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잉차오

덤프버전 : r20190312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이 문서는 나무위키:프로젝트/중국 근현대사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파일:01300000089105121103066806320.jpg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성명
덩잉차오(鄧穎超)
한국식 독음
등영초
영문
Deng Yingchao
출생
1904년 2월 4일 청나라 광시성 난닝
사망
1992년 7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톈진 여자사범대학교 졸업
직업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저우언라이의 아내가 되다
2.3. 공산당의 일원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2.5. 사망
3. 논란
3.1. 마오쩌둥 주치의의 폭로
3.2. 덩잉차오의 일기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중국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1925년 6살 연상의 저우언라이와 결혼한 뒤 평생 함께 했으며 중국 여성 인권신장을 위해 평생 투쟁했다. 또한 양상쿤, 펑전, 보이보 등 중공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덩잉차오는 1904년 2월 4일 광시성 난닝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등정충(鄧廷忠)은 1861년 생으로, 허난성 광산현 성관진(城關津)에 거주하며 무한림(武翰林)을 직접 관리했으며 1901년 녹영군(綠營軍)의 고급 무관이 되었다. 덩잉차오의 어머니 양진덕(楊振德)은 관리 가문의 여식으로, 어릴 때부터 한의학을 배웠다. 그후 등정충에게 시집온 지 3년만에 딸 덩잉차오를 낳았다. 그런데 등정충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딸을 내다버리려 했다. 이에 양진덕이 죽을 힘을 다해 맞서 겨우 딸을 구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했을 때, 등정충이 사망했다. 양진덕은 덩잉차오를 혼자 양육하며 광저우, 상하이 등을 거쳐 톈진에 정착했다. 덩잉차오는 홀어머니 밑에서 한약을 제조하는 법을 배웠고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베이징 평민학교, 톈진 제1여자사범대학교를 잇달아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베이징 사대 부속소학교, 톈진 여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하자, 그녀는 류칭양(刘清扬), 궈룽전(郭隆真), 장약명(张若名) 등과 함께 톈진 여성 지식인들이 모인 <애국 동지회>를 조직하고 톈진 각계의 연합체를 구성했다. 또한 그녀는 이 시기에 저우언라이를 만나 진보 청년단체 자각사를 조직해 톈진 학생들을 이끄는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1923년, 덩잉차오는 '여성사'를 조직해 여성 인권신장을 위한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1924년에는 중국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23년 여름, 덩잉차오는 난카이대학 여름학과를 수강했으며 이듬해 3월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해 천진지부 여성부장을 맡았다.

2.2. 저우언라이의 아내가 되다[편집]


파일:F201103180848291162132931.jpg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는 5.4운동에서 처음 서로를 대면했다. 그때 두 사람은 각각 여학교(톈진 제1여자사범학교)와 남학교(텐진 난카이 중학교)를 다녀서 서로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으나 민족운동을 함께 하면서 점차 서로에게 호감을 품었다. 또한 두 사람은 대학 연극 행사에 참가해 연극을 함께 하기도 했다.

저우언라이가 프랑스로 유학간 후, 두 사람은 편지와 엽서를 주고받았다. 1923년 어느 날, 저우언라이는 카를 리브크네시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초상이 그려진 엽서를 보내며 "우리 둘이 앞으로도 이 두 사람처럼 단두대에 함께 올라가길...."이라는 메모를 덧붙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저우언라이가 중국에 귀국한 직후인 1925년 8월 8일에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결혼했다.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는 서로를 "한 지붕 아래 있는 반려자"라는 개념을 넘어 "한 참호 안의 전우"라고 인정했다. 덩잉차오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일년 후에 다시 임신했으나 국민당이 광저우에서 공산당원들을 수색하자 어쩔 수 없이 광저우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다가 난산 끝에 겨우 아기를 낳았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요절했다. 후에 의사는 난산으로 인해 신체 손상이 매우 커서 다시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저우언라이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에 그녀는 '홍색 공주' 손유세(孫維世)와 리펑(李鹏) 등 공산 혁명 운동 중 사망한 공산당원들이 남긴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달랬다.

