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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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파일:자크데리다.jpg
본명
재키 엘리 데리다[1]
Jackie Élie Derrida
출생
1930년 7월 15일
프랑스령 알제리 엘 비아르
사망
2004년 10월 9일 (향년 74세)
프랑스 파리 퀴리병원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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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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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벤 아크눈 중등학교
마이모니드(메일 모파) 중등학교
고티에 고등학교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파리 고등사범학교
하버드 대학교(펠로우쉽[1])
파리 대학교
경력
파리 대학교 교육조교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파리 고등사범학교 조교수[2]
예일대 객원교수
국제철학학교 창립자 겸 책임자
사회과학고등연구원[3] 교수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객원교수
케임브리지 대학 명예교수[4]
직업
철학자, 미학자, 작가
사상
해체주의
배우자
마거리트 오쿠튀리에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철학을 위하여
2.3. 명성과 비난
2.4. 말년
3. 사상
3.1. 해체
3.2. 타자에 대한 유령론
4.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
5. 관련 영상
6.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2] 미국의 예일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당시 지배적인 철학이었던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그 구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해체주의를 창시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사회와 문화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사회ㆍ문화적 구조에 얽메이지 않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해체주의는 철학, 문학, 법학, 인류학, 역사학, 응용언어학, 사회언어학, 정신분석학, 정치이론 등의 인문학사회과학 그리고 건축, 음악, 예술, 예술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철학에 한정해서도 대륙철학에서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미학, 해석학, 언어철학에 영향을 미쳤고, 분석철학에서는 문학비평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큰 영향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했던 철학자였지만, 악명 높은 난잡한 글쓰기[3]로 인해 영미 철학계로부터 단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된 철학자"[4]였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데리다는 1930년 7월 15일 새벽, 알제의 언덕 위에 있는 엘비아르의 휴양지에서, 포도주 양조회사에 다니던 아버지 '에메 데리다'[5]와 어머니 '조르제트 사파르'[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들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재키 데리다(Jackie Derrida)'로 지었는데, 재키라는 이름은 당시 유명했던 영화 「더 키드」의 주인공 '재키 쿠건'에서 따온 것이었다. 데리다는 이후 할례식 때 '엘리'라는 제2의 이름을 얻었다.

데리다의 집안은 종교개혁기에 스페인에서 건너와 프랑스령 알제리에 정착한 유대계 집안으로서, 당시 알제리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 정책에 부역하여 토착 무슬림들을 핍박했었다. 그래서 토착민들은 유대인들을 극히 싫어했는데, 어린 데리다도 학교에 가기만 하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인종차별적 욕설들을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나치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프랑스에 나치 괴뢰정권이 들어서자, 알제리에도 덩달아 유대인 차별정책이 시행되어, 초중등교육에서는 유대인 학생의 정원비율을 14%로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으로 인해 12살의 데리다도 벤 아크눈중등학교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린 데리다는 큰 충격을 받는다.

데리다는 한동안 공부를 뒤로 하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스포츠에만 열중했다. 특히 축구를 좋아했는데, 데리다에게 학교에 가는 것, 그것은 책가방 속에다 축구화를 넣고 학교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데리다의 말에 따르면, '공책보다 더 정성스럽게 간수했던 그 밀랍 먹인 축구화'를 정말로 경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1947년 6월 바칼로레아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그때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고 여름 내내 열심히 공부한 끝에 9월 시험에는 합격할 수 있었다.

성적이 좋아지자 데리다는 프랑스 본토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가서 철학을 더 깊이 공부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데리다는 파리에 있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고, 2번의 낙제 끝에 한 해에 불과 30여 명을 뽑는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다. 그는 여기서 알튀세르 교수와 푸코 조교 등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동기생 미셸 오쿠튀리에의 누나 '마르그리트'를 스키장에서 처음 만난 것도 이때였다. 처음에는 마르그리트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점점 서로가 서로에게 끌려들어가 둘은 사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데리다는 교수자격시험을 힘들게 합격하고 나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하버드 대학을 다녔고, 데리다는 바로 이곳 미국에서 마르그리트와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2.2. 철학을 위하여[편집]


