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노르웨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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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노르웨이
Danmark–Norge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Royal_Arms_of_King_Frederick_IV_of_Denmark_a.png
국기
국장

파일:덴마크-노르웨이(1780).svg

1523년 ~ 1814년
위치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
그린란드, 북해 여러 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수도
코펜하겐
인구
1600년 1,100,000명
덴마크 700,000명
노르웨이 400,000명

1700년 1,200,000명
덴마크 700,000명
노르웨이 500,000명

1800년 2,200,000명[1]
덴마크 1,200,000명
노르웨이 1,000,000명
공동 군주

주요 국왕
프레데리크 2세
크리스티안 5세
언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독일어
종족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종교
개신교
주요 사건
1523년 성립
1645년 브룀세브루 조약
1658년 로스킬레 조약
1660년 코펜하겐 조약
1679년 퐁텐블로, 룬드 조약
1814년 해체
통화
크로네
성립 이전
칼마르 동맹
해체 이후
덴마크,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언어별 명칭
덴마크어
Danmark–Norge
노르웨이어
Danmark–Norge
독일어
Dänemark-Norwegen

1. 개요
2. 역사
2.1. 프레데리크 1세 시대
2.1.1. 즉위와 반란 진압
2.2. 크리스티안 3세 시대
2.2.1. 백작 전쟁
2.2.2. 종교 개혁
2.2.3. 노르웨이 완전병합과 종교개혁
2.2.4.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 분봉 문제
2.2.5. 카를 5세와의 대립
2.3.1. 즉위와 팽창 정책
2.3.2. 스웨덴과의 북방 7년 전쟁
2.3.2.1. 리보니아의 상황
2.3.3. 전쟁의 시작
2.3.4. 덴마크의 육지 공세와 스웨덴의 바다 반격
2.3.5. 스웨덴 내 반란과 전쟁 종식
2.3.6. 후기 치세
2.4.1. 즉위 과정
2.4.2. 스웨덴과 칼마르 전쟁
2.4.3. 독일의 30년 전쟁 개입
2.4.4. 스웨덴과의 토르스텐손 전쟁
2.4.5. 말년 치세
2.5.1. 즉위 초 왕권 강화 노력
2.5.2. 제2차 북방전쟁 개입과 고전
2.5.2.1. 제2차 북방 전쟁 개입
2.5.2.2. 스웨덴의 1차 공격과 로스킬레 조약의 굴욕
2.5.2.3. 스웨덴의 2차 공격과 덴마크의 반격
2.5.2.4. 종전과 코펜하겐 조약 체결
2.5.4. 말년 치세
2.5.4.2. 올덴부르크 백국의 동군연합 성사
2.6.1. 즉위 초의 상황
2.6.1.1. 즉위 과정
2.6.1.2. 페데르 슈마케르의 두각과 몰락
2.6.1.3. 스코네 전쟁의 고전
2.6.1.3.1. 스코네 공격 실패
2.6.1.3.2. 강화 조약 체결
2.6.2. 덴마크와 스웨덴의 동맹
2.6.3. 스웨덴과의 관계 재악화와 내부 정비
2.6.3.1. 홀슈타인-고토르프 분쟁 및 스웨덴과의 관계 악화
2.6.3.2. 내부 정비
2.7.1.1. 반(反) 스웨덴 동맹 결성
2.7.1.2. 스웨덴의 반격과 덴마크의 전쟁 이탈
2.7.1.3. 스웨덴의 위기와 덴마크의 재참전
2.7.1.4. 덴마크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점령
2.7.1.5. 대북방전쟁의 종식
2.7.2.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병합
2.7.3. 사생활 문제
2.10.1. 정신적인 결함
2.10.2.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의 전횡
2.10.3. 율리아나의 대리 통치
2.10.4. 제1차 무장중립동맹 가입
2.10.5. 율리아나의 실각과 프레데리크 6세의 섭정 취임
2.10.5.1. 프랑스 혁명 전쟁과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의 결성
2.10.5.2. 제1차 코펜하겐 해전
2.10.5.3. 제2차 코펜하겐 해전
2.11. 프레데리크 6세의 즉위 이후
2.11.1. 스웨덴 왕위계승권 확보 실패
2.11.2. 대(對) 영국 전쟁
2.11.3. 덴마크-노르웨이의 동군연합 해체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이 이탈한 후 성립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동군연합 국가로 모든 기간에 올덴부르크 왕조가 지배했다.


2. 역사[편집]



2.1. 프레데리크 1세 시대[편집]



2.1.1. 즉위와 반란 진압[편집]


스칸디나비아의 세 나라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AD 1397년 이후 120여년간 칼마르 연합 상태의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고 덴마크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AD 1520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벌인 스톡홀름 대학살으로 인하여 스웨덴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스웨덴 귀족인 구스타브 바사가 AD 1523년 6월 6일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다만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동군연합 상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2세의 실정에 견디다 못한 유틀란트 귀족들이 AD 1523년 반란을 일으켜 크리스티안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숙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를 새로운 국왕 프레데리크 1세로 선출했다.

프레데리크 1세는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를 개창했던 크리스티안 1세의 차남으로서 아버지가 사망하고 형인 한스가 왕위에 오르자 AD 1482년 형과 함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공동 공작이 되었으나 AD 1490년 프레데리크 1세의 의사에 따라 한스와 공작령을 분할하였다. AD 1513년 한스가 사망했을 때 일부 유틀란트 귀족들이 프레데리크 1세에게 왕위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대다수 덴마크 귀족들이 한스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2세를 지지하는 것을 알고는 거절했다. 하지만 AD 1523년 유틀란트 귀족들이 크리스티안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덴마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들이고 AD 1524년 8월 코펜하겐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며 덴마크 왕으로 즉위했다. 다만 프리데리크 1세는 덴마크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고 즉위한 이후에도 여전히 슐레스비히의 고토르프 성에서 지냈다.

AD 1524년 유틀란트와 스코네에서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한때 덴마크 함대의 제독이었고 고틀란드의 총독으로 지내고 있던 쇠렌 노르비까지 가세하면서 기세가 거세졌다. 쇠렌 노르비는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된 후 프레데리크 1세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AD 1525년 4월 블레킹에에서 크리스티안 2세의 이름을 빌려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쇠렌 노르비의 반란군이 8천명으로 증가하여 헬싱보리의 체르나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프레데리크 1세가 파견한 요한 란차우의 토벌군이 도착하여 스코네의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쇠렌 노르비가 블레킹에를 거점으로 크리스티안 2세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덴마크와 스웨덴, 뤼베크를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이다가 AD 1526년 8월 덴마크-스웨덴-뤼베크의 연합 공격에 패배하여 루스 차르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2.1.2. 루터교 전파[편집]


프레데리크 1세는 즉위 당시에는 비록 스스로 로마 가톨릭의 근엄한 수호자라고 선언하였지만, 곧바로 자신이 주교 임명권[2]을 가진다고 선언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하였다.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3]와 로마교황청의 지원 아래 복위를 계속해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1세로서는 덴마크 내 가톨릭 세력이 크리스티안 2세에게 동조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당시 덴마크 내에서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귀족들은 주교가 교회법에 의한 재판으로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였고 농민들도 과도한 십일조 징수와 성직자 부족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1세는 당초 약속과 달리 덴마크 내 프로테스탄트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프레데리크 1세는 루터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가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있도록 명령했고, 성경에 대한 덴마크어 번역도 권장했다. 또한 AD 1526년 루터교의 종교개혁가인 한스 타우센이 이단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개인 사제로 임명하여 구명해 주었고 AD 1527년부터는 덴마크 28개 도시의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폐쇄시켰다. 그리고 같은해 개최된 오덴세 종교회의에서, 가톨릭교회에서 가톨릭의 보호와 루터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자, 프레데리크 1세는 '왕의 권력과 권위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며 사실상 덴마크 내에서 루터교의 포교를 묵인해주었다. 다만 프레데리크 1세의 뛰어난 협상력 덕분에 그의 치세 기간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심각한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2.2. 크리스티안 3세 시대[편집]



2.2.1. 백작 전쟁[편집]


AD 1553년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하자 당연히 그의 장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크리스티안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자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AD 1521년 신성 로마 제국의 보름스 회의에 참가하여 종교 개혁을 촉발시킨 마르틴 루터를 옹호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프로테스탄트였고 AD 1523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 된 뒤에는 자신의 영지에 이미 종교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크리스티안 3세의 프로테스탄트 성향에 대하여 덴마크의 통치를 담당하고 있던 국가 평의회(덴마크어 Rigsraadet)의 귀족들 대부분이 우려를 나타냈고 가톨릭 주교들도 가톨릭 신자 국왕을 세우기 위해서 크리스티안 3세 대신에 그의 이복동생인 한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3세를 지지하던 국가 평의회 의장인 모겐스 괴예가 AD 1534년 7월 국가평의회의 유틀란트 귀족 의원 8명과 유틀란트의 주교 4명을 소집하여 오랜 토론 끝에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크리스티안 3세가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가 투옥되어 있는 크리스티안 2세의 석방과 복위를 주장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백작 전쟁(Grevens Fejde)'이 시작되었다. 반란군에는 올덴부르크 뿐만 아니라 메클렌부르크, 셸란 섬, 스코네의 귀족들과 코펜하겐말뫼와 같은 도시들도 참여하였고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 탈환을 원하던 북독일의 뤼베크도 반란군을 지원했다.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는 셸란 섬의 링스테드에서 자체적인 국가 평의회를 개최하여 스스로를 크리스티안 2세의 권한을 위임받은 섭정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1534년 크리스티안 2세 시절 사략선을 지휘했던 클레멘 안데르센이 유틀란트 반도 북부의 올보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다.

