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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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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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역모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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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nge_pos.png 전쟁 도중 연합국으로 전향 파일:whattheydo.png 간접적 지원 및 여부 논란
파일:pupet_state.png 나치 독일의 괴뢰국 / 파일:pupet_state_jap.png 일본 제국의 괴뢰국 / 파일:ita_kingdom_symbol.png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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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40대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1] | Tojo Hideki


파일:377149_hideki-todzo_ff.jpg

출생
1884년 12월 30일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1948년 12월 23일 (63세)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재임기간
제40대 내각총리대신[2]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서명
파일:1280px-Hideki_Tojo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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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도조 히데노리
모친 도조 치토세
배우자
도조 가쓰코
자녀
장남 도조 히데타카
차남 도조 데루오
삼남 도조 도시오
장녀 도조 미쓰에
차녀 도조 마키에
삼녀 도조 유키에
사녀 도조 기미에
친인척
손녀 도조 유코
신체
164cm
종교
국가신토불교 (정토종)
학력
육군대학교 (27기)
정당


약력
관동군 헌병사령관
제10대 관동군 참모장
제21대 육군차관
제16대 육군참모총장
제50-52대 육군대신
제64대 내무대신
제40대 내각총리대신
제66대 외무대신
제53대 문부대신
제25대 상공대신
초대 군수대신
훈장
훈일등욱일대수장
금치훈장(2등급)
서보대수장
Order of the German Eagle
Order of Saints Maurice and Lazarus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17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05년 3월 ~ 1944년 7월 22일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정치인 생활
2.4. 태평양 전쟁과 전시 총리로서의 행적
2.5. 총리직 사임
2.8. 처참한 말로
3. 평가
3.1. 세계
3.2. 당대
3.2.1. 부하
3.3. 일본
4. 대중매체에서
5. 어록
6. 주요 경력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군인, 전쟁 범죄자. 일본 제국의 4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일본군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은 대장이다.

대표적인 추축국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프로파간다를 포함한 매체에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3]에 영향을 주었다.[4] 또한 워낙에 벌인 일이 거대하고 잔혹해서, 자살하려던 도조를 미군들은 살리고 치료해서 기어코 교수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2. 생애




2.1. 초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oung_Tojo.jpg

청년기 시절의 도조

아버지(도조 히데노리)[5] 때부터 군인 집안이었고 도쿄 출생으로 군인 아버지를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일 유학 시절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에게 초슈벌만 등용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면전에서 따지는 짓을 했다가 쵸슈벌에게 찍혔고,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으나 상관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여 예편되었다. 이때 야마가타가 중장으로 승진시켜 3일간 별 세개를 달게 한 다음에 예편시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때가 도조 히데키 임관 직후였다.

육군에서 출세하려면 사관학교 졸업후, 일종의 고급 지휘관 과정인 육군대학을 들어가야 하는데, 도조는 3수 끝에 겨우 들어갔다.[6] 육군대학을 다녔는데 아버지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도조 히데키의 성적은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유년시대엔 싸움대장이였으며 겁도 없이 상급생 20명에게 덤비고 뒤지게 얻어맞은 다음에야 싸움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 육군대학 시험을 앞두고서 합격에 필요한 학습 시간을 계산해서 하루에 공부 시간을 정하고 쪼개서 시험을 준비했다. 근데 3번이나 떨어진 후 간신히 졸업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졸업한 뒤 관동군 헌병사령관, 참모장, 일본 육군 차관을 역임했다. 다만 육대 출신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직책을 전전했는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초슈 쪽 라인에게 찍혀서 한직을 돌았다. 실제로 육대 출신이면 갈 까닭이 없는 한직인 헌병사령관도 했다. 일본군 헌병이 큰 권력을 행사한 조직이지만, 그와 별개로 사령관은 별 것 없는 자리였고, 사실상 이 자리를 주면 좋은 말할 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물론 도조는 때를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그냥 역임. 이후에는 당시 군부의 최고 유력 파벌이였던 통제파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는데, 통제파의 수장이였던 나가타 데쓰잔이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어 도조가 통제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관동군에 헌병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그 악명 높은 731 부대가 생체실험도 했고 프로파간다라는 말도 있지만 10만의 반일 분자를 재직시 1만으로 줄였다는 평도 얻을 정도였으며, 실제로 만주에 부임했을 때 딸들에게 "몸값도 없고 굴복할 생각도 없으니 비적이 납치해도 구하지 않겠다"라 공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조 히데키에게 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이유는 도조가 일을 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2. 정치인 생활


