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지레 클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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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현 스웨덴•노르웨이) 베르나도트 왕조의 창시자인 칼 14세 요한의 아내이자 오스카르 1세의 어머니이다. 프랑스 평민 출신 왕비이지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등 정치적인 상황을 우연치 않게 겪어 본의 아니게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스웨덴 왕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실, 벨기에 왕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조상 중 하나이다.
2. 작위[편집]
- 마드무아젤 베르나르딘 외제니 데지레 클라리 Mademoiselle Bernardine Eugénie Désirée Clary (1777년 11월 8일 – 1798년 8월 17일)
- 베르나도테 부인 Madame Bernadotte (1798년 8월 17일 – 1806년 6월 5일)
- 퐁트 코르보 대공비 전하 Her Serene Highness the Princess of Pontecorvo (1806년 6월 5일 – 1810년 9월 26일)
- 퐁트코르보 대공비와 스웨덴의 왕자비 데시데리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Desideria of Pontecorvo and Sweden (1810년 9월 26일 – 1810년 11월 5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Sweden (1810년 11월 5일 – 1814년 11월 4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Sweden and Norway (1814년 11월 4일 – 1818년 2월 5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and Norway (1818년 2월 5일 – 1844년 3월 8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Dowager of Sweden and Norway (1844년 3월 8일 – 1860년 12월 17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777년 11월 8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클라리 가문은 원래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 가문이었다. 아버지인 프랑수아 클라리는 2번 결혼했는데 데지레는 2번째 부인의 막내딸이었다. 당연히 형제 자매는 많을 뿐더러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고 한다.
데지레의 언니도 6살이나 차이 났으나, 이복오빠/언니도 훨씬 나이 차이가 심했다. 이 때문에 데지레와 언니 줄리는 서로 친해졌고 데지레의 가족들은 자주 서로 돌보았으며, 가장 각별했던 줄리와 데지레는 남편의 지위가 높아지자 친정 가족들을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데지레의 아버지 프랑수아 클라리는 매우 부유한 데다 귀족 출신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를 계기로 자신도 귀족이 되려는 노력을 하며 딸들과 자녀들의 교육을 상류층 교육방식으로 가르치려 했다. 데지레는 언니와 함께 수녀원 학교에 들어갔는데, 데지레는 공부에 관심에 별로 없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나서 수녀원이 문 닫게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혁명이 부유한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데지레의 형부는 마르세유를 위해 많은 일을 도왔으나 혁명으로 이탈리아로 이주해야 했다. 그리고 데지레의 큰오빠가 투옥되고 다른 형제들은 살해되거나 자살하고 아버지도 사망한다. 이를 통해 데지레는 혁명과 정치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적 사건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업은 집안의 가장인 큰오빠가 물려받았다. 계모인 데지레의 어머니,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들과 가정을 꾸려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
3.2. 나폴레옹과의 약혼 그리고 파혼[편집]
데지레는 형제의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전쟁위원을 찾아갔었는데 이때 전쟁위원이 마르세유로 이주한 보나파르트가의 조제프 보나파르트였다 . 이를 계기로 조제프와 줄리는 결혼하고 데지레는 나폴레옹의 약혼자가 되었다.
1793년, 나폴레옹은 툴롱 공략전에서 큰 성과를 거둬 무인으로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데지레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직 결혼은 안 했다. 1794년에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나폴레옹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1796년에 파리에서 왕당파의 폭동이 발생하면서 이를 진압하기 위한 총재정부의 총재 바라스의 부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시가지에서 대포를 쏘는 과감한 진압 작전으로 이를 진압한 것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명성을 얻게 되면서 나중에 프랑스 제1제정의 첫 번째 황후가 되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3] 와는 이때 알게 된다.
