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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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地下鉄サリン事件|Tokyo Subway Sarin Attack

파일:무제41_20220928155941.png
발생일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경
발생 위치
도쿄 제도고속도교통영단 지하철(現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 · 히비야선 · 치요다선
유형
테러
원인
동시 다발 테러, 사린 가스 화학 테러
범인
아사하라 쇼코[1]옴진리교 교인 다수
테러 주동 세력
옴진리교
인명피해
사망
14명[2]
부상
약 6,300명

1. 개요
2. 배경
3. 사건
3.1. 실행범
3.2. 범인들의 승차 지점+시간, 피해 규모
4. 가해자와 피해자
5. 교주 및 간부 체포, 판결
6. 형벌 및 사형 집행
7. 여파
8. 관련 매체
8.1. 서적 및 TV 프로그램
8.2. 창작물
9. 기타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기분 좋게 맑게 갠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외투 차림이었다. 바로 전날은 일요일, 그 다음 날은 공휴일[3]

- 즉,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오늘 하루는 쉬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신은 휴가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인생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루였을 뿐이다.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인 젊은 남자 다섯 명이 갈개로 뾰족하게 갈아둔 우산 꼬챙이로 기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찌르기 전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신의 명령 1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신의 명령 2

[4]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일본 도쿄에서 옴진리교가 일으킨 대규모 지하철 화학 테러 사건으로, 세뇌된 광신도를 동원해 도쿄 지하철에서 독가스인 사린을 살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일본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리말 연음 현상 때문에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데 살인 가스 사건이 아니라 테러에 사용된 가스의 이름이 '사린'(Sarin)이다. '사린'이라는 이름은 이 가스를 발명한 과학자 게르하르트 슈라더(Gerhard Schrader), 오토 암브로스(Otto Ambros),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 한스-위르겐 폰 데어 린데(Hans-Jürgen von der Linde) 네 사람의 이름의 일부 글자를 각각 따 온 것이다. 물론 LD50(반수치사농도)값이 매우 적어 소량만 흡입해도 인체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殺人gas'도 틀린 말은 아니고, 그랬기에 1995년 3월2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도 사린 가스(Sarin Gas)는 그 엄청난 파괴력과 살상력 때문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살인 가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사린 가스는 대표적인 신경계 독가스다. 위력도 대량살상무기인 만큼 강력한데 동물 실험 결과 밀폐된 공간에서 살포하면 염소와 토끼를 바로 마비시키고 3분 내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이다. # 군 복무 경험자라면 화생방 정신교육 받을 때마다 늘 들었을 그 가스 중 하나다.

정부 기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지하철 운영 기관이었던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에이단)이 민영 기업으로 개편된 것은 사건 9년 뒤인 2004년 4월 1일이므로 사건 당시 영단은 재무성 산하의 관공서였고 기관사 및 역무원을 비롯한 직원들도 국가공무원 신분이었으며, 옴진리교의 타겟이자 주요 희생자였던 국가공무원[5]들도 영단 지하철로 통근했기 때문이다.

테러와 관련된 학술 연구들 가운데는 이 지하철 사린 사건을 9.11 테러만큼, 혹은 그보다 더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인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테러 사건이기 때문이다.[6] 이전에도 독가스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살상용으로 쓰인 일은 많았지만, 그동안은 국가와 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반면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는 일개 범죄단체가 대량살상무기를 확보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한 것이고, 그만큼 일반인들이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비록 해당 사건은 불과 십수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데에 그쳤지만, 생화학무기가 테러에 성공적으로 사용된다면 최소한의 물질로 단 한 번의 공격을 통해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하마터면 수천 명을 죽일 뻔했다. 만약 테러범들이 살겠다고 농도를 희석하지 않았거나, 혹은 과감하게 더 깊숙히 봉지를 찔렀거나 정부가 전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사망자가 늘어났을 것이다. 엑시트에서 단 한 번의 테러로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도 이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독가스는 인명 피해 측면에서 폭탄급, 아니면 그보다도 더 위험하다. 때문에 최악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연구를 할 때 사린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사린과 같은 신경작용제를 만드는 게 대단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브레이킹 배드같은 드라마에서 메스암페타민같은 마약을 집에서 손쉽게 합성하는 것을 보여주어 마치 신경가스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 싶지만 신경가스는 만들기 극히 어려운 화학물질이다. 미국조차 사린 대량생산 시설을 확보하는 데 7년 씩이나 걸렸다.

앞서 일개 범죄단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옴진리교는 결코 단순한 조폭이 아니었다. 통일교와 같이 세계적 규모의 조직을 갖추고 진심으로 화학무기 개발에 집념을 다한 테러 조직에 가깝다. 옴진리교는 사린을 합성하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수십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3층 규모의 화학 연구소를 설립했고 각종 정밀 실험기기를 도입했다. 그러고도 첫 생산에서는 20g 남짓의 사린을 얻는데 그쳤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에서 쓰인 8L 정도의 사린을 얻기 위해 들인 돈과 시간은 군소 테러 조직이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옴진리교 수준의 거대 범죄 조직, 또는 국가 규모에 이르러서야 시도할 수 있는 범죄라 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도 차라리 폭탄을 쓰면 썼지, 화학무기를 이용한 대규모 테러가 빈발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배경[편집]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국토이용계획법 위반사건, 카메이도 악취 사건, 마츠모토 사린 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등의 온갖 대형 강력 범죄를 저지르던 옴진리교는 그 결과 이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 시작하면서 경찰 수사가 포위망을 좁혀 오자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교주 아사하라 쇼코경찰의 수사력 및 관심을 분산시켜 궁극적으로 옴진리교가 조사받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지금까지와 수준이 다른 대규모 테러를 일으키기로 작당했다. 특히, 테러 대상으로 도쿄의 주요 관공서가 밀집된 지역 등을 골라 일본 정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것까지 노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계속적으로 중, 소규모 테러를 저질러 왔기 때문에 옴진리교는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요주의 대상으로 찍혀 있었다. 이 상황에 대규모 테러를 저지를 경우 오히려 제일 먼저 용의 대상으로 지목받기 쉽다. 역시나 이 사건이 터지자 옴진리교는 확실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궁지에 몰리자 망상에 빠져 폭주해 최악의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3. 사건[편집]