1936년에는 대립 관계였던 황도파가 2.26 사건을 일으키자 도조가 이끄는 통제파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결국 황도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이후로 내각은 각료의 인선이나 정책에 대해서까지 군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군부는 내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7]를 부활시키고 군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는 등 '국방 국가' 구상을 정강으로 내세워 군부의 권력을 끝없이 강화시켰다. 또한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나치 독일과 독·일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군사비 약 14억엔을 포함한 방대한 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치체제의 군국주의화를 가속화시켜 나갔다.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으로 재직하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2개 여단을 무단으로 파견하여 사태 확대를 꾀했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되자 도조 병단이라 불리는 차하얼 병단을 조직하여 베이핑 탈환전에 투입, 탕언보가 지휘하는 13군을 격파하고 차하얼성과 수원성을 장악하였다. 1940년에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된 후에는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일본 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일에도 한몫 했다. 그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는 그 기획안을 육군 수뇌부에게 공개하여 열렬한 지지를 얻고, 1941년 10월에는 대미 개전을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압박하다가 결국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렸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켜 영국미국을 상대로 슬슬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자, 도조는 "이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리하게 전선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고 어느정도 전후 수습이 된 후'로 미루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이미 도조가 공개한 태평양 전쟁 기획안에 취향저격 당한 육군 강경파는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며 난리를 쳤고, 우습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인 도조가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2.3. 내각총리대신 재임기



파일:4QmKTki.jpg

40대 총리 취임 후

성의는 화평을 희구하신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외교 교섭을 보좌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1년 9월 6일, 육군성 군무과, 군사과 연석회의에서의 발언.


그러던 와중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심각하게 폭주하는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은 황실의 큰어른이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전하 정도밖에 없다."며 나루히코를 새로운 총리 후보로 추천했고, 도조 역시 당장은 대미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 된 만큼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최측근이였던 기도 고이치는 "지금 육군은 황실의 큰 어른이든 뭐든 간에 자신들 뜻에 따라주지 않으면 무시해버리고도 남을 놈들이다. 지금 당장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뿐이다."라며 도조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이 말을 들은 쇼와 덴노는 고민 끝에 "이른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이라며 도조를 총리로 임명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였던 도조는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내각의 총리가 되었고, 일단은 교섭을 통해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해보려 노력했으나 미일 양국 간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조의 이러한 방침 변경에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육군은 그를 따르기는 커녕 도조 내각마저 압박하며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도조는 결국 쇼와 덴노와 기도 고이치를 찾아가서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피하려다가는 여론이 분개하고 육군 강경파가 폭발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황국은 결국 대규모 내전 상태가 되어 자멸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즉, 도조는 육군 강경파의 뜻대로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며 덴노를 거듭 설득했고, 더이상 육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쇼와 덴노도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도조는 진주만 공습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2.4. 태평양 전쟁과 전시 총리로서의 행적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느니라.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 중


육군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사실상 억지로 일으킨 전쟁이였으나, 놀랍게도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연속으로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도조도 "내가 미군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괜한 걱정을 했었다."며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던 육군 역시 다시 도조를 적극 지지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수많은 관직을 집어먹으며 더욱 권력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부, 상공, 군수대신까지 겸임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색이 점점 짙어져가며 도조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계는 물론이고 해군 측에서도 도조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전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결국엔 통수부, 즉 육군의 참모총장과 해군의 군령부장이 ‘전시 통수권 독립’을 명목으로 중요한 군사 정보를 도조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도조는 1944년 2월 21일 ‘국무와 통수의 일원화’를 명목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본인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무렵의 도조 히데키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국방부 장관 교육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인 셈. 쉽게 말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먹었다는 얘기다.

실질적으로는 차관이 장관직을 하니 이렇게 겸직해도 일단 겉모양은 그럭저럭 굴러갔다지만, 대부분의 관직은 1년도 안 가서 물러났다.[8]

이렇게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행정수반인 총리대신, 육군의 수장인 육군대신, 육군 군령의 장인 참모총장 3직을 장악해버린 도조는 정계와 해군으로부터 "육군이 완전히 도조의 사병 집단이 되어버렸다", "천황의 대권마저 대놓고 침해하는, 그야말로 '도조 막부'가 따로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헌법과 정치/군사 제도의 구조상 전시 내각을 총리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면 주요 국무대신직을 총리가 얻어야만 했다. 국무대신이 단 1명이라도 정책에 딱지를 놓고 파업하면 각내 불일치로 내각 전체가 깡그리 물러나야 했으니. 당시 일본의 체제에서는 총리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조는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상술했듯이 도조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군부의 수장이였다. 그리고 군부는 당시 일본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 집단이였기 때문에 군부의 최고 권력자는 곧 일본의 최고 권력자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군부는 내각의 통제를 아예 거부하며 오히려 틈틈이 무력으로 내각을 압박하고 있었고, 통수권자인 덴노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 또한 덴노가 군부의 뜻대로 나라가 돌아가게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행사해주는 대가로 군부는 덴노를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 충성한다는 암묵의 룰이였기 때문에 결국 덴노도 군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부와 내각을 모두 점령한 도조는 이미 절대적인 권력자였고, 심지어는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을 이끌면서 점점 그의 매우 실망스러운 군사적 능력이 끝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그의 답 없는 인재 등용 능력까지 더해져서 온갖 무능한 바보들과 미치광이들이 군에서 높은 자리를 해먹는 바람에 일본군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희대의 막장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9]

일본군을 대전말 막장 집단으로 만든 데는 도조 히데키도 단단히 한 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1년 1월 8일 육군 대신이었던 도조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 전진훈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항복 금지를 명문화하여 쐐기를 박아놓는 바람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개죽음)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태평양 전쟁이 그야말로 개막장으로 치닫자 일본 정계에서도 도조 히데키에게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다. 언론 통제로 민간과 군에서는 나라 돌아가는 자세한 꼴을 몰라 대놓고 비난은 못했는데, 일본의 정보 통제가 워낙 철저해서 정부의 고위 관계자조차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심지어 도조 자신도 처음엔 제대로 몰랐다. 해군 군령부에서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조는 해군의 보고를 그대로 천황에게 올렸는데 천황이 자신과 다른 수치로 알고 있었던 것을 듣고는 그제서야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알았을 정도였다.

