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 타카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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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堂高虎(とうどう たかとら) 등당고호
(1556년 2월 16일 ~ 1630년 11월 9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축성의 명수 타카토라
5.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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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 가문의 담쟁이 문장.[1]

전국시대부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 몇 번이고 주군을 바꾼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워낙 유명하고 스케일이 커서 가려지는 면이 좀 있지만 토도 타카토라도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가루에서 32만 석의 다이묘가 되는 엄청난 출세를 이룬 인물이다. 축성의 달인으로 생애 무려 20개의 성을 축성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1556년 정월 6일에 오우미국 이누카미군 토도무라에서 토도 겐스케 토라타카와 묘세이 부인(도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1569년 8월에 키나이에 영향력을 뻗힌 노부나가가 아자이 나가마사 등을 동원해 이세로 진공하자, 형인 토도 겐시치로 타카노리가 나가마사를 따라 이세 공격에 참여했다. 타카노리는 이번 전투에 선진을 맡아 오카와치 성을 공격했는데, 훌륭한 무위를 숙부 다가 신스케 요시마사와 함께 보여주었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형을 잃은 타카토라는 약 1년 뒤인 1570년 6월에, 형과 똑같이 나가마사를 따랐다. 동월 즈음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에도 참가해, 어린 나이에도 적의 수급을 하나 취하는 군공을 올렸다.[3]

9월의 우사야마 성 전투에서도 농성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적의 수급을 취해나갔다. 이를 들은 나가마사는 타카토라의 활약을 칭찬하며 패도를 내려주었다. 1571년 8월 오다군의 공성을 보고 성에서 뛰쳐나가 첫 번째로 수급을 올리며 군공을 쌓았기에, 나가마사는 타카토라에게 직접 감장을 내려주며 특별히 칭찬해주기까지 했다.

무예를 뽐내며 아자이 가문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던 타카토라였지만, 곧 위험에 빠뜨릴 사건이 벌어졌다. 1572년, 성하에서 같은 아자이 가문의 가신인 야마시타 가스케와 싸움이 붙어 야마시타를 죽여버렸다(...).[4] 주군의 가신을 죽여버리고 만 타카토라는 오다니 성에서 도망쳐, 아츠지 사다유키가 있는 야마모토야마 성으로 피신해 몸을 의지했다. 타카토라를 맞이한 사다유키는 크게 기뻐하며 빈객으로서 대우해주었고, 우거까지 내려주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타카토라는 다른 가신들과 불화에 빠질 뿐이었다. 특히 아츠지 나타스케와 히로베 토쿠히라는 뛰어난 무용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령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타카토라는 이들을 찔러죽이고 아츠지 가문을 떠나 완전한 로닌으로 전락했다.

아츠지 가문마저 떠난 타카토라는 곧 1573년에, 한때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었던 현 오다 가신 이소노 탄바노카미 카즈마사에게 80석의 봉록으로 사관했다. 이 무렵 이소노 가문은 하시바 히데요시의 휘하로서 아자이 가문 공격의 전공으로 오우미의 사와야마 성에 영지를 받았기에, 타카토라가 오우미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모처럼 정착에 성공하나 싶었던 타카토라였지만, 1574년에 카즈마사의 후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인 오다 노부즈미가 오자 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노부즈미의 케라이가 되고 호로의 임무를 맡아 조금씩 군공을 올리는 것은 좋았지만, 이에 따른 가은이나 가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에 타카토라는 더 이상 호로의 임무를 맡기 어렵다는 청원을 세 번 정도 올렸지만, 양자의 교섭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오다 가문에서 벗어나 다시 로닌이 된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5] 결국 타카토라는 당대 천하라고까지 칭해진 키나이에 영향력을 확고히 한 오다 가문에서 탈퇴하면서까지 로닌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1576년, 타카토라는 300석의 봉록으로 하시바 히데나가를 따랐다.[6] 오다로 돌아왔다(...) 당시 히데나가의 형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새롭게 수여된 오우미의 영지에 나가하마 성을 새롭게 쌓는 중이었는데, 타카토라는 여기에 출사해 축성에 관련해서 이런저런 업무를 맡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오다 노부나가 또한 아즈치 성을 새롭게 쌓는 중이었고 히데요시가 중요 부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여기에도 불려가 토목 관련 업무를 맡은 것으로 보여진다. 계속되는 삽질지시

