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히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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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2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徳川秀忠

파일:Hidetada2.jpg
출생
1579년 5월 2일
도토미국 하마마츠
(현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
사망
1632년 3월 14일 (향년 52세)
무사시국 에도 에도 성
(현 도쿄도 치요다구)
묘소
조죠지[増上寺]
재임기간
제2대 정이대장군
1605년 6월 2일 ~ 1623년 8월 23일
오고쇼
1623년 8월 23일 ~ 1632년 3월 14일
태정대신
1626년 10월 8일 ~ 1632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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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마츠(長松) / 쵸마루(長丸)
→ 타케치요(竹千代)
→ 히데타다(秀忠)
원호
다이토쿠인(台徳院)
종교
불교
별명
에도 츄나곤(江戸中納言)
에도 우다이쇼(江戸右大将)
신체
157.6cm[1], O형
부모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친모 사이고노츠보네(西郷局)
양모 아차노츠보네(阿茶局)
부인
정실 오히메(小姫)
계실(미다이도코로) 오고우(於江与)
첩 오시즈노가타[お靜の方]
형제
11남 5녀 중 3남
자녀
장남 도쿠가와 나가마루(徳川長丸)
장녀 센히메(千姫)
차남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차녀 타마히메(珠姫)
삼남 도쿠가와 타다나가(徳川忠長)
삼녀 카츠히메(勝姫)
사남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
사녀 하츠히메(初姫)
오녀 도쿠가와 마사코(徳川和子)



파일:1024px-Hidetada.jpg

도쿠가와 기념재단이 소장중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막부 성립기
2.3. 쇼군
3. 평가
5. 기타
7.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3남이자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 또한 아버지 이에야스처럼 태정대신 관위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은퇴 이후 오고쇼 시절인 1626년에 받은 관위였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가 낳은 아들이었다. 아명은 '나가마츠마루'로, 오아이노카타 소생으로는 첫째였다.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측실 소생에다 셋째 아들이었기에 처음에는 "그런 녀석은 잉여인간이다"라는 취급을 받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히데타다가 태어나던 해 큰 형 마츠다이라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죄를 받아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할복했다. 얼마 안 가 바로 위의 형인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 때문에 하시바씨를 사성받았고, 훗날 유키(結城) 가문으로 입양되어 유키 히데야스가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거의 이에야스의 실질적인 장남으로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으나 이 때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탓에 거의 반인질 상태로 살았으며, 이름 히데타다의 '히데'()도 히데요시에게서 한 글자를 받은 것이었다.[1]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누이인 아사히히메와 정략결혼을 한 후에는 아사히히메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적장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595년 아자이 나가마사오이치의 딸인 오에요와 결혼했다.


2.2. 막부 성립기[편집]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가 두각을 나타내자 다소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1600년,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와 천하를 두고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타다는 가문의 중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의 보좌를 받으며 38,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진군하는 이에야스와 합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삽질을 한번 거하게 터뜨리고 마는데, 바로 진군 도중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던 사나다 일족[2]이 지키고 있는 우에다 성을 공격해버린 것이다. 우에다 성에는 불과 2,000여 명의 병력이 있어서 전력차는 압도적으로 히데타다의 군세가 우세했으나 시간을 끄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지략과 격렬한 저항 때문에 공격은 크게 실패했고, 결국 이에야스가 결전을 치를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12만여명으로 싸울 수 있던 걸 8만 여명으로 싸운 셈이고 어찌나 아들에게 실망했는지 이에야스는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3]는 게 기존의 설이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히데타다의 편지 등에서 보여지는 것은 히데타다가 아버지 이에야스로부터 받은 본래의 공격목표 명령은 시나노 제압, 즉 사나다 일족의 우에노 성을 공략하는 것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다 갑자기 작전이 변경되어 카미카타로 합류하라는 명을 받고, 히데타다는 우에노 성 공격을 그만두면서 서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에 늦었다는 것이 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늦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게 세키가하라 전투가 한나절만에 끝나버렸다는 엄청난 변수가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4]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동군이 약간 불리한 형세에 있었다. 포진도 미츠나리의 서군 진영이 우세했던 데다가 병력도 많았기에 이에야스로서는 히데타다의 합류를 기다렸던 것. 다만 서군의 경우는 동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명에게 지휘권이 집중된 것과는 달리 이시다 미츠나리,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지휘권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탓에 단결이 잘 안되었던 면도 있었고, 이를 이용한 이에야스의 모략이 먹혀들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어쨌든 사나다가 지키는 성을 빠르게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만 따져도 군사적으로 시원찮다는 것을 드러냈지만 이미 이에야스의 후계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1603년 에도 막부가 성립한 후 2년 뒤인 1605년, 아버지 이에야스로부터 쇼군을 계승받았다. 쇼군직을 2년만에 물려준 이유는 이에야스가 늙어서 언제 급사할지 모르니[5], 쇼군직을 세습함으로써 도쿠가와 집안이 쇼군가임을 만천하에 분명히 할 의도였다.