미국에서 돌아온 데리다는 전쟁 중인 알제리에서 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는 방식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르망 고등학교에서 1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다가, 1960년 소르본 대학의 교육조교[7]를 맡으면서 그의 첫 저서인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의 프랑스어번역본을 출간했다. 데리다는 여기에서부터 자신의 본명인 '자키'(Jackie) 대신 '자크'(Jacques)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흥미로운 책이었다. 후설의 글에 대한 번역은 겨우 43쪽인 데 반해, 데리다가 작성한 서문 부분은 170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서 그는 후설의 전체 기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가면 나중에 그의 중심 주제로 등장할 '차연'(différance)과 비슷한 개념들이 나온다.

데리다는 이 책을 통해 탁월한 후설 전문가로서 이름을 알린다. 이 조그마한 명성을 바탕으로 데리다는 잠시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있다가, 1964년 고등사범학교에서 알튀세르의 교수자격시험 업무를 도와줄 조교수가 되었다. 이시기 데리다는 도처에서 논문과 학회 발표 요청이 쇄도해서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써댔다. 데리다는 특히 『텔켈』지와 『크리티크』지에 자신의 논문들을 실었다. 이런 활동들의 결실로써 1967년에는 앞으로 그를 대표할 세 개의 주요 저서가 탄생한다.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목소리와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글쓰기와 차이』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는 박사학위논문으로 저술한 글이나, 국가박사학위 논문심사에서 좋지 못한 반응을 얻었다. 실망한 데리다는 앞으로 13년 동안은 박사 학위에 대한 생각을 접는다. 반면 『목소리와 현상』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앞선 두 책에서 제기한 질문들을 발전시켜 서구 역사에서 '현전'과 '목소리'에 부여된 특권을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데리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통해서였다.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존스홉킨스 대학의 폴 드 만은 이 작품을 극찬했고 그는 데리다를 수십번 미국 세미나에 초대함으로써 데리다가 미국에서 유명해지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72년에는 두 번째 세 개의 주요 저서, 『산종』 『입장들』 『철학의 여백』을 발표했고, 1975년에는 폴 드 만의 도움을 받아 예일대학 객원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예일학파'가 발전하기 시작해서, 데리다는 미국에서 아주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이 지점에서 데리다의 미국 수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가야트리 스피박이었다. 그녀는 폴 드 만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계기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접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힘든 그 책의 번역에 수년을 할애해서 마침내 그 책을 1976년 존스홉킨스대학 출판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비록 번역에 많은 비판을 받아 여러 번 개정을 하게 되지만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는 약 10만 부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이루었다. 그 후로 '해체'는 미국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2.3. 명성과 비난[편집]


1975년, 프랑스의 우파정부가 고3학생들의 철학수업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바꾸려는 정책을 펼치자, 이에 맞써 데리다는 '철학교육연구단체'를 설립하고 거기서 중심적인 역할을 도맡았다. 데리다는 행정적이고 실무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를 신문에 수 번 기고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철학 삼부회[8]의 소집을 호소해서, 순식간에 2500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전국에서 1200여 명이 회의에 참석했고 데리다는 그 회의를 주도하면서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정책은 마침내 되돌려졌고, 고3의 철학교육은 이후 오랫동안 그대로 지켜진다. 이를 계기로 데리다는 프랑스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데리다는 1980년에 그 동안 미뤄왔던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급하게 받았다. 낭테르 대학의 폴 리쾨르가 은퇴를 해서, 그 남는 교수자리를 추천받았기 때문이었다. 데리다는 원래 그 자리에 욕심이 없었지만, 추천을 해준 이들이 선발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부추겼다. 그래서 신청한 면접이었지만 낭테르 대학에는 데리다의 명성을 질투한 여러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학부 고등심의회의 면접에 온 데리다를 굴욕적으로 떨어뜨렸는데, 같은 날 면접을 본 '르쿠르'에 따르면 '몇몇 심사위원들이 데리다의 책들에서 발췌한 부분들을 최대한 빈정대며 아주 크게 읽으면서 놀려 댔다'고 한다. 데리다는 철학교육연구단체와 삼부회의 활동 때문에 교육부의 미움을 받고 있었고, 이번 면접은 그들의 복수였던 셈이었다. 데리다는 그들의 복수에 참담해 했다.