1995년 3월 20일 아침 7시 46분, 옴진리교는 한창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출근 및 등교로 바쁜 러시 아워 시간대에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이 담당하는 노선에서 총 5개 편성을 노려 차량에 대량의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실행자들은 각각 2명씩 패를 이루어 1명은 지하철에 탑승하여, 신문지로 포장된 사린이 담긴 비닐봉투에 우산으로 구멍을 내는 식으로 사린을 살포하고 다른 1명은 살포자를 태워 도망치는 운전수 역할을 맡았다.

마루노우치선히비야선에 각 2편성, 치요다선에 1편성을 노렸는데, 이들 3개 노선의 공통점은 도쿄의 주요 관공서 밀집 지역인 카스미가세키를 지난다는 것이다.[7] 이 지역은 대한민국세종대로와 비슷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위치한 주요 성급 부서만 해도 법무성, 후생성, 노동성, 환경청, 통상산업성, 총무청, 우정성, 자치성, 운수성, 건설성,국토청, 대장성, 문부성, 과학기술청, 외무성 등 15개에 이르며[8] 또한 이들 부서의 산하 기관들+공사(公私)합동기업체들이 수두룩하게 밀집해 있다. 당연히 통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고 그들을 핵심 타겟으로 노려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평상시에는 출근 시간이 9시 30분까지지만, 사건이 일어난 월요일은 아침 일찍 조례를 하는 곳이 많아 사건이 일어난 시각 즈음에 출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옴진리교 내부에 이런 일본 정부 관청가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옴진리교는 이렇게 정부기관들에 몰래몰래 인원을 포섭하거나 잡입시켜 힘도 키우고 테러를 더욱 유리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거기에 마루노우치선과 치요다선은 콧카이기지도마에역[9]을 지나는데 여긴 이름 그대로 일본 국회의사당 앞이며, 그 밖에도 총리관저, 의원회관, 정부중앙합동청사8호관, 주일미국대사관 같은 굵직한 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카스미가세키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다. 한마디로 이 테러는 일본의 입법부와 행정부를 한 번에 날려 버릴 수도 있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3.1. 실행범[편집]


'테러리스트(최종학력) ↔ 이동 담당 운전수'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 하야시 이쿠오林郁夫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 니이미 토모미츠新実智光
  • 히로세 켄이치広瀬健一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응용물리학과) ↔ 키타무라 코이치北村浩一
  • 요코야마 마사토横山真人 (도카이대학 공학부 응용물리학과) ↔ 토노자키 키요타카外崎清隆
  • 토요다 토오루豊田亨 (도쿄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 타카하시 카츠야高橋克也
  • 하야시 야스오林泰男 (코우카쿠인대학 전기공학과) ↔ 스기모토 시게로杉本繁郎

일본 재판소는 실행범들의 죄질이 운반책보다 나쁘다고 봤다.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하야시 이쿠오를 제외하고 전원이 사형 확정된 반면 운반책들 중에는 2018년 7월 6일 사형당한 니이미 토모미츠를 제외하고 사형 확정자가 없다. 나머지 운반책들의 경우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하야시 야스오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로부터 스파이로 의심을 샀다고 하며[10] 이것이 그를 과격파로 만들어 후술하는 바대로 도쿄 지하철(히비야 선)에 가장 큰 피해를 유발했다.[11] 같은 피해를 당한 마루노우치선과 치요다선을 비롯하여 다른 도쿄 지하철 노선들이 아침에만 운전 승무를 정지하고 오후부터 운전 승무를 재개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피해 규모이다. 또 이 자의 도주 중 행보도 비판받았는데 이 사건을 저지른 후 장기간 도주하다 1년 9개월 만인 1996년 12월 3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에서 오키나와 현경에게 체포됐을 때 # 이 자의 소지품에서 작은 불상이 나왔고 그 불상이 다름 아닌 하야시 야스오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한 불상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를 일으켜서 지하철 승객들을 사망하게 만들어 놓고도 자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도망다니던 주제에 뻔뻔스럽게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해 불상을 소지했다는 것은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꼴이고, 엄청나게 비판받을 부분이다.[12]


3.2. 범인들의 승차 지점+시간, 피해 규모[편집]


테러리스트
탑승 차량
승차 시각
승차 지점
독가스 살포 구간
사상자
해당 범인들의 목적지
하야시 이쿠오
JR 203계 마토67편성
7:48
치요다선
키타센쥬역
센다기

신오차노미즈[13]
지하철 직원 2명 순직[14]
지하철 승객과 직원
231명 중경상
콧카이기지도마에역(국회의사당앞역)
히로세 켄이치
02계 제16편성
7:48
마루노우치선
이케부쿠로역
이케부쿠로

오차노미즈[15]
지하철 승객 2명 사망[16]
지하철 승객과 직원
358명 중경상
신코엔지역
요코야마 마사토
02계 제50편성
7:55
마루노우치선
신주쿠역
신주쿠

요츠야[17]
지하철 승객과 직원
200명 중경상
콧카이기지도마에역(국회의사당앞역)
토요다 토오루
도부 20000계 제11편성
7:59
히비야선
나카메구로역
나카메구로