크리스티안 3세는 부왕 시절부터 충성을 바쳐온 요한 란차우에게 토벌군을 맡겨 올보르의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에 요한 란차우는 AD 1534년 12월 올보르를 함락시켰고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벌여 최소한 2천명을 살해하였다. 이 때 반란군을 이끌던 클레멘 안데르센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달아났으나 며칠 뒤 올보르 동부의 농민에게 붙잡혀 요한 란차우에게 넘겨지면서 비보르에서 재판을 받고 AD 1536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요한 란차우는 유틀란트 북부의 반란을 모두 토벌하자 이번에는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가 있는 퓐 섬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당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이미 루터교를 스웨덴의 국교로 선포한 상태였기 때문에 덴마크의 루터교 확대를 위해서 크리스티안 3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스웨덴군을 스코네에 파견하여 스코네 귀족들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고 그 일대를 불태웠다. 이어서 할란드까지 진격하여 마찬가지로 폐허로 만들었고 AD 1535년 1월 헬싱보리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는 외레순 해협 동부에 위치한 덴마크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더욱이 퓐 섬으로 진격했던 요한 란차우와 AD 1535년 6월 왹스네베리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바다에서도 스웨덴 함대의 지원을 받은 덴마크 함대가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를 지원하던 한자동맹 함대를 물리쳤다. 비록 코펜하겐과 말뫼가 AD 1536년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수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모두 항복하면서 백작 전쟁이 종식된다.


2.2.2. 종교 개혁[편집]


백작 전쟁의 승리로 이제 크리스티안 3세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다만 백작 전쟁을 치르면서 크리스티안 3세가 자신의 영지인 홀슈타인을 비롯하여 독일 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치세 초기에는 한동안 그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안 3세의 초기 6년 동안 덴마크의 국가평의회와 독일 출신 자문관 사이의 알력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비록 덴마크 귀족들이 고위직을 덴마크 출신으로만 채워야 한다는 칙령을 받아내면서 대립이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지만 독일인 자문관들은 여전히 크리스티안 3세를 통해서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크리스티안 3세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가톨릭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덴마크의 국교를 루터교로 변경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톨릭 주교들의 특권을 축소하여 백작 전쟁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3세는 AD 1536년 8월 자신에게 반대하였던 주교 3명을 체포하였고 교회 영지를 몰수하여 백작 전쟁으로 인해 생긴 부채의 일부를 갚았다. 이에 따라 몰수된 영지 대부분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의 소유가 되었다. 나아가 크리스티안 3세는 루터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삼기 위해서 자신이 재결성한 코펜하겐 국가평의회를 통해서 AD 1536년 10월 30일 루터교를 국교로 승인했다.

이제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의 가톨릭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가톨릭 성당과 신학교가 문을 닫도록 했고, 종교개혁을 거부한 사제들은 추방하였다. 주교들도 감옥에 갇힌 채 독신 생활과 특권을 포기하도록 종용받았는데, 일부는 이를 수용하고 석방되었으나 나머지는 순교를 선택하였다. 이와 별도로 크리스티안 3세는 종교개혁을 위해서 이미 독일의 포메리아나 공작령에서 종교개혁을 이끈바 있었던 요한 부겐하겐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의 교회를 루터교로 재조직하였다. 예배 의식과 기도문을 루터교식으로 변경하였고 AD 1537년 코펜하겐 대학교를 루터교 대학교로 재편했으며, 성경덴마크어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AD 1550년 최초의 덴마크어 성경인 '크리스티안 3세 성경(Christian III Bible)'을 출간하게 된다.


2.2.3. 노르웨이 완전병합과 종교개혁[편집]


덴마크 왕이 겸임하고 있던 노르웨이는 크리스티안 3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니다로스 대주교인 올라브 엥엘브렉손이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라브 엥엘브렉손은 가톨릭 대주교로서 노르웨이에 종교 개혁이 추진되는 것을 방해하였고, 그의 사촌인 크리스토프 트론손이 해군 제독으로서 군권을 장악한 채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올라브 엥엘브렉손은 종교 개혁을 추진하는 크리스티안 3세의 노르웨이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추진했지만 실패하였다. 오히려 AD 1536년 덴마크의 국가평의회는 노르웨이를 덴마크에 병합시키겠다고 선언하였고, 노르웨이의 국가평의회 의원 중 빈첸스 룽에가 이를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이에 크리스토프 트론손이 빈첸스 룽에를 암살하고 올라브 엥엘브렉손과 함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재정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AD 1537년 3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4]가 덴마크와 3년 기한의 휴전에 동의하면서 노르웨이 반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올라브 엥엘브렉손를 비롯한 노르웨이 반란군 수뇌부들은 노르웨이를 떠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노르웨이 반란을 진압한 크리스티안 3세는 AD 1537년 공식적으로 대관식을 치르며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르웨이의 국정 운영을 위임받았던 국가평의회와 원로원을 폐지하였고 루터교노르웨이의 국교로 삼았다. 비록 이후에도 노르웨이의 전통적인 법률은 유지되었지만 이제 국정에 관련된 모든 결정이 덴마크에서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유지되던 자치권이 모두 폐지된 채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속주로 전락하게 된다.


2.2.4.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 분봉 문제[편집]


크리스티안 3세는 본래 자신의 영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이복동생인 한스 및 아돌프와 나누게 되었으나 이들이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직접 통치했다. 참고로 어머니가 다른 형제 중 막내 동생인 프레데리크는 루터교 성직자의 길을 가도록 했다. 이후 한스와 아돌프가 성년이 되면서 AD 1544년 크리스티안 3세가 동생들과 영지를 분할하고자 했지만 본래 홀슈타인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고 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우려한 지역 평의회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세 형제는 영지를 셋으로 나누지만 여전히 공동 정부로 묶어서 관리하고 세금 등의 수입을 삼등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세 명 모두 공식적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의 칭호를 사용했지만 세부적으로는 각자의 거점을 추가적으로 붙여서 한스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하데르슬레우 공작으로, 아돌프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으로 각각 칭하게 된다. 이후 AD 1559년 크리스티안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2세가 덴마크 왕위와 함께 영지를 상속받으면서 프레데리크 이제 2세가 한스 및 아돌프와 함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공동 공작이 되었지만 AD 1580년 한스가 후사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다시 아돌프와 프레데리크 2세가 한스의 영지를 공동 상속하였다.

AD 1586년 아돌프가 사망하고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2세와 동명인 자신의 아들 프레데리크 2세에게 영지를 상속시켜주면서 아돌프의 후손이 대대로 덴마크 왕과 함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공동 통치하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다만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은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 가문이면서도 영지의 통지에 대해 올덴부르크 왕조의 덴마크 왕에게 계속해서 간섭받는 것 때문에 반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장차 덴마크와 오랜 전쟁을 벌이게 되는 스웨덴과 오히려 우호 관계를 맺게 된다. 다만 비슷한 사례로써 AD 1564년 크리스티안 3세의 다른 아들인 한스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손더부르크 공작이 되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없이 단순히 수입을 분배받는 것에 그치면서 별도의 방계 가문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2.2.5. 카를 5세와의 대립[편집]


비록 크리스티안 3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종교개혁도 성공시켰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위협에 시달렸다. 카를 5세는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의 처남으로서 크리스티안 2세의 딸들의 권리를 통해서 크리스티안 3세의 덴마크 왕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크리스티안 3세는 외교적으로 카를 5세를 압박하기 위해서 카를 5세와 맞서고 있던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연합을 도모했다. 그리고 본래 크리스티안 2세가 스칸디나비아의 3개국 왕위를 모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딸들이 덴마크 뿐만 아니라 스웨덴 왕위도 요구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와 AD 1541년 브룀세브루 조약을 체결하고 카를 5세의 해상 공격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크리스티안 3세가 백작 전쟁에서 독일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서 독일 귀족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것도 역시 많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의 귀족 및 대영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것이 결실을 얻어서 AD 1542년 코펜하겐 의회에서 덴마크 귀족들의 수입 중 20분의 1을 제공받기로 결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크리스티안 3세는 독일에 대해 지니고 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하게 된다. 그러자 여유가 생긴 크리스티안 3세가 이제 카를 5세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비록 크리스티안 3세가 시도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의 연합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해상에서는 외레순 해협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카를 5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상선이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교역에 종사하면서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카를 5세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카를 5세 역시 네덜란드에게 재정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AD 1544년 크리스티안 3세와 카를 5세는 서로 슈파이어 조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 상선의 출입을 다시 허용하는 대신에 크리스티안 3세의 덴마크 왕위가 공인받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크리스티안 3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스웨덴과의 브룀세브루 조약과 카를 5세와의 슈파이어 조약을 통해서 주변과의 외교 관계도 우호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전쟁은 피했다. 이에 따라 AD 1546년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연합체인 슈말칼덴 동맹과 카를 5세 간에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개입하지 않았고 AD 1552년 다시 반란을 일으킨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AD 1553년 지버스하우젠 전투에서 전사하자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작센 선제후국 간의 중재를 맡기도 했다. 이후 독일에서는 AD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서 루터교가 공인받게 되었고 이로서 덴마크가 종교 문제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격을 받을 일도 사라졌다.


2.3. 프레데리크 2세 시대[편집]



2.3.1. 즉위와 팽창 정책[편집]


AD 1559년 크리스티안 3세의 뒤를 이어 덴마크 왕위를 상속받은 프레데리크 2세는 아버지와 달리 군사적인 야심이 컸다. 프레데리크 2세가 즉위했을 때의 덴마크는 크리스티안 3세의 효율적인 치세 덕분에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었고 노르웨이도 병합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2세의 목표는 스웨덴을 굴복시키며 옛 칼마르 동맹을 재건하고 발트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되었다. 프레데리크 2세의 첫번째 군사행동은 AD 1500년 이래 농민 공화국으로 유지되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디트마르셴이 그 대상이 되었는데 프레데리크 2세는 AD 1559년 여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서 자신까지 3대에 걸쳐 층성을 바치고 있던 요한 란차우를 파견하여 정복하였다. 그리고 다음 목표로 루스 차르국 및 리보니아 기사단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리보니아를 노리게 되지만 스웨덴의 에리크 14세도 리보니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과의 대립이 불가피해졌다.


2.3.2. 스웨덴과의 북방 7년 전쟁[편집]



2.3.2.1. 리보니아의 상황[편집]

본래 리보니아튜튼 기사단의 한 지부인 리보니아 기사단령이었지만 AD 1525년 튜튼 기사단이 해체되고 프로이센 공작령으로 재편되자 다시 분리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도르파트 주교령, 쿠를란트 주교령, 외젤-비크 주교령, 리가 대주교령과 함께 '리보니아 연방'을 형성하였으나 AD 1558년부터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에게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고 프레데리크 2세는 리보니아 근처의 발트해 연안의 외셀 섬을 점령했다. 그리고 AD 1559년 9월 외젤-비크 주교 요한 폰 뮌히하우젠으로부터 외젤-비크 주교령을 매입하고 자신의 동생인 홀슈타인 공작 망누스를 외젤-비크 주교로 임명해 이듬해 4월 외셀 섬의 병력을 이끌고 외젤-비크 주교령을 장악하도록 했다.