외교관인 형부를 따라 제노바로 가게 된 데지레과 나폴레옹은 서로 연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경력을 쌓아가며 빠르게 데지레를 잊어갔다. 이후 나폴레옹이 아무 말도 없이 조제핀과 결혼하게 된다. 데지레는 신문으로 결혼 소식을 접하고 굉장히 슬퍼하였다.당신 모습은 내 심장에 새겨져있다오. 나는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본 적 없건만 사랑하는 데지레, 그대는 왜 내가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오? 지금은 오후 네 시요. 영원한 당신의 것 나폴레옹으로부터
나폴레옹이 보낸 편지
데지레는 후에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리고 스웨덴의 왕세자비가 되면서 나폴레옹과 조제핀을 용서하게 되었지만, 당시 절절한 마음이 담긴 이 편지는 나폴레옹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데지레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써주게 된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안 좋았던 데지레의 남편을 손대지 않고, 파리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데지레의 집을 파괴해야하자 특별히 데지레가 죽을 때까지 철거를 불허[4] 하는 등 많은 신경과 배려를 해주었다.당신은 참으로 나를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약하게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결혼을 하셨다고요? 이미 이 가련한 데지레는 당신을 사랑하거나 생각만 해도 안되는 것입니까? 나의 단 한가지 위안은 나만이라도 변심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미련도 희망도 없습니다. 다만 죽음을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
3.3. 결혼[편집]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간 사이에 형부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로 부터 한 남자를 소개를 받는다. 그 남자는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였다. 데지레는 그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는데, 장이 나폴레옹을 숭배하지 않았을뿐더러 나폴레옹 휘하 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1797년에 장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군에 파견되어 그의 휘하에서 싸웠긴 했지만, 나폴레옹이 무명일 때 베르나도트는 이미 상브레와 뫼즈군의 장군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는 키가 컸으며 강인한 인상에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또 강인한 성격에 스스로에 대해 매우 자부심이 컸으며, 왕립군 출신으로 기사도에 매우 철저했다. 베르나도트가 장군이 된 뒤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망이 두터웠는데 규율을 엄격히 적용했음에 불구하고 베르나도트의 병사들은 "우리와 함께 위험을 감수하는 장군을 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데지레 역시 가족들이 베르나도트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 휘하의 다른 장군들과 달리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스웨덴에서 데지레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가(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 대적할만한 인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이야기했다.
베르나도트와 데지레의 결혼식은 1798년 8월에 치러지고 조제프와 줄리, 뤼시앵&크리스틴 부부와, 쥐노 부부가 참석했다. 마담 쥐노가 봤을 때 데지레와 베르나도트의 결혼에서 큰 열정은 보이지 않으며, 확고한 의지가 없는 데지레와 로맨틱하지 않은 베로나도트였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데지레와 베르나도트의 결혼생활이 완전히 나쁘지는 않았다.데지레는 남편 베르나도트를 매우 사랑했으며 그가 없을 때는 베르나도트의 부재에 대해 슬퍼하였고, 그가 돌아왔을 때는 다시 떠날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 지었다고 한다.
데지레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고 남편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열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남편이 곁에 있는 것이랑 자신의 친척과 가족들을 왕래하면서 편안하게 살길 바랬지만 베르나도트에게는 데지레와의 결혼을 통해 아주 큰 유용한 결과를 낳게 된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의 약간의 거리가 생긴 상황이었는데 데지레와 결혼하면서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된다.[5] 이런 상황을 통해 나폴레옹이 베로나도트를 함부로 제거할 수 없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통해 베르나도트가 데지레의 남편만 아니었어도 총살했을 사건이 세 번쯤 된다고 회고했다.
데지레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있었고 남편 베르나도트 역시 악의 없이 철없는 행동을 하는 아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신, '아내 데지레가 세상사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고 바랐다고 한다.[6]
하지만 남편의 항목에는 "후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조제핀의 불륜으로 조제핀과 멀어지자 다시 옛 여인인 데지레에게 접근했는데 데지레는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불륜을 저지르던 데지레를 끝까지 사랑했다. 스웨덴의 섭정으로 있을 때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그를 마음에 들어해 러시아의 대공녀와 결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아내가 있다면서 정중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더구나 그 당시엔, 아내 데지레가 북방의 스웨덴의 추운 기후와 풍토,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파리에 남아서 부부가 긴 별거생활을 했을 때였다."라고 나와있어서 그녀가 정말로 남편을 사랑했는지는 큰 의문이다. 상술된 그녀의 회상, '사람들이 말하길 그가 나폴레옹과 비견될 인물이라 해서 청혼을 받아들였다' 부분을 보면 애초에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부터가 다분히 나폴레옹을 의식해서였다.