비록 세키가하라에서의 지각 때문에 실망한 이에야스였지만 히데타다가 개인적으로는 무난한 성품이었고 '그래도 이놈이 수성(守成)은 잘하겠지.'라는 생각에서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라는 추정도 있고, 만약 의도적으로 후계자를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세키가하라에 늦게 오게 했다면 모든 것이 쇼맨쉽에 가까운 보여주기 식이었을 터였다.

1607년에는 조선 선조에 의해 첫 조선 통신사가 찾아와 국교 재개를 알리기도 했다. 이후 통신사는 오사카 전투 조금 뒤인 1617년과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쇼군에 오른 이듬해인 1624년에 또 일본을 방문했다.

1609년 시마즈 타다츠네류큐 왕국을 정복하고 잡아온 쇼네이 왕으로부터 알현받았다. 이는 타다츠네가 끌고 온 것이었다.

1612년에는 규슈의 번주 아리마 하루노부가 기독교인 막부 인사와 내통해 영지를 확장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614년에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을 선포하고 선교사를 추방했다. 이는 훗날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

1615년에는 오사카 전투에서 승리해서, 도요토미 세력을 압살하고 도쿠가와 세력의 일본 열도 지배를 확실시했다. 같은해 <일국일성령>과 《무가제법도》 등으로 다이묘들을 견제하고, 쇼군의 권력을 강화했다.


2.3. 쇼군[편집]


비록 쇼군이 된 히데타다였지만 아버지 이에야스는 '오고쇼'(大御所)라는 직함을 만들고 슨푸 성(駿府城)에 웅거하며 히데타다의 머리 위에서 또다른 실권을 행사했다. 과연 전국시대라는 난세를 헤쳐나온 '너구리'에 걸맞는 행동이었다. 그랬기에 실질적인 권력은 치세 초기에는 가지지 못했다.[6][8] 그러나 재임 10년이 되어가는 1615년경, 즉 도요토미 가문을 멸족시킬 때부터는 슬슬 히데타다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이에야스의 관료 집단이 히데타다 측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는데, 단적인 예로 오사카 성에 웅거한 도요토미 일족에 대한 공격 방침에 대한 대립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느긋하게 압박할 것을 주문했지만 히데타다는 속전속결을 주장했고, 결국 히데타다의 방침대로 전쟁은 빨리 진행[9]되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막부를 완전히 안정시켰으며[10] 그 이듬해인 1616년에 이에야스가 죽자 진정한 막부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자신이 친정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막부와 쇼군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천황 가문에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천황 가문과의 결속을 강화했고, 본거지인 에도를 개발했으며 쇄국 정책을 펼쳐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외국 선박의 기항 항구를 제한했다. 또한 히데타다 대에 많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도요토미 측에 있다가 막부의 신하가 된 다이묘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대표적인 희생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숙청한 이들의 영지를 도쿠가와 일족에게 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하며, 도쿠가와가의 분가를 만들었다.[11]

영국인 가신 윌리엄 애덤스를 통해 영국과 교역했으며[12] 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일본식 갑옷 2벌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이 갑옷들은 지금도 런던 탑에 보관되어있기 때문에 방문하면 구경해볼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 중 하나는 다케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있다.

家夜をありつの日浅く、今まで創建せし綱紀政令、いまだ全備せしにあらざれば、近年のうちにそれぞれ改修せんと思ひしが、今は不幸にして其の事も遂げずなりぬ、我なからむ後に、御身いささか憚る所なく改正し給へば、これぞ我が志を継ぐとも申すべき孝道なれ

지금까지 만든 기강 법령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곧 개정하려고 생각했으나, 불행하게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죽은 후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점이 없도록 개정한다면 그야말로 내 뜻을 잇는 효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 이에미츠에게 남긴 유언


1623년 쇼군직을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물려주고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오고쇼가 되어 이에미츠 위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아버지가 슨푸 성에서 권력을 행사한 것처럼 본인은 옛날 호조 가문의 영지였던 오다와라 성에 웅거하며 권력을 휘두를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에도 성의 별채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다.[13] 그렇게 살면서 막부의 안정에 진력하다가 1632년 정월에 사망했다. 향년 53세. 사인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위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


3. 평가[편집]


이에야스의 노선을 확립한 것은 히데타다의 공적이다. 정치적 자질에서 이에미츠보다 훨씬 뛰어났다.