이후 AD 1560년 8월 에르메스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루스 차르국에게 대패를 당했기 때문에 리보니아 기사단장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AD 1561년 아예 기사단을 해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속국이 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리보니아의 서부와 남부를 '쿠를란트와 젬갈렌 공국'으로 재편하고 스스로 초대 공작이 되며 폴란드의 봉신이 되었다. 또한 리보니아의 동부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할양되었고 리가 대주교령은 신성 로마 제국자유도시로 남았다. 이제 남은 리보니아 북부를 덴마크가 노리기 시작했으나 핀란드를 통해서 국경이 인접해 있던 스웨덴군이 먼저 상륙하여 차지하였다. 이로서 리보니아 북부는 스웨덴의 영토인 '에스토니아 공국'으로 재편되었고 발트해 동부를 장악하려던 덴마크의 의도가 무너졌다.


2.3.3. 전쟁의 시작[편집]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이후에도 프레데리크 2세는 에스토니아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프레데리크 2세는 칼마르 동맹을 재건하려는 욕심에 스웨덴 왕실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3왕관 문장을 자신의 문장에 포함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도 덴마크-노르웨이 문장을 사용하면서 서로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이제 프레데리크 2세는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하였고 이에 앞서서 자신의 여동생인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와 매제인 핀란드 공작 요한이 투옥된 데 불만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발트해 무역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던 북독일의 뤼베크도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차지하고 루스 차르국과의 무역을 차단한 데 앙심을 품고 덴마크의 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에스토니아가 스웨덴령이 되면서 발트해로의 진출이 차단된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도 동맹을 체결했다.


2.3.4. 덴마크의 육지 공세와 스웨덴의 바다 반격[편집]


이렇게 외교적으로 스웨덴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프레데리크 2세는 전쟁의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AD 1563년 5월 보른홀름 섬 근처에 10척의 덴마크 함대와 19척의 스웨덴 함대 간의 전투가 벌어져 스웨덴이 승리했다. 이는 단순한 국지전에 불과했지만 독일의 중재안을 스웨덴이 거절하자 같은 해 8월 13일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2세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과의 본격적인 대결인 '북방 7년 전쟁'을 시작되면서 덴마크가 먼저 스웨덴 남서부의 앨브스보리 요새를 점령하고 할란드까지 진출하며 스웨덴의 서부 항로를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스웨덴은 그동안 북해로부터 얻고 있던 소금이 차단되었다.

당시까지 군사력을 비교하면 덴마크가 스웨덴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미 스웨덴 육군은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전쟁 수행 능력에 문제가 있음이 증명되었고 이에 그의 뒤를 이은 에리크 14세가 징집된 육군에 대하여 독일식 무기와 군제를 도입하였지만 여전히 덴마크가 고용한 독일 용병보다는 전투 능력이 뒤처졌다. 이 때문에 에리크 14세가 스웨덴 군을 직접 이끌고 할름스타드를 공격했지만 덴마크군에게 격퇴되었다. 또한 에리크 14세가 떠난 뒤에 스웨덴군은 AD 1563년 11월 마레드 전투에서 덴마크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였다.

바다에서도 잠시 전쟁의 소강 상태 이후 AD 1564년 5월에 벌어진 제1차 욀란드 해전에서 덴마크-뤼베크 동맹함대에게 야코브 바게의 스웨덴 함대가 패배하였지만 스웨덴 제독이 핀란드 출신의 클라스 호른으로 교체된 이후 스웨덴 해군은 전황을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AD 1564년 8월에 벌어진 제2차 욀란드 해전에서는 스웨덴 함대가 승리를 거뒀고 AD 1565년 5월 뤼겐 전투에서 스웨덴 함대가 승리를 거두며 북유럽 해안을 유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클라스 호른의 스웨덴 함대 49척이 덴마크-뤼베크 동맹함대 36척과 벌인 보른홀름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발트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그렇지만 육지에서는 여전히 덴마크 육군이 우세함을 보여줬다. 다니엘 란차우가 이끄는 덴마크군이 스웨덴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베스테르예틀란드까지 진격하였고 AD 1565년 10월 할란드의 팔켄베르그 근처에서 벌어진 액스토르나 전투에서 다시한번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하여 바다에서는 스웨덴군의 우위가, 육지에서는 덴마크군의 우위가 이어지는 상태가 유지되면서 전황이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웨덴 내부에서 에리크 14세에 대한 내부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쟁을 종식시킬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2.3.5. 스웨덴 내 반란과 전쟁 종식[편집]


스웨덴 에리크 14세는 즉위 초기부터 정신적으로 불안했는데 점차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AD 1567년 에리크 14세는 정신 착란을 일으켜 유력 귀족인 스투레 가문의 스반테 스투레와 그의 아들인 닐스, 에리크를 반역혐의로 처형했고 AD 1568년에는 평민 출신의 카린 몬스도테르와 결혼하였다. 이에 에리크 14세에 대한 스웨덴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에리크 14세의 동생인 요한 3세가 다른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킨 후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후 요한 3세가 북방 7년 전쟁을 포기하면서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중재를 받아 AD 1570년 슈테틴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슈체친 조약을 통해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위 요구를 포기하는 대신에 스웨덴으로부터 점령지를 모두 반환받고 앨브스보리 요새의 인질 석방의 대가로 15만 릭스달레르(스웨덴 화폐)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받기로 합의하였다. 이로 인해 스웨덴 사람들이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한 중과세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에 스웨덴의 요한 3세가 재원 마련과 중재에 대한 보답으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매각하기로 합의했지만 막시밀리안 2세가 스웨덴에게 약속했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면서 취소되었다.


2.3.6. 후기 치세[편집]


비록 프레데리크 2세는 스웨덴을 굴복시켜 칼마르 동맹을 부활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슈테틴 조약을 통해 북유럽과 발트해에서 덴마크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는 대북방전쟁이 벌어지는 AD 1720년까지 유지된다. 이후 프레데리크 2세는 덴마크의 전후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집중하여 귀족들에게 과세하고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를 징수하며 부족한 재정을 충당했다. 특히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는 덴마크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발트해를 어지럽히는 해적 소탕에도 나섰고 헬싱외르크론보르 성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프레데리크 2세는 발트해 무역을 장악하며 덴마크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도록 만들었으나 지나치게 사냥과 축제, 와인을 좋아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AD 1588년 프레데리크 2세가 과음을 원인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4세가 즉위하게 된다.


2.4. 크리스티안 4세 시대[편집]



2.4.1. 즉위 과정[편집]


크리스티안 4세는 AD 1588년 왕위에 즉위했지만 아직 나이가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닐스 카스, 크리스토페르 팔켄도르프, 페데르 뭉크, 외르겐 로센크란츠의 섭정단이 덴마크를 대리통치했다. 섭정단이 크리스티안 4세의 훈육도 관장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는 루터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소뢰 아카데미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의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와 수학, 항해술, 그림, 무용, 지휘통솔, 검술 등의 각종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AD 1596년 통치가능 연령에 도달하자 전통에 따라 '국왕 헌장(덴마크어 Haandfæstning)'에 서명하고 코펜하겐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대관식을 거행한 후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한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2.4.2. 스웨덴과 칼마르 전쟁[편집]


한편 AD 1587년 스웨덴의 요한 3세의 아들인 시기스문드 바사가 모계 혈통에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그문트 3세로 선출되었고 AD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까지 계승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가 아닌 가톨릭을 신봉했기 때문에 요한 3세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AD 1599년 지그문트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칼 9세로 즉위했다. 이후 칼 9세는 덴마크가 발트해와 북해 사이의 외레순 해협을 통제하면서 많은 통행료를 징수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의 라플란드를 통한 북해 항로의 개척에 나섰다. 그리고 AD 1607년 스스로를 "노르드란드의 라프족의 왕"이라고 선언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크리스티안 4세는 그 지역이 노르웨이 영토이고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가 자신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칼 9세가 이를 무시하자 AD 1611년 4월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전쟁을 주요 전장인 칼마르의 이름을 따서 '칼마르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제 크리스티안 4세는 세 방향으로 스웨덴에 대한 침공을 실시하여 크리스티아노펠에서 칼마르 방향으로, 할름스타드에서 옌셰핑 방향으로, 노르웨이에서 엘브스보리와 베스테르예틀란드 방향으로 각각 진격시켰다. 그리고 5월 1일 직접 6천명의 덴마크군을 이끌고 칼마르 요새에 도착하여 5월 26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칼 9세도 반격을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크리스티아노펠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크리스티안 4세는 칼마르에서 기병대를 우회시켜 스웨덴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또한 AD 1611년 여름 스웨덴군이 노르웨이의 옘틀란드와 헤리에달렌을 무혈입성했으나 AD 1611년 겨울이 다가오자 전투가 소강 상태가 되었고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AD 1611년 10월 20일 칼 9세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자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의 더 많은 지역을 정복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에 군대를 더욱 증강시켰고 이에 대하여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국경 지역을 습격했지만 AD 1612년 2월 11일 빗셰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승리를 거뒀다. 이제 덴마크 군이 스웨덴 공격을 재개하여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함락시켰고 노르웨이군도 반격에 나서서 AD 1612년 가을 다시 옘틀란드와 헤리에달렌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덴마크 군이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으나 스웨덴군의 초토화 작전과 게릴라전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덴마크군의 독일 용병들이 더이상의 종군을 거부하였다.