결혼 초 데지레는 언니 줄리 부부랑 같이 살았는데, 이것이 베르나도트에게 문제가 되어 파리에 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하지만 데지레는 자신의 친척들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언니 줄리의 얌전한 성격의 영향을 받은 데지레를 남편 베르나도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데지레가 남편의 정치적 행동을 언니 줄리 부부에게 이야기했지만, 데지레가 정치적으로 좀더 덜 민감하게 행동하게 된것은 1799년 아들인 오스카르가 태어난 이후였다. 남편이 프랑스군의 장군이기에 자주 집에 비웠는데, 이를 매우 슬퍼했지만 아들의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훨씬 덜해졌다고 한다.[7]
또 데지레 스스로는 사람들과 만나는것을 무척 좋아해 특히 샬롱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견을 공유하는 등 성숙한 면을 길렀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 교류가 있었던 마담 즈카르에와 마담 드 스탈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 남편 장 베르나도트에게 퐁트코르보 대공이라는 작위를 내려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나 남편 장 베르나도트에게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3.4. 스웨덴의 왕자비와 왕세자비 [편집]
1811년 데지레
1810년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이 사망했다. 당시 스웨덴 왕실에서는 쿠테타로 인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칼 13세로 옹립되었으나, 후계자가 없어서 덴마크 왕실과 가까운 친척인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을 왕위계승자로 세웠다.[8] 하지만 그마저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스웨덴 왕실에서는 다음 후계자로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아들 구스타프를 원했지만 스웨덴의 귀족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귀족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같은 강력한 국왕을 원했고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에게 눈을 돌려 자신들에게 가장 친숙한 인물인 데지레의 남편 장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과 전쟁을 했지만 포로로 붙잡힌 스웨덴의 장교들에게 매우 잘 대해줬고, 베르나도트가 현재 독일 북부 지역 한자 동맹지역의 총독으로서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들의 재기에 기여했다는 것도 한몫 했다.[9] 결국 스웨덴에서 투표를 통해 남편 장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상황으로 인해 데지레는 프랑스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남편 장이 먼저 스웨덴으로 떠난 뒤 12월 데지레도 아들 오스카르와 '늑대의 땅' 스웨덴으로 향했다. 먼저 헬싱보리에 도착한 후 할름스타드와 예테보리를 거쳐 육로로 이동했다. 데지레의 일행 중 한 사람은 '굴뚝의 연기 외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일기에 썼다. 그리고 1811년 1월 6일 저녁 영하 24도의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여행의 여파로 고열과 감기를 앓았다. 이후 스웨덴에서 데시데리아로 불리게 된 데지레는 스웨덴에서 매우 불행했다. 일단 프랑스 남부 지역 출신의 데시데리아에게 추운 스웨덴의 겨울철은 매우 낯선 환경이었고, 스웨덴 궁정에서도 데시데리아를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스웨덴의 왕비이자 양시어머니였던 샤를로테 왕비는 데시데리아를 두고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고 언급했지만, 그녀가 프랑스인이고 자신의 새 조국을 거들떠 보지 않으며 아들을 품안에 싸고 돈다는 등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다. 게다가 프랑스인인 그녀는 당시 교양어였던 프랑스어로 대화가 가능했지만 스웨덴어는 잘 몰랐기 때문에 궁정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데시데리아를 안타깝게 본 구스타브 3세의 왕비였던 소피아 막달레나는 그녀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왕실 업무로 매우 바빴고 아들도 후계자 교육을 위해 떨어져 지냈다. 덤으로 당시 스톡홀름 궁은 보수가 안 되어 낡고 바람이 잘 통해 추웠다.
이런 불화와 추운 날씨로 인해 데시데리아는 봄이 되자 파리로 돌아가고자 했다. 남편과의 긴 논쟁 끝에 결국 1811년 6월 스톡홀름을 떠났다. 공식적인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 프랑스 쁠롱비에흐의 욕탕에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을에 스톡홀름으로 돌아오기로 했지만 장장 12년간 파리에 머물게 된다. 파리에서는 스웨덴에 대해 ''매우 추웠다.''라고 이야기 했다. 데시데리아는 고틀란드 백작부인으로서 전처럼 파리에서 언니 줄리 클라리와 같이 지내며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데, 스웨덴의 왕세자비 살롱을 열어 데시데리아의 많은 친구들이 그녀의 살롱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스웨덴의 왕세자비여서 스웨덴인들도 데시데리아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다.[10]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쟁이 심각해지면서 데시데리아의 살롱에는 반 나폴레옹파의 사람들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데시데리아는 주변 친척들과 함께 여러 지역으로 오고 다녔다.