야마모토 히로부미 (일본 역사학자, 도쿄대학 대학원 교수)#[출처]


굉장히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 군인으로서는 유능하지 못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가로서는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야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에야스나 역시 무용으로 이름이 높은 맏형 마츠다이라 노부야스, 둘째형 유키 히데야스에 비하면 전국시대 스타일의 인물은 전혀 아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성 전투에서의 행보를 보면 군사적으로는 그리 유능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14] 도쿠가와 막부측에서 편찬한 책에서도 히데타다의 무용을 낮게 평가하고 있을 정도.

그러나 이에야스에게서 정치적 수완은 잘 이어받아서 창업된 에도 막부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히데타다의 치세는 아들 이에미츠 대에 막부의 전성기로 발전한다.[15] 쉽게 말하자면 전형적인 정치가형 인물. 어떻게 보면 도쿠가와가 '이놈이 수성은 잘 하겠지' 라는 생각이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등의 법을 정비, 정착시켜 아버지의 노선을 이어받아 에도 막부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

히데타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에도 막부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다. 1616년에 아버지 이에야스가 사망한 후, 히데타다는 자신의 측근인 사카이 타다요(酒井忠世)나 도이 토시카츠(土井利勝)를 노중에 임명해 노중에 의한 합의제를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아 오와리·기이·미토에 도쿠가와 요시나오(오와리 가)·도쿠가와 요리노부(기이 가)·도쿠가와 요리후사(미토 가)라고 하는 3명의 동생을 배치했다.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고산케'라 불리는 이 세 가문에 대해 쇼군의 보좌역이나 쇼군의 후사가 없는 경우의 혈통 유지 역할을 주었다. 이후 셋째 아들 도쿠가와 타다나가에게 스루가·도노에·카이 등 도쿠가와 가문에 인연이 깊은 땅을 주기도 했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모가미 요시토시 등의 도자마 다이묘를 연달아 가이에키에 몰아넣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히데타다는 아버지 이에야스를 상회하는 39개의 가문의 다이묘를 가이에키시켰다. # 히데요시 사후,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에 의해서 도요토미 가문이 약체화한 것을 알고 있는 히데타다는, 불온한 인물들을 빨리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정치의 중추를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나 친족으로 굳혀 대립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예방했다. 또, 해외 무역을 제한해, 다이묘들의 재력을 줄이는 데도 성공했다.

또한 히데타다는 다이묘 통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정사찰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히데타다는 천황 가문과 인척 관계가 되는 것을 노리고, 딸 도쿠가와 마사코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히데타다는 조정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실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의 사건(紫衣事件)'을 들 수 있다. 당시 스님에게 자의를 입도록 하는 것은 조정의 권리였다. 이 관습에 따라 고미즈오 천황은 다이토쿠지와 묘신지의 승려에게 자의 착용을 허가했다. 그러나 당시 오고쇼였던 히데타다는 고미즈오 덴노의 행위는 금중병공가제법도에 위반된다며 칙허를 무효로 했다. 이 사건으로 히데타다는 '막부는 조정보다 상위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 1626년에는 고미즈오 덴노를 니조성에 행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오고쇼 재임 당시 조정과의 관계에서는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보다 앞서서 정책을 폈다.

