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쿠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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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Joseph Kutyna
(1933년 12월 6일 출생 ~ )


1. 소개[편집]


미합중국 공군 대장으로, NORAD 사령관, 통합군 우주사령관을 지냈다. 오늘날 민간 조직인 NASA를 앞에 내세우고 뒤에서 온갖 스타워즈를 찍는 미국공군우주사령부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평가되며, 우주왕복선이라는 우주 프로그램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미션인지, 그리고 얼마나 NASA가 관료주의와 보신주의적인 강박감에 사로잡혀 찌질거렸는지(...)를 밝혀낸 인물이기도 하다. STS-51-L 챌린저 폭발사고를 기점으로 그의 주도 하에 미 공군은 우주개발에 있어 독자노선에 돌입하게 된다.


2. 커리어[편집]


1933년 시카고에서 폴란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2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57년 졸업[1]하고 미합중국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조종사 자격을 따고 초기에 주기종으로 받은 항공기가 매우 비범한데, 로켓추진 이륙기B-47 스트라토제트였다. 이후 MIT 대학원에서 항공우주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5년 미 공군 테스트 파일럿 스쿨에 지원한다. 이 시절은 이 곳에서 NASA의 우주비행사들이 많이 배출되던 시기인데, 우주개발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쿠티나도 내심 NASA 지원에 대해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NASA가 아폴로 계획에서 써먹을 우주비행사들은 대개 1966년 5기를 중심으로 모두 뽑힌 상태였고, 미 공군이 별개로 군사용 우주정거장 개발을 꾀하던 시기였던지라 쿠티나는 그냥 공군에 잔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군에서도 우주비행사로 뽑히지는 못했다. 대신 이 시절 테스트 파일럿들의 교육과 차세대 항공기 개발에 투신하며 공돌이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젊은 시절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쿠티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데 실패한 뒤 1969년 12월부터 태국으로 파병되며 F-105 조종사로 활동하게 된다. 무사히 동남아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공군본부에서 일했고, 1975년 국방산업대학(Industrial College of the Armed Forces)을 수료한 이후 1976년부터는 E-3의 개발팀에서 일하게 된다. 초기에는 E-3의 해외 시장 마케팅에 투입되었지만, 이후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로 활약하며 E-3의 개발을 성공으로 이끈다.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쿠티나는 우주개발 프로젝트에 다시 참여하게 된다. 우주왕복선을 위한 로켓 연구와 타이탄 로켓 연구에 투신했고, SDI 연구에도 참여했다. 이런 우주개발에의 참여 경험으로 1986년 초 STS-51-L 챌린저 참사 이후 행정부-NASA-공군 등의 여러 기관의 대표들로 조직된 진상규명특위인 로저스 위원회(일명 Rogers Commission)에 미 공군 측 대표인사로 보내졌다.

https://media.gettyimages.com/photos/members-of-the-rogers-commission-present-the-challenger-accident-to-picture-id50689221
백악관 정원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로널드 레이건과 조사위원들. 사진 맨 오른쪽이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고 대통령 뒤쪽에 공군 정복 입고 있는 사람이 당시 소장이었던 쿠티나 장군, 그 옆의 여성은 샐리 라이드이다. 추가로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은 닐 암스트롱.