사실 통수권자인 쇼와 덴노 말고는 전체적인 전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인물이 없었다. 비록 도조가 군부의 수장이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육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당연히 도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도조에게 전시 상황을 보고할 때에도 중요한 내용은 빠뜨리거나 아예 왜곡해서 보고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반대로 육군의 전시 상황에 관해서는 도조가 쇼와보다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상 다나카 장군이 선박 지원을 요청[10]했지만 도조가 거부하자 욕설을 퍼부어 경질되기도 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희대의 팀킬 만행인 임팔 작전을 하는 것에도 이 인간이 기여했다. 다만 이 부분은 결재받을 때 우물쭈물 준비도 안한 걸 그냥 넘어간 아랫사람 책임도 있다. 거꾸로 도조는 임팔 작전시 위험사항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실제로 도조는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현실성 있는 작전이냐?",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하겠느냐?", "버마 방어에 공백이 없겠느냐?",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냐?" 등을 물어봤다. 그래봐야 어차피 결재했지만.[11] 자세한 것은 임팔 작전 참조.

다만 아주 뻘짓만 한 건 아닌지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에 방탄장갑과 연료 자동 봉입장치를 장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갈수록 여러 삽질과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도조 히데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도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장성은 요직에서 해임시켜 전사할 확률이 높은 최전선으로 보내거나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언론인, 지식인, 관료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징벌소집’하여 이등병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정적이나 비판 세력에게 강권적인 통치를 자행한 것이다. 특히 헌병사령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본래 군인 · 군속에 대한 군사경찰을 주 임무로 하는 헌병을 자의적으로 국회의원 등 정치가를 비롯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도 광범위하게 활용하며 공포정치, 이른바 ‘헌병정치’를 실시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히틀러처럼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만큼은 우수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주류 인맥에서 찍혀서 오늘 내일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군부의 수장이자 독재자가 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2.5. 총리직 사임


이미 전황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던 1944년 7월 일본 본토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사이판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것도 도조가 만주국 이래로의 맹우인 기시 노부스케를 장관직에서 해임하려고 시도했으나 기시가 "나 자르려면 네놈도 절대 국방선 붕괴의 책임을 지고 같이 물러나라!" 면서 강경하게 고집을 피운 덕분에 같이 사퇴했다. 여담으로 이때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어차피 도조는 전후에 전범으로 사형당해야 하는데, 불쌍하게 도조의 후임을 맡아서 죽을 사람을 늘리지 말고 도조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 총리를 맡게 하던가, 아니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족 내각을 수립하고 미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당연히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도조의 어마어마한 권력은 건재했으며, 사퇴 직후에도 고이소 구니아키를 대놓고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게다가 고이소가 원로 중신들에게 탄핵당한 후에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육군 대장 하타 슌로쿠를 차기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하는 해군과 문관들을 "육군이 아닌 사람이 총리가 되어버리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인 육군이 내각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곤란해질 것"이라며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도조의 위험성을 알아버린 쇼와 덴노는 스즈키를 총리로 임명했고, 도조와 육군은 정말로 내각의 지시를 거부한 채 따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에 쇼와 덴노, 스즈키 총리, 그리고 중신 대부분이 항복을 주장한 끝에 결국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 "빨리 자결하라"는 수만 장의 편지가 집으로 왔지만 무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시민들로부터 돌로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사진이 보도됐을 때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6. 자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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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시도 후 치료를 받는 도조
패전 후 집안에 칩거하다가 9월 11일 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에 저항하며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미군 병원에 옮겨져 미 육군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심지어 혈액형이 동일한 미 육군 병사 헌혈을 해 줘서 살아 남았다. 자살 미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전진훈도 못 따른다고 일본인들의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받았다.

2.7. 극동국제군사재판


용태가 회복된 후 수용소로 옮겨졌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 범죄자로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데, 도조는 사형 선고를 받자마자 최후까지 군인답게 죽겠다며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받기를 희망했으나 연합군은 "너 같은 전쟁범죄자에게는 교수형이 더 어울린다"[13]며 거절하고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2.8. 처참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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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되기 직전의 도조.[14]
도조는 1948년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국가신토에서 불교로 개종 한 이후에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 부처님 곁)[15]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도조의 시신은 나머지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7명의 유골은 태평양 먼 바다에 버려졌으나, 화장지 등 남은 유골의 일부를 일본 한복판에 안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순국7사묘 참고.