결국 스톡홀름 함락이 사실상 어려워졌고 칼마르 전쟁의 여파로 발트해 무역에 지장을 받은 잉글랜드네덜란드가 크리스티안 4세에게 강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크리스티안 4세도 2년이 넘는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난을 겪었기 때문에 AD 1613년 1월 20일 스웨덴과 크네레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칼마르 전쟁은 제한적이나마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고 스웨덴이 점령했던 노르웨이 영토를 모두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점령했던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스웨덴에게 되돌려주는 대신에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스웨덴도 외레순 해협에 대한 자유무역 권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칼마르 전쟁이 종식되면서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과의 분쟁을 끝내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세력 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던 독일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2.4.3. 독일의 30년 전쟁 개입[편집]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각 제후들이 반(半) 독립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AD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로마 교황의 권위를 앞세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제후들이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독일 제후들은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으로 나뉜 채 서로 맞서게 되었다. 비록 AD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았고 AD 17세기 초 각기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AD 1618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상속해온 또다른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에서 가톨릭 신자인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AD 1619년 11월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로 선출된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토벌에 나서면서 프리드리히 5세는 AD 1620년 11월 빌라호라 전투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의 가톨릭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채 보헤미아를 상실했고 AD 1623년에는 본래 영지인 팔츠 선제후국마저 상실한 채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편 덴마크 국왕은 AD 147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의 지위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이미 루터교를 국교로 선포한 덴마크가 큰 우호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4세 역시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길 원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서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위축되자 AD 1626년 스웨덴과 동맹을 맺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30년 전쟁에 전격적으로 참전하였다. 그렇지만 AD 1626년 8월의 루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고용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대패하면서 북독일로 후퇴해야만 했다.

AD 1627년 여름이 되자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가톨릭 동맹의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연합하여 북독일로 진격하였고 덴마크령인 홀슈타인 공작령을 넘어서 슐레스비히 공작령과 유틀란트 반도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비록 덴마크의 영토가 유틀란트 반도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군력이 부족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공세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지만 AD 1628년 볼가스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면서 북독일의 덴마크군은 모두 철수해야만 했다. 그러자 크리스티안 4세도 더이상의 전투를 포기한 채 AD 1629년 5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비록 뤼베크 조약을 통해 모든 실지를 회복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는 30년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의 위신이 크게 손상당하게 된다.


2.4.4. 스웨덴과의 토르스텐손 전쟁[편집]


AD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까지 30년 전쟁에 참여하였고 AD 1631년 9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AD 1632년 5월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스웨덴은 6세에 불과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외동딸인 크리스티나를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외무상(스웨덴어 Rikskansler)인 악셀 옥센셰르나를 중심으로 한 섭정단이 통치를 대행하며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육군 총사령관인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AD 1642년 11월 제2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30년 전쟁의 불리해진 전황도 역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크리스티안 4세는 30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외레순 해협의 통행세를 거듭 인상하며 스웨덴과 마찰을 빚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여유가 생긴 스웨덴이 AD 1643년 12월 전격적으로 덴마크를 공격하면서 스웨덴 군의 총사령관인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이름을 딴 '토르스텐손 전쟁'이 시작되었다. 덴마크는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육지에서는 30년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에게 고전하며 AD 1644년 2월 유틀란트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당하고 말았고 구스타브 호른의 또 다른 스웨덴군에게 할란드와 스코네도 빼앗겼다.

더구나 바다에서도 AD 1644년 7월 콜베르거하이데 해전에서 크리스티안 4세가 한 쪽 눈을 잃어버리는 부상을 당한 데 이어서 10월 13일 페마른 해전에서도 패배하면서 제해권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다만 크리스티안 4세가 왕위를 겸하고 있던 노르웨이 만이 분전을 거듭하여 크리스티안 4세의 사위인 한니발 세헤스테드[5]가 스웨덴의 서쪽 국경에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스웨덴 본군이 덴마크의 섬에 상륙하는 것만은 막아냈다. 그렇지만 전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AD 1645년 8월 굴욕적인 조건의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통해서 덴마크는 노르웨이의 옘틀란드, 헤리예달렌, 이드레, 세르나와 고틀란드, 외셀을 스웨덴에게 양도해야 했고 할란드는 30년 간이나 조차해 주어야 했다. 또한 스웨덴에게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를 완전 면제해주고 크리스티안 4세의 삼남인 프레데리크가 관리자로 임명받았던 브레멘 대주교령과 페르덴 주교령까지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스웨덴은 브레멘-페르덴을 세속 공작령으로 재편한 후 AD 1648년 30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 영유권을 공인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는 북방 7년 전쟁 이후로 그동안 유지하던 발트해의 제해권을 상실한 채 약소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2.4.5. 말년 치세[편집]


크리스티안 4세는 전쟁을 좋아했지만 패전만 거듭하면서 신뢰를 잃었다. 또한 재정 악화 때문에 귀족, 성직자, 상공인들로 구성된 의회(스웨덴어 Riksmöten)를 여러 차례 소집하면서 귀족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는 수많은 음악가와 예술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궁전을 호화롭게 만들었고 중상주의를 통한 상공업 육성도 노력했으며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크리스티안산, 스웨덴의 크리스티안스타드와 크리스티아노펠 등 수많은 도시도 세우는 등 내정에도 많이 힘썼다. 이렇게 내정과 외정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은 크리스티안 4세는 AD 1648년 50년이 넘는 장기간의 재위를 끝내고 사망하고 만다.


2.5. 프레데리크 3세 시대[편집]



2.5.1. 즉위 초 왕권 강화 노력[편집]


AD 1609년 프리데리크 3세는 덴마크 왕과 노르웨이 왕을 겸하고 있던 크리스티안 4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브레멘 대주교, 페르덴 주교, 할버슈타트 주교를 보좌하는 행정관이 되어 행정 업무의 소양을 쌓았다. 또한 독일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스웨덴과 벌인 토르스텐손 전쟁에서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 경험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 4세의 장남인 동명의 프레데리크가 태어나자마자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인 크리스티안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 역시 AD 1647년 6월 사망하면서 프레데리크 3세가 삼남이면서도 후계자가 될 수 있었고 이듬해인 AD 1648년 2월 크리스티안 4세가 사망하자 프레데리크 3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위를 모두 계승하게 되었다.

한편 이 당시 덴마크 국왕노르웨이 국왕을 겸직하는 동군연합이 이어졌지만 세습직인 노르웨이 왕위와 달리 정작 덴마크 왕위는 공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선출제였다. 그리고 '올덴부르크 왕조'를 개창한 크리스티안 1세 이후 모든 덴마크 국왕들은 귀족 특권의 보장과 왕권의 제한에 동의하는 '국왕 헌장(Haandfæstning)'을 서명해야만 즉위할 수 있었다. 국왕 헌장은 국왕이 즉위 이후 중앙 및 지방 통치에 대한 권한을 귀족들에게 위임하고 선전 포고 및 강화 조약 체결을 위해서는 귀족들의 승인을 받도록 하며 왕권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덴마크의 실질적인 통치는 고위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국가 평의회(덴마크어 Rigsraadet)'가 담당하고 있었다.

프레데리크 3세 역시 전통대로 국왕 헌장에 서명하고 11월 23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지만 즉위 이후 국왕 헌장에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추구하면서 국가 평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특히 국가 평의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그의 매제이기도 한 국가 평의회 의장 코르피츠 울펠트와 노르웨이 총독 한니발 세헤스테드와 크게 대립했다. 그리고 AD 1651년 코르피츠 울펠트가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 혐의로 프레데리크 3세의 자문관인 요겐 발테르를 체포하자 프레데리크 3세가 코르피츠 울펠트를 무고죄로 반격을 가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히려 코르피츠 울펠트는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고립된 한니발 세헤스테드도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을 받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노르웨이의 모든 재산도 왕실에 넘겼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청렴함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한니발 세헤스테드는 AD 1660년에 복권된다.


2.5.2. 제2차 북방전쟁 개입과 고전[편집]



2.5.2.1. 제2차 북방 전쟁 개입[편집]

즉위 초기 프레데리크 3세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크리스티안 4세가 호기롭게 참전했던 30년 전쟁과 토르스텐손 전쟁에 패배하면서 피폐해진 덴마크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특히 덴마크는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AD 1645년 8월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에게 노르웨이의 옘틀란드, 헤리에달렌, 이드레, 세르나와 고틀란드, 외셀의 영유권을 양도하고 페르덴 주교령과 브레멘 대주교령의 영유권까지 넘겼다. 그 뿐만 아니라 조약 이행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할란드도 30년 동안 조차를 해줘야 했고 덴마크 왕실의 주 수입원인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도 스웨덴에게는 면제해 주어야 했다.

그러던 중 AD 164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던 자포로제 카자크보흐단 흐멜니츠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AD AD 1653년 10월 루스 차르국이 자포로제 카자크를 자치령을 복속시키는 조건으로 '페레야슬라프 협정'을 체결한 후 참전하면서 자포로제 카자크의 반란이 폴란드-루스 차르국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AD 1655년 7월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며 제2차 북방 전쟁을 시작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대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프레데리크 3세는 이번 기회에 부왕인 크리스티안 4세가 스웨덴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AD 165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2.5.2.2. 스웨덴의 1차 공격과 로스킬레 조약의 굴욕[편집]

프레드리크 3세로서는 스웨덴군이 폴란드에 발이 묶인 틈을 노리고 제2차 북방 전쟁에 개입했으나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는 과감하게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삽시간에 덴마크의 내륙 영토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과 유틀란트 반도를 석권했다. 비록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바다 건너인 셸란 섬에 위치했기 때문에 당장은 큰 위협이 없을 줄 알았으나 AD 1657년 12월 기록적인 한파를 기록하며 소벨트 해협이 얼어붙자 칼 10세 구스타브가 과감하게 빙상도하를 통해 걸어서 바다를 건너 퓐 섬까지 장악해 버렸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어서 더 넓은 대벨트 해협 역시 빙상도하를 통해 AD 1658년 2월 8일 셸란 섬에 도착했다.

이후 코펜하겐을 포위당하자 프레데리크 3세가 굴복하여 AD 1658년 2월 26일 '로스킬레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프레데리크 3세가 모든 불리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스웨덴에게 이전의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으로 30년간 조차해 주었던 할란드를 이번에는 완전히 양도하고 그 밖의 덴마크 영토 일부(스코네, 블레킹에, 보른홀름 섬)와 노르웨이의 일부(부흐슬랜, 트론헤임)의 소유권도 넘겨야 했다. 마지막으로 스웨덴에게 적대적인 선박의 통과를 허용하지 말아야 했으며 스웨덴군의 덴마크 내 주둔 비용도 제공해야 했다.

