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삼국지) (r20180925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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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공손찬
도겸
장양
공손도
장연
장수
장로

18로 제후
원술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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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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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모
원유
포신
공융
장초
도겸
마등
공손찬
장양
손견
원소
조조

陶謙
(132년 ~ 194년)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서주자사
2.3. 조조와의 대립
3. 연의
4.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는 공조(恭祖). 단양군 단양현 사람.

2. 정사



2.1. 초기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현 내에서 도겸이 막되먹은 놈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14살이 되어서도 병정놀이를 해서 동네 아이들이 도겸을 따랐다. 창오태수를 지낸 적이 있던 동향 출신이 감공이 도겸의 용모를 보고 비범하다고 여겨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도겸에게 딸을 주어 부인으로 줄 약속을 했으며, 감공의 부인이 이를 알고 따지자 감공은 도겸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면서 딸을 도겸에게 내어줬다.
젊어서는 유생으로 주군에 출사해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에 임명되었으며, 옮겨서 서현 현령을 지내는 등 각지의 지방 장관을 맡았다. 이후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여현령, 유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군태수인 장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장반이 춤을 추라고 부탁하자 도겸은 춤추려 하지 않았다가 끈질긴 강요로 겨우 춤을 추면서도 억지로 추는 모습이 역력해 춤을 추면서 도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반이 한 바퀴 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자 도겸은 돌 수 없다면서 회전을 한다면 다른 분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의랑을 지내다가 후한의 서쪽 변경에서 군무 경력을 쌓았다. 도겸은 강족을 토벌하러 서쪽으로 향하던 황보숭에게 발탁되어 함께 강족을 무찔렀다. 변장 · 한수의 난 때 토벌군 대장인 사공 행 거기장군 장온의 참군사[1]로 종군했다. 장온은 도겸을 불러 후히 대우했다. 도겸은 장온에게 속으로 불복하였으나, 술자리와 같은 자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는 되려 장온을 욕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장온은 분노하여 도겸을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나, 어떤 사람이 장온에게 도겸을 풀어줄 것을 진지하게 간하여 도겸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도겸에 대한 장온의 대우는 처음과 같았다.
이때까지 그가 쌓은 군무경력은 손견 다음으로 가는 수준으로, 당대의 그는 주변으로부터 제법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던 것 같다. 두 인물 모두 강동 출신이며, 서북변에서 벌어진 군사적 활동에 참여한 것도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다. 다만 도겸이 손견보다 더 나이가 많았기 때문인지 도겸의 민정경력은 손견에 비해 더 오래되었고 그의 관위도 손견보다 높았다.[2]

2.2. 서주자사


조정의 명령으로 도겸은 서주의 황건적 잔당들을 토벌하였고, 서주 지역을 장악하고 지방호족들과 연계하고 조정으로부터 이를 승인 받아 서주의 태수가 되었다.
동탁과 맞서 싸우는 주준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탁이 왕윤, 여포에게 죽은 후 이각, 곽사 등이 조정을 장악하자 도겸, 공융 등은 주준을 추대하여 연합군을 이끌고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함을 권유했으나 주준은 이를 사양했다. 도겸은 공물을 보낼 사자를 조정에 보내었다. 사자에게 일러 샛길로 가게하였다. 이로써 그는 안동장군·서주목으로 옮겼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어렸을 때 도겸은 공부를 잘했고 인망도 있었는데, 정작 서주자사가 되자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조욱을 소원하게 여겼고, 조굉과 같이 아첨하는 소인배들을 가까이하여 형벌과 정치는 형평을 잃어 선량한 사람 대부분이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당대의 명사로 유명한 허소가 도겸을 찾와 서주로 왔을 때 도겸은 그와 면담을 하였다. 허소의 평에 따르면, "도겸은 겉으로 겸손하고 깨끗한 명성을 추구하지만, 정직하지 못하다. 남을 후대하고 있지만 끝내 그는 반드시 변할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망한 허소는 도겸을 떠났다. 다만 이런 사례 중 하나가 자신의 초빙을 거부한 장소를 잡아들인 사실이다. 정작 장소는 대인배였는데, 도겸이 죽었을 떼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을 정도였다.
정치에서 인사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실권이다. 그의 인사능력 나쁘지 않았다. 왕랑, 조욱, 미축, 진등 과 같은 인물은 모두 도겸이 조정에 추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된 사람들이었다. 또 당시 서주백성들은 부유하여 충분한 먹을 거리가 비축된 상황이었으므로, 매우 많은 유민들이 서주에 몸을 의탁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겸은 혹설처럼 연산군과 같이 막무가내로 정치를 한 인물이 아니었다.