히데타다는 이에야스가 펼친 정책 중 뛰어난 것은 그대로 답습하여 더욱 강화했다. 그 중 하나가 무역 정책이다.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무역에 의한 수입을 에도 막부에 집중시키기 위해 사이고쿠 다이묘에게 주인장을 주고 무역을 허가시켜 수입의 일부를 막부에 헌상시키고 있었다. 이후 히데타다는 무역으로 인한 수입이 막대한 것을 실무를 통해 알고 있었으며, 무역 실권을 더욱 막부로 집중화시켰다. 1616년에는 명나라와 조선 이외의 외국 선박의 귀항을 나가사키·히라도로 한정했다. 본격적인 쇄국 체제를 시작한 시기도 히데타다 통치 시기이며, 쇄국제도의 원형을 만든 것은 히데타다다. 히데타다는 무역 이익보다 기독교 배제에 주력하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러한 공적들로 "뛰어난 아버지의 평범한 후계자"에서 "에도 막부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1999년 역사학자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 시즈오카대학 교수가 히데타다를 재평가하는 저서를 낸 것이 대표적이다. 오와다 교수는 히데타다를 "막번체제 260년의 초석을 다졌다."라고 평가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연구한 역사학자 야마모토 히로부미(山本博文) 도쿄대학 교수는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 때까지의 히데타다는 쇼군 지위에 있었으나 위대한 아버지 이에야스의 영향 아래 독자성 있는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망한 후 독립한 히데타다가 쇼군, 오고쇼로서 무역을 허가하는 한편, 기독교 금지를 철저히 꾀하는 외교정책을 취하거나 조정과 융화를 도모하는 등 아버지 이에야스의 정책을 계승하여 전개시키고 있다고 평했다. 히로부미 교수는 그러한 히데타다의 착실한 정치자세를 중시하여 그를 260년 남짓에 이르는 에도 막부의 기초를 구축한 인물이며 이상적인 2대째였다고 평가했다. #[16]

역사학자 타카기 쇼사쿠(高木昭作)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다이묘들의 가이에키, 여러 다이묘의 보조 공사(御手伝普請)에 의한 에도성·오사카성의 대강화[17], 키리시탄 탄압, 자의사건 등에 보이는 종교·조정의 통제 강화, 남만 무역에 봉서선 제도를 창설 등의 정책을 통해 막번제제 질서를 사회에 침투시켰다"는 이유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도쿠가와 마사코가 천황의 중궁으로 들어가고 외손녀인 메이쇼 덴노천황으로 즉위하는 등 일본 천황 가문과 친인척이 되었다.


5. 기타[편집]


  • 개인적으로는 정말 '무난한' 성품이었는데 다른 형제들에 비해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한다.[18] 괄괄한 아내 오에요에게는 기를 펴지 못한 공처가였다고 전한다. 오에요의 어머니, 즉 장모인 오이치도 성깔 있는 여인이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외조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정말 히데타다를 휘어잡으며 다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데타다가 아버지 이에야스처럼 호색 행위를 하지 못했고, 한 때 후계구도에서 오에요가 차남 쿠니마츠를 미는 것에 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19] 하지만 이에야스가 미녀를 들여보냈는데, 다음 날 이 두 미녀가 아무 일도 안 당하고 나왔다는 일화도 있는 것을 보면 사실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것 같다.

  •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시녀 오시즈와의 사이에서 아이즈 번의 초대 번주 호시나 마사유키가 태어났다. 하지만 오에요의 눈치가 보였는지 히데타다는 마사유키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고, 마사유키는 어머니 오시즈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가 타케다 신겐의 딸이자 아나야마 노부타다의 정실인 켄쇼인(見性院)에게 맡겨진 뒤 옛 타케다 가문 가신이었던 호시나 마사미츠의 양자가 되었다. 히데타다는 오에요가 사망한 후에야 마사유키를 만났다고 한다.[20] 그러나 마사유키는 이복형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해 발탁되어[21] 막부의 중신으로 능력을 발휘하였고 이후 가토 아키나리가 가신과 분쟁을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개역된 이후 아이즈 번주가 되었다. 마사유키의 자식대에서 도쿠가와의 옛 성인 마츠다이라씨를 쓸 수 있었다.

  • 키는 약 158cm로, 당시 시대 기준으로는 평균 이상의 키다. 털북숭이의 손발을 한 큰 체격이었다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근육의 발달이 좋고 충분히 단련된 몸이라고 한다. #

  • 의리가 두터운 일화가 많이 존재해, 부하들에게도 참을성 강하고 너그러운 일면을 보였다고 한다. 히데타다는 '사람을 쓸 때에는 과실로 이를 저버리지 말라. 아무쪼록 그 자신을 용서할지어다(人を用うるに、過失を以てこれを棄つることなかれ。よろしくその自新を許すべし)'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 히데타다는 쇼군이 된 후에도 인질 시절에 자신을 상냥하게 보살펴 주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네네)을 잊지 않고 말년에 교토에 갈 때마다 네네를 방문하며 네네의 봉토도 향상시켰다고 할 만큼 효성이 대단했다.

  • 히데타다의 등장 시기는 조선선조(1567~1608), 광해군(1608~1623)의 치세와 일치하며 은거 후에도 실권을 휘두른 시기까지 합치면 인조(1623~1649) 치세 초반과도 겹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수충'(源秀忠: 미나모토노 히데타다)이라고 적혀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끊긴 국교가 회복된 것이 바로 히데타다 치세였다. 물론 이때 쇼군이었지만 실권은 이에야스에게 있었다.