2.3. 공산당의 일원[편집]


1925년, 덩잉차오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광둥성 당위원회 위원 겸 여성부장을 맡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도록 장려했고, 덩잉차오는 이에 따라 국민당원이 되었다. 1926년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 당원 8명이 국민당 중앙위원회에 들어갔는데, 그중에는 덩잉차오와 마오쩌둥이 있었다. 당시 덩잉차오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이었고 중국 국민당 여성부에서 랴오중카이의 아내 허샹링(何香凝)의 비서로 부임했다.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해 많은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자, 덩잉차오는 상하이로 가서 저우언라이와 만났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중국 공산당 직속 지부 서기 등을 역임했으며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에서 공산주의를 홍보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8년, 덩잉차오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했다.

1931년 말, 저우언라이는 루이진에 들어간 후 바로 중국 공산당 중앙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덩잉차오 역시 반년 만에 루이진으로 들어가서 묵묵히 저우언라이를 보좌했다. 또한 그녀는 중국 공산당 중앙국 비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 비서, 중앙 소비에트 공화국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4년 10월, 그녀는 병든 몸을 이끌고 대장정에 참가해 목적지까지 함께 했다.

옌안에 도착한 후, 덩잉차오는 중앙 백구 사업부 비서, 중앙 소비에트 정부 서북사무소 내무부 비서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37년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우한, 충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저우언라이를 따라 통전 업무를 맡았다. 중국공산당 중앙남방국 위원, 부위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38년 1월, 덩잉차오는 <국제 반침략운동 대회 중국지회> 상무이사에 당선되었고 그해 3월엔 선쥔루(沈鈞儒), 궈모뤄(郭沫若), 오토 브라운 등과 함께 전쟁고아 보육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맡았다. 그리고 5월엔 <여성을 동원하여 항전에 참가하는 건국사업 대강>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6월엔 저우언라이, 둥비우 등과 함께 <국민참정회> 중국 공산당 정치 참여원을 맡았다.

1943년 7월 엔안으로 돌아온 덩잉차오는 정풍운동에 참여해 중앙당 교1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했다. 그리고 1945년 제7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차이창(蔡暢), 진소민(陳少敏)과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합류했으며, 중국 공산당 중앙부주임 부서기를 맡았고 해방구 준비위원회 주임을 겸임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덩잉차오는 충칭에서 열린 정치협상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여성대표로서 참석했다. 그리고 1946년 국제민주부연합회 이사에 선출되었고 1947년 3월부터 중국 공산당 중앙 후방공작위원회 위원, 중국 공산당 중앙부위서기 대리 등의 직책을 겸임했다. 1949년 6월엔 전국 정치협상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공동강령' 초안 작업반의 일원이 되었다. 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부탁을 받고 직접 상해에 가서 '인민을 사랑한 여인' 쑹칭링이 베이징에 열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행사에 참가하게 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덩잉차오는 전국 부녀자 연합회의 1~3기 부주석, 제4기 명예주석, 중국 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 부주석 등의 직책에 연이어 선출되었다. 그녀는 이 시기에 중국 여성 및 아동의 인권 신장과 전족의 폐지를 위해 사회운동을 여러 차례 주도했다. 그후 그녀는 중국 공산당 8대회의 이후 중앙위원으로 남아있었지만 정부 직책을 맡지 않다가 1976년 남편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뒤 그해 12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전국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덩잉차오는 1978년 3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연임한 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준 전회에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2서기직에 임명되었따. 이후 덩잉차오는 과거에 우한, 충칭에서 국민당과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당 인사들과 맺었던 인맥을 이용해 대 대만 업무를 총괄했고 새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 대 대만 영도소조 회장을 겸임했다.

