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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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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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왕국 제임스 1세 & 6세의 왕비
덴마크의 아나
Anna af Danmark


파일:Anne_of_Denmark_by_Paul_Van_Somer.jpg

이름
덴마크어
덴마크의 아나
(Anna af Danmark)
영어
덴마크의 앤
(Anne of Denmark)
출생
1574년 12월 12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스칸데르보르 스칸데르보르 성
사망
1619년 3월 2일 (4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햄프턴 궁전
장례식
1619년 5월 13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제임스 1세 (1589년 결혼)
자녀
헨리 프레더릭, 엘리자베스, 마거릿, 찰스 1세, 로버트, 메리, 소피아
아버지
프레데리크 2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
형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안 4세, 울리크, 아우구스타, 헤드비그, 요한
서명
파일:Signature Anne Of Denmark.sv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유년기
3.2. 결혼
3.3. 결혼생활
3.4. 자녀와 육아
3.5. 잉글랜드의 왕비
3.6.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왕비.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차녀이며 크리스티안 4세의 손윗 누이다.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찰스 1세의 어머니이다.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Anne of Denmark.svg
문장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1574년 12월 12일에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의 딸로 태어났다. 프레데리크 2세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원했기에 첫 아이인 엘리자베트에 이어 또 딸이 태어나자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프레데리크 2세는 방종한 인물이었고 어린 왕비는 남편을 제어할 수 없었다. 대신 조피 왕비는 육아에 온 힘을 쏟았다. 조피는 당시의 다른 왕족 여성들과는 달리 아이들을 직접 돌보고 가르쳤다. 앤은 외가의 가정적인 환경 하에서 다방면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3.2. 결혼[편집]


1589년 7월에 14살의 앤은 9살 연상의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와 약혼했다. 제임스 6세는 엄격한 개신교도 군주였는데, 신붓감으로 마찬가지로 개신교도인 왕녀를 찾고 있었다. 개신교도이며 교육을 잘 받았고, 거기다가 스코틀랜드와 교역 관계에 있는 덴마크의 공주인 앤은 제임스 6세에게 있어 최적의 왕비였다. 처음에는 앤의 언니인 엘리자베트를 원했지만 엘리자베트는 이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작과 약혼한 상태였기에 앤이 제임스 6세의 아내로 낙점되었다. 앤은 얼굴도 보지 못한 남편의 셔츠를 수놓으며 앞으로 있을 결혼을 기대했다.

1589년 8월에 앤은 덴마크의 크론보르 성에서 대리로 결혼식을 치뤘다. 10일 후 배를 타고 남편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배가 폭풍우를 만나 앤과 신하들은 오슬로에 발이 묶였다. 대리 결혼식으로부터 약 한달 뒤에 소식을 들은 제임스 6세는 크게 놀라 전국적으로 앤의 안위를 위한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앤이 당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궁전에서 앤이 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렸다. 같은 해 10월, 앤은 제임스 6세에게 도저히 향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제임스 6세는 직접 수행원을 이끌고 앤을 맞이하러 떠났다. 1589년 11월 23일, 앤은 육로를 통해 오슬로에 도착한 제임스 6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결혼 후 부부는 덴마크에서 앤의 언니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1590년 5월 17일에 앤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3.3. 결혼생활[편집]


낭만적인 해프닝으로 시작한 결혼이었지만 앤과 제임스 6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면 앤은 성질이 불같고 승부욕이 강했으며 제임스 6세는 처음에는 앤의 성질을 받아주곤 했다. 그러나 제임스 6세는 점점 아내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게다가 앤은 사치스럽고 낭비벽이 있기에 이를 싫어한 제임스 1세가 이로 인해 자주 다투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아내와 이름이 같은 앤 머레이라는 정부를 두고 정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 앤 또한 이따끔씩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불행해진 데에는 제임스 6세의 동성애 성향 또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제임스 6세의 성적 지향은 오늘날까지도 의혹이 무성한데, 당시의 궁인들은 이때문에 국왕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떠들었다. 1594년에 앤이 첫 아이인 헨리 프레더릭을 낳자 비로소 소문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제임스 6세가 앤에게서 맏아들의 양육권을 빼앗으면서 부부의 사이는 본격적으로 악화되었다.

1600년에 고우리 백작 존 루스벤과 그의 동생이 제임스 6세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들켜서 처형당한 사건이 있었다. 고우리 백작의 동생이며 앤의 시녀였던 베아트리스와 바바라 루스벤 자매는 이 사건으로 인해 궁에서 해임되었다. 총애하는 시녀들이 쫓겨나자 앤은 제임스 6세에게 그녀들을 복직시키지 않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먹지도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당시 앤은 임신 6개월이었다. 제임스 6세는 어떻게든 아내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녀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앤은 완강했다. 결국 제임스 6세는 베아트리스 루스벤에게 연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도 부부관계는 나아지지가 않았고 앤과 제임스 6세는 자주 말다툼을 했다. 제임스 6세는 앤을 고집쟁이라고 하며 지겨워했고 앤은 제임스 6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불평했다.[1]

1607년에 앤이 막내 소피아를 낳고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부부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이후 제임스도 아내한테 질려서 아내를 멀리하였고 왕비의 처소로 찾아가지도 않아 부부는 별거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3.4. 자녀와 육아[편집]


부부는 사이가 나빴지만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식들 대부분은 요절하여 그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찰스 1세 뿐이었다.