  • 파일:10278eb6eca4071e3402ddb0519dcb2f.jpg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필체를 볼 수 있는 서장. 형 유키 히데야스 앞으로 보낸 편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기 전에 쓴 것이다. #


  •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에게 일본식 갑옷 2개를 선물했다. 이 중 하나는 런던 탑에 보관되어 있다. #


  • 총포의 명수였다고 전해지며, 그의 무덤에는 생전에 아꼈던 총이 발견됐다. #

  • 히데타다의 장례식은 쇼군의 장례식으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검소하게 치러졌다. 장례 자체가 조촐하게 치러져 시신을 운반할 때는 근신 10명이 겨우 따라다녔을 뿐, 단 한 명의 승려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장례식이 조촐하게 된 것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언에 따른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타다는 자신의 매장에 대해 '장례식·법회 모두 검약을 취지로 하며, 위패 외에 새로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신호'(神号)를 수여받을 것[22]을 제안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


6. 창작물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시대를 다룬 시대극 등 다른 창작물에서 이에야스, 이에미츠와 함께 자주 만날 수 있다. 다만 창작물 내용마다 매우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 군사적으로는 무능했던 면이라거나, 워낙 일본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걸물인 이에야스의 후계자라는 점 때문인지 부친에 비해 우둔한 이미지나 심지어 악역으로 나올 경우 찌질한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막번 체제를 굳건히 한 '수성의 명군' 이미지를 강화해 제법 노회한 정치가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는 아예 처음에는 찌질하지만 점점 거물로 성장하는 성장형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다. 히데타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하드라마로는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가 있다.