1983년 6월, 덩잉차오는 80세에 제 6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다. 또한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명예회장, 중국인구복지재단 명예회장 등을 겸임하기도 했다. 1985년 9월, 덩잉차오는 고령을 이유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직을 자진 사퇴했고 1988년 4월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임기가 만료된 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2.5. 사망[편집]


은퇴 후, 덩잉차오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특히 1990년 감기와 폐렴으로 5차례 입원했고 1991년 8월에는 신부전으로 수차례 의식을 잃었다. 결국 1992년 7월 11일 오전 6시 55분, 덩잉차오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88세. 그후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저우언라이의 유골을 뿌렸던 같은 장소에서 뿌려졌다. 그녀는 생전에 자신이 죽거든 장기를 기증하고 남은 시체를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그녀의 죽음을 알리며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인, 저명한 사회활동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 중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3. 논란[편집]



3.1. 마오쩌둥 주치의의 폭로[편집]


마오쩌둥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李志綏)는 회고록에서 덩잉차오를 "지극히 이기적이며 미꾸라지 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한번은 그가 장칭이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의사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걸 막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덩잉차오는 오히려 장칭을 옹호하고 의사를 한바탕 꾸짖었다고 한다. 다음은 리즈수이의 회고록 <마오쩌둥의 주치의 회고록>에 실린 내용 일부다.

장칭이 소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 후, 신경쇠약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중병으로 자궁경부원위암이 재발하고 인부 림프결염에 걸렸으며 위가 안 좋고 소화력이 떨어졌으며 머리에 철모가 박힌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녀는 스스로 림프 체질이 약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마치 벌레가 귀를 들쑤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바람을 겁내고 빛을 두려워했으며 소리를 무서워했고 공포증도 있었다. 그녀는 불면증이 오래되어서 수면제를 이리저리 바꾼 후 다시 약물 알레르기라고 말했다. 그녀는 수면제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장칭은 소련에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암이 완치된 상태였다. 당시 나는 그녀와 마오쩌둥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검사할 수밖에 없었다.

장칭이 코발트 60 방사치료를 받은 후, 혈액검사에서 전혈세포가 매우 낮았으며, 특히 백혈구와 혈소판이 정상수치보다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장칭이 방사선 치료 후 회복기에 있으니 크게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칭은 거의 히스테리 상태였다. 내가 13릉 저수지에서 노동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내가 책임지고 구체적으로 조직을 안배해 각 과의 전문가들을 찾아 회진했다. 이때는 이미 여름이 되었는데, 장칭이 북대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체의 혈맥을 검사했다.

장칭은 내게 각 과를 나눠 배치해 검사하라고 했다. 그녀는 또 신경이 긴장되지 않도록 이틀동안 계속 검사한 후 3,4일 간격으로 쉬면서 다시 검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전면적인 건강검진을 마치는 데 2주일이 걸렸다. 장칭은 검사하는 의사들을 매우 존중하지 않았고 검사 시간을 임의로 변경하는 등 의사들을 마치 하인처럼 간주했다.

검사가 끝난 후, 의사들이 모여서 검사 결과를 토론했다. 모두가 매우 난처해했다. 이미 완치된 자궁경부암을 제거하려면 정기 검사가 필요하지만 방사선 치료후 혈구 저하를 적절하게 치료해야 했다. 기타 중요한 질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후 여러 해 동안, 그녀가 체포될 때까지 20여 년간, 그녀의 건강 상태는 줄곧 매우 좋았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장칭의 생활 조건은 매우 우월해서, 매일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접촉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그야말로 무리를 떠나 살다시피 하니, 필연코 성격상의 괴벽이 형성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증상은 많고 심하지만, 몸은 기본적으로 건강하고 무병 상태이다. 그녀가 말하는 몇몇 증상은 사실 신경쇠약의 표현이다. 우리는 모두 내과의사여서 그녀의 심리적 병폐를 치료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의견서를 써서 마오쩌둥과 장칭에게 각각 건네주었다. 의견서에서 강청 동지는 각 과별로 세밀한 검사를 거친 후 현재 방사선 치료 후 회복기에 있다.일반적인 체제 증강, 질병에 대한 저항력 제고를 위한 약물치료 외에 가능한 한 일정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당분간은 일을 맡을 수 없지만 레크리에이션과 스포츠단련에 많이 참가해야 한다"우리의 표현은 매우 완곡하지만, 사실 강청의 병인 중의 하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장칭은 의견서를 본 후 불만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이 방사선 치료의 회복기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병에 걸려있는데, 의사들이 이를 무시하거나 진상을 숨기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녀는 한바탕 질책했고, 의사들은 다시 토론해 실제 상황을 진지하게 보고해야 했다.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한데 모여서 또 반복해서 논하였다.모두가 무슨 병이 있는지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로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는지 궁리했다. 마지막으로 장칭에게 제시한 방사선 치료의 회복기는 회복 과정 중 기존의 신경쇠약과 식물신경기능의 불균형이 나타나는 증상들이 자신이 느끼는 여러 가지 불편함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장칭은 이 설명에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고, 의사들이 자신에게 중병을 앓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식으로 다그쳤다. 그러나 의사들은 더 이상 양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장칭은 눈을 부릅뜨고 의사들에게 "내가 아프지 않다는 보장이 있느냐?"라고 따졌다. 장칭은 뒤이어 이어 "문화오락 활동과 체육단련, 우주정거장에 참가한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세부항목을 제시하고 매주 스케줄을 빼야 한다"고 말했다.