1981년에는 데리다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이슈가 벌어졌다. 당시 출판의 자유가 없던 체코슬로바키아 대학들의 서적 공급 등을 돕기 위해 설립된 '얀후스 재단'의 프랑스 지부 부회장이던 데리다는, 체코 현지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의 세관 검색대에서 '마약 밀매 및 운송'의 혐의로 체포됐다. 데리다는 이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으나 헛일이었다. 이 일은 자신의 업적(?)을 보여 주고 싶은 체코의 한 경찰부서의 장이 계획한 사건으로, 그들은 누명을 씌우긴 했지만 정작 데리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각종 미디어와 장관들, 그리고 엘리제궁에 이르기까지 몇 시간 만에 폭발적으로 빗발친 그 엄청난 항의에 체코 경찰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큰 실수를 깨달았다. 결국 체코의 대통령은 그날 저녁, '프랑스가 그 철학자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데리다를 프랑스에 돌려주는 것 외에 달리 해결책이 없었고, 데리다는 프랑스로 무사히 귀국했다.[9]

체코에서의 사건이 있은 이후로 데리다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는 정권교체에 성공한 좌파정부의 국제철학학교 창립에 관여하여 제1대 책임자가 되었으며, 학교를 반석에 올려놓고 사임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1983년,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교수'에도 선출되었다. 데리다는 점점 유명해져서 처음에 유럽의 주요 언어에 한정되었던 그의 저서의 번역은 이제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예일, 뉴욕, 버클리, 어바인, 코넬, 마이애미, 오하이오, 도쿄, 프랑크푸르트, 토론토, 볼로냐, 우르비노, 로마, 시애틀, 리스본 등지에서 강연과 세미나를 하고 콜로키엄에 참석했다. 특히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그러나 데리다의 명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지기 시작했고, 데리다는 앞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그 시작은 1987년이었다. 파리아스의 책 『하이데거와 나치즘』이 출간되어 프랑스에서는 하이데거의 나치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불거졌다. 이런 상황에서 데리다는 그 해 『정신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문제』를 출간했는데, 데리다는 그 책에서 하이데거의 '정신' 개념 분석에만 천착할 뿐, 윤리적으로는 하이데거를 단죄하지 않는 그런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10] 관련 토론에서도 전후(戰後) '하이데거의 침묵'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했다. 이로 인해 데리다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더 심각한 것은 그 해 말에 있었다. 미국에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널리 알린 폴 드 만의 어두운 과거가 밝혀진 것이다. 폴 드 만은 미국으로 망명오기 전, 벨기에 신문에서 반유대인주의적 글을 수차례 기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데리다의 적들은 '해체주의'를 파시즘과 연결시켰는데, 그럼에도 데리다는 폴 드 만을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고수했다.[11] 사람들은 데리다의 이러한 옹호에서 텍스트의 조작을 보았으며, 마치 해체적 독서의 고도화가 결국에는 이런 것, 즉 반유대인주의적 기사에 대한 변명을 찾는 것, 어떤 글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글로부터 나치즘이라는 누명을 벗겨 주는 것 같은 행동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았다.[12]

이렇듯 데리다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극심해져서, 1992년에는 그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케임브리지대학이 데리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온갖 항의가 쏟아진 것이다. 『타임지』에는 여러 나라 철학자들이 서명한 ㅡ 데리다를 반대하는 공개서한이 실렸다. 그 중에는 미국 분석철학의 주요 인물인 윌러드 콰인도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데리다의 "허무주의적인" 저작들은 "대학의 모든 학과가 기초하고 있는 근거와 논의의 모든 층들을 와해시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몇 주 동안이나 영국 안밖에서 이어지면서 데리다를 심란하게 했다. 2개월 뒤,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들은 데리다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에 대한 찬반투표를 벌였는데, 그런 투표는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찬성 336표에 반대 204표를 받아서, 데리다는 학교 사무총장인 필립 대공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필립 대공은 수여식에서 데리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나도 가정에서 얼마 전부터 해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13]