3. 평가



3.1.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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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있는 말은 간체로 '일본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중국 인민에게 사죄합니다'. '중국 인민에게 사죄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대로 읽으면 '일본 갑급 전범 동조영기/향 중국 인민 사죄'.

보통 이런 대접. 대한민국, 중국, 미국, 영국 등 이놈 때문에 고생한 나라들은 이놈이라면 학을 뗀다. 당연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이 까인다. 중국에서도 많이 까이긴 하지만 중국에서는 독단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넘사벽급으로 많이 까이는지라... 근데 현대 미국에서는 더 꾸준히 까이는 나치도 있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 자체도 아시아권에 비하면 낮기 때문에[16] 분명히 안 좋은 이미지라서 나왔다 하면 풍자당하지만 히틀러 정도로 메이저하게 까이지는 않고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중국에서 더 많이 까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전쟁범죄보다는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의 측면이 크기 때문에, 국권 피탈 당시의 대표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가 더 욕을 많이 먹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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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중국에서는 도조 히데키 얼굴 모양을 한 아이스크림이 등장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문구는 "국가가 겪은 치욕을 잊지 말자(勿忘國恥)"는 표현을 살짝 비튼 "나라의 치아를 잊지 말자(勿忘國齒)"와 "만인이 함께 도조 히데키를 먹자"는 뜻이다. 이 아이스크림을 선보인 회사는 상하이의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아이시즌으로, 상하이 최대 유제품 회사인 국영 광밍 식품공사의 계열사다. 사실 이전에도 중국 국영 기업들의 반일 정서 이용 마케팅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전범의 머리를 씹어먹도록 하는 제품이 나온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3.2.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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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은 어떤 면에선 정말 천차만별이라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지나친 완벽주의자', '면도날' 같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맘씨 좋은 할아버지라 가을에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운동회를 열고 과자를 나누어주었다' 는 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손녀인 도조 유코가 한 말이지만, 밑에 서술한 사병들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이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정도 떨어졌으며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으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냥 권력 강화하고 자기 이득이나 챙기는 전형적인 악질 독재자였다. 사실상 그냥 막장. 그 유명한 무능의 대명사 무타구치 렌야심복으로 쓰고 직속 상관으로부터 '이놈은 쓰면 안 됨'이라고 평가받던 츠지 마사노부를 인재라고 격찬까지 하면서 등용할 안목이었으니 말 다했다. '파시스트' 라는 점을 빼고 봐도 그냥 개막장이다.

그의 수기에서 발췌
"싸움은 최후의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인데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십분 발휘해보지도 않고 적들의 선전책동에 휘말려 무릎을 꿇게 됐다."
"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얼빠진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은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신폭탄에 움츠러들고 소련참전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사는 급속히 사그라진다. 이런 사태는 군의 통수 지휘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
"동아시아와 일본의 보호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민이 희생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화평을 맺는 것은 적에게 종속되는 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라는 자가 자신 잘못이라는 말도 안하고 정작 남 탓을 하다가 죽었으니 지도자로써는 영 아니였던 양반임은 분명하다. 이쯤이면 태평양전쟁터로 가서 개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이 불쌍하다.

히데키의 조카, 즉 남동생의 아들도 육군 장교였는데, 하루는 백부의 집을 방문했다가 하녀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조카의 뺨을 때리면서 "이놈이 체면도 없이 여자한테 정신줄 놓고 뭐하냐?"라고 야단을 쳤다고... 그러나 진짜 이 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건지 우습게도 나중에 도조 사후 이 조카는 그때 담소를 나누던 하녀와 결혼했다.

그래서 히데키의 남동생과 그의 아들(= 위 문단에 언급한 조카)은 도조와 의절하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남동생은 형의 사형 선고에 매우 고소해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일절 안 갔으며 그의 아들인 조카는 반극우 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부하들이 옥쇄를 준비하자 "안경 쓴 바보 두 마리(도조와 히로히토)들을 위해 아까운 니네 목숨을 날리지 마라"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덴노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야마구치 출신들을 싫어해서[17] 육군대학 면접관으로 재직시에 야마구치 출신 수험생들에게 '귀관이 면접 장소까지 걸어오는데 몇 보였나?', '본교 화장실의 변기는 모두 몇 개인가?' 등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질문을 하여 다 떨어뜨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 내 분위기는 반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 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군 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 탓이지만. 위 주석에서 기술했듯 도조의 부친이 야마가타 총리에게 그렇게 간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도쿄를 시찰하면서 사람들이 을 낭비하는지 확인한답시고 하수구를 살펴보면서 쌀이 몇 알 떨어졌네, 낭비하네 떠들어서 사람들의 어이를 털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는 연대장 시절 부대 취사장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자 음식이 맛없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수상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뭐만 하면 시찰하면서 쓰레기나 하수구를 뒤지면서 뭔가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총리씩이나 되는 직위에 있는 이가 할 짓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절대 국방권은 도서 지역 확보를 거친 비행장 건설로 할 뿐 삽으로는 이룰 수 없다며 도조의 전략을 대놓고 디스한 신문 수석기자자기 명령으로 일본 육군 이병으로 징집해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이오지마에 보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중간에 일본 해군에서 이 기자를 육군 입대일 하루 전 날짜에 징병[18]하는 식으로 데려가 버려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연히, 해군은 그 기자를 말단 수병으로 죽게 냅두진 않았고, 종전시까지 정훈 업무에 종사시켜 종전 시까지 살아남게 해 줬다. 자세한 내용은 죽창사건 항목 참조.