1577년 10월이 되자 모리 테루모토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히데요시를 주고쿠 공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히데요시는 이 말을 듣고 하리마에 들어가 히메지 성을 개수하기 시작했는데, 히데나가는 산인 방면으로 군사를 진격해 다지마로의 침공을 시작했다. 타카토라 또한 히데나가의 휘하로 다지마 원정에 참여했다. 또한 히데나가는 그 유명한 다케다 성의 죠다이를 이 시기에 맡았고, 대대적인 개축을 행했기에 타카토라 또한 다케타 성의 개수에 관계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1578년에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모리 세력과 연동해 노부나가를 배신하자, 히데요시와 히데나가는 군사를 돌려 나가하루를 공격했다. 물론 타카토라도 히데나가 휘하에서 나가하루 공략에 함전했다.[7] 결국 1580년 정월에 미키 성은 함락되고 벳쇼 세력은 멸망했다.

1581에는 다지마 방면으로 돌아와 다지마 원정에 종군했다. 이 때 전후로 타카토라는 자신의 거관을 다지마에 조성하기 시작했기에, 잇시키 슈리노다이부의 딸인 규보 부인과 결혼했고, 부친 토라타카 또한 오우미에서 다지마로 불러들여 자신의 거관에서 생활하게 해주었다고 한다.[8] 오우미에서 다지마로, 이건 효도일까 불효일까(...) 6월이 되자 히데요시는 산인 원정을 계획하며 돗토리로 군사를 진군시켰다. 히데나가도 이에 동참했기에 타카토라도 군사를 이끌고 따라가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9]

1582년에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야마자키 전투를 일으키자 여기에 따라가 선봉으로서 공을 올렸다. 이후 타키가와 가문과의 전투에도 참여했고, 주군 히데나가는 하리마와 다지마의 2국을 가지는 한 명의 다이묘로 올라가는 것에 성공했다. 히데나가는 곧 다지마에 입부했지만 마땅한 성곽이 없었기에 아리코야마 성 주변의 이즈시에 성을 하나 만들 것을 명령했는데, 타카토라도 이 명령을 받아 양성을 개축하는 것은 물론, 히메지와 이즈시에서의 통치도 맡게 되었다.[10]

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지만 이순신을 만나 그 동안의 명성과 달리 옥포해전 등에서 패배하고, 정유재란원균을 상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하지만 다시 이순신과 명량해전, 절이도 해전 등에서 맞붙어 패배한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오타니 요시츠구에게 패했고 오사카 전투에서는 쵸소카베 모리치카에 궤멸 직전에 이이 나오타카의 구원을 받아 구사일생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요 이마바리의 20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가 1608년에 이세츠(津) 지역으로 전봉되면서 2만석을 추가로 받았고, 오사카 전투 이후에 추가로 봉토를 가증받아 최종적으로 32만 3000석이 되었다. 이에야스 사후엔 닛코 동조궁의 건축을 담당하였으며, 자신의 영지에도 동조궁을 건축했다.

1630년 에도의 번 저택에서 사망. 후계자로 아들인 토도 타카츠구가 뒤를 이었으며, 대대로 츠번의 번주가 되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진다.

타카토라가 섬긴 주군은 최초의 아자이 가문 계열[11] → 오다 가문[12] → 도요토미 가문[13] → 도쿠가와 가문[14]까지 10명에 달한다.