에비스[18]
지하철 승객 1명 사망
지하철 승객과 직원
532명 중경상
카스미가세키역
하야시 야스오
03계 제10편성
7:55
히비야선
우에노역
우에노

아키하바라[19]
지하철 승객 8명 사망
지하철 승객과 직원
2,475명 중경상[20]
츠키지역
아래 도쿄 지하철 노선도를 동시에 로딩해 놓고 위 데이터를 맞춰 보면
파일:도쿄사린가스노선도.jpg
5명의 테러리스트가 도쿄 지하철을 어떻게 파괴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도쿄는 대혼란에 빠졌다. 사린가스가 살포된 직후 인근 승객들이 쓰러진다는 신고를 받은 에이단 직원들이 화학테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람에 열차 운행을 중단하지 않았고, 이는 피해가 확산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현장에 출동한 역무원이 사린이 든 비닐봉지를 역무실로 옮겨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추가 피해가 나왔으며 현장 원점 역시 훼손되었다. 다만 에이단 직원들은 승객들을 1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끝까지 살포 현장에 남아 대피를 유도하다 사린 중독으로 인해 순직하는 등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줬다. 화생방 테러 상황임을 조기에 인지하지 못했을 뿐.

도쿄 소방청은 8시 9분경 최초 신고를 접수받고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을 판단한 경시청은 화학작용제를 이용한 테러임을 의심하고 8시 50분경 자위대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시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소방청은 9시 40분 지하철에 살포된 물질을 아세토나이트릴로 탐지하였다.[21] 그러나 후송된 환자를 치료하던 의료기관에서는 환자의 증상을 근거로 이를 부인했으며, 경시청은 재탐지 끝에 테러에 사용된 게 사린가스라고 정정하였다. 이 사실은 소방청과 의료기관에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의료기관은 TV로 경찰의 브리핑을 듣고 나서야 피해자들이 사린에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22] 또한 제독작업 중에도 이런저런 사고가 뒤따랐다. 현장에 출동한 관계기관 직원들은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으며, 현장에서 수습된 환자들을 제대로 제독하지 않아 구급대원과 의료진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본 사건에서 2차 오염으로 인해 사린에 중독된 이들이 전체 피해자의 30%나 된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 와중에 도쿄 도내의 각 병원에 사린 가스의 해독제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병원에 비교적 빨리 도착한 피해자들을 제외하면 추가 치료가 불가능해 대재앙이 발생할 뻔했다. 사린의 해독제로는 아트로핀과 프랄리독심(Pralidoxime, 2-PAM)[23]이 쓰이는데, 프랄리독심은 유기인계 농약 중독의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물질이어서 대도시인 도쿄에는 물량이 얼마 없었다. 다행히 스미토모(住友) 제약 회사에서는 이 프랄리독심을 생산하고 있어서 서일본 지역에 있는 아트로핀과 프랄리독심을 긁어모아 도쿄 지역의 병원에 공급해 사태가 크게 번지는 일을 막았다.[24]

자위대에서는 경찰로부터 협조요청을 접수받은 후 화학전 담당 부대인 제101화학방호대를[25] 중심으로 화학학교 교관 등을 파견하여 환자 치료를 도왔다. 자위대 중앙 병원에서 파견한 의사가 이전의 간부 연수에서 화학 병기 대응 교육을 받았고, 현장으로 파견될 때 연구자료를 가지고 와서 화학 병기로 인한 테러라고 판단하고 병원에 아트로핀과 2-PAM을 투여할 것을 조언해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 테러로 13명이 숨지고 6,3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나마 테러의 규모, 살포된 사린가스의 양을 보면 이 정도에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264페이지에서는 피해 규모가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친 사유를 거론하고 있다. 구명 구급 센터 의사 겸 토호대학(東邦大学) 의학부 사이토 토오루(斎藤徹) 조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액체 사린 가스에 아세토니트릴을 섞어 휘발 속도를 늦추어 도주할 시간을 확보했는데, 액체 사린 가스에 아세토니트릴을 섞으면서 사린가스 자체의 농도가 30% 이하로 떨어졌고, 아세토니트릴이 섞인 사린 가스가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기화하면서 겨자 및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기며 느린 속도로 기화해 그 사이에 사린 가스 살포 사실이 파악되어 대피가 이뤄졌고 앞서 거론한 대로 그나마 신속한 사고 처리가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위키백과에서도 현장에 돌입한 소방청 화학대응팀의 장비가 아세토니트릴을 검출했다고 서술되어 있다.[26] 실제로 이 겨자 및 고무 타는 냄새를 맡고 독극물이 지하철 전동차에 살포됐다고 감지하여 즉시 대피해 사망하지 않음은 물론 다치지도 않고 생환한 지하철 직원과 승객들도 다수 있었다.

순수한 100% 농도의 순수 사린이었다면 기화하는 도중엔 냄새도 없고 휘발속도 역시 대단히 빠르므로 가스를 살포한 테러리스트들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만약 옴진리교가 실행범 본인도 죽는 자살 테러를 각오+침착함을 갖고서 이 테러를 저질렀거나, 순도 100% 사린을 쓰되 우산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시한 장치 폭발물을 제작해 이를 이용한 사린가스 폭탄을 지하철 전동차 내에 살포하는 방식을 썼다면 6,000명 이상의 피해자가 죄다 사망자가 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초대형 참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결국 실행범들이 자기들 목숨은 아깝다고 짜낸 꾀로 인해 최악을 피한 셈이 됐다.[27]


4. 가해자와 피해자[편집]


이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인 지하철에서 가스를 살포한 이들은 일본 사회 전체 가운데에서도 엘리트로 불릴 만한 고등 교육을 받고 전문 지식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해자들의 학력과 경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28]