당시 유럽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프랑스의 적국이었고 그 중 스웨덴도 포함되어, 남편 칼 요한은 스웨덴을 위해 프랑스를 버리고 전쟁을 해야 했다. 프랑스와 싸우게 된 칼 요한은 데지레를 스톡홀름으로 데려오려 노력했지만 데지레는 파리에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친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던 데시데리아는 프랑스에서 친구들과 친척들을 돕는데 열중했다.[11]
3.5. 왕비[편집]
1818년, 칼 13세가 승하하자 남편 칼 14세 요한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데시데리아도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비가 되었다. 데시데리아 왕비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머물렀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과 데시데리아의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대신 돌아온 프랑스의 귀족들과 영국 등 여러 외교관 부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특히 영국 대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무척 친하게 지냈고, 그것을 계기로 데시데리아가 영국 대사관에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국왕으로 즉위한 남편은 데시데리아에게 그만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주저한다. 언니 줄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그러지도 못했고[12] 당시 데시데리아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차있었다. 리슐리외 공작 아르망 디 플레시에게 반해 그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리슐리외 공작은 데시데리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의 미친 여왕이라고 불렀다. 이 모든 것을 보고받은 칼 14세 요한은 화를 내며 당장 돌아오라고 했지만 데시데리아는 '건강상의 이유'로 파리에 머물렀다. 1년 후 리슐리외 공작은 사망했고 데시데리아는 매우 슬퍼하며 공작의 초상화를 간직한다.
1822년 독일의 아헨에서 11년만에 아들 오스카르 왕세자를 만났다. 멋지게 장성해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왕자로 불리던 오스카르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오스카르와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공녀의[13] 결혼이 결정되었고 데시데리아 왕비는 며느리가 될 조제핀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기로 한다. 데시데리아는 남편에게 '짧은 방문'을 할까 한다고 편지를 썼다.
1823년 7월 13일 며느리와 함께 스톡홀름에 도착한 데시데리아 왕비는 스웨덴 여름의 음침하지 않은 날씨와 매우 밝은 분위기 속에서 대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데시데리아 왕비가 입성하면서 스웨덴 궁정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14] 이 때문에 데시데리아 왕비와 요세피나 왕세자비가 있던 스웨덴의 궁정은 구스타브 3세 이후에 가장 활기찼다고 한다.
1829년, 데시데리아는 남편 칼 14세 요한에 의해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왕비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원래 스웨덴의 대관식은 국왕과 왕비가 함께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남편의 대관식 때 데시데리아는 프랑스에 있었고 평민 출신이기에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가톨릭 종교 때문에 노르웨이 대관식은 하지 못 했다.
칼 14세 요한과 데시데리아 부부는 스웨덴에서 적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데시데리아는 모국인 프랑스로 매우 돌아가고 싶어했다. 당시 데시데리아는 스웨덴으로 떠날 때 프랑스에 있던 집과 사업체를 두고 떠나면서 언니와 조카에게 이를 유지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여러 번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지만 때로는 남편의 만류로 때로는 뱃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매번 취소되었다. 데시데리아 왕비는 궁정에 있는 자신의 살롱에서 측근들과 교류했다.[15] 하지만 언어의 장벽과 정치의 대한 무관심, 오랜 부재 등으로 인해 스웨덴의 왕비로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3.6. 왕대비[편집]
1844년 남편 칼 14세 요한이 승하하자 외아들 오스카르 1세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면서 데시데리아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대비가 되었다. 아들 오스카르 1세는 어머니 데시데리아가 이전처럼 계속 살도록 지원해줬다고 한다. 데시데리아는 국왕의 어머니인 왕대비(Äkedrottning)이기 때문에 궁정을 크게 꾸릴 필요는 없었지만, 원래 사람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의 궁정에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뒀다고 한다. 자선사업에 열렬한 관심을 쏟았는데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는 일 등을 했다고 한다.
