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리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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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kugawa_Yorihusa.jpg
徳川 頼房
1603년 9월 15일 ~ 1661년 8월 23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고산케 중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의 초대 당주이자 미토번의 초대 번주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이긴 덕분에 태어날 수 있었다. 만약 서군이 이겼더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서군의 수장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동군의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죽이기 위해 싸운 전투가 세키가하라 전투이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으로 후시미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만노카타(お万の方)로 도쿠가와 요리노부와 어머니가 같다. 아명은 츠루치요마루(鶴千代丸)

1606년 3살의 나이에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히타치국(常陸国) 시모츠마성(下妻城) 10만석의 영지를 받는다.

1609년 동복형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히타치국(常陸国) 미토성(水戸城)에서 슨푸번(駿府藩)으로 전봉(転封)(영지 이동)되고 요리후사는 형의 영지로 전봉(転封) 된다. 형들인 요시나오, 요리노부와 함께 슨푸성(駿府城)에서 아버지 이에야스 슬하에서 자랐다.

1610년 아버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딸 이치히메(市姫)를 잃은 오카지노카타(お梶の方)란 아버지 측실(側室)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611년 겐푸쿠[1]를 치르고 이름을 마츠다이라 요리후사(松平頼房) 고쳤다.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선 출진하지 않고, 슨푸성(駿府城)의 수비를 맡았다.

1619년 아버지 이에야스 사후 17세의 나이에 영지인 미토번 부임했으나 2달 뒤에 다시 에도로 돌아가고 계속 에도에서 지내다 1625년에 다시 영지로 부임한다. 요리후사는 형들인 요시나오, 요리노부가 에도와 영지를 왕복하며 지내는 것과 달리 청년시절을 대부분 에도에서 지내게 된다.

1625년부터 1630년까지는 3년을 제외하고 영지에 부임해 미토성(水戸城)을 개축하고 성하(城下) 마을등을 정비한다.

1636년 도쿠가와성(姓)을 사성(賜姓) 받는다.

1661년 영지인 미토에서 지내다 병을 얻어 동년(同年) 미토성(水戸城)에서 사망한다. 향년 59세. 가문은 측실(側室)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인 미토 고몬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이었다.

도쿠가와 요리후사는 평생 정실(正室)을 두지 않고 여러 측실(側室)만 두어 이들 사이에서 11남 15녀를 보았다. 이 많은 자식들의 후손 중 한명이 막말의 아이즈번주(会津藩主)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파일:徳川頼房.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에 첫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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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元服 - 일종의 성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