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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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
― 도덕경 제1장
1. 개요
2. 상세
3. 죽간본 원문과 번역
3.1. 1장(갑본)
3.2. 2장
3.3. 3장
3.4. 4장
3.5. 5장
3.6. 6장
3.7. 7장
3.8. 8장
3.9. 9장
3.10. 10장
3.11. 11장
3.12. 12장
3.13. 13장
3.14. 14장
3.15. 15장
3.16. 16장
3.17. 17장
3.18. 18장
3.19. 19장
3.20. 20장
3.21. 21장(을본)
3.22. 22장
3.23. 23장
3.24. 24장
3.25. 25장
3.26. 26장
3.27. 27장
3.28. 28장
3.29. 29장
3.30. 30장(병본)
3.31. 31장
3.32. 32장
3.33. 33장
4. 왕필본에 의한 번역의 반박
1. 개요[편집]
노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글. 《노자》 혹은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도교에서 핵심 경전으로 삼는다. 《도덕경(道德經)》이란 이름은 상편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의 "道"와 하편의 "상덕부덕(上德不德)"의 "德"을 합해 부른 이름이다.
2. 상세[편집]
기존에 《노자》에는 3개의 주요 판본이 있었다. 하나는 한대,漢代,에 성립된 하상공본(河上公本),[1] 또 하나는 삼국,三國, 시대의 왕필이 주석한 왕필본(王弼本), 그리고 당대,唐代,의 학자 부혁이 전한 부혁본(傅奕本)이 그것이다. 이 중 왕필본의 권위가 가장 인정되어 후대에 나온 대부분 《노자》 텍스트들은 대부분 왕필본을 따랐다.[2]
하지만 왕필본 《노자》의 권위는 20세기에 새로운 자료들이 출토되어 조금씩 무너졌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돈황 문헌에서 《노자》의 판본이 발견되면서, 왕필본의 내용이 진짜 《노자》 원본대로인지 의문을 품었다.
이후 관련 학자들에게 경천동지 같은 소식을 전한 것은 1974년 마왕퇴 무덤에서 발견된 《노자》였다. 이 《노자》사본은 비단에 쓰였기 때문에 '백서 노자', '마왕퇴 노자', 통칭 '백서본'으로 불린다. 이 백서본은 서한의 황제 고조(劉邦)와 문제(劉恒)의 이름이 피휘되지 않아, 지어진 시기가 한대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이것으로써 《노자》가 한대 이후에 만들어진 위작이 아니라는 것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백서본은 편집 순서가 왕필본과 다르게 상편(도경)과 하편(덕경)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본래의 《노자》는 덕경-도경 순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에는 후베이성 징먼시 궈뎬촌(곽점촌)의 한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무덤(기원전 3세기 초 이전) 곽점에서 대나무 죽간에 쓰여진 《노자》의 사본이 발견되어, 《노자》가 한대 이후 위작되었다는 설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곽점에서 출토된 사본을 '죽간 노자', '초간 노자', '곽점 노자' 등으로 부르지만 보통 '죽간본'이라고 통칭한다. 죽간본은 갑, 을, 병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후 연구결과, 백서본은 죽간본 《노자》의 주석서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죽간본은 실존하는 《노자》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 되었다.
죽간본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왕필본 《노자》와 성격이 다른데, 기존 왕필본 《노자》의 중요한 특징인 '반 유가적 성격'이 후대에 와서야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왕필본으로 《노자》를 바라보았던 후대의 수많은 주석서들을 모두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초기 노자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또한 죽간본과 기존의 여러 판본들은, 내용과 사상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이는 《노자》가 처음 지어진 이래로 수많은 후대 사람들이 변형하고 추가했음을 보여준다.
3. 죽간본 원문과 번역[편집]
3.1. 1장(갑본)[편집]
꾀를 끊고 말재간을 버리면 백성들은 백배 이로워지며,
재주를 끊고 이익냄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지며,
거짓됨을 끊고 생각을 비우면 백성들은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위의 세 문장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듯하여 이야기를 덧붙이면 어떨까 한다.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소박함을 지켜라.