3. 평가[편집]


대세를 따라 주군을 수없이 바꾸어 섬긴 인물로, 주군을 바꾸는 것이 일상적인 전국시대의 분위기에서조차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현대 일본에서는 무사를 소위 샐러리맨에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고 여기저기 경력직으로 불려다니며 그때마다 몸값을 올려 받은 풍운아와 같은 케이스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세가 판가름 났을 때 주군의 뒤통수를 때린 적은 없었고 임관하고 있는 가문에 뭔가 일이 있을 때에는 한눈 팔지 않고 성실히 일했다. 때문에 오히려 전주인으로부터 감사장이나 추천장을 받고 나올 정도였고 새 주군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15] 다만 실력 좋은 경력직 신참이 들어오니 오랫동안 가문을 섬겨온 고참들의 견제와 디스가 좀 심한 편이었을 뿐... 그리고 아무리 실력주의에 주군을 수없이 바꾸는 것이 일상적인 전국시대라고 하여도 위급한 때에 기존의 주군을 버린다던가 뒤통수를 때린다던가 하는 일은 암묵적인 금기로 여겨졌고[16][17] 이런 일을 행한 뒤에는 십중팔구 매장당하거나 새 주군을 섬긴다 해도 찬밥 취급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토도가 신중했던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타카토라가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가 장수로서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축성술을 비롯해 지상전에서도 유능했는데 임진왜란에서 수군을 지휘할 정도로 수상전까지 무난히 수행이 가능한 육상, 수상 전부 운용이 가능한 만능형 장수였다. 이렇기에 타카토라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다스리는 일본에서도 중용되었다.

타카토라 자신은 이에 대해서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이는 타카토라가 남긴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18]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지조다."[19]

한마디로 중국사의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가후, 풍도같은 인물. 하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해 역사소설 등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훗날의 일이지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무렵 토도 타카토라의 후손인 토도 타카유키(藤堂高猷)는 조정군과 막부군 최대의 전투인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가장 처음으로 막부군을 배반했다. 에도 막부에서는 "전투가 일어나면 선봉은 히코네의 이이 가문과 이세의 토도 가문."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에야스의 창업공신인 이이 나오마사의 후예들 동급의 대열로 붙였다는 점에서 당시 토도 가문에 대한 막부의 대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잽싸게 그런 대접을 해 준 막부를 배반하고 조정군 쪽으로 돌아선 것. 이를 두고 막부 쪽 사람이든 유신지사든 누구를 막론하고 "제 조상 버릇 어디 가나"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타카토라에 대한 이미지는 당시부터 좋지 않았다는 소리.

그러나 최후의 양심은 있었는지 이에야스의 무덤인 닛코(日光)[20]의 닛코 동조궁을 포격하라는 명에도 "타카토라공이 곤겐님(이에야스)께 입은 은혜가 있다"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상술했듯 토도 타카토라는 닛코 동조궁 건축을 담당했고, 현재 도쿄도 다이토구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우에노 동조궁(上野東照宮)[21]도 그가 지었으니 포격을 했다간 조상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격이 되기에 거부할 만 했다.

어찌되었든 여러 주군을 섬긴 인물답게 여러 싸움에 참가하였다. 시즈가타케 전투, 사이카슈 정벌, 큐슈 시마즈 정벌, 임진왜란, 정유재란, 아이즈 우에스기 정벌, 세키가하라 전투 및 오사카 겨울, 여름 전투까지 굵직한 싸움에는 해외를 막론하고 참가하였다. 공도 많이 세워서 말년에는 다이묘로서 32만석의 영지를 가지기도 했다. 단, 미묘하게 대전운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오오타니 요시츠구[22], 오사카 겨울싸움 때에는 쵸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카츠나가 등과 붙어서 피해를 많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을 만나면서 대진운이 바닥을 찍게 된다.[23] 일단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첫 승리를 내줬고 임진년 해전에서 연달아 계속 털렸다. 단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기도 했다.근데 이건 못이기는게 바보 아닌가. 또한 명량 해전에서는 수군 총대장으로 참전했는데, 그냥 털린 게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 있었을 총대장이 화살을 맞을 만큼 대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물론 이는 토도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대전한 모든 일본 수군 장수들에게 공통된 운명.