(중략)

북대하에 있을 때 장칭의 신경쇠약이 갈수록 심해졌다. 간호사는 날마다 울상을 지었다. 장칭은 빛을 두려워하여 창문에 커튼을 드리워야 했는데, 그녀가 창문을 자주 열고 공기를 통하게 하라고 요구했으므로 창문을 반드시 열어야 했다. 그러나 창문을 연 간호사는 욕을 먹었다. 장칭은 커튼을 걷어올리거나 창문을 열고 닫는 약간의 소리도 참지 않았고 간호사가 방안을 걸을 때 옷에서 나는 보슬보슬한 소리에도 지극히 민감했다. 간호사는 나에게 울고불며 하소연했지만, 정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기간에 5~6차례 간호사를 바꿔야 했다. 장칭은 "중국은 6억 명이고, 사람은 매우 많다.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다."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저우언라이에게 장칭을 좀 달래줄 것을 청하기로 했다.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비서가 그는 매우 바쁘다고 말했고, 우리는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덩잉차오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매우 존경했다. 나는 우리가 장칭을 모시지 못하는 상황을 덩잉차오에게 잘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덩잉차오에게 장칭의 문제를 설명했다. 그리고는 정말 방법이 없다고 했다. 또 의료 간호 방법만으로는 장칭의 병을 해결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제해야 하며, 그녀의 증상을 알아보는 것은 진짜 병이 아니라 직장을 이탈하고 사회생활을 이탈하는 결과라고 충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덩잉차오는 내 말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주석은 혁명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일가족은 8명이나 있었으나 모두 혁명을 위해 희생하셨으니, 주석은 정말 혁명을 위해 비할 바 없이 공헌하셨다. 주석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공허할 수 없다. 주석에겐 지금 부인이 한 명밖에 없다. 우리가 잘 돌봐야만 의장에게 떳떳할 수 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잘 돌봐야 한다."

"주석의 첫 부인인 양카이후이가 혁명을 위해 희생했다. 두번째 부인인 허쯔전에겐 정신병이 생겼다. 지금 너희들이 또 말하길, 장칭 동지도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한다. 너는 이렇게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주석에게 너무 불공평하다. 당이 너희에게 준 책임은 바로 장칭 동지를 잘 돌보고, 치료도 잘하고, 관리도 잘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런 문제들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

당시 나는 말문이 막혀, 다만 승낙만 하고 먼지를 안은 채 돌아갔다. 나는 덩잉차오의 술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저우언라이와 그녀 두 사람이 마오쩌둥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충심으로 진심을 다할 것임을 나타냈다. 나는 그제야 저우언라이가 사실 마오쩌둥의 노예라는 것을 깨달았다. 덩잉차오는 오랜 간부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미꾸라지 같은 인물이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사전에 저우언라이와 상의한 후에 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의롭고 늠름한" 태도를 보이며 우리에게 한바탕 훈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에게 '무책임하고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앞으로 그녀의 말은 주위 사람들을 통해 마오쩌둥에게 들어가, 그가 저우언라이와 그녀를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를 위해 우리를 팔아먹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는 '피고'가 되었다.