사사로움(私)을 줄이고 원하는 것을 적게 하라.
3.2. 2장[편집]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수많은 계곡의 아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들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을 뒤로 하기 때문이며,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는 것은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들의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그가 백성들의 앞에 있어도 백성들은 해롭게 느끼지 않는다.
천하가 그를 즐거이 받들며 싫어하지 않는다.
성인은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3.3. 3장[편집]
죄(罪)는 지나치게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고,
허물은 가지려 욕심부리는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으며,
재앙은 만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만족할 줄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만족해지니, 이것이 영원한(恆) 만족감이 되는 것이다.
3.4. 4장[편집]
도로써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는 군대로써 천하를 강압하려 하지 않는다.
훌륭한 자는 결과를 얻으면 그만두니,
강압하지 않는다.
결과를 얻은뒤 짓밟지 않고,
결과에 교만하지(얕보지) 말고,
결과로 위협하지 말라.
이를 '결과를 가지면 강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좌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오래 가는 것이다.
3.5. 5장[편집]
태고에 훌륭했던 선비들은 미묘현달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를 말해 보자면,
그 예상은 겨울 시내를 건너는 듯하고
그 망설임은 사방의 적군을 경계하는 듯하며
그 삼감은 손님과 같고
그 마음이 풀리는 것은 얼음 녹는듯 하며
그 진실됨은 꾸밈이 없어 수수하고
그 아무렇게나 하는 행동은 우둔해 보였다.
누가 우둔할 수 있음으로 차분해져서 장차 마음을 서서히 맑게 하겠는가.
누가 평온할 수 있음에 머물러서 서서히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러한 도를 지키는 자는, 항상 가득차 있음을 바라지 않는다.
3.6. 6장[편집]
하려고(爲) 하면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면 멀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려함이 없기 때문에 그르침이 없고
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일에 임하는 바탕은 일의 마무리를 처음처럼 신중히 하는 것이며,
이렇게 처사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도다.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가르치지 않음으로 가르치고,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렇듯 성인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3.7. 7장[편집]
도는 항상 억지로 하고자함이 없다.
제후나 왕이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
하려는 것에 욕심이 생긴다면,
이름 없이 꾸미지 않음으로써 진정케 한다.
대저 만족함을 알아라.
만족함을 알게 되어 차분해지면
만물은 스스로 안정을 이룬다.
3.8. 8장[편집]
무위(無爲)를 하려고 하고,
일 없애기를 일삼으며,
즐기지 않음을 즐겨라[3] .
크고 작은 일들을 쉽게 대함이 잦아지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쉽더라도 오히려 어렵게 대하기 때문에,
고로 어려움이 없게 된다.
3.9. 9장[편집]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을 알기를
아름답다고 여기면, 추할 따름이다.
모두가 좋다고 알면,
이는 그 좋음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형성해내고,
길고 짧음이 서로를 만들어내고,
높고 낮음이 서로를 메우고,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서로를 뒤따른다.
때문에 성인은 하고자함이 없는(無爲) 일에 머무르며,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만들어지지만 다스려지지는 않으며,
하더라도 길러주지 않아서,
다 자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3.10. 10장[편집]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꾸밈없음은 매우 작지만
천지도 감히 부릴 수 없다.
제후와 왕이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따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모여 단이슬을 내리며,
백성들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질서를 지킬 것이다.
비로소 이름을 만들더라도,
이름(명성) 역시 다함이 있다.
대저 또한 그칠 줄을 알아야 하는데,
위태롭지 않은 바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한다.
낮은 도가 천하에 있는 것은, 작은 계곡물들이 강과 바다에 합쳐지는 것과 같다.
3.11. 11장[편집]
(세상의) 모양이 혼탁함에서 가지런해지니,
먼저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어 홀로 존재하며 바뀌지 않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아직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글자로는 ‘도(道)’라고 한다.
나는 억지로 그것에 이름을 붙여 '크다(大)'라고 말한다.