전범재판소에서 오카와 슈메이라는 극우사상가도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 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 정신이상으로 사형을 면했다. 그가 말년에 코란일본어로 완역했으니 정신이상은 사형을 면하기 위한 연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19][20]

<불량지식의 창고>라는 책에 따르면 도조 히데키는 단 것을 좋아해서 그의 치아 상태는 군대 상태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바꿔야 했을 정도. 아돌프 히틀러도 단 것을 좋아해서 치아가 성치 않았다는데 나쁜 놈은 서로 닮아가는 듯.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는 둘 다 당분 덕후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의외로 세세한 부분까지 닮았다.

또한 단순히 동맹 관계인 것을 넘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매우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이자 든든한 동맹으로 여겼고, 도조 역시 히틀러를 '친구'라고 칭할 정도로 좋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천생연분...

미 육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미 해군 치의관 조지 포스터(George Foster)와 잭 맬러리(Jack Mallory)는 도조의 틀니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유명한 환자에게 장난을 치기로 작당했다. 그들이 만든 틀니는 아주 잘 맞았지만 거기에는 모스 부호"진주만을 기억하라"문구를 새겼다.

도조 히데키는 1920년초에 독일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독일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독일군이 고안한 총력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Wehrstaat개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21] 또, 독일 근무 중 바덴바덴에서 다른 육군장교들과 인사쇄신과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군의 현대화와 국가총동원 체제의 확립, 마사키 진자부로·아라키 사다오·하야시 센주로 등의 옹립, 육군내 조슈벌 타도, 각 기의 유능한 동지 획득·결집 등 육군 개혁과 만몽문제의 조기해결, 혁신운동의 단행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육군 주류 파벌인 초슈, 사쓰마 파벌을 몰아내기로 맹세한다.(바덴바덴의 밀약이라고 한다.)[22] 아이러니하게도 1922년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딱 한 번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인에 대해 '돈, 성, 와인, 파티에만 찌든 물질주의에 물든 나약한 놈들'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7년 뒤 닥쳐온 대공황을 거친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에서는 그야말로 악바리 근성이 절정에 달해있던 때라 자신들에게 선전포고없이 비겁하게 기습을 가한 일본에 대한 분노로 모두가 앞장 서서 일본과 싸우러 나서게 된다.


3.2.1. 부하


"병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한다. 여러분은 이들을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대하고, 나이가 많은 병사들에게는 형으로 대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입대하는 자의 가정환경, 본인의 직업, 능력을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입대하는 그날까지 중대의 신병의 이름을 기억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병사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저승길을 갈 동료이기 때문이다." - 1929년 4월 제1사단 보병 제1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하들에게 훈시한 내용


매우 놀랍게도 일반 병사나 부사관, 하급 장교들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고 한다.[23] 도조는 신병이 들어오면 일일이 부모를 찾아 뵙고 "귀한 자식을 맡겨주셨으니 끝까지 보살피겠습니다"라며 부모와 입대하는 자식 모두를 안심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가장이 입대하면 동사무소를 통해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게다가 도조는 평등주의에 철저하여 식사도 사병과 같은 것을 먹었다.[24] 이건 그 당시 일본군 장군들로써는 굉장히 이례적인 반응이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자 항목의 하나야 타다시와 비교해도 훨씬 나은 대접이다. 항목 참조하길 바란다. 부하들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한 번이라도 다른 반찬이 나오면 병사들의 식단에도 그 반찬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는 만약 없을 경우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어 사단장 시절에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건강과 가족사항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름을 외웠고 부하인 부대장들에게도 병사들의 신상명세와 집안 사정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 부모가 위독하다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을 경우 사단장의 권한으로 전역증도 발급했다고 한다.

부대 훈련 때도 도조는 군 생활이 병사들에겐 평생 남는 기억이 된다며 체력이나 전투 기술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핸디캡을 적용하여 훈련에 낙오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심지어 시골 출신 병사가 도시 출신보다 면역력이 약해 결핵에 걸리기 쉽다는 군의관의 조언을 듣고 결핵 검진을 위해 당시(1920년대)로선 최신 기술인 X선 장비를'즉석에서'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야전 부대장 때는 물론이고 총리 재임 시절에도 관저의 임원들과 수상관저를 지키는 병사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며 운동회와 보물찾기도 열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조의 운전기사 역시 "총리 각하만큼 훌륭하신 분은 진짜 처음 봤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만약 도조가 총리를 지내지 않고 그냥 사단장 등 야전 지휘관이나 헌병사령관에서 퇴임을 했더라면 아마 못해도 최소한 기타나 평범한 인물 측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며 조금 과장하면 대인배 항목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3.3. 일본


도조가 화장된 후 그 유명한 고이소 구니아키의 전담 변호사를 지낸 산몬지 쇼헤이(三文字正平)[25]라는 작자가 화장장에서 이 7개 인간 쓰레기들의 남은 유골을 모아서 이들의 무덤 겸 제단인 순국7사묘라는 네오 나치도 생각하지 못한 희대의 등신짓을 했다. 자세한 것은 순국7사묘 참조.