2.3. 조조와의 대립


원술과 원소가 사이가 벌어지자, 공손찬과 동맹을 맺어 유비, 전해, 선경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3]하여 원소를 압박했으나 이들은 모두 원소와 조조에게 격파당했다.
천자를 자칭하던 궐선이라는 도적과 손을 잡아 함께 약탈을 일삼다가 그를 배신해서 죽이고 군대를 흡수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손찬과 협력하여 조조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조숭을 죽게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조에게 공격당해 연전연패했다. 한때는 고향 단양으로 도주하려고 했을 정도. 전해와 유비가 원군으로 오고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퇴각하자, 사망하기 직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객장으로 와 있던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 도겸은 인망이 자자한 인물로 그려진다. 예주 지역을 평정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게된 조조는 전란을 피해 남하하였던 조조의 부친 조숭에게 서신을 보내 모시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도겸은 조조와 사귀고자 하여 자신의 부장인 장개와 군사를 보내 조숭의 일가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숭이 가진 재물에 욕심을 낸 장개가 조숭과 그 일가를 살해하고 보물을 차지하고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도겸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에게 공문을 띄우고 군사를 이끌어 단숨에 서주로 진군한 조조와 싸우게 되었다. 정사에서 도겸은 조조의 군세에 맞서 끝내 서주를 지켜냈던 것과 달리 연의에서 그는 조조의 군세가 서주를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심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는 허수아비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급기야 "차라리 나 혼자 죽겠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묶어 조조에게 보내려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에 이어진 그의 행적은 유비의 도움을 받았다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나며 유비에게 서주를 맡긴다는 식으로 정사와 같다.
한 마디로 연의에서 그려지는 도겸은 통솔력과 용병술은 낮추어졌는데 반해 인의와 덕망은 상향되도록 조형된 인물이다. 이는 도겸 뿐 아니라 유표, 공손찬[4] 등 유비에게 우호적이었던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화이며, 유비 본인에게도 똑같은 보정이 걸려 있다.

