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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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편찬 배경
3. 내용
4. 의의
5. 기타
5.1. 조선의 도로가 활성화 되지 않은 이유

道路考

1. 개요[편집]


조선 영조 46년, 1770년에 신경준(申景濬)이 우리나라의 국도, 지방도, 육로, 해로, 도로 등 여러 교통로에 대해 기록한 지리지. 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편집]


배경 부분은 <한국건설기네스(Ⅰ) 길(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간> 발췌 부분을 참조하였습니다.

원래 삼국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은 도로정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치도 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 라는 숙종의 말이 그 단적인 사례로, 군사적 측면에서 도로의 역기능이 강조됨으로써 도로 건설은 곧 외적의 침략을 부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들은 적군, 특히 주적이었던 북방 기마민족들의 주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조선시대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거기다 조운선에 의한 수운이 있었기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모든 교통로는 몇개의 좁은 보도만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다면 평시에도 도로를 통한 마차의 이용이 꽤 있기는 했으나 신라백제는 이미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도로와 마차의 사용이 매우 적었고, 고려 건국 후부터는 아예 도로가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는 마차 등은 의전용에 가깝게 변해가게 된다. 이후 들어선 조선 정부에서는 양마장을 설치하고 중국의 품종 좋은 말을 들여 북방 평지지역인 평안도에 한해 도로를 닦고 마차를 적극적으로 운용해보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그만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친 이후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처들어올 마음을 먹은 놈들은 도로가 깔려있든 말든 잘만 처들어와 쾌속 진격했고, 오히려 방어를 하려던 조선 측이 지휘관의 늦은 속도로 인해 제승방략의 허점이 찔리거나 구원온 명나라 연합군에게 보급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등 불리한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200여년간 평화를 누리며 전국적인 범위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던 조선은 이때 처음으로 대난리를 겪은 후 기존의 문제점을 인식, 이후 이를 반성하고 삼국말 통일신라초부터 시작되었던 통금정책을 해제한 후 각지에 서서히 잔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도로들을 기점으로 광해군수미법,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여각등의 발달, 상평통보의 발행과 한반도 최초의 전국적 화폐 유통 경제 구축 등이 이루어진다. 사상적으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들어 유형원반계수록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설파한 이래로 이익유수원 등의 실학자들이 도로 및 교량 건설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이들이 평가받으며 이에 따라 한반도 전토에 도로 건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1]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국가 도로에 대한 총집편이 바로 도로고이다.


3. 내용[편집]


내용 부분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1권: 왕이 선대 조선왕릉에 행차할 때 통행하던 34개 능행로에 대한 내용. 휴식차 가는 온천길에 대한 내용, 화성행궁, 남한산성 행궁 등 왕이 여행갈 때 머무르던 여러 행궁을 잇는 도로에 대한 내용. 수도 서울로부터 육대로(六大路)와 그에 소속된 제읍 및 역원(驛院) 간의 국도에 대한 내용 등이 있다. 국가 육대로는 크게 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이다.

2권: 팔도 각 읍의 사방경계와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까지의 거리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3권: 사연로(四沿路), 즉 백두산연로·압록강연로·두만강연로 및 팔도연해로(八道沿海路)를 열거한 뒤, 팔도 각 지방의 역로(驛路)와 대로(大路)·중로(中路)를 구분, 기록하였다. 그리고 파발제(擺撥制)에 따라 서울과 의주(義州) 사이에 38참을 두어 말이 질주할 수 있게 해놓은 기발(騎撥)인 서로, 그 외 걸어서 공문을 전할 수 있게 깔아놓은 보발(步撥)인 북로와 동남로 등 파발로와 봉수로를 기록하고 있다.

4권: 외국과 연결된 도로에 대한 내용. 즉, 강진제주 사이의 해로 및 교린사행로(交隣使行路)인 중국사행육해로(中國使行陸海路), 일본통신사해륙로(日本通信使海陸路), 유구국해로(琉球國海路) 등을 수록하고 있다. 부록으로 조석(潮汐)·풍우(風雨) 등의 조목과 항해에 사용되던 전통적인 지식, 전국 각지의 정기 시장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4. 의의[편집]


전통적인 지리지가 아니라 최초로 경제의 유통을 중점에 두고 만든 전문 저술로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전개된 도로와 시장에 대한 이용과 유통량의 증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함으로서, 조선 후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경강 상인(京江商人), 시전상인 등의 발달과 육의전(六矣廛)에 대한 신해통공(辛亥通共) 조치 등등 자본주의 맹아론의 근거 중 하나가 된다.

또한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이정표(里程表)》와 《도로표(道路表)》 등 유사한 종류의 많은 경제적 도로 관련 저술을 나오게 한 선구적인 업적이 있다.


5. 기타[편집]


2016년 4월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에서 도로고에 나와 있는 육대로(六大路), 즉 삼남로·의주로·영남로·강화로·경흥로·평해로의 6개 도로 중 삼남길·의주길·영남길 일부를 복원해 '경기옛길'이라 이름짓고 경기옛길 생태탐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관련 기사


5.1. 조선의 도로가 활성화 되지 않은 이유[편집]


조선이 국방을 위해 일부러 길을 닦지 않았다거나 , 바다 수운교통을 매우 중시했으므로 굳이 길을 닦을 필요가 없었다는 이유로 설명하곤 한다. 운하, 도로 항목에도 자세히 나오며 실학자들이 이를 간과했단 비판도 있다. 물론 이런 이유들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조선이 길을 닦지 않은 것에 대해선 이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있다.