한편 칼 10세 구스타브의 처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은 본래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로서 역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 덴마크 국왕과 함께 명목상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은 지리적으로 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속했고 홀슈타인은 독일에 속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었다. 더욱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두고 오랫동안 덴마크 국왕들과 대립했기 때문에 이미 1세기 동안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며 오히려 덴마크와 전통적인 적대 관계인 스웨덴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가 프레데리크 3세를 굴복시키면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은 공식적으로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


2.5.2.3. 스웨덴의 2차 공격과 덴마크의 반격[편집]

비록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굴욕을 감내했으나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번 기회에 아예 덴마크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AD 1658년 6월 로스킬레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덴마크를 전격적으로 재침공하여 코펜하겐을 다시 포위했다. 여전히 유틀란트 반도와 퓐 섬을 스웨덴군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3세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3세는 코펜하겐 시장 한스 난센을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거 덕분에 성문을 닫고 굳건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사이 덴마크를 지원 온 네덜란드 함대가 10월 29일 외레순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바다를 통한 보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AD 1659년 2월 22일 스웨덴군을 최종적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덴마크가 반격에 나서서 반(反) 스웨덴 동맹인 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폴란드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유틀란트 반도를 탈환했다. 그 밖에도 스코네, 블레킹에, 할란드에서 '스나프하네(snapphane)'라고 불리는 봉기군이 일어나 스웨덴군을 몰아냈고 노르웨이군도 트론헤임을 탈환했으며 보른홀름 섬에서도 주민 봉기가 일어나 지배권을 되찾았다. 또한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의 편으로 돌아섰던 동명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공격하여 퇴닝을 포위했고 AD 1659년 8월 그가 사망하면서 18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계승했다. 마지막으로 AD 1659년 11월 14일 뉘보르 전투(Battle of Nyborg)에서 네덜란드 해군 및 폴란드 육군의 도움을 받은 덴마크 해군과 육군이 스웨덴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프레데리크 3세는 퓐 섬도 되찾을 수 있었다.


2.5.2.4. 종전과 코펜하겐 조약 체결[편집]

결정적으로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AD 1660년 2월 13일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칼 11세가 불과 5살의 나이에 즉위하면서 스웨덴이 위기에 빠졌다. 어린 칼 11세를 보좌하기 위해서 구성된 스웨덴 섭정단이 서둘러 강화 협상에 나서면서 프레데리크 3세는 로스킬레 조약과 비슷한 조건으로 AD 1660년 5월 27일 '코펜하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른홀른 섬과 트뢰넬라그에 대한 영유권을 되돌려받는 대신에 스웨덴에게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렌, 벤 섬의 영유권을 양도하고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까지 면제해주면서 오늘날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2.5.3. 전제군주제 구축[편집]


프레데리크 3세는 호기롭게 제2차 북방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재정과 인력을 소모한 것치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무리지어야 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증세안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프레데리크 3세는 AD 1660년 9월 신분제 의회를 소집했다. 본래 덴마크는 왕권을 제한하는 국왕 헌장 때문에 귀족들의 권한이 매우 컸으나 스웨덴의 첫 번째 공격에서는 귀족들의 소극성 때문에 참패하면서 귀족들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오히려 스웨덴의 두 번째 공격을 코펜하겐 시민들의 활약으로 격퇴해 내었기 때문에 비귀족 계층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프레데리크 3세는 이러한 계층 간의 대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신분제 의회에 증세안이 상정되었을 때 귀족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부담하기를 기피하자 비귀족 계층이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고 더이상 덴마크의 통치를 귀족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며 국왕 헌장을 폐지하고 왕권을 강화하자는 프레데리크 3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따라 프레데리크 3세는 왕권을 제한하는 국왕 헌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더 이상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국가 평의회를 대신할 새로운 정부 형태의 구축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복권된 구 세력인 한니발 세헤스테드와 신흥 세력인 크리스토페르 가벨의 경쟁심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시켰고 AD 1665년 마침내 부유한 상인 출신인 페데르 슈마케르가 기초한 '국왕법(덴마크어 Kongeloven)'이 공포되면서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선언하는 데 성공했다.


2.5.4. 말년 치세[편집]



2.5.4.1. 제2차 영란전쟁 개입[편집]

AD 1665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간의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네덜란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주요 수입원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선이 잉글랜드 해협의 봉쇄로 인하여 멀리 북해를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마저도 잉글랜드 함대의 추격을 받는 위기에 처했지만 프레데리크 3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선이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피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에 대하여 잉글랜드가 거세게 항의하고 무력 시위까지 나섰지만 AD 1665년 8월 2일 덴마크 함대가 보겐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선은 17일 뒤 네덜란드로 무사히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2.5.4.2. 올덴부르크 백국의 동군연합 성사[편집]

본래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는 독일의 올덴부르크 백국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올덴부르크 왕조를 개창한 크리스티안 1세가 AD 1448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올덴부르크 백국은 AD 1450년 그의 동생인 게르하르트 6세가 물려받았으나 AD 1667년 안톤 귄터의 사망으로 올덴부르크 백작 가문이 단절되었다. 이후 올덴부르크 백국의 상속을 두고 프레데리크 3세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대립하였는데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상속권이 있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프레데리크 3세가 올덴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아 덴마크와 올덴부르크 백국 사이의 동군연합이 완성되었지만 이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친(親) 스웨덴 성향을 보이는 상태에서 올덴부르크 백국을 두고 대립했던 것은 훗날 프레데리크 3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5세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


2.6. 크리스티안 5세 시대[편집]



2.6.1. 즉위 초의 상황[편집]



2.6.1.1. 즉위 과정[편집]

프레데리크 3세는 AD 1650년 자신의 후계자로 장남인 크리스티안 5세를 지정했다. 다만 국왕 헌장이 아직 폐지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 지위가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5세는 크리스토페르 파르스베르그와 장기간 해외 여행을 떠났고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를 차례로 방문한 후 귀국길에 독일도 거쳤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티안 5세는 특히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베르사유 궁정에서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 크리스티안 5세는 AD 1663년 덴마크로 돌아왔고 AD 1665년 11월 국왕법이 제정되면서 절대 왕권과 왕위 세습제가 공식화되면서 크리스티안 5세도 공식적으로 왕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AD 1670년 2월 프레데리크 3세가 사망하자 그대로 덴마크-노르웨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크리스티안 5세가 국왕 헌장 폐지 이후 세습제로 즉위한 최초의 덴마크 국왕이 되었다.


2.6.1.2. 페데르 슈마케르의 두각과 몰락[편집]

본래부터 크리스티안 5세는 덴마크인에게 인기가 많았고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민들을 중용하던 부왕 프레데리크 3세의 정책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즉위 이후에 더욱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크리스티안 5세 시절에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평민은 프레데리크 3세의 국왕법을 기초했던 페데르 슈마케르였다. 그는 AD 1670년 크리스티안 5세에 의해 그리펜펠트 백작으로 임명받았고 AD 1674년에는 상급 자문관에 임명받으면서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페데르 슈마케르가 대외 정책을 총괄하면서 AD 1672년 5월에 발발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AD 1672년 ~ AD 1678년)의 참전 여부를 두고 크리스티안 5세와 마찰을 빚었다.

크리스티안 5세는 이번 기회에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4세와 아버지 프레데리크 3세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스웨덴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황제 레오폴트 5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네덜란드를 지원하자 스웨덴의 어린 왕 칼 11세를 대신하고 있던 섭정단이 프랑스의 부추김을 받아 브란덴부르크 군의 배후를 공격했으나 AD 1675년 6월 페르벨린 전투에서 오히려 패배하였다. 이에 고무된 크리스티안 5세가 스웨덴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려고 했으나 페데르 슈마케르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크리스티안 5세의 총애를 잃은 페데르 슈마케르는 AD 1676년 부정부패 혐의로 실각하고 사형까지 언도받았으나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노르웨이의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쓸쓸이 보내야 했다.


2.6.1.3. 스코네 전쟁의 고전[편집]


2.6.1.3.1. 스코네 공격 실패[편집]

AD 1675년 크리스티안 5세는 스웨덴을 공격하기에 앞서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를 공격하였다. 이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스웨덴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예전에 올덴부르크 백국을 두고 대립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했다. 결국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는 함부르크로 추방당했고 크리스티안 5세는 '렌츠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덴마크의 영토로 병합해 버렸다. 이후 덴마크군은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인 비스마르와 브레멘-페르덴 공국을 공격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지원하며 스웨덴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AD 1676년 6월 헬싱보리 근처에 상륙한 덴마크군이 스코네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덴마크와 스웨덴 간의 전쟁을 '스코네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덴마크의 공격에 대하여 스웨덴의 방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본래 덴마크 영토였던 스코네 사람들이 덴마크군의 입성을 환영했기 때문에 덴마크군은 손쉽게 스코네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 국왕 칼 11세가 무능한 섭정단을 해체하고 직접 통치에 나서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칼 11세가 할름슈타드 전투(AD 1676년 8월 17일)과 룬드 전투(AD 1676년 12월 4일), 란스크로나 전투(AD 1677년 7월 14일)에서 직접 스웨덴군을 이끌고 덴마크군에게 연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스코네의 상당 부분이 다시 스웨덴의 소유로 돌아갔다.


2.6.1.3.2. 강화 조약 체결[편집]

스코네에서의 전황과 달리 바다에서는 덴마크 함대가 스웨덴 함대에게 우위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군은 자유로운 증원이 가능하여 전쟁이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노르웨이군이 AD 1677년 6월 마르스트란 섬을 점령하고 이어서 보후슬렌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스웨덴은 남쪽과 서쪽이 모두 위험에 노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AD 1678년 10월 슈트랄준트의 함락을 마지막으로 스웨덴이 북독일 영토를 모두 상실했기 때문에 스웨덴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당초 스웨덴을 전쟁에 끌어들였던 프랑스가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중재에 나서면서 스코네 전쟁이 종식되었다.

다만 강화 조약은 스웨덴이 배제된 채 프랑스의 주도로 체결되면서 브란덴부르크는 AD 1679년 6월 29일 프랑스와 '생제르맹앙레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배상금과 프리슬란트 동부의 반환을 조건으로 오데르 강 동쪽의 골레니우프와 돔비에를 제외한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를 모두 반환했다. 또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도 프랑스가 무력 시위까지 앞세운 외교적 압력에 굴복하여 프랑스와 AD 1679년 9월 2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하고 모든 점령지를 스웨덴에게 반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추방당했던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에게도 전쟁 배상금을 지불받는 조건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되돌려 주어야 했다.