크면 뻗어나가고,
뻗어나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도도 크고 왕 또한 크다.
나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3.12. 12장[편집]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풀무[4] 와도 같다.
그것은 텅 비어 있으나 쇠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샘솟는다.
3.13. 13장[편집]
텅 빔에 이르름은 끝없어서,
텅 빔을 지키기를 진심으로 한다.
만물은 다 함께 일어나서 (각기) 쓰여지는 곳으로 돌아간다.
하늘의 도는 둥글고 둥글어서, 각기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3.14. 14장[편집]
안정된 것은 지키기 쉽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을 꾸며가기 쉬우며,
연한 것은 나누기 쉽고,
조그만 것은 흩어버리기 쉽다.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리라.
아름드리 나무도 한 터럭의 싹에서 시작하고,
구층 누대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며,
천리 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3.15. 15장[편집]
똑똑한 자는 말이 없으며, 말을 하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
기뻐함을 경계하여 그 방법을 보배로 여기고,
요구하는 바는 뜻을 맞춰서 기쁨을 함께하며,
많은 재물은 나누어서 다툼을 해결한다.
이를 일러 '깊이 하나가 되는 것(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가까이 할 수 없고 또한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가 없고 또한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또한 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3.16. 16장[편집]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부리며,
일하지 않음으로 천하를 얻는다.
내가 어떻게 그러한 이치를 알겠는가.
대저 세상에 꺼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이한 것들이 더욱 일어나고,
법률이 많아질수록 도적들도 많아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나서서 일을 벌이지 않으면 백성들은 스스로 넉넉해지고,
내가 무위(無爲)에 머무르면 백성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며,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바라지 않기를 바라면 백성들은 스스로 순박해진다.
3.17. 17장[편집]
덕을 품음이 두터운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벌레, 독사도 쏘지 못하고
사나운 새나 맹수도 덮치지 못하며
뼈가 연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붙잡음이 굳세다.
암수의 합을 모르는데도 곤두서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로움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조화로움은 일상적인 것인데,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다(明)고 하고,
생명을 더하는 것을 상서롭다(祥)고 한다.
마음이 기를 통제하는 것이 날로 강해져서
물건이 장성하면 노쇠하게 되니,
이를 일러 도가 아니라고 한다.
3.18. 18장[편집]
명예와 몸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몸과 재물 중 무엇이 더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 중 무엇이 더 문제인가?
과도히 애착하면 반드시 큰 댓가를 치르게 되고, 무겁게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그러므로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3.19. 19장[편집]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약해 보이는 것은 도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있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비롯된다.
3.20. 20장[편집]
가져서 가득 채우려는 것은 그만둠만 못하다.
많이 뭉쳐 모으면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금과 옥으로 가득 찬 집은 지켜낼 수가 없다.
귀하고 부유하다고 하여서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니,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3.21. 21장(을본)[편집]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아낌[6] 만한 것이 없다.
오직 아낄지라. 이렇게 함으로써 미리미리 갖추게 된다.
미리미리 갖춤을 일러 ‘덕을 두둑이 쌓는 것’이라 하며,
덕이 두둑이 쌓이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만하고,
나라의 근본이 있으면 (그 나라는) 오래 갈 수 있다.
길게 살아 오래 보이는 것이 도(道)이다.
3.22. 22장[편집]
배우는 자는 나날이 쌓아가나,
도를 위하는 자는 나날이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내어서 무위(無爲)에 이른다.
(그는) 함이 없는데도 하지 않음이 없다.
3.23. 23장[편집]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공손함과 성냄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꺼리는 것에는, 다만 꺼리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3.24. 24장[편집]
사람은 조롱와 모욕을 옥으로 된 목걸이처럼 여기며,
큰 근심을 자신의 몸뚱이처럼 귀중히 여긴다.
조롱와 모욕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롱은 천한 것(下)이 되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하며,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한다.
이를 '조롱과 모욕에 자기 몸처럼 놀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이 있음을 위하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음에 이르면 어찌하겠는가.