야스쿠니 신사에 이 사람도 합사했다. 일본 정부가 '몰래' 모셔놓았다고. 그리고 이 사람의 손녀인 도조 유코[26]난징 대학살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고 정치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촉구하며 미국의 원자탄 사용을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을 촉구하는 등의 만행을 벌였다.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도 나왔으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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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유코KBS의 다큐멘터리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징병 조선인/대만인의 유족들과의 대담에서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진심을 아느냐?", "일본을 위해 싸워주신 당신의 아버지께 감사한다" 는 둥의 막장 발언으로 한국인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데 지대한 공헌도 했었다.[27] 결혼하느라 성이 바뀌어서 도조란 성은 통명이다. 일본 우익들이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들이 통명 쓴다고 까댐을 생각하면...

일본 우익들이야 이 인간이 그 당시 최고지휘관의 심복이라 어쩔 수 없이 미화하지만, 우익에서도 '일본군을 말아먹은 졸장'이라고 욕하는 이들도 꽤 있다. 우익들조차 거론하기 싫어하는 무타구치 렌야라든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간을 유능하다고 써먹었으니 오죽할까?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최악의 졸장이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무능함을 넘어 세계 근현대사 최악의 졸장[28] 도미나가 교지한테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도조 유코는 '저런 멍청한 부하들을 등용하여 아군을 무수히 죽이며 패전에 기여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슈?' 라는 질문에 그래도 다른 유능한 부하들도 등용했다고 넘어가면서 반론조차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멍청한 부하에 대한 후한 대우를 생각하면...

인도인 펄 판사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여 그를 영웅시한 영화 프라이드가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바 있지만, 극우 단체들의 반복적인 관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뿐이지 대중적 흥행은 영 별로였다 한다. 심지어 개봉 첫날에는 극장에 교련복 입은 시커먼 사내놈들이 우글거려서 일반 관객은 접근도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리고 이 영화 감수 및 제작에 이시하라 신타로와 가세 히데아키[29]가 참여했다.

우익적 견해로 유명한 베츠미야 단로는 도조를 가리켜 "인사계원으로나 쓸모 있고 지휘관으로서는 중대장조차 위험하다"고 적시했다. 실제로 도조는 연대장 시절에 인사계 이상으로 사병들의 처우와 복장에 솔선수범한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일본군 제17사단장이자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켰던 히라바야시 모리토는 도조가 총리였을 당시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놈은 헌병사령관 정도만 하고 예비역으로 물러나야지 총리로는 안 어울린다.

이 발언은 부하들이 숨겨서 도조와 히라바야시 둘 다 고인이 된지 한참 지난 2009년에야 드러난 발언이다.

일본의 동양 사학계 거장이자 전쟁을 겪은 세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1901~1995)는 자신의 저서인 '중국통사' 226~227 페이지에서 조조를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도조 히데키를 깠다.

조조의 정치 방침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 곧 위험한 파탄이 일어날 듯하다. 그러므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극도로 엄중한 법령의 실시가 불가결하게 된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사회 전체를 계엄령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그것은 일본의 전시 중 생활을 뒤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조와 도조 히데키는 능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과 최측근들의 이익을 위해 자국 민중들과 다른 민족들을 탄압하고 쥐어짜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국가의 문제점들을 악화시킨 공통점이 있다는 독설이다.

