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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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밴 헤일런
알렉스 밴 헤일런
데이비드 리 로스
볼프강 밴 헤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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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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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헤일런의 역대 보컬

초대
데이비드 리 로스
1975 – 1985
제2대
새미 헤이거
1985 – 1996
제3대
게리 셰론
1997 – 2000
제4대
새미 헤이거
2000 – 2007
제5대
데이비드 리 로스
2007 – 2020


데이비드 리 로스
David Lee Roth


출생
1954년 10월 10일 (69세)
미국 인디애나 주 블루밍턴
성장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
거주지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일본 도쿄도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소속
파일:Van Halen.png 밴 헤일런 (1974 – 1985, 2007 – 2020)
데이비드 리 로스 밴드 (1985 – 2006, 2015 – 현재)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응급구조사, 화가
부모님
네이선 리
시빌 로스
신체
183cm
종교
유대교
장르
하드 록, 메탈, 헤비 메탈, 글램 메탈, 뉴 웨이브, 팝 록
활동 기간
1972년 – 현재
사용 악기
보컬, 기타, 하모니카
레이블
워너 브라더스, 인터스코프, 마그나 카르타, CMH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유년기
3.2. 밴 헤일런 시절
3.3. 데이비드 리 로스 밴드 시절
3.4. 밴 헤일런 재결합
4. 음악적 성향
4.1. 보컬
4.2. 송라이터
4.3. 프론트맨
5. 여담



1. 개요[편집]




전성기 시절의 모습 (1970년대)
현재 (밴 헤일런 재결합 이후)
미국의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가수. 미국의 록밴드 밴 헤일런프론트맨이었다.

2. 상세[편집]


이 사람하면 일단 떠오르는건 찰랑이는 금발 머리와 밴 헤일런. 흔히 음악사 사상 지미 헨드릭스 이래 가장 영향력이 큰 기타리스트였던 에디 밴 헤일런 때문에 데이비드 리 로스는 묻혀지는 경우가 많으나, 헤비 메탈이든 글램 메탈이든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 뛰어난 음악가였다. 더군다나 그는 밴 헤일런의 프론트맨 역할은 물론이고 회계, 마케팅, 비즈니스 등을 담당한 실질적인 리더였으며, 밴 헤일런이라는 이름도 그가 정한 것이다. 비록 밴 헤일런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또다른 전설의 음악가 빌리 시언, 스티브 바이와 함께한 원맨 밴드 커리어도 팬들 사이에서는 밴 헤일런에 못지 않게 유명하다.

LA 메탈 씬에서 상당히 개성있고 기라성있는 보컬로 유명해, 밴 헤일런을 1980년대 최고의 인기밴드로 올려놓는데 에디 밴 헤일런 못지 않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그의 후임인 새미 해이거가 팝 스타일에 더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올드 팬들은 Van Halen부터 1984까지 밴드의 전성기를 밴 헤일런 형제와 함께한 리 로스를 새미 헤이거보다 더 좋아한다. 이런 팬들의 부응 때문에 말년에는 다시 밴 헤일런 형제와 뭉치기도 했지만 2020년 에디 밴 헤일런이 사망하면서 밴드가 해체됨에 따라 다시 원맨 밴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흔히 '데이빗 리 로스'라고도 하지만 '데이비드 리 로스'가 표기에 맞다.[1]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데이비드 리 로스는 1954년 안과의사 네이런 리와 교사 시빌 로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유복한 중산층이었으며[2] 더군다나 어머니와 아버지 두분 모두 유대교 신자였기[3] 때문에 그 역시 유대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4] 아주 어릴적에는 인디애나에서 거주하였지만 10대때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위치한 패서디나라는 마을로 이사했고, 여기서 알렉스 밴 헤일런에디 밴 헤일런 형제를 대학생 시절때 만나서 친한 친구가 되었다.


3.2. 밴 헤일런 시절[편집]


그는 어릴때부터 록 음악에 관심을 가졌으며, 레드 제플린이나 크림, 블랙 사바스의 곡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밴 헤일런 형제를 만나고 난 이후 20세였던 1974년 작은 동네밴드를 하나 만드는데 그 밴드가 바로 밴 헤일런이다.[5] 밴 헤일런을 결성한 데이비드는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LA 근처를 돌아다니며 뒷뜰 생일 파티부터 학교 행사까지 밴드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닥치는대로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해 실력을 쌓았다. 수없이 많은 공연을 거친 끝에 기라성같은 데이비드의 보컬과 화려한 에디 밴 헤일런의 기타 연주가 LA 시내에서 입소문을 탔고, 1978년 그들은 워너브라더스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역사적인 첫 데뷔 앨범인 Van Halen을 녹음, 발매했다.