2.4. 말년[편집]


1990년대 들어서 데리다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절정에 달했다. '해체'라는 개념은 처음엔 프랑스학과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비교문학과로 이어졌지만 곧 건축, 미학, 인류학, 법학도 '해체'를 수용하게 되었다. 해체라는 개념은 학과들 사이에 가교를 놓아 주면서 아주 다양한 분야에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모두가 어떻든 간에 영향을 받았다. 미 국무부의 한 책임자가 '해체'를 언급하고, 믹 재거가 '해체주의자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지는 어바인 대학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된 철학자"인 데리다를 만나 그가 "자신의 아주 어려운 이론"을 옹호하는 인터뷰를 기사로 써냈다.

1993년 데리다는 마르크스에 대한 콜로키엄를 준비하면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저술했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점점 정치와 윤리 쪽의 주제를 많이 다루었는데, 그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나'라는 주체가 '타자'를 위한 순수한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1995~1997년 동안에는 그의 세미나의 주제인 타자에 대한 '환대'가 반복되면서, '환대'는 점차 그의 이름에 가장 자주 결부되는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데리다는 환대의 원리가 "철학에 윤리를 접합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알맞은 긴급성"을 농축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몰두했다. 이시기에 질 들뢰즈, 에마뉘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 등 그의 시대를 살았던 동료들이 죽으면서 타자에 대한 '애도'에도 철학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데리다는 블랑쇼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2003년 어느 날, 알 수 없는 어떤 뒤틀리는 듯한 복통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 췌장암이었다. 의사들은 한시바삐 화학치료를 해야 된다고 말했으나, 데리다는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치료를 한동안 미루기로 결정했다. 의사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화학치료 후에 건강은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데리다의 상태는 곧 더 악화되었고, 연이은 수술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2004년 10월 9일 토요일에 사망했다. 향년 74세.

3. 사상[편집]





3.1. 해체[편집]


데리다는 서로 대립되는 가치들을 '중심부'와 '주변부'의 대립으로 살펴보면서 '중심부'를 순수한 것으로 생각하고 '주변부'를 오염된 것으로 생각하는 기존 철학자들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래서 제시되는 것이 '울타리(clôture)'라는 개념으로, 그것은 대립되는 두 가치의 경계선을 지시하면서도 경계선이기에 지니고 있는 양가적 특성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중심부와 주변부의 가치가 서로 대등해지거나[14] 심지어는 가치가 역전되는 경우를 표현한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중심부의 의미는 주변부의 의미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주변부는 '주변부의 주변부'의 의미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이런 식으로 주변부가 무한히 확장하게 되면 그 결정이 끝없이 미뤄지기 때문에, 거꾸로 중심부의 의미는 '결정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으므로, 중심부는 주변부로부터 결코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데리다의 철학 곳곳에서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차연(différance[15])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차연은 '다르다'와 '지연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단어의 특성'에 관한 용어이다. 모든 단어는 그것이 아닌 다른 단어에 의해, 즉 단어들간의 '차이'에 따라 정의되고, 그러한 정의는 의미의 가능성에 한계를 가지게 한다.(경계선) 그러나 의미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그와 다른 단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데, 그 다른 단어 역시 또 그와 또다른 단어로 이루어진 정의를 필요(양가성)로 하게 되는 등, 이런 식으로 끝이 없기 때문이다.