샐리 라이드는 이 시기에 NASA의 관계자들이 밥줄 끊길까봐 차마 고백하지 못하던 내용을 몰래 제보해주며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의 그 유명한 즉석 오링 테스트가 나오게끔 의도했다. 쿠티나 장군은 사실 이 사고 전까지 NASA와 예산다툼을 하며 타이탄을 지키려는 입장이었지만 NASA가 "셔틀을 자주 쏘면 된다!"고 우기는 바람에 SDI의 기반이 될 첩보위성들을 타이탄으로 쏘아올리는 프로젝트가 붕 떠버려서[2] NASA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STS-51-L켄 매팅리 문서 등에 소개된 이 시절 우주왕복선 미션의 명명법도 이 시기에 타이탄 대신 셔틀을 군사적 프로젝트로 자주 쏜다는 야심찬 청사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정치인이나 아랍 왕자님을 우주에 올려보내더니(...)[3] 이런저런 대중 홍보에만 정신이 팔려서 NASA는 공군의 요구를 뒷전으로 치워버렸다. 쿠티나는 이 과정에서 암으로 골골대던 스타 물리학자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을 캘리포니아에서 춥디 추운 워싱턴으로 불러와서는 다들 높으신 분들의 이해관계에 묶여있는 조사위원들 사이에서 독립 조사위원으로서의 역할을 주문하지만... 파인만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결국 파인만의 명줄을 재촉해서 챌린저 사고의 진실을 밝혀낸다. 쉽게 말해 NASA가 늘 예산 감축에 대한 두려움에 쩔어서 대중 홍보에 대한 압박감을 심하게 받고 있었고, 그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무리수를 뒀다는 것.[4]

어쨌든 쿠티나가 샐리 라이드의 도움[5]으로 파인만의 명줄을 재촉하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 뒤, 셔틀에 군사위성을 싣고 한 달에 몇 번씩 쏘겠다는 NASA의 고집은 결국 무너졌다. STS-51-L 같은 기괴한 미션 명명법도 STS-26 같은 깔끔한 넘버링으로 돌아왔다. 쿠티나의 우주발사체 프로젝트는 1989년부터 비록 타이탄은 아니지만 델타 Ⅱ 로켓을 통한 군사위성 발사로 재개되었고, 쿠티나는 미 공군의 우주 프로젝트를 되살린 일등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1987년부터 미국공군우주사령부의 수장에 올라 공군의 군사위성 프로젝트를 지휘했고, 1990년에는 통합전투사령부인 우주사령부로 영전하면서 4성 장군이 되었으며, NORAD 사령관 겸 우주사령관 재임기간에 소련의 해체로 인한 냉전 종식을 맞기도 했다. 비록 챌린저 사고가 너무도 큰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이후 NASA의 자정 노력에 지지를 보내며 쿠티나는 공군의 셔틀 포기와는 별개로 NASA의 유인 셔틀 프로그램 재개를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간지폭풍 우주선의 이미지로 셔틀은 역사에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17년후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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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작 BBC TV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에서는 브루스 그린우드가 연기했는데, 근엄한 인상인 실제 쿠티나 장군의 얼굴에 비해서는 좀 선한 인상이다. 늘 핵전쟁 수행을 대비해야 하는 기구한 군생활을 해왔기에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파인만에게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현실적인 냉철함 대신 낭만에 취해있는 NASA를 까면서도 공군 대표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욕하질 못하니 파인만을 끌어들이며 묘~한 복선을 써내려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수께끼 풀라고 꼬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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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공군사관학교가 1959년 첫 졸업기수를 배출하기 전까지 미 공군의 장교단 인력은 대개 다른 사관학교나 비행사관후보생 등으로 충원되었다. [2] 그냥 붕 뜬 정도가 아니라, 8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우주발사체는 (탄도탄 같은 것은 당연히 남겨뒀지만) 셔틀만 남기고 죄다 퇴역시켰을 정도.[3] STS-51-L 직전의 미션인 STS-61-C가 대표적. 찰스 볼든 항목 참조.[4] 챌린저는 이 미션에서 자체 통신위성의 궤도 전개 외에도 우주에서의 원격 수업, 핼리 혜성 관측 등의 여러 크고 아름다운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간지를 중시하는 일반인들의 시선에서는 이 미션은 아폴로 시대 이후 최대의 본방사수 미션이 될 것이었고 NASA가 이를 연기한다면 여론이 들끓을 것이었기에...[5] 여러 사람 밥줄이 날아갈 수 있는 사안이라서 모 우주비행사의 제보라고만 밝히며 신원을 보호하다가 2012년 라이드가 타계한 뒤에야 이를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