천하를 위하는 것이 천하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를 아끼는 것이 천하를 위하는 것이니, (나를 아끼는 사람[7] 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8]
3.25. 25장[편집]
높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그 정수를 행하고,
중간 사람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해하고,
낮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큰 비웃음을 사지 못한다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도다.
이로써 말씀드리자면,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며,
평탄한 도는 굴곡진 듯하며,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듯하며,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은 듯하며,
큰 순백함은 탁한 듯하며,
큰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엷은 듯하며,
바탕되는 본자리는 변화하는 듯하며,
거대한 모서리는 모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대기만성),
거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리며,
하늘의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크지만 이름이 없으며, 훌륭함은 빌려서 또한 완성하는 것이다.
3.26. 26장[편집]
(의식이 반응하는) 그 문과 구멍을 닫으면 죽는 날까지 힘씀이 없다.
그 구멍을 열고 일을 좇으면 죽는 날까지 앞날이 없다.
3.27. 27장[편집]
진정 성대한 것은 부족한 듯 보이나, 그 쓰임에는 내버리는 것이 없다.
진정 가득한 것은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에는 끝이 없다.
큰 재주는 서툴게 보이고,
큰 성공은 덜한 듯이 보이며,
큰 곧음은 굽은 듯이 보인다.
3.28. 28장[편집]
초조는 냉정을 이기고,
고요는 열정을 이기니,
맑고 맑음에 천하가 안정된다.
3.29. 29장[편집]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보호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니,
후손들은 그 제사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도로써) 몸을 다스리면 그 덕이 이에 곧으며
집안을 다스리면 그 덕에 여유가 있으며
마을을 다스리면 그 덕이 자라나며
나라를 다스리면 그 덕이 풍성해지며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이 모든 곳에 닿는다.
집안을 집안으로써 보고 마을을 마을로써 보고 나라를 나라로써 보고 천하를 천하로써 보라.
내가 어찌 천하의 그러함을 알 수 있겠는가?
3.30. 30장(병본)[편집]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 알며,
다음 가는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찬양하며,
그 다음은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다음은 (아랫사람들이) 업신여긴다.
당신의 믿음이 부족하면 이에 불신이 있게 되니,
아아 그 귀한 말이여.
(만약 믿는다면) 일을 이뤄 공을 세우는 것에, 백성들은 ‘나 스스로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큰 도(道)가 무너지면[9] 어찌 인의가 있겠는가.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면 어찌 효도와 자애가 나오겠는가.
나라가 어둡고 혼란하면 어찌 바른 신하가 나오겠는가.
3.31. 31장[편집]
큰 모양을 잡으니 천하가 돌아간다.
돌아가는 것에 걸릴 것이 없으니 편안하고 태평하며,
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그러므로 도(道)에서 나오는 말은 밋밋하여 아무 맛도 나지 않고,
보아도 볼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을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없는 것이다.
3.32. 32장[편집]
군자는 평상시에는 왼쪽(안 쓰는 손)을 귀하게 여기고 병기를 쓸 때는 오른쪽(잘 쓰는 손)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병기는 군자의 물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부득이하게 쓸 때에는 날카롭게 하는 것이 좋으나, (그 행위를) 미화하지는 말라.
미화하는 것은 살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대저 (사람 해치는 일을) 좋아하고서는 천하에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길한 일에 있어서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에 있어서는 오른쪽을 높인다.
이로서 편장군[10] 은 왼쪽에 자리하고 상장군[11] 은 오른쪽에 자리하는데
이를 설명하자면, 장례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많은 인명을) 죽이는 일인 즉, 슬퍼하는 것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이니,
전쟁에서 승리한 즉, 장례로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3.33. 33장[편집]
하려고(爲) 하면 그르치고 잡으려고 하면 잃는다.
성인은 하려고 함이 없기 때문에 그르치는 일이 없으며,
잡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일의 마무리를 처음처럼 신중히 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도다.