대리보충(supplément)의 개념도 비슷하게 전개된다. 플라톤에 있어서 연설에서 쓰이는 목소리는, 글을 쓰는데 쓰이는 문자(에크리튀르[16])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자는 목소리가 없을 때 그 내용을 알려주는 '목소리의 대리'에 불과하며 '목소리의 보충'에 불과하다. 하지만 데리다는 여기에 의문을 가진다. 과연 목소리가 문자보다 중요한가? 사실 문자는 목소리가 없는 곳에서 목소리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목소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만 그 힘이 작용하지만, 목소리의 대리보충인 문자는 수많은 자기복제, 즉 문자 자신의 또다른 대리보충들을 통해서, 목소리가 없는 곳에서 목소리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파레르곤(parergon) 역시 마찬가지다. 에르곤(ergon)은 예술작품을 말하며, 파레르곤(parergon)은 작품의 외부인 액자를 말한다. 액자는 작품의 외부에 있지만(경계선) 동시에 그 작품과 더불어 있다. 칸트는 "작품의 예술성을 가리는 천박한 액자가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데리다에 의하면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술에서 비본질인 '액자'가 본질인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액자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며 넓게 보면 그 작품이 전시된 공간마저 작품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관객인 당신도 작품의 일부분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작품의 본질이고 어떤 것이 작품의 본질이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양가성)

철학과 문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데리다의 저작을 살펴보면, 데리다는 그 자신의 글보다 다른 철학자의 '인용문'을 더 길게 제시한다. 그 인용문 뒤에 몇줄을 적어 평가하는 것이 데리다의 저술 특징이다. 모든 기성책은 중심부에 글자가 적혀져 있고, 주변부에 흰 여백 부분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이 '주변부 여백'에, 중심부에 적혀져 있는 기존 철학자의 생각을 비판하는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는다. 중심부의 텍스트를 비웃고 철학자의 생각을 더럽혀서 그 철학을 해체시켜 버린다. 심지어 철학자의 글에 다른 문학자의 글을 덧붙여서 철학자의 생각을 뒤집어 놓는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선에서, 철학을 붕괴시키면서 문학으로 나아가려는 니체적 특징이 엿보인다. 또한 이때까지와 마찬가지 논리로 "모든 책에 '완결'은 없다"고 말하면서, 오로지 그 텍스트에 끊임없이 보충되는 '글쓰기'만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중심부의 의미에 아예 접근할 수 조차 없다는 말은 아니다. 중심부의 의미는 비록 '결정불가능'한 것이지만 확률적으로는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제시하는 것이 산종(散種; disse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산종이란 '씨 뿌리기'라는 말이다. 더 이상 하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중심부에 대하여, '그 주위에' 접근가능한 무수한 의미들을 다양하게 뿌려 보자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해, 이런 의미도 제시해보고 저런 의미도 제시해보기도 하며, 중의적인 단어로 표현해보거나 아예 모순된 문법으로 접근해보기도 한다. 이는 비록 지금은 정확하게 해독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어떤 계기로 인해 판독될 것을 대비하여 새로운 해석의 길을 열어 두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뿌려둔 씨앗(다양한 암시)이 훗날 예상치도 못하게 예쁜 꽃(새로운 해석)으로 피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데리다는, 의미를 최대한 개방(산개)함으로써만 중심부의 의미에 대한 일말의 접근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3.2. 타자에 대한 유령론[편집]


'중심부'와 '주변부'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전기의 울타리 개념은, 후기에 '나(주체)'와 '타인(타자)'의 이항대립를 해체하는 유령의 존재론으로 대체된다. 우선 데리다는 후설을 포함한 기존의 철학이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이항대립에 근거하여 '현전하는 것'을 '부재하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17]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을 해체하기 위해, 현전과 부재의 울타리에 있는 존재로서 '유령'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어머니의 부재'를 통해서 '어머니의 존재'를 더욱 강렬하게 의식한다. 마치 내 옆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신차리고 보면 어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 깨닫는다. 유령은 '현전하기도 하고 부재하기도 한 존재'인 것이다.[18]

