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릴 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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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릴 카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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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3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7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2000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93
1997
2000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57번
존 호프만
(1965)

데릴 카일
(1991~1997)


결번
콜로라도 로키스 등번호 57번
없음

데릴 카일
(1998~1999)


제이슨 제닝스
(200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57번
커티스 킹
(1997~1999)

데릴 카일
(2000~2002)


잭 톰슨
(2022~2023)




데릴 카일
Darryl Kile

본명
데릴 앤드루 카일
Darryl Andrew Kile
출생
1968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주 가든 그로브
사망
2002년 6월 22일 (향년 33세)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샤피 주니어 컬리지
신체
196cm / 83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30라운드 (HOU)
소속 팀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1~1997)
콜로라도 로키스 (1998~199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000~2002)
기록
Pitched a No-Hitter (1993.9.8)

1. 개요
2. 선수 경력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야구 선수로, 보직은 투수였다.

낙차가 큰 커브를 주무기로 삼아서 여러 팀의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동맥 경화로 인해 33세의 젊은 나이에 명을 달리했다.


2. 선수 경력[편집]


1987년 드래프트에서 휴스턴에 지명을 받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88년 시즌과 89년 시즌에는 모두 선발로 3점대 초반 방어율을 기록하며 착실하게 성장해 나아갔지만, 1990년 시즌에는 26경기 등판 23경기 선발 출장해 5승에 6.64의 매우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은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데 성공한다. 데뷔전에선 불펜으로 1이닝 0실점을 기록했으며, 이후에 선발로 뛰며 최종 성적 37경기 22선발 7승 11패 153.2이닝 3.69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다. 1992년부턴 본격적으로 선발로 뛰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15승에 3.51의 ERA를 기록하며 올스타전에도 출전하는 등 포텐을 터트렸다. 하지만 단축시즌이었던 1994년에는 4점대 중반의 ERA를 기록하며 주춤하였고, 리그에서 가장 많은 82개의 볼넷을 내주며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5년도 21경기 선발 등판해 4승 12패, 4점대 후반의 ERA를 기록하여 부진한 성적을 냈다. 그러면서 입지가 줄어들만도 했지만, 이듬해에도 선발 자리를 보장받았고, 12승에 200이닝을 넘기며 4.19로, 괜찮은 스탯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FA를 한 시즌 남겨두고 맞이한 1997년 시즌. 시즌 초반부터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카일은 올스타전에도 뽑히며 최고의 기세를 이어갔고, 시즌을 19승 7패 2.57의 매우 뛰어난 승수와 방어율로 마감하였고, 34경기에서 255.2이닝을 던지며 이닝 이터의 모습까지 보이며 소속팀 휴스턴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동부 지구의 지배자였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카일은 1차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를 기록하지만, 팀은 애틀랜타 삼각 편대의 핵심이었던 그렉 매덕스에게 꽁꽁 묶이며 1-2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휴스턴은 2차전과 3차전에서 톰 글래빈, 존 스몰츠에게 털리면서 스윕패로 시즌을 마감하였다.[1] 시즌 종료 후 카일은 사이영 투표에서 5위를 차지하였고, MVP 투표에서도 득표를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맞이한 FA 협상 기간. 카일은 선발투수 최대어로 주목을 받았고, 에이스 부족에 시달리던 콜로라도 로키스가 적극적인 구애를 한 끝에,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을 하고, 투수지옥 쿠어스필드로 떠나게 되었다.


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편집]


큰 기대 속에 입단한 콜로라도 로키스에서의 첫 시즌. 카일은 35경기에 선발등판하며 리그에서 가장 많이 선발로 등판하며 최선을 다한 시즌을 보냈다. 물론 투수지옥+타고투저 크리 탓에 방어율은 5.20으로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fWAR에서 3.2를 기록하며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3승 17패(1위) 230.1이닝 5.20.

하지만 이듬해인 1999년. 카일은 32경기를 모두 선발로 등판하며, 페드로 아스타시오와 함께 선발진을 이끌었지만, 쿠어스 필드 효과+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 겹치면서 완전히 폭망하고 만다. 승-패는 8승 13패에 방어율은 무려 6.60. 거기에 190이닝을 던지며 9이닝당 삼진 비율이 5를 조금 넘기는데 그치며 말 그대로 폭망하고 만다. 그러자 콜로라도는 카일을 트레이드 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결국 12월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되었다.[2]


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편집]