Van Halen은 신출내기 밴드의 데뷔 앨범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혁신적인 사운드를 보여줬는데, 이 사운드를 만든 일등 공신은 태핑 기법을 메탈 사운드에 결합시킨 에디 밴 헤일런이었지만 리 로스의 보컬 역시 크게 공헌하였다. 이 앨범은 빌보드 19위, 네덜란드 차트 10위에 올랐고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1,000만장이 팔려 전세계애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중 하나가 되었다. 롤링 스톤은 밴 헤일런을 "섹시하고 마초스럽지만, 때로는 시적이거나 유쾌한 로스의 가사가 에디 밴 헤일런의 하드 록 사운드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밴드"라고 평가했다. 그정도로 리 로스는 밴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 로스는 유대인 의사 가정에서 태어난 중산층 출신이었고, 네덜란드 이민자 가정이라서 밴드에 돈을 잘 지원하지 못했던 밴 헤일런 형제를 대신하여 돈을 밴드에 많이 투자하고 회계까지 담당하였다. 회계, 비즈니스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케팅까지 담당했다. 그래서 관계자들은 그가 거의 밴드의 리더처럼 활동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에디 밴 헤일런에 비하면 현저히 뒤떨어지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좌지우지할정도의 파워를 가진 인물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밴 헤일런 형제와 다투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리 로스의 사생활이 파티와 여자로 점철되어있어 막장이었다는 점과, 막강한 자금과 권력을 가지고 에디 밴 헤일런의 활동을 간섭해서[6] 1980년대 중반경 밴 헤일런 형제와 관계가 파탄났다. 거기다가 밴 헤일런Jump로 기존 헤비 메탈에서 벗어난 글램 메탈을 추구하자 더이상 밴드에 있을 수 없다면서 밴 헤일런을 탈퇴하고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3.3. 데이비드 리 로스 밴드 시절[편집]


1984년 밴 헤일런을 탈퇴한 이후 1986년을 목표로 새 앨범 제작 과정에 들어갔다. 이 시기 리 로스는 "데이비드 리 로스 밴드"를 만들었는데, 스티브 바이빌리 시언, 그리고 그레그 비소니트(Gregg Bissonette)[7]가 멤버로 있었다. 밴드가 1986년 발매한 1집 "Eat’Em and Smile"은 빌보드 200의 4위까지 오르고 36주간 빌보드 차트에 머무르는 등 상업적으로 대 성공을 거뒀다. 해당 앨범은 평론에 있어서도 어느정도 성공을 거뒀고 싱글컷된 "Yankee Rose" 역시 빌보드 16위에 올랐다. 한편 리 로스는 대중적 성공을 위해 그의 취향이었던 정통 하드 록보다는 글램 메탈에 까운 성향으로 앨범을 제작했는데, 비슷한 시기 발매된 밴 헤일런의 앨범 "5150"과 비교되었다. 전반적으로 밴 헤일런의 팬들과 평론가들의 평은 5150이 더 좋다.

1988년 동일 라인업으로 2집 "Skyscraper"를 제작했다. 해당 앨범 역시 빌보드 6위를 찍으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한데다가, 싱글로 발매된 어쿠스틱 풍의 곡 "Damn Good"은 빌보드 핫 100의 2위에 오르고, "Just Like Paradise" 역시 6위에 오르면서 이전의 앨범보다도 더욱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이 시기는 건즈 앤 로지스본 조비로 대표되는 글램 메탈의 최전성기로서 리 로스 역시 이런 추세에 따라 신스 팝의 요소를 대거 받아들였는데, 이런 점은 음악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기는 했다. 또한 기존 리 로스와 밴 헤일런의 팬들도 정통 헤비 메탈에서 완전한 신스 록으로 전향한 리 로스에게 실망감을 드러냈고 따라서 2집은 평론적으로는 1집만큼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앨범이 제작된 이후 스티브 바이빌리 시언이 "리 로스는 너무 일 중독자라서 같이 일하기 힘들다"라는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다.