치요다 선에서 역무원 2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야시 이쿠오(당시 48세)는 평판이 좋은 심장외과 전문의였다. 마루노우치 선에서 승객 1명을 죽게 한 히로세 켄이치(당시 30세)는 와세다대학의 이공학부 응용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루노우치 선에서 20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요코야마 마사토(당시 31세)는 도카이 대학에서 응용물리학을 전공했다. 히비야 선에서 승객 1명을 죽게 만든 토요타 토오루(당시 27세)는 도쿄대학 이학부의 응용물리학과 출신으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하고 우수한 연구실의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같은 히비야 선에서 무려 8명의 승객을 죽게 만든 하야시 야스오(당시 37세)는 코우가쿠인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아마도 타깃으로 삼은 일본의 관료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철역에서 사린 가스를 마시고 호흡 곤란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격렬한 고통 속에서 목을 쥐어뜯으며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스템 안에서 하루하루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책을 위해 사건 피해자들을 60명 넘게 인터뷰했지만,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실행범들에 필적할 만한 고학력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언더그라운드'에 실린 피해자의 인터뷰들을 보면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사이타마현의 도심 바깥 지역에 거주하면서 매일같이 1시간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2시간 안팎의 시간을 소요하며 도쿄로 힘들게 출근하는 시민들이 대다수였다.

또한 사린가스를 대량으로 흡입했음에도 크게 다치지 않았거나, 크게 다쳤음에도 빠른 치료를 받은 뒤 긍정적으로 사고 충격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 사건 이후부터 옴진리교 관련 언론 보도를 놓치지 않고 보기 시작한 피해자들도 많지만, 사린 가스 액체가 다 쏟아져 난장판이 되었던 지하철 전동차 바닥과 승강장 바닥 근처를 스쳐 지나간 덕분에 사린 가스를 전혀 흡입하지 않았음에도 크게 다쳐 수십 년째 기억력 감퇴 및 체력, 시력 저하 등의 후유증을 앓거나 암 등의 지병을 얻거나 이미 있던 지병의 악화 등으로 사망한 피해자들도 많았다.

이 사고로 중증 장애인이 된[29] 독신 여동생을 챙기던 한 30대 남성의 이야기가 나와서 독자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여동생은 사고 이후 평생 누워서만 지내야 했고 2020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남매는 2000년대 중반부터 얼굴과 이름을 밝혔으며[30] 오빠는 2010년대부터 피해자 구제 활동을 시작했다. 여동생의 사망 후 언론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평범한 소시민들이었으며, 그에 반해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은 사이비 종교의 악행에 가담하지만 않았더라면 국가와 사회를 지탱할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었을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이 기막힌 아이러니는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옴진리교 측은 이전에도 '이 나라에서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엘리트들도 우리 옴진리교를 믿는다'는 프로파간다를 자체제작 애니메이션 초월세계 등을 통해 설파하기도 했고[31], 실제로 옴진리교의 신도 중에는 이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들처럼 우수한 학력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에서 이런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다미선교회 휴거 사건 당시에도 집안이 가난했음에도 공부를 잘 하던 고등학생이 휴거 종말론에 빠진 후 학교를 가지 않았다거나 사이언톨로지교를 믿는 톰 크루즈 등 그가 사회적인 인지도가 있거나 지능이 높거나 하더라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사망자 목록 사이트(일본어).[32]


5. 교주 및 간부 체포, 판결[편집]


아사하라 쇼코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본 경찰은 테러의 배후로 옴진리교를 지목해서 집중적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이미 아사하라 쇼코가 지휘하여 각종 독가스를 사용한 테러 사건을 1980년대부터 저질렀기에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옴진리교를 배후로 지목했다.

수사를 시작한 일본 경찰은 전국의 옴진리교 관련 시설을 일제히 수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린 테러에 관련된 옴진리교 간부들을 체포하고 사린가스를 포함한 독가스 및 무기 제조,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신도 납치 등 옴진리교의 악행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옴진리교 잔존 신도들은 "종교 탄압을 반대한다"며 경찰의 수사에 저항했지만 이미 옴진리교가 사린 가스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아무 소용 없었다. #

이후 1995년 5월 16일, 일본 경찰은 후지산 근교에 있던 옴진리교의 본부인 제6 사티안(サティアン)[33]에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가족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사하라 쇼코 본인도 제6 사티안에 은거 중일 것으로 판단해 체포 작전에 나섰다. 아사하라 쇼코의 도주를 막기 위한 대규모 경찰 병력과 사린 테러의 주범이 체포되는 모습을 기다리는 취재진들이 사티안을 포위하였고, 사티안 내부에 돌입하는 체포조는 혹시나 있을 신도들의 독가스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가스를 감지하기 위한 카나리아 새장[34]과 독가스를 막아 줄 방독면을 구비하였다. 체포조는 철문을 쇠톱으로 열고 사티안으로 진입했지만 사티안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4시간이 넘게 수색해 봐도 아사하라 쇼코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색을 하던 경찰 병력이 사티안의 2층 계단과 3층 계단 사이에 작은 공기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얼마 안 가 계단 사이의 좁은 밀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사하라를 체포할 수 있었다. #

아사하라 쇼코는 체포 이후 사형 판결을 받고 20년 넘게 복역하다 2018년 7월 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옴진리교는 테러 단체로 지목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관련인은 도합 188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중 13명은 사형이 확정되었다.

한편 옴진리교는 원래 사린 가스가 아니라 탄저병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옴진리교의 기술력이 부족해서 탄저병을 포기하고 사린으로 전환했다. 탄저균 배양에는 성공하여 도쿄 고토구 카메이도 지역에 살포하였으나 악취만 남게 된 카메이도 악취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35]

사린 제조 프로젝트에 관여한 키쿠치 나오코(菊地直子)는 2012년 6월 3일 저녁에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체포되었다. 키쿠치는 1996년에 타카하시와 함께 숨어 산 것으로 알려져 일본 경찰은 키쿠치가 타카하시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추궁 중이라고 밝혔다.