최후로 섬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충성을 보이고 많은 공을 세워서, 주위의 대다수가 토도 타카토라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에야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소설 대망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와 대화를 하면서 경계할 만한 다이묘를 논하는데 히데타다가 시마즈, 다테 등을 얘기할 때는 "그럴 능력도, 상황도 안 된다"며 웃어 넘겼지만 타카토라를 거론하자 정색을 하며 "이즈미노카미(和泉守. 타카토라가 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며 즉시 동석시킬 정도[24]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도쿠가와 마사코가 입궁할 때는 할복까지 불사한다는 태도로 입궁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우수한 무장이면서도, 그보다는 지장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내정, 축성(유머를 섞어서 '축성 오타쿠'라고 불리기도 한다), 모략,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문학이나 노가쿠, 다도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4. 축성의 명수 타카토라[편집]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25] 쿠로다 칸베에[26], 카토 키요마사[27]와 함께 성쌓기 3대 달인(築城三名人)으로 불렸다고 한다. 층탑식 천수(層塔式天守)[28], 타카이시가키(高石垣)[29], 타몬야구라(多聞櫓)[30], 미야코바이(宮勾配)[31] 등이 타카토라의 특기였다고 하며, 평생 스무 곳이 넘는 성을 쌓았다고 알려져있다. 그 중에서도 타카토라가 손을 댔다고 확인된 성곽 리스트의 일부[32]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 사루오카야마 성(猿岡山城): 와카야마현 키노카와시
  • 와카야마 성(和歌山城):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아카기 성(赤木城): 미에현 쿠마노시
  • 사누키-타카마츠 성(讃岐高松城): 카가와현 타카마츠시[33]
  • 야마토-코오리야마 성(大和郡山城): 나라현 야마토코오리야마시[34]
  • 순천왜성(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 오오미시마-아마자키 성(大三島甘崎城):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 이마바리 성(今治城): 에히메현 이마바리시
  • 우와지마 성(宇和島城): 에히메현 우와지마시
  • 오오즈 성(大洲城): 에히메현 오오즈시
  • 이가-우에노 성(伊賀上野城): 미에현 이가시[35]
  • 후시미 성(伏見城): 교토부 교토시
  • 제제성(膳所城): 시가현 오오츠시
  • 탄바-카메야마 성(丹波亀山城): 교토부 카메오카시
  • 사사야마 성(篠山城): 효고현 탄바사사야마시
  • 에도 성: 도쿄도 치요다구
  • 오사카 성(大坂城): 오사카부 오사카시[36]
  • 츠 성(津城): 미에현 츠시[37]


5. 여담[편집]


  • 초상화에서 드러나듯이 동시대의 일본인치고는 가 매우 큰 거한이었다고 전한다. 알려져 있기로는 6척 2촌.(190대 초반)[38]
  • 말년에는 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침실을 나설 때 오늘은 죽는 날이라고 마음 먹어라. 그런 각오가 있다면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 가훈 1조