'애도'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상실했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본 뜻이라면, 타자의 상실을 극복하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때 애도는 실패한 것이다. 친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으로부터 쉽게 회복한다는 것이 종종 죽은 사람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죽은 사람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애도가 성공하길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도가 실패하길 바라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성공과 실패 중 하나만을 선택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한 짓이다. 그러면 어쩌라는 얘긴가? 데리다는 타인에 대한 애도가 '유령'처럼 출몰한다고 생각한다. 애도는 '6시까지 슬퍼하다가 6시 이후부터는 슬퍼하지 말아야지' 하는 식으로 되지 않으며, 잊혀지더라도 애도는 삶에서 끊임없이 불쑥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현듯 그에 대한 기억이 가끔식 되살아날 때 그를 추억하고 슬퍼함으로써 애도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더 집중하게 만들어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환대'도 비슷한 논리다. 손익계산을 거쳐서 '조건'을 붙인 환대가 과연 진정한 환대라고 볼 수 있을까? 진정한 환대란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일테다. 거기에 어떤 '계산'이 들어가 있으면 짐짓 우리는 그 환대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리하여 환대는 실패하게 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조건'이 없는 환대, 즉 '무조건적인 환대'를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타자를 순수한 타자로 수용하길 욕망하더라도, 타자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항상 우리의 "조건들" 안에서 형성되며 제한된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순수한' 환대란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타자'와 더불어 살기 때문에 타자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조건적인 환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실패를 하겠지만, 그 불가능한 시도들을 통해서 '나'는 스스로를 해당 타자와 다른 종류의 관계 속으로 들어서도록 하며, 그 과정에서 '나'는 폐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며 '개방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개방성'이야말로 나와 또 다른 타자를 연결시켜주는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용서'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쉬우면 쉬울수록, 그만큼 용서의 가치는 작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대가로 치르지 않는 용서는 사실상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용서는 힘들면 힘들수록 그만큼 더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전혀 뉘우치지 않고, 주저 없이 범죄를 반복하는 그런 범죄자를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무섭고도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여 더 과감한 용서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한 순간, 우리는 용서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용서의 폭을 더 넓혀주리라는 어떤 희망에 대해서 얘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선 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기 철학에서는 중심부의 '순수성'에 의심을 품어서 그 가치를 역전시키려고 했던 반면에, 후기 철학에 들어서는 '내'가 '타인'에게 조건없이 행하는 그 '순수성'에 가치를 두어서 '나'와 '타인'의 가치를 역전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애도하고 환대하고 용서하는 등의 타인에 대한 모든 순수한 시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할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그것을 생각해보고 신중하게 그리고 기꺼이 시도할 때야 비로소 '무조건적인' 우정이 어쩌면 가능할수도 있음을 데리다는 지적한다. 그렇다! 타인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어떤 '조건'을 붙인다는 것은 항상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무조건'적인 관계에 대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책임감'을 얻을 수 있고, 그 책임감을 통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최대한의 환대를 해주기를 스스로에게 요청할 수도 있다. 그것은 최대한의 환대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의 '타협'일 것이며, 또한 우리 삶의 한계인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갈런지도 모르며, 그런 가능성이 언제 이루어질런지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유령'처럼 출몰했다가 곧 사라진다. 그러나 유령은 멀지 않은 미래에 언젠가 다시 그리고 반드시 '도래'한다.

4.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편집]


데리다에게 있어서 문제는 유명한 자기 지시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칠게나마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가 진리 개념을 포함한 철학의 모든 고전적 개념이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데리다는 여전히 이것에 관해 자신이 말한 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그는 자기 지시적 모순에 빠진다. (자신이 제시한 개념도 해체시켜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을 하나라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아니면 제 3의 답변이 존재하는가?

군나르 시르베크ㆍ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19]


5. 관련 영상[편집]




6. 여담[편집]


  • 상당한 훈남에 청년기에는 프로 축구 선수를 꿈꿀 만큼 활동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40대 초에는 테니스도 규칙적으로 쳤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사진들을 봐도 꽤 미중년, 미노년(?)이다. 여러모로 전형적인 철학자의 이미지와는 대비되는 인물.