사람이 일을 그르치는 것은 항상 그 이뤄내려함 때문이며,
그래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
고로 성인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배우지 않기를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쳐온 곳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기 때문에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수는 있으나, 감히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4. 왕필본에 의한 번역의 반박[편집]
흔히 알려진 도덕경 번역은 왕필의 주석을 따르는 번역이다. 먼저 번역에서 이의 하나만 달자면, 첫 문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에서 常(늘,항상,언제나)이 번역되지 않았다. 상의 뜻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음의 링크 모성재, 월운 어학당, 노자도덕경1장를 참고하면, 백서본에 쓰인 也로 인해, 왕필의 띄어 읽기는 '묘, 교'가 있는 3문단까지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주석도 달라져야 했는데, 월운의 해설은 이를 반영하지 못한 느낌이다.
왕필의 주석이 오류인 결정적 증거는, 월운이 名을 설명하기 위해, 왕필 주 다음에 올려 놓은 한비자의 해로편 문장에 있다. 월운은 이곳에 쓰인 道의 번역 중 2곳에서 '말(하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 출판된 책이 이렇게 번역한 것 같다.) 이것을 '도'로 바꿔서 번역 해보면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말'로 번역한 道를 그냥 道(길)로 번역해서 전체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도덕경 첫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즉, 道가 '말'로 번역된, '시이불가도야'(이 때문에 말할 수 없다)와 '도지가도 비상도야'(도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상도가 아닌 것이다)를, '이 때문에 道는 불가하다'(是以不可道也)로 번역하면, 名이 곧바로 道가 될 수 없는 설명으로 반듯하게 이어지고, 이런 이유로, 모든 설명 후 마지막에 쓴 결문 '道之可道, 非常道也'는 '도는 도를 할 수 있는 것이나, 늘 도는 아니다 함이라.'가 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故 이하는 알 수 없으나) 名의 의미에 대해서는 왕필과 달리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왕필은 '(말)하다'로 번역한 道를 道로 고쳐서 읽어보면, '도를 부르면 도가 아니다'는 식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 지우지 말고, 반론을 달아주세요.)
죽간본 원문과 번역에 쓰인 한문과 번역은 죽간 원문의 한자와 너무 다르다. 당연히 번역도 해석도 다르다. 고명의 책 '고문자류편'의 序를 읽어보면, 진시왕의 통일 이전에는 합체문자(合文)가 많이 쓰였다고 했는데, 중국측이 발표한 '곽점초묘죽간'은 전혀 이의 반영이 없고,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이를 따르고 있다. 초간은 중국측의 주장으로도 기원전 약 450의 것으로, 기원전 221년보다는 훨씬 앞이다. 또한 통행본과 다른 한자는 거의 대부분 가차자나 통가자로 판단하여 통행본의 한자로 고쳤다. 이는 인터넷을 찾아 통행본 제19장에 해당하는 처음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가지 기록과 주석의 사상적 경향으로 보아 한대,漢代,로 추정하고 있다[2] 왕필은 노자의 주석을 16세에 달았다. 또한 주역의 주석도 달았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위진 시대 현학(玄學)이 발전할 수 있었다. 위진 현학의 3대 경서가 바로 《노자》, 《장자》, 《주역》임을 생각한다면 왕필은 정말로 천재였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역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이 외에도 그 시기에 노자를 언급한 비석들도 참고가 된다.[3] 味는 취향. 즐기는 바를 뜻함.[4]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5] 원래는 上尒下賏 모양으로 '많은 재물'들을 뜻한다.[6] 앞에서 가득 채우지 마라(아끼지 마라)고 했는데, 이 장에서는 아끼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사적인 것은 아끼지 말고, 공공의 것은 아끼라는 뜻이다.[7] 나를 아끼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내가 몸이 없음에 이르는 사람'을 뜻한다. 즉 물욕이 없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는 뜻.[8] 더 정확히는, "나를 '위해' 아끼는 것이 천하를 위하는 것이니, (그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9]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10] 방어하고 지원하는 장군. 낮은 등급의 장군이다.[11] 황궁을 경비하는 장군. 높은 등급의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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