나는 돌아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덩씨 누님'을 매우 존경했는데, 지금은 그녀가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직위가 높은 인물의 총애를 받아려고 애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3.2. 덩잉차오의 일기[편집]


덩잉차오는 남편 저우언라이와 함께 공산 혁명 운동을 전개하면서 틈틈이 일기를 썼다. 특히 남편이 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된 시기부터는 매일 일기를 적었다. 그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자, 덩잉차오는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자신의 일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문의했다. 이에 상임위원회 대표 예젠잉은 "현재 일이 너무 많고 복잡하니 일단 잘 보관하고 있으라."며 공개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1981년 7월 2일, 덩잉차오는 또 다시 자신의 일기를 공개하는 문제를 중앙정치국에 거론했다. 당시 공산당 주석이었던 후야오방은 "상임위원들이 동지의 일기를 모두 읽어봤는데, 공산당의 처지와 마오쩌둥 동지의 명예를 위해 공개를 유보하기로 결정했다."며 역시 공개를 미룰 것을 당부했다.

1992년 7월 덩잉차오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일기는 공산당 산하 기관으로 옮겨졌다. 2004년 3월, 중국 공산당은 저우언라이 서거 30주년을 기념해 덩잉차오의 일기를 제한된 범위 내에서 공산당 역사에 반영하되 정치적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후 2006년 1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와 중앙이론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은 '저우언라이 사상 연구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때 덩잉차오 일기가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비록 내용이 완전히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내용은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덩잉차오 일기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특히 마오쩌둥이 병상에 누워있던 저우언라이에 대한 문병을 거부했다는 내용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저우언라이는 1975년 1월 24일 병세가 악화되 베이징 의과대학병원에 입원했고 이듬해인 1976년 1월 8일 사망했다. 그가 병원에 있는 1년 동안 의료진은 1975년 5월 7일과 7월 11일, 9월 25일, 11월 12일, 그리고 사망 직전인 1976년 1월 1일 등 5차례에 걸쳐 당중앙에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통지를 보냈다. 다음은 덩잉차오 일기에 실려 있는 저우언라이 문병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의 반응이다.

5월 3일 : 마오가 주재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예젠잉과 천시롄(陳錫聯)은 "주석이 한번 문병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으나 마오쩌둥은 일언지하에 "나는 의사가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9월28일 : 저우언라이가 위독하다는 3차 통지 직후 예졘잉과 리더셩(李德生), 주더(朱德), 리셴녠(李先念) 등 7명의 정치국원이 공동 명의로 "주석이 50년 전우을 문병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조카인 마오위엔신(毛遠新)를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강요하는 것을 원치않는다"며 저우언라이에 대한 문병을 거절했다.

1976년 1월 12일 :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나흘 뒤 정치국은 "주석이 직접 추도식에 참석할 것인지, 덩샤오핑에게 추도사를 시킬 것인지" 마오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구두 지시를 통해 "강요하지 말라. 덩이 추도사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답변했다. 당시 마오가 평생동지인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알려졌지만 마오의 의료 담당자들은 "추도식 참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덩잉차오 일기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지도자로 올린 것에 후회하는 뉘양스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1975년 11월 17일 : "1944년 5월 21일 6기7중전회 1차 회의에서 주더, 류사오치, 런비스(任弼時) 저우언라이 4명으로 주석단 회의를 구성해 최다 득표자를 주석으로 올리기로 했었다. 결과는 류샤오치가 1위, 주더가 2위였고 마오는 4위에 그쳤다. 그러나 나는 내부회의에서 주석은 그래도 마오가 맡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주더는 반발했다. 나는 다시한번 내 의지와는 다른 정치적 과오를 범했다."

1975년 11월 19일 : "1962년 1월 중공중앙이 소집한 확대공작회의(일명 7천인 대회)가 열렸다. 당시 사람으로 인한 잘못이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이 실사구시와 군중노선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서 많은 동지들은 주석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2월 10일 정치국상임위에서 마오 주석은 "회의의 결정에 따라 주석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주더, 천윈(陳雲), 덩샤오핑은 주석직 사퇴에 찬성한다고 했다. 나는 주석은 2선으로 물러나더라도 주석은 주석이다 라고 밝혔다."