  •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이 어떻게 선택되었는지를 「한 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 편지에서 데리다는 여러 가지 단어를 고민하던 중, "하이데거가 사용했던 단어인 'Destrukion' 또는 'Abbau'를 자신의 주장에 맞게 번역하고 채택하기를 바랬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 두 단어는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의 전통적 '구조'나 '골조'와 관련된 작용을 의미했는데, 하지만 프랑스어로 '파괴'(destruction)는 '몰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배제시키고, 'deconstruction'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20]

  • 그는 마피아가 나오는 『대부』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같은 영화들을 좋아했지만, 그런 영화들이 자신의 저술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미술관도 좋아했지만 스스로 미적 안목은 없다고도 말했다. (들뢰즈는 해체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이용했는데,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 없다"면서 해체의 방법으로 '텍스트'만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비교적 전위적인 영화인 켄 맥뮬런의 「유령의 춤」에 배우로 나와,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상대 여배우는 파스칼 오지에.[21]


  • 데리다는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말했던, ㅡ'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 광기를 배제했다'는ㅡ 주장을 반박한다. 데카르트는 광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기만적인 신'을 가정하면서까지 광기를 고려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푸코는 데리다가 그 문제가 푸코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틀려먹은 것이라고까지 지적하자 열이 받았고, 그래서 푸코는 데리다와 절교를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빡친 푸코는 훗날 데리다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데리다는 목소리의 권위를 텍스트로 해체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은 '텍스트를 다시 무한정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는 선생의 권위적인 목소리'나 다름없다. 데리다의 철학은 무한히 확장되는 텍스트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또 다른 권위주의이자 '선생이 말하는 텍스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편협한 교육학'이라는 것이 푸코의 지적이었다. 푸코는 이후 데리다를 공석에서 만나도 아는 척도 안 했다고 한다. 나중에 데리다가 체코의 감옥에 갇혔을 때 푸코는 데리다의 석방을 외쳤는데, 그제서야 둘은 화해했다.

  • 데리다는 결혼 이후에도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다. 그는 저마다의 관계가 유일하고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명과 변함없는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 밝혀진 것은 데리다의 사생아를 낳기로 결심하고 홀로 그 아이를 키웠던 실비안 아가생스키. 두 가정을 책임질 수 없어서 그 결심을 찬성할 수 없었던 데리다와 헤어졌는데, 아가생스키는 훗날 프랑스 총리가 되는 리오넬 조스팽과 결혼한다.

  •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철학자로 악명이 높다. 고려대 진태원 교수는 한국 데리다 번역의 문제점을 오랫 동안 고발해 오면서 또한 스스로 데리다 번역의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데리다 스스로 자신의 해체 철학을 글쓰기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의적인 표현을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의미의 반복 (불)가능성을 직접 실천하는데, 불어와 문장/문법 구조가 완전히 다른 한국어로 그 미묘한 뜻을 온전히 전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채 번역이 진행되어 한국에 수용된 데리다 저서는 대부분이 오역 문제를 안고 있으며, 한국에서 데리다 수용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걸림돌 중 하나이다. 데리다의 글쓰기는 아주 난해하기로 악명 높고 무의미한 글로 지적 허세를 부렸다는 말까지 듣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적자이자 니체적 사유를 현상학적 사유의 비판으로 계승해내고 있는 철학자라 평가받는다. 다만 들뢰즈, 푸코 등이 철학사적, 계보학적 방식으로 니체를 계승했다면, 데리다는 이분법의 해체와 가치전도를 행하는 니체적 방식을 해석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닮아 있다.