또한 남편의 죽음 이후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으며, 오페라가 끝났는데 오페라 박스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할머니로서 손자 손녀들과 함께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때문에 오스카르 1세의 자녀들이 스웨덴어보다 프랑스어를 먼저 배웠다고 한다.
장수해서 1858년에는 증손자 구스타프 5세의 탄생도 보았다. 데시데리아는 구스타프의 대모였다. 1859년 아들 오스카르 1세가 승하하고 장손 칼 15세가 즉위하여 대왕대비까지 되었다. 1860년 12월 17일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연극 <<인생은 꿈>>이 끝나는 순간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했고 격렬한 구역질이 몰려와 급히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으로 옮겨져 의자에 앉아 밤 10시 30분 83세로 승하하였다. 마지막 말은 '매우 피곤하다.'였다. 그녀의 침실 안 베개 밑과 책상에는 예전에 나폴레옹 앞으로 보냈던 수많은 연애편지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4. 가족[편집]
4.1. 자녀[편집]
5. 여담[편집]
- 사람들과 지내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특히 언니 줄리 클라리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정치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어서 남편 칼 14세 요한이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또한 스웨덴의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매우 어려워했다.
- 가톨릭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데시데리아. 당시 스웨덴의 국교는 루터교회였고 남편 칼 14세 요한, 외아들 오스카르 1세는 스웨덴의 국왕이었기에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했다. 반면 며느리인 요세피나는 데지레처럼 가톨릭 신자였다. 조제핀도 시어머니처럼 개종하지 않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으며, 1876년에 69세의 일기로 사망할 당시 가톨릭 장례미사로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 나폴레옹은 회고록에서 데지레가 첫사랑이라고 언급했다. 한 때 수줍음 많고 순진한 총각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데지레는 처음 진지하게 만난 여성이었고 젊은 시절 진정한 의미에서 첫사랑이었다고.
-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탄 암말의 이름은 데지레였다.
- 고향 마르세유에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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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 결혼이다. 첫 부인과는 사별했다.[2]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3] 훗날 자신의 며느리가 되는 요세피나 왕비의 할머니.[4] 스웨덴 왕후인것도 있어서 이 보류는 나폴레옹 3세 때까지 유지되었다.[5]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은 데지레와 베르나도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고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보나파르트 가의 사람들이 대부분 베르나도트를 비난했지만 뤼시앵은 그를 옹호해 주었다고 한다.[6] 베르나도트가 데지레에게 너그러웠던 것에는 부부의 나이 차이의 영향이 있다. 칼 14세 요한(1763년 생)과 데지레(1777년 생)의 나이 차가 14세 차이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이 정도 나이차는 흔한 결혼이긴 했다.[7] 장 베르나도트가 집에 오면 정치 이야기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에 마담 르카리에의 샬롱을 포함한 다른 살롱에 갔다왔다고 한다.[8]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을 후계자로 세운 이유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합병시키는데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9] 한자 동맹 도시들은 스웨덴과 자주 교역을 하는 곳이기에 베르나도트에 대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10] 특히 스웨덴 대사가 데시데리아의 살롱에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11] 언니 줄리의 경우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정이 복고되면서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자, 데시데리아가 언니를 ''스웨덴 왕세자비의 손님''으로 프랑스에 초대해 언니를 보호했다고 한다.[12] 당시 스웨덴에서는 반 나폴레옹 성향이 강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이었던 줄리 클라리를 스웨덴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13] 나폴레옹의 전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손녀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장녀.[14] 당시 스웨덴 궁정은 왕실 여성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군인들로만 이루어지는 참모 회의''같은 분위기가 강했다. 남편 칼 14세 요한은 데시데리아의 부재와 정치적 목적 때문에 선왕의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고 한다.[15] 데시데리아는 스웨덴어를 잘 몰랐지만 프랑스 출신이었고 당연히 언어는 데시데리아의 모국어이자 당대 상류층들의 교양어였던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16] 칼 15세, 오스카르 2세 등[17]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아내다.[18] 뷔르템베르크 국왕 프리드리히 1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아우구스테 공녀의 장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아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