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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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도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전근대[편집]
2.1. 12세기 이전: 우산국[편집]
독도를 발견한 것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하던 울릉도 주민들이 처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에서 독도는 날이 맑으면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이러한 섬을 울릉도 주민들이 발견하지 못 했을 리 없고, 삼국사기에 이사부가 현 울릉도까지 130km를 대규모 인력을 이끌고 정벌한 사실에 근거하여 당시 울릉도에서 90km 떨어진 독도로 항해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독도가 간접 언급된 첫 문헌으로 추정되는 것은 한국 측의 삼국사기(1145년)로 지증왕 13년에 있었던 이사부의 우산국(于山國) 정벌을 다룬 내용이 독도가 편입된 첫 시기로 추정된다. 이는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이다"라는 문구에 기초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우산국에 관음도, 죽도, 독도 등의 부속섬이 포함되었다는 직접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그 영유 인식이 문헌상 인과적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자들은 고대의 독도가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통치하던 땅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에는 울릉도 이외에 현재의 독도를 뜻하거나 암시하는 묘사가 없다. 게다가 일본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의 영토에 독도가 포함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산도라면 본토인 울릉도를 놔두고 미쳤다고 살 수도 없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일컬었겠느냐고 반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산도=독도를 가장 명확히 밝힐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고 그 세종실록지리지조차 일설에는 우산도=울릉도라 카더라 할 만큼 우산도에 관한 기술은 가지각색이다.[2]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의 땅이었다.'라는 최초 기록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이 기술도 안용복 사건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와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우산국은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에 동북방 여진족들의 원정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2세기 즈음에 이르러 끝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울진군 지역에 이주했다. 웬 뜬금없는 여진족인가 싶을 수 있지만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함경도에서 살고 있던걸로 추정되고 함경도 또는 연해주에서 동남쪽으로 항해하면 울릉도와 독도가 그렇게 멀지는 않으며, 이 11세기 초반에는 여진족 해적이 일본 서부 일부 지방까지 가서 약탈을 할 정도로 극성이었음이 일본 기록에서도 교차검증되는데 그 사이에 끼인 우산국은 충분히 여진족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2.2. 12세기-14세기:무릉도와 우산도[편집]
우산국이 사라진 뒤 고려에서는 의종이나 최충헌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또 국가의 통제를 피해 울릉도로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극성을 부리는 왜구에 맞서고, 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섬 지역에 대한 인구 쇄출(刷出)을 단행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태종은 1425년(세종 7)에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고 울릉도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조처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에는 한 섬인 것처럼 인식하던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가 짝을 이루어 기록되기 시작한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3번째 기사
쇄출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가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1번째 기사
바로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에 2차 쇄출, 1423년(세종 7)에 3차 쇄출, 1438년(세종 20)에 4차 쇄출이 거듭되었고, 이와 더불어 요도(蓼島)라는 섬의 존재를 탐문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차츰 동해에 있는 섬들의 존재를 실사해나가게 되었다. 더욱이 본토로 쇄출된 울릉도민에 의해 울릉도에 대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우산도는 무릉도와는 서로 다른 두 섬으로 개념이 분리되어 나갔다. 여기에 무릉도가 오늘날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3] 우산도는 울릉도 외의 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쇄출을 집행하는 사람의 직함도 1차 쇄출의 '무릉등처안무사'에서 우산도와 무릉도가 나열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확장되었고, 3차 쇄출 이후에는 이 가운데 무릉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4차 쇄출에서는 다시 '무릉도순심경차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을 겪으면서 확장된 지리적 지식은 이후 편찬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문제는 고려사는 우산도-울릉도 1도설을 본설로 채택하고 2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여기에 울릉도가 있다.(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무릉이라고 하고, 일설에 우릉이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지증왕 12년에 항복해 왔다. ……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2섬인데,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 김종서 등, 『고려사』「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1년
여기서는 2도설을 본설로 하고 1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가와카미 겐조는 고려사를 잘못 베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울릉도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지증왕 12년 이사부가……)
다만, 이 시기의 우산도가 독도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 중이다, 다름아닌 우산도에 대한 묘사 때문인데, 우산도의 묘사를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되어 있고, 당시 울릉도는 공도, 즉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기 때문이다. 90km라는 먼 거리를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인지도 의문이다.[4]
또한 이후 우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에 걸쳐 등장하는 일이 굉장히 적은데, 당장 조선왕조 실록을 펼쳐서 우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그리고 고종1건이 나온다. 그 사이 실록에 등장한 적이 아예 없다는 뜻. 이 원인 해당 실록에 등장한 이유인 울릉도의 쇄출정책과 공도정책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 말인 즉슨 조선 조정이 우산도라는 존재를 실감하지 않거나 아예 까먹은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공도 정책 이후 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가 전부인데[5] , 만약 중요도가 있었다면 우산도 또한 올라왔겠지만 중요도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을 끈 건지 아예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사이 조선이 이 섬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2.2.1. 세종실록지리지[편집]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 도호부 울진현》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김종서로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울릉도, 독도라는 두 섬을 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