7.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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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増上寺] 도쿠가와 쇼군 15명 중 6명(히데타다, 이에노부, 이에츠구, 이에시게, 이에모치)의 묘소가 있는 절이다.[1] 히데타다의 '히데'(秀)는 히데요시(秀吉)에게서 받았고, '타다'()는 조부인 히로타다(廣忠 : 이에야스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었다[2] 그 유명한 사나다 마사유키사나다 노부시게가 있었다.[3] 오지 않는 히데타다를 두고 “차라리 그 녀석(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이 지금 내 옆에 있었더라면 내가 저런 꼴은 안 봐도 됐을 텐데.”라고 했다고.[4] 사실 천하의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조차 오다 본인과 장남이 한꺼번에 죽어 권력이 휘청거린걸 보면 본인과 후계자가 전장에 한꺼번에 모이는 건 위험한 상황이다.[5] 쇼군에 즉위할 때 이에야스는 이미 60이 넘었고,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6] 일부 매체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나, 사실 이에야스가 굳이 쇼군을 2년만 하고 오고쇼라는 직책을 만들어 앉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쇼군에 즉위할 당시 도쿠가와는 이미 60이 넘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령이었고 따라서 언제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다. 이 당시보다 수명이 길어지고 의학도 발달한 현대에도 60이 넘어서 건강이 악화되는 사례가 굉장히 흔하다. 만약 이에야스가 아들을 후계자로 공언하지 않은 상태에서 급사한다면 아들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도쿠가와 가문 자체가 쿠데타로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본인이 멸망시킨 도요토미가 망한 이유도 후계구도가 부실해서인 게 컸다. 따라서 아들에게 미리 쇼군이라는 직위를 쥐어주면서 후계자를 공고히 하여 아들의 안전을 챙겨주고,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 지위에 있음을 명백히 알리는 큰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조선의 태종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책봉한 직후 바로 왕위를 양위한 것도, 차후 양녕이나 효령에 의한 후계구도가 어지러워질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충녕을 왕으로 확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7] 꼭 쇼군이 아니더라도 전국시대는 그만큼 하극상이 많이 나왔다. 전국통일의 기반을 갖추었던 오다 가만 해도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은 가신의 분가 정도의 위치였으나 세력이 커비면서 원래 주군을 누르고 권력을 잡았고 그런 오다 노부나가도 동생과 신하의 하극상을 겪었다. 그 다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를 옹립하면서 오다의 기반을 아예 통째로 가로챘다. 그나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 역시 크고 작은 하극상을 겪었기 때문에(주로 이마가와에서 막 독립한 시점에서 주로 잇코잇키와 관련하여 하극상을 겪었으나 이에야스가 현명하게 대처해서 잇코잇키에 심취했던 부하들도 자진해서 다시 이에야스에 귀순하였기에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꽤 위험한 상황이긴 했다.) 이런 식으로 자식, 더 나아가 도쿠가와 가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8]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쇼군 가문이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명분과 권력을 가진 왕가가 아니라 일본 천황가로부터 위임을 받는 형식이다보니 그런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일본 천황가는 실권이 거의 없고 사실상 쇼군이 일본을 통치했지만 그래도 그 권위만큼은 천황가에서 나왔는데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먼저 권력을 잡은 이들이 천황가를 협박 또는 회유하면서 힘센 자가 쇼군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쇼군이라도 더 힘센 놈이 나오면 데굴멍할 수밖에 없는 것.[7] 그리고 사실 이런 오고쇼 제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초가 아니고 이미 그 이전부터 '죠고'(상황)라는 제도가 있었던 탓도 컸다. 한마디로 천황이 태자한테 양위하고 죠고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책임은 새 천황에게 떠넘겼던 것. 그리고 이에야스는 이런 방식을 도쿠가와 가의 권력 강화에 써먹은 것이다.[9] 그렇다고는 해도 오사카 성을 공격하기 전에 오고쇼(이에야스)와 쇼군(히데타다) 중 어느 쪽이 선진을 맡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히데타다가 완강히 주장하여 공격의 선진은 그가 맡았다. 그러나 막상 공격이 시작된 후 도요토미 진영의 강한 저항으로 결국 격전 중 이에야스가 선진을 맡게 되었다. 히데타다로서는 세키가하라의 명예회복을 꾀했던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 셈이었다.[10] 이 때의 연호인 '겐나'(元和)를 따서 일본에서는 이 이후로 메이지 유신 때까지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겐나엔부'(元和偃武)라고 한다.[11] 이에야스 직계 혈통이 끊어진 후 분가 출신 쇼군이 나오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기슈 도쿠가와가 출신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있다.[12] 다만, 윌리엄 애덤스(영국)와 얀 요스텐(네덜란드)을 처음 등용한 것은 이에야스였다.(1600년)[13] 이때 본인이 한 것이 로쥬와 상의를 거쳐서 행한 천황 권한 축소와 《무가제법도》 제정이다.[출처] 山本博文『遊びをする将軍 踊る大名』教育出版、2002年、66-67頁。[14] 그렇지만 나폴레옹도 존경했던 18세기 군사 영웅인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도 28세에 치른 첫 전투에서 도망쳤다. 히데타다는 첫 전투에서 22세였고, 위에서 다뤘듯이 명령도 상황이 애매해서 애매하게 내려온 상태였으니 애매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투에서는 기껏 선진을 맡았으나 결국 이에야스가 직접 나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에야스도 본진이 찔려서 할복을 각오했다. 겪은 전투 두개에서 모두 낮은 성과를 냈으니 군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겠지만 상황적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15] 도쿠가와 막부 초기 3대 쇼군에 대한 평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이에야스는 모두 스스로 결정했다.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반은 스스로 결정했다. 이에미츠는 모두 중신에게 위임했다.'[小和田哲男] 많은 NHK 대하드라마의 고증을 담당하기도 했다.[16] 다만, 히로부미 교수는 히데타다가 수많은 다이묘를 가이에키 시킨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7] 에도성오사카성을 정비해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여 세간에 쇼군의 위광을 알리는 정책을 실행하기도 했다.[18] 에도 시대의 일화집 '조오잔 기담(常山紀談)'에는 히데타다에 대해 "예의바르고, 실언도 없다."라고 적혀있다. #[19] 다만 아버지 이에야스가 장남인 이에미츠를 밀어준 것에도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냥 부인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은 것인 지도 모른다.[20] 이는 히데타다가 비정한 아버지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과거 히데타다가 성명불상의 시녀에게서 얻은 첫 아들 나가마루가 1년만에 죽은 게 오에요의 짓일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오에요가 죽은 후에야 부자가 상봉한 것도 좋게 해석하자면, 오히려 오에요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고 볼 수 있다.[21] 이에미츠는 친동생은 죽였지만 이복동생은 중용했다. 어머니가 첫째인 자신은 거리를 두고 둘째인 동생만 아끼며 쇼군 자리도 둘째에게 주자고 해서 위협을 느꼈기 때문. 반대로 이복동생은 눈치밥 먹으며 세력이 없어서 두려워할 것도 없고 어쨌든 혈통이니 잘 대해주면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22] 이에야스의 신호는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