2.6.2. 덴마크와 스웨덴의 동맹[편집]


비록 프랑스의 중재로 모든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웨덴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AD 1679년 9월 26일 스웨덴과 덴마크는 별도의 '룬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퐁텐블로 조약의 영토 반환을 재확인했지만 네덜란드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서 덴마크와 스웨덴 간의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보증하기 위해서 AD 1680년 크리스티안 5세의 누이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스웨덴의 칼 11세 간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의 우호 관계는 불과 10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2.6.3. 스웨덴과의 관계 재악화와 내부 정비[편집]



2.6.3.1. 홀슈타인-고토르프 분쟁 및 스웨덴과의 관계 악화[편집]

비록 AD 1679년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돌아왔지만 AD 1682년 덴마크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큰 위기 의식을 느끼고 다시 함부르크로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는 당초 약속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크리스티안 5세는 다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제 크리스티안 5세가 AD 1686년 8월 함부르크까지 공격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개입하자 물러나야 했다.

이후 AD 1688년 프랑스의 팔츠 선제후국 공격으로 9년 전쟁이 촉발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대동맹을 결성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네덜란드 공화국, 잉글랜드 왕국이 배후의 안전을 위해서 홀슈타인-고토르프 분쟁에 대하여 중재에 나섰다. 이에 따라 AD 1689년 '알토나 조약'이 체결되고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스웨덴의 칼 11세가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를 지지했기 때문에 덴마크와의 10년 간 유지되었던 우호 관계가 깨졌다.


2.6.3.2. 내부 정비[편집]

크리스티안 5세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둘러싼 분쟁이 끝난 이후 유럽의 대동맹 전쟁에는 중립을 지키며 관여하지 않은 채 내부 정비에 몰두했다. 그리고 부왕 프레데리크 3세 시절부터 시작된 절대왕정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동안 유틀란트 반도와 셸란 섬으로 구분하여 적용되고 있던 시대착오적인 지방법을 폐지하고 AD 1683년 덴마크 전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법률인 '덴마크 법(덴마크어 Danske Lov)을 공포했다. 이는 AD 1687년 '노르웨이 법(노르웨이어 Norske Lov)'으로도 이어진다. 또한 정확한 토지세 부과를 위해서 AD 1688년 부동산 등기제를 도입했다. 크리스티안 5세는 개인적으로 과학에 대한 지식과 흥미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 올레 크리스텐센 뢰머를 후원하여 그가 빛의 유한한 속도를 처음으로 측정하는 것에 기여하기도 했다.


2.7. 프레데리크 4세 시대[편집]



2.7.1. 대북방전쟁[편집]


대북방전쟁 문서를 참고하셔도 됩니다.

2.7.1.1. 반(反) 스웨덴 동맹 결성[편집]

AD 1697년 스웨덴의 칼 1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칼 12세가 불과 14살의 나이에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자 이를 기회로 크리스티안 5세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종주권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덴마크 해군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육군도 주로 용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전투 수행능력은 상당히 강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5세가 AD 1699년 8월 사냥 도중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프레데리크 4세가 덴마크-노르웨이 왕위를 계승하고 스웨덴과의 전쟁도 함께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덴마크, 작센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간에 반스웨덴 동맹이 결성되었다. 덴마크가 스웨덴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아우구스트 2세와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발트 스웨덴의 발트해 영토를 넘보고 있었다. 본래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들의 선거로 군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던 만큼 스웨덴령인 리보니아를 자신의 베틴 가문의 영지로 삼아 왕권을 강화시킬 야심을 품고 있었다. 또한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는 서유럽식 개혁을 추진하면서 발트해를 통한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 스웨덴에게 빼앗긴 잉에르만란드를 되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3개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AD 1699년 11월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근교에서 '프레오브라젠스코예 조약(Treaty of Preobrazhenskoye)'이 체결되고 덴마크, 작센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간의 반(反) 스웨덴 동맹이 결성되면서 대북방전쟁이 시작되었다.


2.7.1.2. 스웨덴의 반격과 덴마크의 전쟁 이탈[편집]

이제 프레데리크 4세는 AD 1700년 3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공격하여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가 있는 퇴닝을 포위했다. 비슷한 시기에 아우구스트 2세도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하여 리가를 포위했다. 그러나 스웨덴 함대가 덴마크의 외레순 해협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스웨덴 육군 10,000명을 셸란 섬이 상륙시키면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전년도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독립을 보장한 바 있었고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려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AD 1701년 ~ AD 1714년)이 임박하여 발트해까지 전쟁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도 덴마크로 향하여 스웨덴 함대와 함께 7월 20일부터 26일까지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이에 놀란 프레데리크 4세가 강화 협상을 제안하자 일단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가 물러났다. 그리고 AD 1700년 8월 '트라벤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가 스웨덴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스웨덴의 적대국과도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덴마크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으로부터 전쟁 배상금으로 260,000 라이히스탈러(Reichstaler; 은화)을 지급받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는 대북방전쟁에서 이탈했고 칼 12세는 스웨덴군을 이끌고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떠났다. 그리고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도 AD 1700년 10월 잉그리아로 들어가 나르바를 포위하면서 대북방전쟁의 전장이 발트해 동부 지역으로 옮겨졌다.


2.7.1.3. 스웨덴의 위기와 덴마크의 재참전[편집]

이후 프레데리크 3세는 평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개혁에 나섰다. 먼저 군제 개혁에 나서서 기존의 용병 의존에서 벗어나 농민 징집병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또한 AD 1702년에는 농노제의 일종인 셸란 섬의 보르네스카브(Vornedskab) 제도를 폐지했다. 그 사이 대북방전쟁은 칼 12세가 승승장구를 하면서 스웨덴령 리보니아에서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고 AD 1700년 11월 30일 나르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 후 폴란드에 상륙하여 아우구스트 2세를 작센 선제후국으로 몰아내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로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로 세웠다. 하지만 칼 12세가 AD 1709년 6월 27일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1세의 루스 차르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모든 병력을 잃고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는 길까지 차단당하자 루스 차르국군의 추격을 피해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에 고무된 프레데리크 4세는 스웨덴과 체결한 트라벤달 조약을 파기한 후 AD 1709년 6월 아우구스트 2세와 다시 동맹을 맺기 위하여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8월에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로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자리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2세는 10월 9일 표트르 1세와도 '토른 조약'을 체결하며 동맹을 재건했다. 또한 프레데리크 4세는 10월 22일 표트르 1세와 '코펜하겐 조약'을 체결하면서 덴마크, 루스 차르국, 작센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간의 반(反) 스웨덴 삼각 동맹이 부활하였다.


2.7.1.4. 덴마크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점령[편집]

이제 덴마크군이 AD 1709년 11월 2일 헬싱보리에 상륙했고 12월까지 란스크로나와 말뫼를 제외한 스코네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고 스웨덴 함대의 핵심 기지인 칼스크로나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롭게 신병을 모집한 스웨덴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AD 1710년 2월 헬싱보리 전투에서 스웨덴 장군 망누스 스텐보크에게 패배한 채 스코네의 점령 지역을 다시 상실했고 3월 5일 헬싱보리마저 포기하며 철수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덴마크의 스코네 점령 시도는 다시 한번 좌절되었지만 AD 1713년 덴마크 군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재점령 시도는 성공했다.

이 당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은 공작인 프리드리히 4세가 AD 1702년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가 불과 2살의 나이에 공작이 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섭정이 된 카를 프리드리히의 모후인 스웨덴의 공주 헤드비그 소피아는 대북방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북독일의 스웨덴령 공격을 위해 덴마크군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지나는 것도 허용했지만 덴마크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AD 1713년 덴마크군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공격했고 AD 1714년 2월 퇴닝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AD 1715년이 되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대부분이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2.7.1.5. 대북방전쟁의 종식[편집]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이 위기에 몰리자 이제는 프로이센 왕국하노버 선제후국까지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AD 1701년 1월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그 1세는 AD 1714년 8월 영국 왕위를 계승하고 조지 1세로 명명되면서 하노버와 영국 간의 동군연합이 된 상태였다. 참고로 AD 1707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탄생했으나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영국(英國)'으로 부른다. 프로이센은 스웨덴령 포메른슈테틴을 노렸고 하노버는 또 다른 스웨덴령인 브레멘-페르덴 공작령을 원하고 있었다.

비록 AD 1714년 11월 오스만 제국에 억류되어 있던 칼 12세가 탈출하여 북독일의 스웨덴령인 슈트랄준트에 돌아오는 데 성공했지만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칼 12세가 스웨덴 본국으로 탈출하였고 슈트랄준트는 12월 24일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비스마르마저 함락당하면서 스웨덴은 북독일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절치부심한 칼 12세가 AD 1716년 3월 노르웨이를 공격했지만 노르웨이군의 지연전에 말려들면서 보급난 때문에 후퇴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12세는 포기하지 않고 AD 1718년 가을 재차 노르웨이를 공격했지만 프레드릭스할[6] 공격하던 중 정찰을 위해 나섰다가 저격을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국왕까지 잃은 스웨덴은 더 이상 항거할 힘을 상실했다. 더구나 칼 12세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그의 누이인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이자 차기 헤센카셀 방백국의 상속 예정자인 프리드리히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AD 1720년 3월에는 아예 왕위까지 넘겼다. 프레드리크 1세는 대북방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강화 협상을 벌여 하노버에게는 브레멘-페르덴 공작령을, 프로이센에게는 슈체친을 비롯한 스웨덴령 포메른 남부 지역을 각각 넘겼다. 또한 루스 차르국에게도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잉그리아, 카리알라켁스홀름비보리를 모두 양도했다. 덴마크도 스웨덴과 AD 1720년 7월 '프레데릭스보르 조약'을 체결하고 슈트랄준트를 비롯한 북독일의 모든 스웨덴 영토를 반환하는 대신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고 그동안 스웨덴이 누렸던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 면제 특권을 폐지하기로 했다.


