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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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특별행정구 제2대 행정장관
도널드 창
曾蔭權 | Hon. Sir Donald Tsang

G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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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름
Donald Tsang Yam-kuen[1]
중국 이름
曾蔭權 (짱얌퀸, 증음권)
출생
1944년 10월 7일 (79세)
일본령 홍콩
재임기간
행정장관 권한대행
2005년 6월 21일 ~ 2007년 7월 1일
제2대 행정장관
2007년 7월 1일 ~ 2012년 7월 1일
학력
Wah Yan College, Hong Kong
하버드대학 M.T.
가족
아내
슬하 2남
정당

[[무소속|
무소속
]]


1. 개요
2. 일생
3. 기타



1. 개요[편집]


홍콩의 정치인으로, 홍콩의 제2대 행정장관을 지냈다. 흔히 영어식 이름인 "도널드 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광둥어 이름은 "짱얌퀸"이다. 드물게 표준중국어 발음인 "쩡인취안"으로 불리기도 한다.

홍콩 섬 출신들 중에서 구도심인 센트럴, 셩완, 완차이, 케네디타운 출신들이 대개 그렇듯 가톨릭을 믿는 기독교 신자다.[2]


2. 일생[편집]


1944년 일본 치하 홍콩에서 홍콩 경찰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광둥성 포산이다. 일본군이 점령하던 시절 홍콩 경찰은 일본 헌병대의 꼭두각시로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던 일은 거의 없었고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살았다.[3]

와얀 중학교를 나왔으며 미국으로 유학가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거쳤다.

유학생활 후 귀국, 홍콩 정부에서 재무와 관련된 일들을 하다가 1995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인 2001년 사임한 앤슨 찬의 뒤를 이어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005년 사임한 퉁치화의 뒤를 이어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으로 취임했고 2007년 무난히 재선되어 2012년까지 재직했다.

그러다가 2016년 홍콩 부동산 재벌 선홍카이(新鴻基) 그룹과 엮인 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어 2017년 징역 1년 8개월 형을 선고받아 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구속된 행정장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 버렸는데 공교롭게 동시기 대한민국에서도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감옥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홍콩 우산 시위로 이미 평판이 땅에 떨어진 렁춘잉을 당시 행정장관으로 두고 있었던 홍콩인들의 눈에는 그저 애교로 보였던 건 물론 이젠 아예 폭탄을 터뜨린 캐리 람과 이보다 친중 성향이 더욱 강한 존 리가 있어서 홍콩인들은 도날드 창이 그립다는 여론이 매우 강하다.


3. 기타[편집]


친중파이긴 하지만 홍콩 행정장관 중 가장 온건한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관료 출신이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후임 행정장관인 렁춘잉이나 캐리 람은 강경 친중 성향이다.

그가 재임하던 시기 홍콩은 학생비자, 취업비자 등 각종 비자도 잘 나오고 가장 외국인을 잘 받는 곳이었다. 중국의 국익에 맞아 떨어지는 것이 홍콩의 외국인 인재 유치였으며 이에 호응하고자 한국인에게 대거 취업비자를 발급해주고 한국과 워킹홀리데이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후임 행정장관들로 갈수록 홍콩의 각종 비자가 까다로워졌다.[4]

그의 남동생 창얌푸이 또한 고위직에 올랐는데, 형과는 달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 생활을 했으며 홍콩 경무처장을 지냈다. 다만 형이 행정장관이 되기 전인 2003년에 이미 퇴직한 상황이어서 형과 동생이 경찰 총수와 행정부 수반으로 나란히 앉는 일은 없었다.

트레이드마크가 나비넥타이인데 넥타이를 맬 시간이 아까워 나비넥타이를 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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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콩식 이름이기 때문에 Donald가 영어 Tsang Yam-kuen이 광동어 이름이다[2] 별개로 홍콩은 영국의 영향으로 성공회의 영향력이 강하다.[3] 사실 저항하는 경찰간부들은 전원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살해당하거나 망명을 택했으며 홍콩 왕립경찰 자체가 해산 후 일본 치하 홍콩 점령지 경찰로 재조직되었다. 일본인 헌병장교들이 이것저것 감 놔라 대추놔라 하며 간섭하며 재량권이 없었다.[4] 이는 시진핑 정부의 배타적 외교정책 탓에 로컬사람 우선을 내세워 그런 면이 크다. 2022년 존 리로 행정장관이 교체된 뒤 인재유출이 현실화되자 로컬사람 우선 원칙은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