앤은 첫 아이인 헨리 프레더릭의 양육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제임스 6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완전한 스코틀랜드인으로 키우고 싶어했기에 외국인인 왕비가 왕자의 교육에 개입할 수 없게 했다.[2] 제임스 6세는 왕세자의 양육을 맡을 여성을 구하고 마르 백작 존 어스킨의 보호 아래 아들이 스틸링 성에서 자라게 했다. 어머니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던 앤에게 이는 매우 부당한 일이었다. 앤이 지속적으로 아들의 양육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제임스 6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1603년에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로 떠났다. 앤은 이때를 틈타 아들의 양육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사전에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에게 막히게 되었다. 앤은 분노해 아이를 유산하였다. 후에 잉글랜드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들의 양육권은 인정해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3.5. 잉글랜드의 왕비[편집]


스코틀랜드에서 앤은 남편의 압박에 밀려 권력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주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곤 했다. 반면 앤은 런던 사교계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잉글랜드 귀족 사회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면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앤은 사적으로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남편의 의견을 따르며 현명하게 행동했다. 또한 대중들에게 자주 상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앤은 자주 문화 생활을 즐겼으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을 후원하는 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국의 여러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연극을 좋아해 자신이 직접 가면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앤이 왕비로 있는 동안 영국의 가면극이 매우 발전했다고 한다. 다만 문화 생활을 즐긴다고 돈을 많이 쓰는 바람에 이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과 갈등했다.


3.6. 말년[편집]


1612년에 장남 헨리 프레더릭이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아끼는 아들 헨리가 18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상심한 앤은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앤은 통풍으로 고생하며[3] 요양 생활을 했다. 앤은 점점 쇠약해져갔지만 제임스 6세는 여전히 싫어하여 아내가 병을 앓는 동안 세번 정도 그녀를 만났다. 대신 왕세자인 차남 찰스가 어머니를 자주 찾아갔으며,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1619년 3월 2일, 앤은 햄프턴 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제임스 6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나 아내의 죽음에 감정적으로 힘들어 했다고 한다. 같은 해 5월에 앤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 때 묘가 파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덴마크의 아나
(Anne of Denmark)
프레데리크 2세
(Frederick II)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프레데리크 1세
(Frederick I)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Anna of Brandenburg)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Dorotea of Saxe-Lauenburg)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마그누스 1세
(Magnus I, Duke of Saxe-Lauenburg)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타리나
(Catherine of Braunschweig-Wolfenbüttel)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
(Sophie of Mecklenburg-Güstrow)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
울리히 3세
(Ulrich III, Duke of Mecklenburg-Güstrow)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7세
(Albrecht VII, Duke of Mecklenburg)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Anna of Mecklenburg,
Duchess of Mecklenburg)

덴마크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zabeth of Denmark)
프레데리크 1세
(Frederick I)
포메른의 조피아
(Sophie of Pomerania)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데릭
(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
1594년 2월 19일
1612년 11월 6일

1녀
보헤미아의 왕비 엘리자베스
(Elizabeth, Queen of Bohemia)
1596년 8월 19일
1662년 2월 13일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슬하 8남 5녀[4]
2녀
마거릿 공주
(Princess Magaret)
1598년 12월 24일
1600년 3월

2남
찰스 1세
(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1649년 1월 30일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슬히 3남 4녀[5]
3남
킨타이어와 론 공작 로버트 왕자
(Prince Robert, Duke of Kintyre and Lorne)
1602년 1월 18일
1602년 5월 29일

3녀
메리 공주
(Princess Mary)
1605년 4월 8일
1607년 12월 16일

4녀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a)
1606년 6월 22일
1606년 6월 23일



5. 여담[편집]


대체적으로 왕의 총신들과 사이가 나빴지만 제임스 6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동성 애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 친밀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학식 높은 남편의 바가지를 긁는 경박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또한 낭비벽이 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조의 안 좋은 이미지와 찰스 1세의 어머니라는 점 때문에 실제보다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영국의 건축가 이니고 존스는 앤을 위해 영국의 왕실 주거지 중 하나인 퀸스 하우스를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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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1세는 국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는데 나중에가면 알코올 중독이 심해졌다.[2] 앤의 친가톨릭 성향을 경계해서 아들과 떨어트려 놨다는 주장도 있다.[3] 통풍이 심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다리까지 절게 될 정도였다.[4] 카를 1세 루트비히,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5] 찰스 2세, 제임스 2세,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