히비야선 구간에서 운전수 역할을 포함한 총 5가지 사건[36]에 관여했던 타카하시 카츠야(高橋克也)는 다른 범인들과 마찬가지로 지명수배 중인 상태였으나 2012년 6월 15일 도쿄 오타구(大田区)에서 타카하시가 잡히면서 사건 17년 만에 드디어 옴진리교 특별 지명수배 대상이었던 3명[37]이 모두 잡혔다.[39] 사건 전에도 만화를 좋아했던 터라 만화방에서 나오다 잡혔다고 한다. 잡히고 나선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드립을 쳤다. 그러더니 경시청 조사에서는 또 옴진리교에서 수행하고 싶다는 드립을 쳤다!!! 또한 해당 기사에 따르면 체포됐을 때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도주하는 17년 동안 반성이나 후회를 했을 가능성은 전무한 걸로 보인다.

최후의 옴진리교 재판인 타카하시 카츠야의 재판은 2015년 1월 16일에 시작되어 2015년 4월 30일, 1심에서 구형 그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본인은 "뿌려진 것이 사린 가스인지 몰랐다"고 했지만 재판장은 그가 "지하철에 위험한 독극물을 뿌리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17년간의 도주와 재판 중의 태도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무기징역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타카하시 피고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지만 그가 요구한 아사하라 쇼코 사형수 등의 증인 심문은 각하당하고 피고인 질문도 행해지지 않은채 1심의 무기징역을 지지한다며 9월 7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피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런데 2015년 11월 27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키쿠치 나오코가 살인 미수 방조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는 재판정의 발언에 일본 현지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당연히 검찰측은 상고를 진행했다. 결국 2017년 12월 27일, 대법원에 해당되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었다.

한편 2018년 1월 19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마지막 수배자인 타카하시 카츠야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이로써 옴진리교 관련 사건 재판은 22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마무리되었다. 한편 재판이 끝난 후 옴진리교 사형수들은 도쿄에서 전국 각지의 구치소로 흩어졌다.

2018년 7월 6일 교주를 포함해 운반책, 전속 기사 겸 테러 주동자, 화학무기 개발자 등 그 중 죄가 상대적으로 무거운 7명의 사형이 먼저 집행되었고, 주로 실행범인 나머지 6명은 2018년 7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례적으로 한 달 사이에 옴진리교 13명의 사형이 한꺼번에 집행되었는데, 이는 2019년에 예정된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를 앞두고 헤이세이 시대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은 되도록 헤이세이가 지나가기 전에 완전히 끝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6. 형벌 및 사형 집행[편집]


  • 주범 - 마츠모토 치즈오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6년 9월 15일 도쿄고등재판소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40]
  • 연락책 - 이노우에 요시히로 - 1995년 5월 15일 체포 - 2010년 1월 12일 도쿄고등재판소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41]
  • 공급책 - 나카가와 토모마사 - 1995년 5월 17일 체포 - 2011년 11월 18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42]
  • 공급책 - 엔도 세이이치 - 1995년 4월 26일 체포 - 2011년 11월 21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 공급책 - 츠치야 마사미 - 1995년 4월 26일 체포 - 2011년 2월 15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 실행범 - 하야시 이쿠오 - 1995년 4월 8일 체포 - 1998년 5월 도쿄지방재판소 무기징역 확정[43]
  • 실행범 - 히로세 켄이치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9년 11월 6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실행범 - 요코야마 마사토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7년 7월 20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실행범 - 토요다 토오루 - 1995년 5월 16일 체포 - 2009년 11월 6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44]
  • 실행범 - 하야시 야스오 - 1996년 12월 3일 체포 - 2008년 2월 15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집행
  • 운전자 - 니이미 토모미츠 - 1995년 4월 12일 체포 - 2010년 1월 19일 상고 기각으로 인한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

7월 6일에 사형 집행이 끝난 7명 중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를 제외한 6명은 화장 후 집행 전의 유언에 따라 시신 인도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중 엔도 세이이치 사형수는 자신의 시신을 옴진리교의 후속 단체인 알레프에 인도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 유언에 따라 그대로 인도되었다. 사실 위험 인물의 시신을 위험 단체에 넘기는 건 공안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이라 논란이 일었지만, 사형 집행 전에 피형자가 사후 처리를 요청한 인물이 있는 경우 사후 처리자로 지명된 사람이 거부하지 않는 한 그대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사하라 쇼코는 본인이 넷째 딸에게 넘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넷째 딸도 시신 인도를 수락하였으나, 아직 교단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내와 셋째 딸이 이의를 제기한 점도 있고 반대로 교단과 척을 진 넷째 딸이 시신 인도 후 안전 확보 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도쿄 구치소가 임시로 보관하던 중 2021년 7월 5일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아사하라의 유골을 둘째 딸에게 인도할 것을 결정했다.#