1990년대에는 하드 록과 글램 메탈이 얼터너티브, 힙합 등에 밀려 힘을 잃은 만큼 리 로스도 하락세를 피할 수 없었다. 3집 "A Little Ain't Enough"는 빌보드 18위에 머물면서 그가 제작한 앨범중 Van Halen 이후 최초로 빌보드 차트 10위권 진입에 실패한 앨범이 되었다. 더군다나 평론가들의 평도 혹평 일색이었다. 올 뮤직과 롤링 스톤에서는 5점 만점에 2점을 얻는데 그쳤고 LA 타임스에서조차 2.5점을 줬다. 1994년에는 그의 본래 성향이었던 하드 록에 기반을 둔 앨범 "Your Filthy Little Mouth"를 발매하며 R&B, 댄스록, 재즈 퓨전 등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하였지만 도리어 혼란스럽고 어설프다는 평만 들으며 평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완전 망한 흑역사가 되고 만다. 리 로스 밴드의 마지막 작품인 "DLR Band"는 롤링 스톤에서 1점(...)을 받았으니 할 말 다했다.


3.4. 밴 헤일런 재결합[편집]



4. 음악적 성향[편집]



4.1. 보컬[편집]



로버트 플랜트, 이안 길런 등 다양한 1970년대 록 음악가들의 보컬에서 영향을 받았다.

에디 밴 헤일런에 비해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낮지만, 그럼에도 밴 헤일런의 얼굴 마담이자 팝 메탈 사상 최고의 보컬중 한명. 그런데 정작 보컬 면에 있어서 새미 헤이거에 비해 역량은 딸린다는게 중론이다. 새미 헤이거는 더 넓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는 보컬이기도 하며 후기 밴 헤일런이 추구한 글램 메탈의 팝 사운드에 더 어울리는 보컬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헤비 메탈 보컬로서 그의 역량은 새미 헤이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평가도 많다.

무엇보다 팬들은 1집부터 1984까지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한 보컬인지라 새미 헤이거보다는 리 로스를 훨씬 높게 쳐준다. 거기다가 새미 헤이거에 비해리 로스가 딱히 글램 메탈에 덜 어울리는것도 아니고, 음역대가 넓다고 무조건 좋은 가수인것도 아니다.

다만, 라이브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원곡의 멜로디를 애드립에 가깝게 바꿔 부르거나 가사 중간을 생략하고 부르는 경우가 많고, 젊을 때는 무대에서 수시로 술을 마셔가며 노래를 하다보니[8]원곡을 얼마만큼 재현하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새미 헤이거보다는 평이 좋지 않다. 그러나 '날 것의 락큰롤' 정신과 부합한다며 오히려 좋아하는 팬들도 많은 것이 사실.

전반적으로 그는 액슬 로즈이안 길런급의 올타임 레전드급 메탈 보컬리스트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밴 헤일런이라는 밴드의 정체성을 만든 훌륭한 보컬이었다는 평이 많다. 또한 글램 메탈에서나 헤비 메탈에서나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고, 글램 메탈 쪽에서는 후대 보컬들의 찬사를 받는 최고의 보컬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4.2. 송라이터[편집]


일단 스티브 바이빌리 시언과 같이 몇년간 밴드를 할 정도로 기본기는 있었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밴 헤일런 내에서 그가 작사한 곡들을 보면 그의 작사 실력은 평균 이상이다. 대표적으로 밴드의 히트 곡 Jump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혼자서 작사를 한 곡이다.

다만 솔로 시절의 평가는 약간 갈린다. 1집은 전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밴 헤일런이 동년도 발매한 앨범 5150에 비하면 높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2집은 평가가 갈리는 상황에서 전반적으로는 부정 평가가 우세했으며, 3, 4, 5집은 모두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따라서 데이비드 리 로스의 솔로 커리어는 글램 메탈이나 밴 헤일런의 팬이 아니라면 1984년 이후의 밴 헤일런에 비해 인지도도 떨어지고, 평가도 이에 못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 헤일런의 보컬이었다는 명성도 있지만 또다른 올타임 레전드로 불리는 스티브 바이, 빌리 시언과 같은 밴드를 할 역량이 되었고 또 빌보드 차트 top 10 안에 올린 앨범이 2개나 된다는 점에서 성급히 깎아내릴 재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4.3. 프론트맨[편집]