2.7.2.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병합[편집]


이와 별도로 프레데리크 4세는 그동안 스웨덴이 보여주었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차단하는 성과를 거뒀다. 스웨덴도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스웨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발했기 때문에 그를 반란자 취급하며 앞으로는 지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에 프레데리크 4세는 그동안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 덴마크 왕들과 함께 공동으로 겸하고 있던 슐레스비히 공작 지위를 박탈하고 슐레스비히를 공식적으로 덴마크의 영토로 병합했다. 다만 홀슈타인은 공식적으로 독일에 속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4세도 이를 박탈하지는 못한 채 공식적으로는 카를 프리드리히와 공동 작위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홀슈타인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카를 프리드리히는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하였다. 둘은 AD 1727년이 되어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안나 페트로브나는 아들 카를 페테르 울리히를 낳고 사망하지만 카를 페테르 울리히는 모계 혈통에 따라 훗날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3세로 즉위한다. 또한 카를 프리드리히는 스웨덴의 왕위 계승에는 실패했지만 스웨덴의 프레드리크 1세가 AD 1751년 적장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카를 프리드리히의 5촌 당숙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로 인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가문은 가문의 영지 자체는 대부분 상실했지만 러시아와 스웨덴의 왕위를 이어받는 형태로 유럽의 대표적인 왕가 중 하나가 되었다.


2.7.3. 사생활 문제[편집]


프레데리크 4세는 대북방전쟁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최종적으로 슐레스비히 병합에 성공한 후 더 이상은 전쟁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AD 1721년 한스 에게데가 지금의 누크인 고드호프를 세우면서 그린란드에 대한 식민지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4세는 사생활에서 문제를 드러냈는데 왕비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와 AD 1695년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AD 1703년 프로이센 출신의 관료인 아담 오토 폰 피레크의 딸인 엘리자베트 헬레네 폰 피레크와 중혼하였으나 AD 1704년 사망했다. 이후 프레데리크 4세는 AD 1712년 레벤틀로 백작 콘라드의 딸인 안나 소피이 레우엔틀로프와 다시 중혼하였다. 그리고 AD 1721년 왕비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가 사망하자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나 소피아를 왕비로 승격시켰다.


2.8. 크리스티안 6세 시대[편집]


AD 1730년 프레데리크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첫번째 왕비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로부터 얻은 아들인 크리스티안 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미 프레데리크 4세가 슐레스비히를 성공적으로 병합하였고 크리스티안 6세도 스웨덴, 영국, 프랑스와 외교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6세는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역사상 단 한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다만 비록 크리스티안 6세가 성실하고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엄격하고 보수적인 정치를 추구했기 때문에 덴마크인으로부터 그리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크리스티안 6세는 효과적으로 농민들을 병사로 징집하기 위해서 AD 1733년 '농민 귀속법(덴마크어 Stavnsbånd)'을 제정했는데 징집된 농민들이 나중에 자신이 태어난 귀족의 영지로 되돌아가게 만들면서 농민들을 토지에 예속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농노제를 부활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또한 크리스티안 6세가 통치하는 동안 덴마크의 교역과 상업이 발전하였지만 정작 크리스티안 6세가 개인적으로 화려한 것을 선호하여 치세 중에 크리스티안스보르(Christiansborg) 성, 히르슈홀름(Hirschholm) 궁전, 에르미타주(Hermitage) 사냥용 별장 등의 화려하고 값비싼 건물을 잇달아 지으면서 덴마크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2.9. 프레데리크 5세 시대[편집]


AD 1746년 크리스티안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프레데리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프레데리크 5세는 경건주의에 심취했던 부왕 크리스티안 6세와 달리 쾌락주의자였다. 더욱이 AD 1751년 12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딸인 왕비 루이제가 사망한 뒤에는 술과 여자에만 몰두하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통치의 대부분을 신하들에게만 맡겼으나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요한 하르트비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하인리히 카를 폰 시멜만와 같은 각료들이 유능하여 별다른 무리없는 통치가 이루어졌다. 특히 AD 1756년 프로이센 및 하노버-영국 동맹과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동맹 간의 대결인 7년 전쟁이 발발하여 유럽의 대부분이 전쟁에 휩싸였으나 덴마크는 중립을 유지한 덕분에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런데 AD 1761년 12월 25일 러시아의 여제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자격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카를 페테르 울리히가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 표트르 3세로 즉위하면서 덴마크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표트르 3세는 7년 전쟁의 유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오히려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명목상 지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회복하고 덴마크가 병합한 슐레스비히까지 되찾기 위해서 덴마크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표트르 3세가 불화를 겪고 있던 부인인 예카테리나의 정변에 의해 AD 1762년 6월 28일 폐위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표트르 3세는 살해당했고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새로운 여제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하면서 덴마크는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2.10. 크리스티안 7세 시대[편집]



2.10.1. 정신적인 결함[편집]


AD 1766년 1월 프레데리크 5세가 불과 42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크리스티안 7세가 덴마크-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7세는 어머니 루이제를 일찍 잃었고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가 방탕한 생활에만 몰두하며 그의 교육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가정교사 레벤틀로프 백작 크리스티안 디틀레브 프레데리크의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에 방치되었다. 이로 인해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고 AD 1766년 11월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누이인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2.10.2.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의 전횡[편집]


크리스티안 7세는 AD 1768년부터 AD 1769년부터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 의사로 수행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총애하여 그를 궁정의사로 임명했다. 이후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가 덴마크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고 AD 1770년 12월에는 추밀원 자문관으로 임명되며 실질적인 덴마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심지어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AD 1770년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의 애인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16개월 동안을 '슈트루엔제 통치기'라고 부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언론의 자유, 농민 부역 동원 축소, 사법 제도의 통일, 코펜하겐 자치 정부 개혁 등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의 전횡이 이어지면서 많은 반대파가 생겨났고 크리스티안 7세의 계모인 율리아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이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AD 1772년 1월 율리아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의 압력에 따라 크리스티안 7세가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와의 간통 혐의로 체포했고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AD 1772년 4월 사망했다. 또한 캐롤라인 마틸다도 이혼당한 채 영국 하노버 왕조의 독일 영지인 첼레 성으로 쫓겨난 후 AD 1775년 사망했다.


2.10.3. 율리아나의 대리 통치[편집]


이후 여전히 정신병에 시달리는 크리스티안 7세를 대신하기 위해서 율리아나는 자신의 아들이자 크리스티안 7세의 이복 동생인 프레데리크 왕자를 섭정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총리인 오베 회그-굴드베르의 보좌를 받으며 율리아나가 직접 맡았다. 율리아나와 오베 회그-굴드베르은 보수 반동 정치를 펼치면서 귀족 특권을 부활시켰다. 또한 율리아나가 AD 1779년 왕실 도자기 공방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이다.


2.10.4. 제1차 무장중립동맹 가입[편집]


AD 1775년 영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게 펼친 중과세 정책이 문제가 되어서 북아메리카 대륙 13개 식민지미국으로 독립하게 되는 미국 독립 전쟁(AD 1775년 ~ AD 1783년)을 시작하자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해상을 봉쇄하고 중립국 선박까지 포획하기 시작했다. 이에 AD 1778년 중립국인 스위스가 도움을 호소하자 이듬해인 AD 1779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무기와 군수물자 수송이 아닌 한 중립국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AD 1780년 8월 덴마크와 스웨덴이 호응하면서 덴마크와 동군연합인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는 핀란드까지 가담하는 '제1차 무장중립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덴마크가 영국과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제1차 무장중립동맹 자체는 AD 1781년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포르투갈 왕국이 참여하고 AD 1782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AD 1783년에는 나폴리-시칠리아 왕국까지 참여하면서 계속 확대되었다. 그리고 제1차 무장중립동맹은 AD 1783년 미국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는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해산되었다.


2.10.5. 율리아나의 실각과 프레데리크 6세의 섭정 취임[편집]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프레데리크 6세는 왕위계승권을 보유했지만 그동안은 너무 어려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AD 1784년 16세가 되면서 공식적인 통치 가능 연령에 도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프레데리크 왕자가 명목상 섭정 지위에서 물러나고 율리아나가 실각하는 대신에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이 되었다. 비록 공식적인 왕위 즉위는 크리스티안 7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하는 AD 1808년 3월이 되어서야 이루어지지만 이 때부터 프레데리크 6세가 사실상 덴마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2.10.5.1. 프랑스 혁명 전쟁과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의 결성[편집]

AD 1784년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크리스티안 7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이 되었을 때 덴마크는 동군연합인 노르웨이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포함하여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일부 해외 식민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프레데리크 6세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AD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발발한 프랑스 혁명 전쟁에 대한 대처였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AD 1793년 ~ AD 1797년)에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왕국, 사르데냐 왕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으로 이루어진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협공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이겨내고 새롭게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활약한 덕분에 사실상 승리했다.

그렇지만 AD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오스만 제국령인 이집트로 원정을 떠난 사이 합스부르크 제국, 영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새로운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가 공동의 적인 프랑스를 두고 함께 싸우게 되었으나 영국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점령했던 몰타를 탈환한 후 그대로 차지하면서 명목상 몰타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와 불화가 발생했다. 더욱이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안을 봉쇄하면서 프랑스산 밀수품을 실어나르는 중립국 선박까지 무차별적으로 나포하자 이에 반발한 러시아의 파벨 1세가 중립국 선박의 보호를 위해서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주창하자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이 가담했다. 이로 인해 덴마크는 다시 영국과 대립 관계가 되었다.


2.10.5.2. 제1차 코펜하겐 해전[편집]

영국은 함대 건조를 위한 목재와 항해 물품들을 주로 스칸디나비아에서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또한 당장은 덴마크가 중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장차 프랑스의 위협에 굴복할 경우 덴마크-노르웨이 함대가 프랑스의 편으로 돌아설 우려가 있었다. 이에 AD 1801년 초 영국 함대가 겨울 동안 얼어붙은 발트해가 녹아 크론시타트레발러시아 제국 해군 발트함대가 활동을 하기 전에 서둘러 덴마크와 스웨덴의 함대를 먼저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만일 러시아 함대가 나설 경우 덴마크, 스웨덴의 함대를 합치며 전열함만 123척이나 되어 천하의 영국 해군도 고전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함대의 총지휘는 하이드 파커가 맡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중 나일 강 해전에서 승리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퇴로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해진 호레이쇼 넬슨이 부제독이 되었다.