  • 데리다는 생전 마르크스를 포함한 모든 철학자들을 해체주의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는데, 조던 피터슨은 그런 데리다를 두고 급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정체성 정치의 옹호자라고 비난하는 오류를 저지른 바 있다.[22]
[1] 출생증명서에는 "재키 데리다"로 등록되어 있지만, 할례 의식 때 "엘리"라는 두번째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재키 엘리 데리다". 이후 첫번째 저서 《기하학의 기원》을 낼 때 필명으로 "자크 데리다"를 사용하면서 이후 계속해서 "자크 데리다"라는 필명을 고수했다.[2] 질 들뢰즈, 미셸 푸코와 더불어 가장 저명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이다.(푸코는 후기 구조주의에 속하기도 한다.)[3] 언어 구조의 해체로 인해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데다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동음이의어를 통한 유희를 많이 사용해서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데리다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4]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 인터뷰 기사에서 데리다를 소개하면서 언급.[5] 본명은 하임아론 프로스페르 샤를르 데리다. 보통 '에메'로 불렸다.[6] 본명은 조르제트 술타나 에스테르 사파르. 보통 '조르제트 사파르'로 불렸다.[7] 폴 리쾨르의 조교.[8] 원래 삼부회는 프랑스에서 중세시대 3계급(성직자, 귀족, 시민)이 모여 특정정책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던 모임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에서 삼부회는 '정부관료, 교사, 학생'의 세 집단을 의미한다.[9] 브누아 페터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변광배, 김중현 옮김, 그린비, 2019, p.658[10] 데리다는 『정신에 대하여』에서, 하이데거는 나치가 있던 시절에는 '정신'을 강조하는데 나치가 나오기 이전이나 나치 패망 이후에는 '정신'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석해 놓고 있다. 즉, '정신' 개념이 문제이기 때문에, '정신' 개념이 나오지 않는 전기나 후기 하이데거 철학은 나치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데리다는 암시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나치 때만 문제있다고 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 이전과 이후에 이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하이데거에게 철학적 면죄부를 주어서야 되겠는가?"[11] 데리다는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다. "폴 드 만은 저속한 반-유대인주의를 배척했는데, 그럼 고상한 반-유대인주의도 있다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고상한 반-유대인주의가 있다는 것은 저속한 유대인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폴 드 만은 '저속한' 유대인주의를 비판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물론 폴 드 만은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 상황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궤변[12] 브누아 페터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변광배, 김중현 옮김, 그린비, 2019, p.780[13] 브누아 페터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변광배, 김중현 옮김, 그린비, 2019, p.874[14] 똑같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등'하다는 것은 서로의 가치가 다르지만 '그 가치의 중요성'이 대등해진다는 것을 말한다.[15] 프랑스어 ‘différence(차이)’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서 데리다가 만든 단어로, ‘다르다(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지연시키다(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즉, différance는 différence와 발음은 똑같지만 그 의미는 다른데, 이는 '목소리'로는 구별되지 않던 단어가 '문자'로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데리다의 트릭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 '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6] 문자언어를 뜻함. 음성언어와 구분되는 문자언어를 말하며, 글쓰는 행위 그 자체, 언어, 서체, 글쓰기의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 등을 포괄하는 넓은 범위의 개념이다.[17] 이 부분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후설과 다르게 '부재'를 통한 '현전'을 말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이데거만의 독특한 해석이었다.[18] 데리다의 후기 철학은 그런 점에서 '유령학'이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유령학적 논의는 이후 후기식민지 담론 논의와 결합하여 스피박서발턴개념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스피박은 담론의 '주체'인 '제국'과 담론에서의 '타자'인 '식민지' 사이에서,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그 담론에서조차 언급되지도 못하는 유령같은 하층민(서발턴)의 문제를 지적한다.[19] 군나르 시르베크ㆍ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 이학사. 2016. p.1013~1014[20] 브누아 페터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변광배, 김중현 옮김, 그린비, 2019, p.300[21] Pascale Ogier(1958-1984).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만월의 밤>에서의 연기로 그 해 세자르 상 최우수 여배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명성을 얻었으나, 그 직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22] 피터슨은 동시에 푸코도 마르크스주의자라며 비판했는데, 푸코 또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더불어 페미니즘의 사상사에서, 조던 피터슨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정체성 정치와 어퍼머티브 액션, 소수 할당제 등은 자유주의 페미니즘래디컬 페미니즘의 정치적 의제이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의제가 아니며 심지어 주디스 버틀러뤼스 이리가레 같은 일부는 이를 백인여성중심주의라는 이유로 반대하기까지 한다. 이런 미묘한 현대 대륙학 및 페미니즘 학파 내에서의 차이를 무시한 피터슨의 망언은 전공자들에게 비판을 받고는 하는데 대표적으로 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에서 이런 피터슨의 잘못된 정보 전달이 크게 지적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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