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처 사이에서 아들 이해만[A]을, 역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해구를 얻었다. 이해만은 자식이 없어 철종의 생가 누동궁 사손 이해승의 아들 이택주를 입양했다. 이택주는 6.25 전쟁 때 사망했으며 슬하에 이우석, 이우용 두 아들을 두었다. 현재는 이우석의 장남 이성기가 은언군가의 종손으로 있다.# 그 밖의 다른 가문의 일원들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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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2] 사족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3] 중종의 아들이자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11대손.[4]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5] 덕흥대원군중종의 아들이다.[6] 원래 익평군 이희는 친아들 경은군 이재성이 있었으나 서자인데다 너무 어려서 새로 입양한 것이다.[7]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8] 조선시대 오위의 종 6품 관직.[9] 조선시대 병조에 둔 정 5품 관직으로 정원은 4명이다. 정랑은 육조의 실무를 관장하여 중요한 자리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이조 · 병조의 정랑은 좌랑(佐郞)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여 전랑(銓郞)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삼사(三司) 관직의 임명 동의권인 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 권한이 막강했으며 이에 대한 폐단이 일어났으니 그 유명한 붕당이다.[10] 조선시대 홍문관의 종 6품 관직.[11] 조선 시대 사헌부의 정 5품 관직.[12] 조선시대 홍문관 · 예문관의 정4품 관직.[13] 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14] 작호는 양어머니의 본관인 경기도 개풍군 덕수리의 덕수(德水)에서 따왔다.[A] A B 1900년(광무 4년)에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에서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15]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의 무덤.[16]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덕안군의 생몰년도를 고려하면 사망 당시 20대로 추정된다.[17] 흔히 아는 매국노 이완용이 아닌 동명이인인데, '용' 자 한자가 다르다. 전자의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는데 비해, 후자는 李完鎔으로 쓴다. 하지만 이 사람도 친일파다.[18] 덕안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는 선조의 형 하원군의 손자 대에서 갈라졌다. 촌수로는 21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