7. 여파[편집]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이 사건을 비롯하여 그간 옴진리교가 일으킨 각종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었으며, 그를 포함해 테러 주동자급으로 지목된 13명이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주범인 아사하라 쇼코 본인과 공급책 등 배후 교사범들은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고 실행범들은 하야시 이쿠오 한 명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옴진리교는 강제로 해산당했다. 하지만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된 후에도 잔당들이 모여서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들은 사건 발생 후 17년 가까이 장기 지명수배되어 있었고 핵심 주범들은 대부분 사형이 확정된 뒤였으나 공범들은 2012년이 되어서야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공범들의 재판까지 전부 끝난 뒤인 2018년 7월 일본 법무부는 사형 집행 대기 중이던 아사하라 쇼코 등 1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 일로 인해 도쿄 경시청과 공안조사청의 고위 간부들의 목이 줄줄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일본 경찰, 특히 도쿄의 경찰들은 업무가 완전히 빡세졌다고 하며 신흥 종교들은 일본 경찰이나 공안조사청의 매의 눈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과 함께 일본 경제 호황 끝물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45] 무라야마 개조내각의 무능한 행보와 1996년 이후 경제 불황으로 인해 다시는 일본 정계에서 혁신계가 야당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경제 불황, 고베 대지진에 이어 사린가스 테러까지 터져 수천 명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자 일본 내에서는 세기말적인 분위기까지 돌았다.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우울증과 더불어 이런 세기말적인 사회적 배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46]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이후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까지 일어나자 동시다발적인 테러로 인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가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고 6년 뒤인 2001년에 9.11 테러가 발생하였다.[47]


8. 관련 매체[편집]



8.1. 서적 및 TV 프로그램[편집]


  • 서적
    • 언더그라운드(アンダーグラウンド), 약속된 장소에서ー언더그라운드 2(約束された場所で―underground 2)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직접 사건의 피해자들을 취재한 인터뷰 내용을 모아서 1997년 3월에 '언더그라운드'를, 이듬해인 1998년 옴진리교 신도[48]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약속된 장소에서'를 발간했다.
  • 그래도 살아간다―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수기집(それでも生きていく―地下鉄サリン事件被害者手記集)
  • 여기에 있다는 것―지하철 사린 사건 유족으로서(ここにいること―地下鉄サリン事件の遺族として)
저자 타카하시 시즈에는 이 사건으로 순직한 타카하시 카즈마사 당시 카스미가세키역 부역장의 아내이다.
  • 일본 VS 옴진리교 - 일본 현대사의 전환점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네티즌 나인
  • 다큐멘터리
  •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NHK, 2012, 2015)
    • file.02 옴진리교
    • file.04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
  • 지하철 사린 사건 15년간의 싸움~그 날, 카스미가세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후지 테레비, 2010)
  • 옴진리교 20년의 진실~폭주의 원점과 환상의 핵무장 계획~(TV 아사히, 2015)
  • 프로그램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2년 12월 4일자에서 다뤄졌다.


8.2. 창작물[편집]



  •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 11 2화에서 독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에 해당 사건이 언급된다.

  • 쏘우 2에서는 직쏘가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2시간 후에는 사린가스 중독으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실제로 지하철 테러 사건이 등장하며, 노선도를 염두에 뒀는지 사건이 일어난 마루노우치역 번호에 속하는 15화에서 본격적인 강도 높은 국면 전환이 이뤄진다.

이 외에도 일본 창작물에서 종교로 인한 테러, 도심 생화학 테러가 등장하면 보통은 모티프가 이 사건이다. 그만큼 이 사건이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종교 테러뿐만 아니라 묻지마 테러PTSD를 다루는 일본 작품들은 이 사건의 영향이 짙다. 이를테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2000),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디스턴스〉(2001), 시오타 아키히코의 카나리아 등.


9. 기타[편집]


  • 언더그라운드의 인터뷰 중 '지하철 사린사건 피해자의 모임'의 상담 창구를 맡고 있는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49]일본 경찰 조직과 사법 조직의 태만을 지적한다. 사건이 일어난 해 설날에 이미 요미우리 신문에서 본거지인 사티안이 있는 카미쿠이시키무라(上九一色村)에서 사린 잔유물이 검출됐다는 기사가 나고 1995년 3월 6일과 13일[50], 2번에 걸쳐 치안 상태 및 사린 가스 살포의 가능성에 대한 건의서가 제출되지만[51] 경찰은 설날로부터 3달이 넘도록 옴진리교의 조직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늦장 대응을 보여주며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안조사청도 비난을 받았는데 경찰은 민생 치안을 전담하느라 대응이 늦었다 쳐도 공안조사청이야말로 이런 위험한 집단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기관임에도 경찰 이상으로 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공산당은 공안조사청이 우리를 감시하느라고 쓰는 시간과 인력의 반만 옴진리교 감시에 썼어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 아베 사부로 변호사는 1995년 69세의 나이로 피해자 구제를 위한 옴진리교 파산 관재인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9년까지 활동하였다.

  • 요도호 납치 사건 당시의 인질로 유명한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52] 가 원장으로 있던 '세이로카 국제 병원'에도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당시 히노하라 원장은 사린 중독임을 알아내고 적절한 해독 치료를 지시해서 600여 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 교주LSD에 중독되어 있었고, 사이비 교주적인 행동을 보였으며 자신의 광신도들을 세뇌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등이 로만 폴란스키의 일가족 5명을 무참히 살해한 찰스 맨슨과 그 추종자들과 닮은 면이 있다.

  • 워낙 일본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대사건이라 일본 방송에서는 사건 발생 29년이 지난 이후에도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주제로 한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한다.