  • 철저한 실력주의자였으며 충의 대신 실력만으로 인생을 살아갔던 토도 타카토라 자신의 가치관을 말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말년에는 200조항의 가훈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 뭐 주인을 바꿨다고 속인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 타카요시를 양자로 들였으나 친아들 타카츠구가 태어나면서 타카요시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뒤 타카토라는 타카요시를 거북하게 생각했으며 타카츠구도 타카요시를 기피했다고 한다.
  • 유소할 때부터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장년의 유모의 으로는 부족해 여러 여인들의 젖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3살에 모찌 6개는 먹어치우고 성격도 거칠어 남들에게 다쳤다고 보고하는 일조차 없었던데다 13살이 되자 형인 타카노리보다 몸집이 커졌다고 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기골장대하고 용맹무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기록과 초상화를 보면 말단비대증이 의심된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큰 체격과 거친 성격, 늦둥이 아들을 겨우 볼 정도로 70세까지 장수했으면서도 자식 복이 없는 난임에 가까운 삶, 아들 타카츠구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유독 큰 귀와 코, 체격등을 보면 호르몬 이상으로 턱, 귀, 코가 계속 자라고 그 체격의 원인이 유전병일수도 있다.
  • 1568년 쯤 오다니에 도적이 출몰했다. 부친 토라타카와 형 타카노리가 이 소식을 듣자 도적을 잡으러 떠났는데 어린 나이를 이유로 동행을 거부당한 타카토라는 집으로 돌아와 칼을 빼돌려 독자적으로 오다니로 갔다. 이윽고 뒷문에 잠복해 도적을 기다리자 부친과 형이 정면에서 침입을 개시해 도적들은 그대로 뒷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타카토라는 재빨리 도적을 베어넘겨 수급을 챙긴 채로 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타카토라의 일을 눈치채자 크게 기뻐하였고 이를 들은 주변의 사람들은 를 내두르며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 1572년 야마시타 가스케를 살해하고 오다니에서 도망칠 때 그만 추적자에게 발각되고 말아 "문장 옷을 입은 자를 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타카토라는 문장 옷을 뒤집어 입은 상태였고 "자신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답변했기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 1577년 다지마 공격에 타카토라는 120기의 병사를 이끌고 오지로 계곡을 공격했는데 계곡의 들을 방화하고 산성을 공격하며 적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성내에서는 거대한 목재와 거석을 연일 떨어뜨려 타카토라의 진공을 막았으며 도치다니 성에서부터 엔야 사에몬노죠가 구원군으로 와 협격을 당해 군세가 괴멸에 가까운 상황에 빠졌는데 타카토라 또한 단기로 도망쳤다. 이 승리를 틈타 잇키가 하시바 도요토미 세력의 도치오 관으로 몰려오자 타카토라는 사력을 다한 전투를 펼쳐나갔고 그 결과 겨우겨우 잇키를 물리칠 수 있었다.
  • 1580년 정월에 미키 성을 공략할 당시 적군의 숙장 로쿠로 우에몬이 명마에 올라타 출진하는 일이 있었다. 로쿠로 우에몬이 아침의 안개를 이용해 군공을 올리고 귀성하려 하자 타카토라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즉시 로쿠로를 베어버리고 수급을 취해 개선을 이루었는데 이 때 로쿠로 우에몬의 명마는 무사했기에 타카토라는 그 을 가지고 돌아와 '가코쿠로'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 1581년에 다지마 원정으로 귀환했는데 마을에 요새를 쌓아 집단을 구성해 마을을 배회하며 농민을 약탈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며 보고를 들은 히데나가는 타카토라에게 철포 수 정을 주며 이를 진압할 것을 명했다. 타카토라는 책략을 내어 자신 주변의 다지마 세력들을 포섭해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마을은 요새의 세력을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 중에 한 명의 강용한 젊은이가 있어 요새를 떨어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에 타카토라는 모략으로 그를 조용히 취할 것을 결의하며 이아이 마고사쿠와 함께 적군의 진지로 숨어들어갔는데 잘못하여 진지의 울타리를 건드려버렸기 때문에 적군에게 들킬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도짓코?(...) 이윽고 소리를 들은 도적이 울타리를 조사하다 창까지 꺼내 들쑤신 결과 그만 타카토라가 넓적다리가랑이?에 창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꿈쩍도 하지 않으며 입고 있는 을 통해 창을 잡으며 혈흔도 닦아내는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적은 창에 느낌이 전해졌기에 불을 켜 창날을 보았지만 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물러났다.
  • 다지마에서 도적들을 공격할 당시 도적들이 측면으로 급습을 감행해 타카토라의 군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타카토라는 직접 신가리를 맡아 싸워나갔지만 말이 적들의 공격에 놀라 타카토라를 떨어뜨렸다. 이를 보고 도적들이 몰려오자 타카토라는 맞서 싸웠으나 입고 있던 진바오리가 넝마가 될 정도로 열세에 몰리게 됐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도치오 겐사에몬 요시츠구라는 자가 달려와 적을 쫓아내며 수장을 베어 타카토라를 구해내었다. 타카토라를 알아본 요시츠구는 자신의 말을 타카토라에게 내어주었고 타카토라는 곧 본진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젊을 적 낭인으로 떠돌아다닐 때 어느 집에서 무전취식을 했는데 주인이 오히려 노자를 주면서 격려해줬고 타카토라는 후에 다이묘가 된 뒤 그 집을 찾아가 떡값을 후하게 치렀다고 한다. 기인도 떡 3개이기 때문에 대중매체나 동인설정에서는 떡을 좋아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 다이묘가 된 이후 도미를 대접받았는데 "출세를 하니 이런 진미도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에도 시대에만 해도 도미가 비교적 흔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이 일화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평이 있다.
  • 오사카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화친하며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는 조건을 걸었는데, 이는 사실 이에야스의 함정이었다. 이에 타카토라의 가신 간 미치나가는 타카토라의 명으로 매립 공사를 맡고도 이것이 무사도에 어긋난다며 매립을 거부하며 타카토라와 큰 갈등을 빚었고, 결국 화가 난 타카토라에게 할복을 명받아 1615년 할복했다고 한다.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카토라.