4. 평가


도겸에 대한 재평가
선역으로 등장하는 연의와 달리 정사 삼국지에서의 평은 굉장히 좋지 않다. 어진 이들을 멀리하고 소인배를 등용하여 주의 정사를 어지럽혔고, 참칭한 역적과 결탁하였다는 것 등등. 도겸에 대한 부정적인 평은 비단 삼국지뿐 아니라 후한서 등 다른 사서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어떤 사서는 연의와 마찬가지로 도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평가 면에서 상반되는 것이 특이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는 후한 말 군벌의 열전이 거의 조조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도겸이 정말 폭정을 베풀었던 인물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부당한 면이 없잖아 있다.[5]
정사에서 그려지는 도겸은 문무를 겸비한 호걸로, 젊어서부터 공부를 좋아해 유생이 되어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관직에 출사한 뒤로는 군무에서도 활약했다. 문약한 늙은 선비로 그려지는 연의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출사할 때 장반의 일화에서 보듯 자존심이 셌고, 마냥 사람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도겸은 정치적인 야심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카리스마와 안목도 가지고 있어서 서주에 자리잡은 이래로 산동과 강소성 일대에서 강력한 군벌로 군림했다. 도겸은 원술 그리고 공손찬과 연합하여 원소와 조조의 동맹에 대항했는데, 한때 도겸은 조조조차 쉽게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의 수장이었다.
천자가 동탁에 의해 강제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제후들과의 연락을 끊었을 때, 왕랑의 조언에 따라 도겸은 샛길로 공물을 바쳐 안동장군과 서주자사로 승진하였고 율양후에 봉해졌던 사실을 문제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동탁이 집권하여 폐쇄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중앙정권에 근왕을 하지 못하니 공물을 보낸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도겸이 서주에서 이룩한 공로와 서주의 사회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입지를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동탁이 패망한 다음 이각곽사가 집권했을 때 도겸은 주준을 태사로 삼도록 추천하였고 이각 등을 토벌하여 천자를 맞이하려고도 했다. 조조보다도 먼저 협천자를 시도한 것이다. 즉, 도겸은 한황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황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셈이다. 이보다 이전에 반동탁연합이 궐기할 당시 영천에 있던 주준을 맹주로 받들어 동탁에게 대항한 것을 생각하면 도겸은 확실히 천자가 지닌 상징성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꿰고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동탁에 굴종한 것도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동탁연합군에는 처음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동탁이 수도인 낙양을 태운 뒤 연합군을 막을 병력을 주둔시켜두는데 그 주둔군의 사령관이 다름아닌 황건봉기 당시 공을 세웠던 주준이었다. 주준은 자진해서 낙양에 남아있었는데, 병력을 인솔해 주둔군을 장악하고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에 동탁은 이각, 곽사 등을 보내서 주준을 공격했다, 병력 차가 심했던 것인지 주준은 이각과 곽사 등에 밀려 연주와 예주 사이로 후퇴하게 되는데 여기서 가만히 있던 도겸과 공융이 제각각 병사와 물자를 보내 주준을 지원, 원소 등의 연합군이 와해된 뒤에 한동안 주준을 중심으로 한 반동탁연합군이 유지되기까지 했다. 한황실을 중시했던 만큼 한황실을 쥐고 흔드는 동탁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후일 서주를 구원한 방계 중 방계황족인 유비에게 서주를 넘긴건 이런 원인도 분명히 있었을것이다.
도겸이 서주에 대한 지배권을 유비에게 이양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서주의 주요 호족이나 주요 관료들(미축진등 등)이 유비를 지지했다. 도겸 스스로도 미축에게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 고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서주에는 유비를 지지하는 여론이 폭넓게 퍼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치로 조조가 서주를 칠 명분을 없앨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도겸 휘하 세력들이 단합하여 유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조표는 소패의 진궁, 여포와 내통하여 유비가 함양의 원술과 싸우러 출정하였을 때 성문을 그들에게 내주었을 정도로 유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유비는 도겸을 도운 일로 인하여 잃은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서주 대학살로 인하여 조조야말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조숭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후대를 하다가 부하가 욕심을 내서 조숭을 살해하여 오해를 덮어쓰게 된 연의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역사적으로는 조숭 살해 당시, 당시 정세는 원소와 조조의 연합과 원술,도겸, 그리고공손찬의 연합이 대립하였다. 193년 가을 이전에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했다. 조조가 서주를 침략했으나 군량이 부족해 군대를 잠시 물렸다.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였으나 여포가 반격하여 퇴각하였는데, 조조의 군세가 돌아가며 일으킨 서주 군민들에 대한 무단학살이 벌어진 때는 진수의 삼국지와 자치통감 그리고 후한서의 기록이 다르다.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들에는 도겸이 마치 대대로 서주를 다스린 것 마냥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 실제로 도겸은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서주를 세력권으로 삼아 당대에 군벌로 성장한 것이다. 즉 도겸 역시 당대의 호걸이자 효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많은 유민들과 백성들이 곡식을 풍족히 축적한 도겸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적어도 연의에서처럼 백성들에게는 괜찮은 군주였던 셈이다. 어쨌건 이런 저런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을 무시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조조의 업적 중 하나라고 알려진 둔전제를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이 도겸이라는 재미있는 설이 존재한다. 도겸은 삼보의 난 전후로, 도겸은 갑작스럽게 발생해 서주 내로 이주하기 시작한 수백만의 난민과 그 원인인 기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 동양현의 장을 지내고 있던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아 둔전을 진행하도록 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2년에 조조 진영에서 모사인 모개에 의해 경작지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조조가 둔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4~5년 즘 즉 조조는 논의에 그쳤던 둔전을 한발 앞서서 진등을 통해 상당한 양의 벼와 보리 등을 비축하고 회복세에 들어간 셈인데 이 시기도 조조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었다. 다만 둔전의 개념은 그전부터 있었고 조조가 처음으로 실행한것은 민둔이다.

5. 미디어 믹스


도겸/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1] 참고로 손견도 똑같은 직책에 있었다.[2] 같이 장온의 참군사가 되기 직전 손견은 군승 · 별부사마였고 도겸은 태수였다.[3] 도겸은 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였고, 상술된 세 인물도 원소와 조조 주변에 주둔하였다.[4] 다만 공손찬은 다소 애매할 수 있다. 원인은 해당 문서 참조.[5] 원소만 봐도 《정사 삼국지》에서는 거품을 물고 비판하는데, 《후한서》에 남겨진 원소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 다만 원소와는 다르게 도겸의 경우는 후한서에서도 딱히 우호적인 서술이 없다. 아무래도 도겸이 동탁, 그리고 이각과 곽사가 중앙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황제에게 공물을 바쳐 정식적으로 서주의 통지권과 공훈을 승인받은 것이 후한서 저자 범엽에세는 역적에게 아첨해 자기 이득을 챙긴 자로 보여져서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