최악의 부진을 겪고, 새 팀으로 이적한 2000년 시즌. 리그는 여전히 타고투저 현상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투수 지옥 쿠어스 필드를 내려온 덕분에 전년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세인트루이스의 1선발이 되었다. 시즌 성적은 20승 9패 232.1이닝 3.91. 그리고 맞이한 애틀랜타와의 디비전 시리즈. 카일은 당초 1차전 선발 등판이 예상되었지만, 라 루사 감독은 폭발적인 임팩트를 보인 신예 좌완 릭 앤키엘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 결정의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3회에만 5번의 폭투를 기록하며 대실패로 끝났지만, 그래도 이기긴 했다. 카일은 2차전에서 7이닝 6삼진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고, 팀은 3차전도 따내는데 성공하여 NLCS에 진출하였다. 카일은 1차전과 4차전에 선발로 등판했지만, 두 번 모두 털리면서 패전투수가 되었고, 팀은 뉴욕 메츠에게 1승 4패로 패하면서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2001년에도 카일은 15승을 넘기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방어율은 3점대 극초반을 기록하며 에이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덕분에 소속팀 카디널스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디비전시리즈에선 서부 1위 애리조나와 맞붙었고, 카일은 1경기 등판해 6이닝 2실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카디널스는 5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2002년 시즌. 카일은 맷 모리스와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선발진을 이끌어 갔고, 6월 18일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는 7.2이닝을 1실점으로 막으며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6월 23일에 시카고 컵스 원정 경기에 선발등판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23일 경기를 앞두고 카일은 경기가 열리는 리글리 필드에 나타나지 않았고, 구단 관계자가 호텔로 가 보니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3] 그의 사망 소식은 곧바로 메이저리그 전체에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4] 이후 세인트루이스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유니폼 패치에 카일의 등번호인 57번을 붙였으며, 라커룸에도 카일의 유니폼 상의를 걸어 놓고 경기에 임하면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1승 4패로 패배하며 카일의 영전에 우승 트로피를 놓지는 못하게 되었다.

데릴 카일이 사망한 뒤 그가 소속되었던 구단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콜로라도 로키스는 그가 생전에 달았던 번호인 57번을 계속 사실상 비공식으로 결번처리를 해 두고 있다가, 카디널스는 2022년 신인투수 잭 톰슨이 57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듬해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유예 기간이 면제가 되면서 입후보했지만 첫 해에 7표 득표에 그치면서 탈락했다.

그의 미망인인 플린 카일은 몇년간은 카디널스의 경기장을 찾았지만 이후 재혼했고 카디널스와의 연락도 끊었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1
HOU
37
153⅔
7
11
0
3.69
144
16
84
6
100
1.484
1992
22
125⅓
5
10
0
3.95
124
8
63
4
90
1.492
1993
32
171⅔
15
8
0
3.51
152
12
69
15
141
1.287
1994
24
147⅔
9
6
0
4.57
153
13
82
9
105
1.591
1995
25
127
4
12
0
4.96
114
5
73
12
113
1.472
1996
35
219
12
11
0
4.19
233
16
97
16
219
1.507
1997
34
255⅔
19
7
0
2.57
208
19
94
10
205
1.18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8
COL
36
230⅓
13
17
0
5.20
257
28
96
7
158
1.533
1999
32
190⅔
8
13
0
6.61
225
33
109
6
116
1.7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0
STL
34
232⅓
20
9
0
3.91
215
33
58
13
192
1.175
2001
34
227⅓
16
11
0
3.09
228
22
65
11
179
1.289
2002
14
84⅔
5
4
0
3.72
82
9
28
8
50
1.299
MLB 통산
(12시즌)
359
2165⅓
133
119
0
4.12
2135
214
918
117
1668
1.410


6. 관련 문서[편집]



[1] 글래빈 6이닝 3실점, 스몰츠 1실점 완투승[2] 이때 세인트루이스에서 콜로라도로 온 선수 중에 훗날 LG의 사이버 투수가 되는 매니 아이바가 있었다.[3] 부검 결과 그의 동맥이 90% 정도 막혀 있었다고 한다. 즉 간접적인 원인은 동맥경화. 그리고 심혈관 쪽에 가족력이 있었다고 한다.[4] 결국 이 경기는 데릴의 죽음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경기가 취소되었다. 하필 경기 시작 직전에 일어난 일이라 관중들이 모두 입장한 상황이었고 대신 당시 시카고 컵스에서 포수로 뛰던 조 지라디가 구장 내 마이크로 직접 경기 취소 소식을 전했다. 당시 지라디는 이 발표를 거의 오열을 하다시피하면서 전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FOX 전국 중계 예정이여서 조 벅 등의 중계진까지 모두 파견했으나 이 여파로 급하게 보스턴 레드삭스 VS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경기로 중계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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