조선시대도 당연히 도로는 다 있었다. 10대 대로를 기본으로 지역마다 고을마다 당연히 연결도로 다 있었다. 10대 대로는 경국대전부터 속대전 등 법정기준 자체가 말 그대로 사신행차가 가능한 대로라서 수레 3대가 연달아 지나갈수 있어야 했다. 대표적으로 중국 사신이 행차한 의주~한성 간 의주대로, 정조가 능행차 다닌 한성~수원 간 대로 이런거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대로들을 제외한 나머지 도로들이었다. 대부분의 도로들이 제대로 보수가 되어있지 않은데다가 너비가 좁아 수레가 다니기 어렵고 불편했다. 이런 점은 수레 사용의 퇴보로 이어졌고, 수레사용이 적으니 결국 도로확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등의 악순환이었다. 더하여 조선 후기 전까지는 조정의 상업 억제[2]자급자족에 도로 정비와 유통망 형성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점 또한 크다.

이에 대해 조선이 포장도로를 깔지 않은게 문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양은 물론 서양도 19세기 전까진 돌로 깐 포장도로는 거의 안만들었다. 괜히 로마시대 도로가 유명한게 아니다. 수레의 나라 중국도 '남선북마' 라 하여 화북에서 전부 수레용 도로가 많았다. 그러나 돌포장이 아니고 그냥 흙길이었는데, 이는 북중국 특성상 강수량이 적고 건조해서 유지가 된 것이다. 일본가마쿠라 시대에 우마와 수레를 이용하는 운송업자인 바샤쿠(馬借), 사샤쿠(車借)가 등장하고 화물의 보관과 운송을 대행하는 도이마루(問丸)라는 상인들이 활약하는 등 중세부터 육로 운송이 발전하였다.[3] 그러나 일본도 이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조선과 마찬가지로 수운 의존도가 높았으며, 에도 시대까지 석재로 포장된 간선도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서양은 어떨까? 서양도 매한가지였다. 서양도 19세기 영국에서 매캐덤 도로(쇄석포장) 포장법 개발 전까진 흙길을 그대로 썼다. 다른 쇄석포장법 적용을 넓게 봐도 영국이 18세기에 그나마 좀 깔기 시작했고 다른나라는 그런 거 없다. 마차는 그냥 흙길을 달렸고 쇄석포장도 그나마 19세기 영프독만 깔았으며 이외의 다른 유럽국가들은 깔지 못했다. 서양이라도 도로가 언제나 라스푸티차일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도저히 개척속도를 못따라간 미국은 20세기 초 까지 기본이 비포장도로였다.[4]

더구나 포장도로를 만들려고 해도, 전부 평지였기에 수레이용이 많은 점, 장마철이 없고, 연교차가 극히 적다는 점 등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유럽(그리고 중국 화북)과 달리 조선은 현대 대한민국 시점에서도 터널없는 도로가 없는 험난한 지형, 극도로 수량이 편중된 장마철, 극심한 연교차로 인한 동결심도[5]라는 악조건 탓에 만들기 힘들었다. 지금도 공구리 대충 쳐놓은 길은 계절마다 쫙쫙 갈라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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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것과 별개로 조선의 도로는 외국인들에게 꾸준히 까이는데 그들이 남긴 묘사를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은듯하다.[2] 조선은 무본억말을 기본으로 삼아 농업인구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상인과 기술자들의 수를 제어하는 등으로, 동시대의 같은 농본 국가들과 달리 상업을 직접적으로 억제했다. 5일장의 활성화와 화폐 정착을 했다는 아이러니한 면모도 상존.[3] 구태훈, 일본고중세사, 재팬리서치21(2016)[4] 오늘 날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미국 지방의 포장도로들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토목사업 이후의 이야기였다.[5] 동결심도는 땅이 품고 있는 수분이 어는 것이다. 당연히 동절기에는 물이 얼고, 물이 얼면 부피가 늘어나고, 부피가 늘어나면 압력이 증가한다. 흔히 보이는 땅은 표면부터 얼기 때문에 압력이 계속 누적될 뿐 드러나지 않는것이다. 다만 이게 간혹 가다가 습지 같은 환경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하부에 있는 물이 얼어서 렌즈처럼 변하고 그 압력으로 땅이 치솟아 오른다. 이런 현상은 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집의 기초가 좀처럼 깊기도 하고 애초에 사람이 살려면 난방이 필수이니 난방열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이용하는 도로는? 땅이 치솟아서 말 그대로 융기해버리고 포장도로는 그야말로 와장창 될 수밖에 없다. 이걸 완전히 막으려면 현대 철근이나 시멘트 대량생산을 통해 철근 콘크리트로 공구리를 치거나 지속적인 보수가 필요한데 둘다 비용이 지속적으로 많이 들기 때문에 재정부족에 시달렸던 구한말에는 이를 보수하기가 힘들었다. 한마디로 답 없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