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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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6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徳川家宣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0px-Tokugawa_Ienobu.jpg
생몰년도
1662년 06월 11일 ~ 1712년 11월 12일 (50세)
신체
160cm[1][2], O형
원호
분쇼인(文昭院)
재임기간
1709년 ~ 1712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에도 막부의 제6대 쇼군. 코후의 번주 도쿠가와 츠나시게의 아들로, 제5대 쇼군 츠나요시의 조카이자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손자였다.

2. 생애[편집]


이에미츠의 3남인 도쿠가와 츠나시게(徳川綱重, 1644 ~ 1678)가 정실이 아닌 유모의 하녀인 조쇼인(長昌院, 1637 ~ 1664)로부터 얻은 아들로, 츠나시게가 정실을 맞을 즈음이었기 때문에 파혼을 염려한 센히메[3]의 수배로 어린 시절에는 가신 신미 마사노부(新見正信, ? ~ ?)의 아들로서 신미 사콘(新見左近) 살았다가 츠나시게가 다른 아들을 얻지 못하자 9세에 다시 츠나시게의 아들로 정식 인정받았다. 1678년 부친인 츠나시게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코후의 번주가 되었다.

원래는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후계자로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에노부는 정실 소생이 아니었던 탓에 이에츠나의 동생인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제5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가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게 되자 1709년 48세의 나이로 제6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 치세에 가장 큰 문제였던 동물 애호 법령인 <생류연령>을 즉각 폐지하고, 츠나요시 치세의 실권자였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막부에서 쫓아냈으며 제4대 쇼군 이에츠나의 문치정치를 계승했다.

츠나요시는 죽어가면서 후임인 이에노부에게

"내가 죽더라도 <생류연령>은 계속 유지해달라"

고 말했으나, 이에노부는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돌아가신 분의 유지는 받드는 것이 원칙이나, <생류연령>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돼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천하만민을 위해서 <생류연령>을 폐지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법령을 보면, 처벌한다는 법령은 폐지하지만,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계속 유지하라고 했다.

전임 세이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이었던 츠나요시의 <화폐주조령>을 유지하여 재임 2년차(1710년)에 '겐로쿠 금•은'을 또 발행하는 실책[4]을 빼면 그다지 큰 우를 범한 적은 없었다. 쇼군직에 오른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큰 실책을 찾기가 더 어렵지만.

츠나요시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 흔적이 보이는데 사실 <생류연령>과 사찰 및 천황가의 능묘 재건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다 계승했다. 주자학(성리학)을 이용한 명분론이라든가 낮은 계급의 인재들을 뽑아쓰는 것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한 부분이었다.

특히 낮은 계급을 등용한 부분은 도자마 다이묘들을 우대한 츠나요시의 그것을 넘어서 로닌[5]들을 최고 관직에 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 ~ 1725)로 주자학자를 최고 관직에 두었다는 점과 로닌(낭인) 계급이 최고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했다는 좋은 반증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제대로 먹혀들어가 이때의 치세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아이디어로 상당 부분 효과를 보게 된다.

재정정책으로는 츠나요시가 했던 사업들의 대부분을 접어서 긴축재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겐로쿠 금•은'의 실책 이후, 의 함량을 초대 쇼군 이에야스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711년에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직접 나서서 (조선에서 일개 왕자 따위의 칭호인) 대군이라고 부르지 말고 일본국왕[6]이라고 부를 것을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예우도 상의 없이 간소화시키려고 했으나, 쇼군인 이에노부가 고작 1년 뒤에 죽고 아라이 하쿠세키도 따라 실각하자 롤백되었다. 허나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통신사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달리게 되었다.

나가사키데지마를 통한 본격적인 무역 통제가 이루어진 시기도 이에노부의 치세하였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총수입 규모를 낮추는 한편, 대금 결재 방식을 금, 은, 구리같은 현금화하기 쉬운 귀금속류 내지는 광물류에서 전복 같은 해산물로 교체하는 방식을 취했다.[7]

감정음미방(勘定吟味方)이라는 재정 감찰 기구를 두고 상인들의 부정을 막고자 하는 시도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시도는 좋았으나 선대 츠나요시때 이미 막부의 상인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너무 높았기에 설치는 했으나 성과는 그다지 낸 것이 없었다.

워낙 츠나요시 치세가 빡빡했었던(적어도 서민들에게는 그랬다) 탓에 <생류연령>을 폐지한 것만으로도 서민들의 지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정 개혁을 시도하던 중인 1712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는 이에노부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이었다. 당시 이에츠구의 나이는 5세.

상냥한 성격에 학문을 좋아하는 쇼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대 쇼군 츠나요시와는 썩 관계가 좋지는 못했는데 츠나요시의 아들 도쿠마츠가 사망하자 츠나요시에게 후계자로 지명을 받았다고 한다.

재위 4년만에 사망한 탓에 많은 사람들과 당시의 나카미카도 덴노 및 교토 조정에서는 아쉬워했다고 한다. 더 오래 살았다면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치세를 재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에도 시대의 역사서들에는 진정한 인자(仁者)라고 평가받았다고. 학문을 좋아했고 덕이 있었으며, 나름의 업적을 남겼으나 어린 후계자를 남기고 짧은 치세 끝에 죽었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문종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짧은 그의 재임기는 조선숙종 재위기 후반과 일치하며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 재위기하고 일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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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6cm는 위패의 키이고, 160cm와 혈액형 O형은 유골 조사의 키와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60cm가 신빙성이 높다.[2] 당시 일본인 평균보다도 컸으며, 역대 쇼군 중 유일하게 키가 160cm여서 역대 쇼군 중 키가 가장 컸다.[3] 츠나시게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츠나시게의 유모는 그녀의 시녀이기도 했다. 여기에서의 센히메는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을 말한다.[4]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했다.[5] 여기에서는 추신구라의 죄인을 가리키는 낭인이 아니라 다이묘급 가문이 아닌 그에 훨씬 못미치는 계급을 의미한다.[6] 참 아이러니 한 게, 무로마치 막부시절 명나라에게서 일본국왕 칭호를 하사받았는데, 19세기에 국학의 발흥으로 요시미츠는 "외세에 굴종했다" 등의 악평을 받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자신 3대의 목상이 참수되어 길바닥에 효수되었다.[7] 네덜란드 상인들은 처음에는 좀 많이 당황했으나 네덜란드(서양물품) → 나가사키(서양물품 - 해산물) → 난징(해산물 - 중국산 차 및 도자기 등) → 네덜란드(중국산 물품 - 서양물품) 무역 루트로 전환하여 이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이때는 전 세계적으로 광물의 생산이 많았기 때문에 광물류로 결재하는 것보다는 해산물을 통해 중국측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무역 루트의 다변화가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