하이드 파커가 받은 명령은 덴마크를 위협하여 우선적으로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에서 이탈시키고 다음으로 크론시타트와 레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중한 하이드 파커는 단순히 발트해 봉쇄에 나서고자 했지만 호레이쇼 넬슨의 적극적인 설득에 따라 코펜하겐의 덴마크 함대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당장은 역풍 때문에 스웨덴 함대가 나서기 힘들었고 또 다른 제2차 무장 중립 동맹 가맹국인 프로이센은 해군력이 미비하여 덴마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AD 1801년 3월 30일 영국 함대는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좁은 해로를 통과할 때 덴마크의 해안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덴마크 해안에서 멀리 항해했으나 운좋게도 스웨덴의 해안도 기지도 침묵을 지켰다. 다만 하이드 파커는 얕은 해역 때문에 호레이쇼 넬슨에게 출수가 얕은 전열함 12척과 함대의 모든 소형함을 맡긴 채 전진하도록 했다.

호레이쇼 넬슨은 코펜하겐의 덴마크 방어선이 굳건하다는 정찰 결과를 보고받자 좀더 약한 지점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4월 2일 제1차 코펜하겐 해전이 시작되었고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영국 함대의 총지휘를 담당해야 하는 하이드 파커는 흘수가 깊은 전열함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포연이 자욱하여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에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도록 명려하는 신호기를 올렸으나 정작 호레이쇼 넬슨은 예전에 입은 부상으로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망원경을 대며 자신은 신호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리고 전투를 이어갔고 영국 포병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영국 함대가 승리하였다. 이에 덴마크가 어쩔 수 없이 강화협상에 나서면서 [7]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이탈하고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지금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도 영국에게 양도했다.


2.10.5.3. 제2차 코펜하겐 해전[편집]

덴마크는 제1차 코펜하겐 해전의 패배으로 인해 많은 함선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틀란트 반도, 노르웨이, 그린란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아이슬란드, 기타 도서 지역을 지킬수 있는 상당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 육군의 대부분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남쪽 국경에 집중해 있었다. 이즈음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AD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프랑스어 Coup d'État du 18 Brumaire)'로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서 AD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한 상태였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는 AD 1802년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며 잠시 휴전에 동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국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영국은 AD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나폴리 왕국 등과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호레이쇼 넬슨이 전사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나폴레옹 1세가 AD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을 대파하였다. 그리고 AD 1806년 9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다시 결성되었으나 나폴레옹 1세는 AD 1806년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대파한 데 이어서 프로이센을 지원 온 러시아 제국군도 AD 1807년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후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동맹이 됐기 때문에 영국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한편 나폴레옹 1세가 트라팔가르 해전의 대패 이후 영국에 대한 무력 정벌이 어려워지자 AD 1800년 11월 프랑스와 위성국, 동맹국에게 영국과의 교역을 중단시키는 '베를린 칙령'을 공포한 데 이어서 AD 1807년 12월에는 중립국에게도 영국과의 교역을 중단시키는 '밀라노 칙령'까지 공포하며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이를 통칭하여 '대륙 봉쇄령'이라고 부른다. 비록 덴마크는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가 이미 네덜란드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영국이 보기에는 덴마크가 프랑스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 시간 문제로 보였다. 영국으로서는 덴마크가 방해할 경우 유일한 동맹으로 남아 있는 스웨덴과의 교역마저 차단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AD 1807년 7월 18일 영국은 덴마크 함대가 프랑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미명 아래 덴마크의 모든 함선을 영국에게 넘기도록 요구했다. 동시에 덴마크를 압박하기 위해서 제임스 갬비어가 지휘하는 50척의 함대가 출발했고 이튿날 슈틀란준트에 주둔 중인 윌리엄 캐스카트에게도 외레순 해협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7월 30일 영국이 파견한 프랜시스 잭슨이 덴마크에 도착하여 덴마크 함대를 영국에게 넘긴다면 대신 영국 함대가 덴마크를 보호하고 덴마크의 방어에 필요한 충분한 숫자의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금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7월 31일 나폴레옹 1세도 외무장관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통해서 덴마크에게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면 홀슈타인을 침공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프레데리크 6세는 영국과 프랑스의 상반된 설득 속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를 영국에서는 사실상 자신들에게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8월 16일부터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제2차 코펜하겐 해전이 시작됐다. 비록 제1차 코펜하겐 해전에서 덴마크에게 패배를 안겨준 호레이쇼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한 상태였지만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의 또 다른 영국의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는 아서 웰즐리가 예비대를 이끌고 8월 26일 덴마크와의 전쟁에 파견되었다. 8월 29일 영국군이 코이에의 개울에서 덴마크 군을 압도했고 영국 함대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코펜하겐에 대한 맹포격을 가하면서 덴마크 시민 195명이 사망하고 768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9월 5일 덴마크는 강화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9월 7일 강화 조약에 동의했다. 비록 모든 함선을 불태우라는 프레데리크 6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 페이만이 항전을 이어갔지만 그 역시 9월 7일 항복하였다. 그리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모든 함선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영국 함대는 6주간이나 코펜하겐에 더 머문 후에 10월 21일 떠났다. 하지만 프레데리크 6세는 곧바로 소규모 포함(gunboat) 다수를 건조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채 영국과 전쟁을 재개하면서 이른바 포함 전쟁을 AD 1814년까지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의 동맹이 된 러시아도 영국의 형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국-러시아 전쟁'를 시작했다.


2.11. 프레데리크 6세의 즉위 이후[편집]



2.11.1. 스웨덴 왕위계승권 확보 실패[편집]


AD 1808년 3월 13일 프레데리크 6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으로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후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는 스웨덴에 대한 응징에 나서면서 핀란드를 점령하고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AD 1809년 3월 스웨덴에서 정변이 일어나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그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새로운 스웨덴 국왕 칼 13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칼 13세에게는 왕위를 물려 받을 자식이 없었고 이미 61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스웨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프레데리크 6세도 스웨덴의 바사 왕조를 창건한 구스타브 1세 바사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스웨덴 왕위를 노리며 AD 14세기 말부터 AD 16세기 초까지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를 하나로 묶었던 칼마르 연합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프레데리크 6세의 기대와 달리 스웨덴의 왕위 계승권이 그의 처남이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에게 넘어가면서 프레데리크 6세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다만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도 AD 1810년 5월 요절하였기 때문에 스웨덴의 왕위 계승 후보자가 다시 공석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1세의 장군인 장 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장 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는 칼 13세의 양자가 되어 칼 요한으로 개명한 후 왕세자 자격으로 섭정으로 임명받으며 고령의 칼 13세를 대신하여 스웨덴을 대리통치하기 시작했다.


2.11.2. 대(對) 영국 전쟁[편집]


덴마크가 영국과 벌인 포함 전쟁의 초기 3년 동안은 그동안 급히 건조한 포함으로는 영국의 수많은 프리깃과 전열함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영국의 호위함을 기습하여 영국의 화물선을 포획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주변 바다에 대한 제해권은 영국 해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영국 상선이 외레순 해협과 대벨트(덴마크어 Storebælt) 해협을 정기적으로 항해하면서 대규모 호위함을 대동시켰다. 다만 영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도 병행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영국은 북쪽의 북극해 인근인 바렌츠 해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북부의 하스비크와 함메르페스트를 파괴하며 노르웨이와 러시아 북서부의 포모르 사이의 이른바 '포모르 무역(Pomor trade)'을 방해하였다.


2.11.3. 덴마크-노르웨이의 동군연합 해체[편집]


한편 틸지트 조약을 통해 마지못해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령에 참여했던 러시아가 점점 경제적인 압박이 심화되자 대륙봉쇄령이 자국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탈을 선언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AD 1812년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AD 1812년 7월 18일 '외레브로 조약'을 체결하며 그동안의 영국-러시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시 반(反)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원정이 엄청난 대재앙으로 끝나면서 AD 1813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스웨덴까지 반(反) 프랑스 동맹으로 돌아서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스웨덴은 섭정이 된 칼 요한 왕세자가 프랑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국익을 위해서 과감하게 나폴레옹 1세와 맞서기 시작했고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핀란드를 되찾는 대신에 여전히 프랑스의 동맹으로 남아 있는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빼앗을 계획을 추진했다.

AD 1813년 10월 19일 나폴레옹 1세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그동안 덴마크도 영국과의 포함 전쟁을 계속 치르느라 AD 1813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기도 할 정도로 재정 위기가 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6세는 AD 1814년 1월 14일 영국 및 스웨덴과 '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프레데리크 6세는 킬 조약을 통해서 우선 영국에게 북해의 헬골란트 섬을 양도하는 대신에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군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10,000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게는 노르웨이를 양도하는 대신에 북독일의 스웨덴령 포메른을 넘겨받기로 했다. 다만 노르웨이에 종속되어 있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는 이번 양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하여 AD 1380년 덴마크 국왕이었던 올루프 2세에 의해 성립되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 간의 오랜 동군연합이 붕괴되고 새로운 스웨덴과 노르웨이 간의 동군연합이 성립되었지만 정작 노르웨이 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 당시 프레데리크 6세는 생존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남계 혈통으로써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던 그의 사촌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훗날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8세)가 노르웨이 총독으로 임명된 상태였는데 노르웨이 의회가 독자적인 자유주의 헌법을 통과시키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웨덴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노르웨이도 오래 버티지 못한 채 8월 14일 '모스 협정(Convention of Moss)'이 체결하면서 자치와 자유주의 헌법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을 수용하였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 왕위를 잃고 덴마크로 추방되었다.

이후 올덴부르크 왕조는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넘어와 1905년에야 노르웨이를 되찾을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이때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여계 자손이기도 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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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덴마크, 노르웨이의 역사적인 인구 변화는 덴마크/인구 참조.[2] 주교 임명은 교황의 권한이다.[3] 크리스티안 2세의 부인 이사벨은 카를 5세의 여동생이었다.[4]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으로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의 왕비.[5] 크리스티안 4세가 키르스텐 뭉크와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와 결혼했다.[6] 현재 노르웨이 할덴(Halden).[7] 사실 정확히 말하면 영국이 패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덴마크는 유럽국가였고. 홈그라운드에서 해안포, 육상포의 도움까지 받으며 결사항전 하는 나라를 함대 하나로 이길수는 없었던것. 그런데 화약 연기 때문에 전황을 알수 없었던 섭정왕자에게 사기를 쳐서 어거지로 평화협상을 이끌어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