1975년 11월 22일 : "1956년 9월 29일 중공 8기 전원회의 후 1차 정치국회의는 두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다. 당의 주석은 한 차례만 연임한다. 지도자의 권력을 제한하고 당내 민주집중제를 실현한다. 당시 17명의 정치국 위원 가운데 15명이 찬성하고 2명이 기권했다. 기권한 사람은 마오와 린뱌오였다. 이 결의는 폐지됐다. 이것도 우리들의 잘못이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1975년 12월 3일 : " 한차례의 정치 폭풍우가 오고 있다. 아직도 투쟁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투쟁해야 그만 둘 것인가? 공산당 철학은 투쟁철학이라는 말인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도 투쟁을 통해야만 건설되는가?"

1975년 12월 28일 :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아직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일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덩잉차오가 사망한 뒤 그녀가 작성했다는 일기가 중앙정치국 산하의 기요국에 줄곧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런 충격적인 내용이 드러나는 걸 미처 막지 못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일기와 <마오쩌둥 연보>와의 모순이 존재한 점도 지적한다. 에를 들어 1975년 5월 3일 덩잉차오 일기엔 예젠잉과 천시롄이 마오쩌둥에게 저우언라이 문병을 건의했으나 마오쩌둥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 연보>엔 5월 3일에 저우언라이가 병을 무릅쓰고 회의에 출석했고 마오쩌둥은 회의 전에 저우언라이에게 "몸은 좀 어떤가?"라고 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덩잉차오 일기에 따르면 1975년 9월 28일 예젠잉, 리더, 진석련 등이 마오쩌둥에게 저우언라이를 문병해야 한다고 연명으로 건의했을 때 마오쩌둥은 조카 마오위안신을 보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일보> 1975년 9월 28일 자 기사엔 마오위안신이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 설립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신강에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마오위안신이 베이징에서 예젠잉 등에게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리 없다.

실제로 유명인사들의 '일기'를 조작하는 사례는 종종 벌어진다. 1985년 5월 워싱턴 지는 중국 대륙에서 거액을 들여 구입한 '장칭 일기'의 필적을 검증한 결과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일기를 조작한 한 화학공장의 보조기사 곽강은 "히틀러 일기가 조작되었다."는 해외뉴스를 보고 장칭 일기를 조작해 해외에 비싸게 팔기로 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2006년 8월엔 린뱌오 일기가 시중에 풀렸으나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고 2011년 초 양상쿤 일기, 후야오방 임종 참회글이 인터넷에 올라왔지만 모두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덩잉차오가 자신의 일기를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두어번 찾아가 일기를 검토하게 한 것을 주목하며 그녀가 이 일기를 통해 저우언라이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중국 국민들의 고난을 가슴아파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덩잉차오가 마오쩌둥 사망 후 일기를 공개함으로서 남편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 역시 강화시키기를 희망했다고 본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정말로 중국 국민들을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지는 의문이다. 가령 1959년, 중국 각지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런데 1983년 중국통계연감에 따르면, 당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이 상황을 잘 알면서도 419만 톤에 달하는 쌀을 수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의 연간 쌀 수출은 1957년에 192만 톤이었고 1958년에는 266만 톤이었는데, 이는 정상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나 1959년엔 대흉년으로 양곡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어 수출을 전혀 하지 않아도 부족할 지경이었는데도 오히려 작년보다 훨씬 많은 양곡을 수출하게 한 것이다.

또한 1960년, 저우언라이는 외국에서 대량의 밀을 수입해 굶주리는 인민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건의를 거부했다. 그는 "외화 사용에 있어서 1달러를 쓰더라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1970년까지 매년 몇십만 톤의 금괴를 매입했다. 그동안 수천만 명이 굶어죽어갔는데도, 일국의 총리는 금괴를 축적함으로서 국부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1960년 중국 공산당의 재정 적자가 80억 위안에 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함이었다지만, 인민들에겐 실로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저우언라이의 행각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의 의중에 의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속으로 그리해선 안된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마오쩌둥의 의중에 따라 대흉년으로 국민들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고 외화로 금괴를 사들였다. 그리고 아내 덩잉차오는 남편과 입을 맞춰가며 마오쩌둥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죽어가면서도 인민들을 생각하는 저우언라이'의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자신이 쓴 일기를 중앙정치국에 제출해 위원들에게 널리 읽게 했다. 그녀의 일기가 진품인지 위조된 것인지는 판별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일기를 순수한 의도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4.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