무엇보다 그가 현재까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비주얼 담당이었던 것도 한몫 한다. 로버트 플랜트를 연상케하는 찰랑이는 곱슬 금발머리는 리 로스의 상징중에 하나다. 상반신은 반쯤 벗고 다니며, 라이브 연주를 할때나 프로모션 비디오를 찍을때나 무대 위를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다리를 찢으며 점프를 하는 정신 사나운(...) 무대 매너는 후대에 액슬 로즈와 같은 여러 글램 메탈 프론트맨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사실, 글램 메탈이 "헤어 메탈"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인 글램 메탈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머리 스타일은 그가 시초라고 해도 좋다.

신정환닮긴 했지만 특유의 광대에서 나오는 강렬하게 잘생긴 얼굴에다가 화려한 보컬, 뛰어난 무대 매너 등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였고 그루피족들을 몰고다녔다. 비록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금발 머리가 다 하얗게 변하고 장발까지 밀어버렸지만, 여전히 뚜렷한 이목구비는 남아있는 편이다.

5. 여담[편집]


  •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중 하나인 "공부만 잘하고 잘 놀줄 모르는 안경 낀 범생이"와 완전히 대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리 로스는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파티광에 대단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고, 휘날리는 금발 머리를 한 미남형이었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 출신 답게, 회계 문제에 대해서 빠삭했고 어떤 빡쎈 파티와 잠자리를 가졌던간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조깅하고 변호사나 자산관리사를 만나 회의를 하는 일중독자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후일 밴 헤일런을 탈퇴하고 원맨밴드를 만들었을때 빌리 시언이 그의 밴드에서 탈퇴를 해버렸는데 이유가 다름 아닌 리 로스가 너무 일을 좋아해서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 최근에는 전신에 문신을 하였다.
  • 유대인 답게, 종교는 당연히 유대교이다. 게디 리, 폴 사이먼, 빌리 조엘, 밥 딜런과 함께 가장 유명한 유대계 록스타를 꼽을때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 날라리 이미지가 있는 록커답지 않게, 가수로 일하기 전에는 병원에서 남간호사로 일한 엘리트다. 현재도 뉴욕시에서 거주하며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가진 전문 구급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의 말로는 "노래를 부를때와는 또다른 열정이 느껴진다"라고 한다.
  • 믹 재거급인 여성 편력과는 별개로 결혼은 한적이 없다고 한다. 즉 현재까지 노총각이다. 밴 헤일런 시기에는 스스로 밝히길 "예쁜 다리를 가진 여자랑은 다 한번씩 자봤다"라고 한다. 2012년부터는 도쿄에 살고 있는 여자 친구와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뉴욕, LA, 도쿄를 오가면서 거주한다.
  • 최근에는 음악 말고도 미술에도 관심을 두는지 코로나19 등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소재로 둔 그림들을 그리면서 화가로서도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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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데이"빗" 보위와 같이 1970년대 활동했던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가진 음악가 대부분이 가진 표기법상의 문제점이다. 만약 데이빗이라고 잘못 표기된 문서가 있다면 데이비드라고 바르게 고쳐주도록 하자.[2] 밴 헤일런이 초창기 시기 마땅히 연습할 장소를 찾지 못할때 리 로스가 자신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대저택의 지하실에서 같이 연습하자면서 지하실을 빌려줬다고 한다.[3] 어머니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한다.[4] 그의 성인 Roth는 유대계 성이다. 1차 대전 직전에 인디애나주에 정착한 유럽계 유대인의 후손이다.[5] 데이비드 리 로스는 왜인지는 몰라도 계속 보컬 오디션에서 탈락했는데, 에디 밴 헤일런이 초창기 시절 경제적으로 궁했기 때문에 유대인 중산층 가정의 자제 출신인 데이비드 리 로스가 있으면 밴드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며(...) 그를 영입했다고 한다.[6] 특히 에디 밴 헤일런Beat It에 참가하는걸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7] 링고 스타의 세션 드러머로 일한 경력이 있다. 동생 맷 비소니트는 엘튼 존 밴드 멤버로 재직 중.[8] 밴 헤일런의 역대 최대 관객규모 공연인 1983년 US페스티벌 영상을 보면 초반부터 술에 취해서 혀가 꼬인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