  •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형 건물인 '대현빌딩'[53]에서 공기조화기의 조작 오류로 건물 전체에 일산화탄소가 퍼져 20여명이 실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독가스 테러인 줄 알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또 다음날에는 잠실 롯데월드의 민속박물관이 전소되는 화재가 발생해 한동안 뒤숭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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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옴진리교의 교주며 본 가스 테러를 구상한 주동자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2] 2020년 3월 사망한 여성이 피해자로 인정되면서 사망자 1명이 추가되었다.[3] 일본에서는 춘분이 공휴일이다.[4] 한 블로거가 이 영상도 입수했다. 피해자 시민들과 지하철 직원, 경찰공무원과 소방공무원, 한국육군에 해당하는 육상자위대 관계자들, 그리고 의사, 간호사, 원무과 관계자들의 처절한 모습이 담겨 있다.[5] 영단 직원을 포함한다.[6] Intriligator, Michael D. “The Economics Of Terrorism.” Economic Inquiry, vol. 48, no. 1, 25 Jan. 2010, pp. 1–13., doi:10.1111/j.1465-7295.2009.00287.x.[7] 카스미가세키역에서 세 노선이 만난다.[8] 한국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법무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 대한민국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재정경제부, 교육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에 대응된다.[9] 카스미가세키역과 한 정거장 차이다.[10] 조총련재일교포였다고 한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임태남으로 중년 한국인 남성의 이름과 비슷하다.[11] 이로 인해 그에게는 미디어에 의해 '살인 머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당 별명에 대해서는 하야시 본인도 '별명 그대로의 일을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라며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였다.[12]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364페이지[13] A725K 아비코요요기우에하라 행.[14] 각각 타카하시 카즈마사(高橋一正, 1945~1995)와 히시누마 츠네오(菱沼恒夫, 1944~1995)이다. 출처: 1995년 3월 21일 연합뉴스 & 1995년 3월 20일 연합뉴스.[15] A777 이케부쿠로 발 오기쿠보 행.[16] 사건 당시 사망자는 1명이었지만, 2020년 후유증으로 사망한 여성 한 명도 이 사건의 희생자로 인정되면서 2명이 되었다.[17] B801 신주쿠 발 이케부쿠로 행.[18] B711T 나카메구로 발 토부동물공원 행.[19] A72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20] <언더그라운드> 361페이지에서부터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나온다. 하야시 야스오의 테러 공격에 이 엄청난 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A720S 전동차에서만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린 가스가 살포된 후 A72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⓪)가 코덴마쵸역에 스톱했을 때 이 전동차의 승객들이 사린 팩을 발로 차서 코덴마초 역 승강장에 버렸기 때문. 결국 츠키지역에 멈춘 ⓪을 뒤따라오던 열차들-
①A621T 기타카스카베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핫초보리역에서,
②A785K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카야바쵸역에서,
③A666S 토부동물공원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닌교초역에서,
④A750S 기타센주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가 코덴마쵸역과 닌교초역 사이에서,
⑤A738S 타케노츠카 발 나카메구로 행 전동차 등이 코덴마쵸역에서 줄줄이 정차했을 때
④에서 하차하여 승강장에서 대기 중이던 모든 승객과 ④를 뒤따르던 ⑤에서 하차하여 승강장에서 대기 중이었던 모든 승객이 코덴마쵸역 승강장에서 대규모로 사린 가스를 흡입하면서 피해가 커졌다. 결과적으로 사린 봉지를 걷어찬 행동이 엄청난 희생을 부른 행동이 된 것이었지만, 사린 흡입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위독 물질인지 몰랐던 상황이라 봉지를 걷어찬 남성이 유죄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이 남성의 행동이 유죄가 아니라는 점을 서술한 것을 본다면 사건 당시에는 꽤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봉지를 차서 내보내려다가 선수를 빼앗겨 내보내지 못했던 남성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가스 팩 개수가 무려 3개나 됐다. 다른 4명이 각각 2팩씩 살포했는데 하야시 야스오만 3팩을 살포했다는 점에서, 팩 하나당 독가스 분량이 900ml였다는 점에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야시 이쿠오, 요코야마 마사토, 히로세 켄이치 3명은 독가스 팩에 구멍을 작게 뚫었고 일부는 뚫지 못하기까지 한 반면 토요다 토오루는 독가스 팩 2개를 구멍 냈고, 하야시 야스오도 독가스 팩 3개를 다 구멍 내어 가장 많이+가장 큰 구멍이 났다. 최종적으로 도쿄 지하철의 여러 노선들 중에서도 히비야선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 총 사망자 9명(8+1), 총 중경상자 3007명(2475+532).
[21] 후술하겠지만 소방청 화학대응팀의 장비에 사린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22]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경찰청에서는 화학테러가 발생한 경우 소방, 환경청, 군과 함께 오염물질을 교차분석하는 걸 매뉴얼화하였다.[23] 군생활 할 때 최소 한 번씩은 봤을 KMARK-1 신경작용제 키트가 바로 이 두 약물로 구성되어 있다. 옥심이 프랄리독심의 뒷부분만 줄여 부르는 명칭이다.[24] 일본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의 "4. 긴급 조치" 항목을 보면 사고 당시 일본이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조치를 취했는지를 알 수 있다.[25] 훗날 2001년 중앙즉응집단(현 육상총대) 소속 중앙특수무기방호대가 된다.[26] 다만 검출 장비에 사린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상태라 원인 물질을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27] 맨 위에서 언급했듯 이 테러를 일으킨 이유가 수사력을 옴진리교가 아닌 테러 수사로 돌리기 위함이었으므로 테러리스트인 옴진리교 간부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어 옴진리교가 저지른 것이 들통나는 상황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28] 이후 벌어진 9.11 테러 또한 마찬가지여서 피해자들은 대부분 뉴욕시 소방공무원과 세계무역센터의 청소직원, 관리직원, 그리고 평범한 사무직 등 일반 시민들이었던 반면 오히려 가해자들은 중동의 상류층 출신 고학력자들이었다. 심지어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도 엘리트 출신이다.