3.4. 한국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를 앞세운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고, 한국 침략의 주범 중 하나이자 한국사에 있어서도 한국을 침략하는데 선봉장으로 나선 악한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이름만 나와도 펄쩍 뛰게 만들고, 분노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장본인. 1992년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을 모이게 하여 지금의 수요집회를 만들게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만악의 근원 중 하나.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에만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도조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들어낸건 1936년 이후, 즉 한국 침략은 예전에 완료되고 한국에 대산 통치가 무단통치, 문화통치까지 다 끝나고 민족말살정책으로 진입한 시기였다. 그리고 일본은 도조 히데키 수상 취임 이전에도 제정신은 아니였다. 도조 히데키가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는 건 수상 취임 이전 육군대신 시절 주전파 대표로서 저지른 전쟁 선동 행각, 태평양 전쟁 개전에 책임이 있고 이전에는 식민지나 전장의 사람들이나 겪는 고통을 본토에서도 겪게 한 것과 메이지 헌법 이래 큰 틀에서 지켜진 권력 균형을 현저히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은 중일전쟁 당시 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법적으로는 본토건 식민지건 얼마든지 전쟁 목적을 위해 쥐어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본토 정부와 별개로 총독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다스리던 곳이었다. 다만 한국 대중매체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계몽사에서 80년대 나온 한국사 책에는 야사로서 머리를 빡빡 깎고 망상에 찌들어 미국을 공격한 광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친 짓한 증거로서 연설할 때마다 깔개로 성조기와 영국기를 썼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런데 몇 국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에선 일제강점기 부분의 이토 히로부미, 세계대전 부분의 쇼와는 언급되지만 도조 히데키는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면 누군지 모르는 학생들도 꽤 있을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1998년, 일본에서 도조 히데키를 주인공으로 한 불쏘시개 영화가 만들어진적 있다. 제목은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Pride: The Fateful Moment, プライド ~運命の瞬間~)'. 영화는 군사재판에서 A급전범으로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도조 히데키가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의 순간을 다루고 있으며, 내용이 무려 전쟁의 책임을 패전국 일본에 모조리 떠넘기려고 하는 연합국에 대해 도조 히데키가 법정에서 국가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오직 혼자 싸운다는 스토리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를 감동 실화 인간 드라마로 미화하는 쓰레기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도조 히데키는 사형 직전까지 전혀 참회하지 않는다.



  • 만화 지팡구에도 나오는데 초기 연재분에서는 악의 축 그 자체로 묘사하고[30] 단 한 장면 나온 도조의 모습은 세밀화로 그린 악의 축 그 자체. 후기에는 매리애나 결전[31] 직전에 학도병 출전식 장면에서 다시 나오는데 전반부의 악마적 카리스마와는 달리 어느 정도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를 구현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대놓고 부하들이 디스함을 알지만 이미 미쳐버린 군을 나름대로 제한하려면 강화는 위험하다는 의견, 즉 군이 완전히 미치게 만든 일본보다는 차라리 화끈하게 져야 낫다는 의견을 독백으로 제시한다.

  • 도라 도라 도라에도 한 장면 나온다. 우치다 아사오라는 배우가 삭발을 하기 싫어서인지 뽀글파마 백발로 나와서 압권.

  • 파일:attachment/도조 히데키/tojoandfuckface.jpg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 박격포 훈련 때 마네킹을 타깃으로 하는데 마네킹에 'Tojo'라고 이름표가 붙었다. 옆에 앉은 친구 마네킹 이름이...

  • 중국 인민해방군의 훈련용 FPS 광영사명에서는 왠지 도조의 얼굴을 한 자위대 병사가 적성군 일반 보병으로 등장한다. 게임의 초기 버전에선 미군으로 보이는 군대가 적성군이었건만 개발 와중 센가쿠 열도 같은 중일 관계 악화로 중간에 바뀐 듯. 이것 말고도 민간용 온라인 버전의 2차 대전 상하이 일본군 웨이브 미션에서도 일본군 병사들이 죄다 도조의 면상으로 등장한다.



5. 어록


내 친구병졸 출신이지만, 나는 장군이오. 걱정할 거 없소.

스기야마 하지메가 작전이 정치에 질질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자 한 대답.


전력 비율은 삼분의 일이라 해도 일본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황국정신이 있습니다!

1941년 9월 일본과 미국의 전력차 비교 결과 도무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육군성 군사과의 보고에 대한 답변.


(천황)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천황도 모르는 사이에 또 천황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32]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점령한 중국 땅의 중국인을 조선인처럼 일본 제국에 편입하겠냐는 질문에 한 대답.


"생존이 위협당할 때 민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국가 간에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출처]

언뜻 보면 국제 정세를 냉철히 꿰뚫는 것 처럼 보이지만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주도해 일본 제국을 붕괴로 이끈 최악의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순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다.


