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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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도상록(都相祿)은 북한의 물리학자이다.
2. 생애[편집]
1903년 함흥시에서 출생했다. 10대초반에 여행과 등산을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여러 명승고적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역사에 흥미가 생겼다. 중학생 시절 역사 교사와 교류를 하면서 임진왜란 시절 거북선 건조에 물리적 원칙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그 시점부터 물리학에 흥미를 느꼈고, 자연과학으로 전공을 계획했다.
1919년, 영생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일때,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3.1 운동의 여파로 한반도내 모든 대학의 원서 접수가 불가능했었고, 결국 제 6 구제 고등학교에 들어가, 1926년 4월부터 1930년 3월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3. 약력[편집]
학부졸업후에 양자역학에 대한 최신이론을 접하고[5]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원 및 만주 신경공업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양자역학 관련논문을 발표했다.
해방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미군정의 국대안 파동과 북한의 인텔리 모시기 정책에 회유되어 1946년 월북했다. 여담이지만 도상록외에도 한인석, 정근, 전평수, 여철기 등 다수의 물리학자들도 동반월북했다.[6]
북한은 이를 통해 1947년 인원부족으로 실패했던 중앙연구소 설립을 1952년 성공했으며 도상록과 그 동료들의 노력을 통해서 북한은 소련 연합핵연구소 창설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1959년에는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고 입자가속기를 제작했다. 일명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유명해졌다.
이후에도 도상록은 북한내 원자물리학/핵물리학 등 과목의 증설, 원자력연구소의 설립을 통해서 북한내 원자력 학문의 기초를 정립했으며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고 자택에서 연구를 계속하다 86세에 사망했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4. 기타[편집]
소련, 중공과의 정치적 분쟁으로 북한은 핵무기 기술이전이 요원해지자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나섰는데 도상록 등 1세대 북한과학자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수학한 북한 네임드 과학자라 그런지 조선신보에서 2010년 도상록에 관한 일대기를 작성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5.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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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재공파 28세. #. [2] 본격적인 핵개발에 착수하기전에 주로 수소, 헬륨 원자의 양자역학적 메커니즘 연구를 했다. 예를 들면, 수소헬륨 분자의 양자역학적 취급, 수소 가스의 양자역학적 이론. [3] 현 오카야마 대학교.[4] 학술 논문 : 低温に於ける水素ガスの量子力學的理論 = 저온에서의 수소 가스의 양자역학적 이론(1927). 해당 링크 6페이지에 초록이 나온다.[5] 에르빈 슈뢰딩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저 번역본이 출판될 당시 슈뢰딩거의 공리는 양자물리학에서 최신 이론이었다. [6] 이때 물리학과는 물론 이공계 계열 교수들 대부분이 월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