6.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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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마토 마츠나가 가문과 동일하다.[2] 토도씨의 거관터는 지금도 코라쵸 자이지 일대에 남아있다. - 축성의 명수 토도 타카토라(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6[3] 親筆留書/高山公実録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0[4]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0[5] 諸家深秘録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1[6] 또한 지금까지 유명을 계속 써왔기에 사관과 동시에 가명도 하나 팠다.(...) 公室年譜略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1[7] 公室年譜略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3[8] 公室年譜略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17[9] 高山公実録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20[10] 高山公実録 - 築城の名手 藤堂高虎 p.22[11] 나가마사(15세), 아츠지 사다유키(17세)[12] 오다의 가신 이소노 카즈마사(18세 80석 봉록), 카즈마사가 오다 노부즈미에게 가독을 승계. 무공을 쌓았으나 봉록을 올려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자 로닌[13] 히데요시의 동생 8천 5백석의 히데나가(21세 300석 봉록에서 32살에 2만석), 히데야스, 히데요시(7만석)[14]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15] 감사장(感状)이라고 불리는 표창장 문화로,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타 가문으로 소속을 옮기는 일이 빈번하던 전국시대에는 직장인의 추천장과 비슷하게 해당 가문에서 활약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원만하게 이직하는 데 쓰인 것으로 보면 무방하다.[16] 그 사례로, 주군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쫓기고 있을 때 제 살겠다고 그를 추격한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포상을 받기는커녕 오다 노부나가의 맏아들인 오다 노부타다에게 붙들려 '천하에 다시 없을 불충한 자'라는 죄명 하에 목이 잘렸다. 정당하게 소속 가문을 바꾸는 것과 배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그 때문에 현대의 샐러리맨처럼 이력서나 추천장의 성격으로 감사장을 써 주는 것이다.[17] 배신을 하지 않더라도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 탈주하거나 주인과 다투는 등 원만하지 않은 퇴직을 할 경우 '호코카마이(奉公構)' 처분을 받아 다른 가문에 블랙리스트가 나돌게 되고, 재임관(재취직)에 지장을 받게 되는 일이 잦았다. 도요토미 정권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이것이 아예 공식적으로 법제화되었다.[18] 사실 이 말은 실리적으로도 당대 관점상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주군을 7번이나 바꿀 정도라면 새 주군에게 호의를 쉽게 얻기 힘들텐데도 주군이 써줄 정도라면 반대로 해당 무사의 실력이 제법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 즉 달리 말하면 무사라면 주군을 7번 바꾸며 바꿀 때마다 실력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치환될 수 있다. 그가 주군을 바꿀 때마다 새 주군은 그의 이력을 다 알고 있을텐데 한번이라도 배신이나 치명적인 실수 혹은 잘못을 발견했다면 써주지 않았거나 재임관시의 조건이 이전보다 나빠졌을 것이지만 자신은 계속 좋은 조건으로 임관되었다는 뜻이니, 어떤 의미에선 타카토라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돌려 말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현대로 치면 난 7번이나 이직했는데도 그 때마다 고위직에 높은 연봉 받았다고 자랑하는 거다.[19] 이 역시도 의미가 있는 말로 앞서 나온 주군을 7번이나 바꾼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7번이나 바꿀 정도로 주군들이 자신을 써줬다는 의미인데 이 과정에서 실력은 물론 신뢰도 중요시된다. 