[29] 시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물체의 색상을 구별할 수 없는 색맹이 되었으며, 거동도 매우 불편해졌고 식사도 아이스크림, 떠먹는 요구르트 등의 부드러운 것이 아니면 소화할 수 없었다. 말을 하기도 힘들어져 매우 불분명한 발음만 나왔기에 그녀의 사연은 다른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달리 본인의 구술이 아닌 그녀를 만나 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험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알려졌다.[30] 사건 발생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나온 '언더그라운드'에는 가명으로 나왔다.[31] OVA 애니메이션에서는 도쿄대 재학 중인 옴진리교 신도가 그의 부모에 의해 구금되어서 신도 활동을 못 하게 되었다가 교단 내의 능력 있는 변호사 등을 동원해 부모를 설득하고 구금된 신도가 풀려났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32] 도쿄 사린가스 사건 사망자는 물론이고 옴진리교가 벌인 다른 사건의 사망자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33] 옴진리교는 교단의 건물을 사티안(Satian)이라고 불렀으며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라는 뜻의 단어인 사티아(Satia, सत्य).[34] 카나리아는 가스에 대한 반응이 인간보다 빠르기 때문에 과거에는 광산에서 유독 가스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나리아 새장을 같이 가져갔다. 또한 아사하라 쇼코 체포 이후 결성된 옴진리교에서 탈출한 신도들의 모임인 카나리아회(カナリヤの会)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참고로 카나리아회(カナリヤの会) 홈페이지를 열어서 "設立者" 및 "会長" 즉 '대표'와 "滝本太郎" 부분을 보자.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가 이 카나리아회 설립자 대표 회장이다. 덤으로 "重要人物" 즉 '주요 당사자' 부분에서, "滝本太郎" 옆에 "永岡辰哉" 부분을 보자.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인데 이분이 나가오카 히로유키(永岡弘行)의 아들 나가오카 타츠야(永岡辰哉)다. 나가오카 타츠야는 옴진리교에 들어갔다가 바로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의 상담과 설득으로 옴진리교를 탈퇴한 후 가정으로 복귀해 자기 아버지 나가오카 히로유키와 함께 옴진리교 탈퇴 운동을 전개했다.[35] 1993년 6월 27일과 7월 2일 2차례 도쿄 고토구 카메이도 지역에 있던 옴진리교 지부가 탄저균의 배양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살포하는 과정에서 고압 분무기를 사용하는 바람에 탄저균이 모두 사멸해 버리고 악취만 남게 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카메이도 악취 사건 문서#[36]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도쿄도청 소포 폭탄 사건, VX를 사용한 2건의 살상.[37] 키쿠치 나오코, 타카하시 카츠야, 히라타 마코토다.[38] 방사능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후타바역에도 이 포스터가 있었다. 당연히 시간이 도호쿠 대지진에서 멈췄기 때문에 범인이 잡힌 시점에도 포스터는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39] 바로 이것이다.[38] 우습게도 이 중 다른 사건에 연관되었던 히라타 마코토(平田信)는 2011년 12월 31일 도피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변호사와 상담 후 자수했다. 그리고 2012년 1월 1일 자수한 지 하루 만에' 본인임이 확인되어 최종적으로 체포되었다. 히라타 마코토는 이후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40] 집행지는 도쿄도 카츠시카구 도쿄 구치소.[41] 집행지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오사카 구치소.[42] 집행지는 히로시마 구치소.[43] 일본 경찰, 검찰, 재판소가 앞장서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준 유일한 사람이다.(다만 내부에서 '그래도 너무 큰 범죄를 저질렀으니 사형이 맞지 않냐'는 의견이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유 후미히로와 마찬가지로 하야시 이쿠오는 옴진리교의 파괴 범죄와 거리를 두어 왔던 자라고 한다. 원래 테러범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있었는데, 사건 이후 교단 내 직위 승격을 미끼로 묵비권 행사를 요구받는 등 옴진리교의 태도에 의문을 품고 흔들리게 되어 자신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시작으로 옴진리교의 모든 것을 다 폭로하며 옴진리교 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자백 전까지 옴진리교가 저질렀다는 물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재판에서도 피해자들에게 거듭 반복적으로 사죄하였으며, 유가족이 '개전의 정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개전의 정이 있다고 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이므로 당연히 사회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치바현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며 피해자들을 염불하며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의 인세를 피해자들에게 기부하고 있다.[44] 히로세 켄이치, 요코야마 마사토, 토요다 토오루 등 3명이 일괄체포된 1995년 5월 16일은 공교롭게도 교주 마츠모토 치즈오가 체포된 날이기도 하다. 동시에, 교주 체포에 반발한 옴진리교 광신도들이 도쿄도청 소포 폭탄 사건을 저지른 날이기도 하다.[45] 실제로 일본의 명목 GDP는 1995년 미국 명목 GDP의 71%의 달했던것을 마지막으로 이듬해인 1996년부터 초장기 불황에 빠졌었다.[46] 세컨드 임팩트로 인해 도쿄가 멸망하고 세워진 2번째 수도인 제2신동경시마츠모토 사린 사건이 일어난 마츠모토시에 위치해 있다는 설정을 통해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47] 사실 옴진리교 신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린가스 농도를 짙게 했다면 6천 명 이상의 엄청난 피해자가 나와 오히려 9.11이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48]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아니라 주로 前 신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다 감방 갔을 거고 관계자들은 이 정도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가 자기랑 아는 사이였다고 하기 싫어 이야기를 꺼릴 게 분명하니 어쩔 수 없긴 하다.[49]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와는 사법 연수원 동기이다.[50] 사건이 일어나기 딱 일주일 전이다.[51] 이 2차례 건의서를 제출한 분이 바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이다. 3월 6일에는 "치안 상태에는 문제가 없는가"라는 제목으로, 3월 13일에는 "옴진리교가 사린 가스를 살포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경찰청장과 검찰총장 앞으로, 그리고 경시청에 제출했다.[52] 2017년에 10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3] 논현동 225-3. 이후에는 대현그린타워로 재건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