6. 주요 경력



[1] 현재의 백과사전이나 교과서 등에서는 신자체에서 東条 英機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2] 제50-52대 육군대신, 초대 군수대신, 제25대 상공대신, 제53대 문부대신, 제66대 외무대신, 제64대 내무대신 겸직[3] 도조뿐만 아니라 일본 장성들의 생김새는 서로 비슷할뿐만 아니라 장병들 역시 빡빡이로 조발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안경은 끼지 않았지만 콧수염 빡빡이인 무타구치 렌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라든지, 콧수염은 기르지 않았으나 안경 낀 빡빡이인 츠지 마사노부라든지. 물론 '안경 낀 콧수염 빡빡이'는 도조가 유명하고, 미국 신문의 만평도 보통 일본군의 수괴인 도조를 희화화했기 때문에 도조가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맞는다.[4] 쇼와 덴노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었다.[5]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출생이다. 도조 히데키랑 달리 굉장히 유능했으며 이 사람은 오히려 착검돌격을 반대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전술 연구의 선구자다.[6] 육군대학은 초급장교들을 대상으로 다시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장성급으로 진급할 수 없었다.[7]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보직 자격을 군 현역에게만 부여하는 제도[8] 도조가 육군대신이던 시절 육군차관은 도미나가 교지였다. 도대체 육군성의 업무가 어떻게 굴러갔을지 궁금할 지경.[9] 도조 히데키의 장남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만주의 풍만발전소로 갔고, 차남은 미쓰비시 공업에서 자동차 사장을 지냈으며, 3남은 육사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못하고 후에 항공자위대에서 소장 계급까지 진급했다.[10] 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육군은 해군과 별개로 수송선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 규모가 해군 통제하의 선단보다 작아서, 상당 부분은 해군에 위탁하긴 했다.[11] 임팔 작전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전부 No였던 상황이었다. [12] 책임감없는 외교와 국정으로 일본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밀어넣은 고노에였지만, 태평양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는 내 말 안듣더니 곧 망하게 생겼다고 고소해하다가 열받은 군부로부터 비국민으로 몰리는(...) 판이었다. 전후에 그가 자살한 이유 중 하나도 일은 개판으로 했을지언정 자신은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군바리들과 같이 심판받아야 함이 억울했다는 것이 컸다.[13] 이는 미국에서 군인이라 할 지라도 총살형에 강력하게 반대해서 그렇다. 이유는 독소전쟁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룬 것 처럼 미국에서는 태평양 전쟁에서 아주 지옥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군인들에 대해 강력하게 총살형에 대해 반대해서 그렇다.[14] 자세히 보면 처형되는 도조를 바라보는 미 육군 군사경찰 장교의 표정이 매우 독특하다.[15] 나무아미타불미타가 바로 이것이다.[16] 미국의 밀리터리 관련 픽션에서도 나치 외에 가장 많이 악역으로 등장하거나 까이는 대상은 소련, 중국, 쿠바, 북한 등 공산 국가들이나 아랍 테러리스트들이지 일본군을 그렇게 까대지는 않는다. 자국을 비판하는 성향이면 되려 원자폭탄 투하를 까기도 하고...[17] 여기는 과거 초슈 번이었다. 초슈 번과 도조의 악연은 부친 대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곳 출신 파벌이 육군을 가득 채우자 부친 도조 히데노리가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에게 "초슈만 편애하지 말고 고루 등용하셈." 소리를 했다가 쵸슈에게 제대로 찍혀서, 제1기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씩이나 되는 사람이 러일전쟁 중 여단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의 실수를 초슈 파벌에게 트집잡혀 한직으로 맴돌다가 퇴역당했다.[18] 전쟁 이후 해군도 징병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육해군 모두 징집 영장이 나왔다 해도 자기가 징집된 군과 다른 군으로 지원해 입대해버리면 징집 영장은 무효가 되었다.[19]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서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쓴 도조x오카와 야설이 있다.[20] 그런데 정작 맞은 도조는 놀란 다음 뒤에 누군지 확인하고 그냥 웃고 치운다. 마치 친한 친구가 자기에게 장난으로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21] 이는 훗날 일본의 국방국가 개념으로 일본에 도입된다.[22] 물론 이들은 훗날 황도파와 통제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23] 추축국 동맹인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24] 참고로 독일군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25] 무슨 일인지 이전판까지 三文字正平을 고이소 쿠니아키라고 소개하면서, 친절하게도 그 유명한 조선 총독 고이소 쿠니아키와는 동명이인이라는 설명까지 붙어있었다. 물론 이는 완전히 잘못으로, 산몬지 쇼헤이는 코이소 쿠니아키의 변호인을 맡았던 사람이다.[26] 웃긴 건 도조 히데키의 장남, 즉 이 여자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도조 히데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도조 유코를 비웃었다고 한다.[27] 사실상 상대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죄다 회피하고 녹음기처럼 자기 할 말만 해댔다.[28] 그냥 적은 게 아니다. 윙드 후사르가 세운 교환비를 압도적으로 능가했으며 심지어는 충무공이 세운 교환비와 맞먹는 화려한 전적을 세웠다.[29] 일제 연간부터 전후까지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부친 아래에서 자라 70년대 한국 정계에서 친한파로 통하다가 지금은 혐한에 앞장서며 일본 극우 홍보나 한다. 93년에 박태혁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을 헐뜯는 <추한 한국인>이란 책을 내서 잘 팔리기도 했지만 이후에 수익 배분 문제로 고소를 겪으면서 자신이 쓴 게 드러나 책이 회수되기도 했다. 프라이드 대박 이후로 무르데카란 인도네시아를 무대로 한 일본 극우 영화를 만들었는데, 거기 묘사된 인도네시아인들이 인니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모욕적으로 묘사되어서 이에 반발로 일본 기업들의 피해가 크면서 받은 소송 문제로 이후로 극우 영화 제작, 감수를 포기했다.[30] 오죽하면 덴노나 기타 궁정 대신들도 아는 미라이의 비밀을 '도조가 알아서는 안 된다'라며 대놓고 이야기한다.[31] 칠면조 사냥이 아닌 이 작품 한정의 대체역사. 여기서 전략적 무승부를 함으로서 지팡구의 역사는 바뀐다.[32]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 본래 저자 개인상으로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일본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재미 일본인의 조언 등을 받아 연구하였다고 한다.[출처] 하츠 오브 아이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