실력은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그 능력 덕에 처음에는 써주는 사람이 있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외면받지만(그렇다고 말단직이나 맡기자니 능력이 아깝다.) 실력도 있고 신뢰도 있는 사람은 설령 적대관계라고 해도 실력에 신뢰까지 있어서 믿고 써줄 수 있다. 즉 '내가 주군을 바꿨지 배신을 했냐?' 뉘앙스의 말.[20] 당시 시모츠케국.[21] 쿠노산, 닛코의 것과 함께 3대 동조궁이라고 불린다.[22] 나중에 요시츠구의 묘를 건립하여 주었다고 한다.[23] 여담으로 임진왜란 시기 토도는 엄밀히 말해 히데나가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야스의 가신 신분이었다. 다만 히데야스가 어리니 주군을 대신해서 군을 지휘한 것. 같은 경우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역시 류조지 가문의 가신 신분으로, 당주를 대신해 임진왜란에 참여했다.[24]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 또한 이에야스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아 이후 쇼군들의 보좌역을 맡을 정도여서 토도가 다테보다 더 신뢰를 받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당장에 이에미츠의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 선언도 그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으며 사적으로는 이에미츠에게 굉장히 많은 신뢰를 받았다.[25] 타카토라의 일본 위키피디아 페이지도 상당 부분은 후쿠이 켄지(福井健二)가 쓴 일본 성곽 시리즈 4편 <축성의 명수 토도 타카토라(築城の名手 藤堂高虎, 2016)>에 의존하는 듯 하다.[26]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나카츠 성(中津城)의 모습은 나카츠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27] 대표작은 구마모토 성(熊本城).[28] 천수각의 형태 중 하나로, 타카토라가 창안했다고 한다.[29] 석축을 높게 쌓는 것을 의미하는 듯. 오사카 성(大阪城) 등이 대표적인데, 타카토라의 작품 중에선 주로 이가-우에노 성(伊賀上野城)의 30m짜리 미나미노마루(南ノ丸)/스나노마루(砂ノ丸)가 예시로 나온다.[30] 병사들이 숙사로 쓰던 방(나가야, 長屋)을 망루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용도변경해서 이시가키 위에 둘러놓은 것.[31] 이시가키 경사에 따른 디자인의 종류. 자세한 사항은 일본의 성/이시가키 문서를 참조.[32] 위의 <생애>에서 언급된 아즈치 성(安土城), 나가하마 성(長浜城), 다케다 성(竹田城) 등 (정황상 개연성이 있지만) 타카토라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찾지 못한 성들은 제외.[33] 축성 지휘(縄張り)는 쿠로다 칸베에가 잡았다고 하는데, 토도 타카토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이름도 언급된다고 한다. 참고로 사누키-타카마츠 성은 쿠로다의 나카츠 성, 토도의 이마바리 성과 더불어 일본 3대 수성(水城: 바다, 호수, 하천 등에 면해서 지은 성)이라고 한다.[34]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 하시바 히데나가 주도하에 아케치 미츠히데, 토도 타카토라가 보청(普請)역할에 종사했다고 한다.[35] 타카토라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듯 하다. 정작 우에노 성은 공사 도중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면서 작업이 스톱, 지금도 미완성이라고 한다.[36]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천하보청(天下普請)을 벌일 때 타카토라가 총책임관을 맡았다. 주된 업무는 기존의 성에서 10m 가량 흙을 더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한번 더 타카이시가키(高石垣)를 높이 쌓아서 도요토미 시절 오사카 성의 옛 구조를 완전히 땅 밑으로 묻어버리는 작업이었다고 한다.[37]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이르기까지 츠 번주 토도 가문의 거성이었다고 한다.[38] 일설에는 체중도 30관(약 113kg)이었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신장을 감안해도 과체중이기에(BMI 기준으로 약 31) 소위 '근육돼지'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