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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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근대
2.1. 12세기 이전: 우산국
2.2. 12세기-14세기:무릉도와 우산도
2.3. 15세기: 삼봉도 오류
2.4. 17세기: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그리고 안용복
2.4.1. 은주시청합기
2.4.2. 안용복 사건 진술의 신빙성은?
2.5.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울릉도로의 지속적인 재파견과 독도의 인식 확대
3. 근현대
3.1. 19세기: 서양의 측량과 아르고노트 오류
3.2.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울릉도의 재개척과 '독도'의 탄생
3.3. 20세기: 일제의 패망과 독도의 행방
3.4. 1953년-1956년: 독도의용수비대
3.4.1. 일본과의 교전 및 침입 기록
3.5. 1960년대 이후
4. 옛 지도의 독도



1. 개요[편집]


독도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전근대[편집]


전근대 독도사(史)는 보통 울릉도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울릉도를 모도(母島)로 주변 부속섬을 아우르는 나라였고, 안용복이 지킨 '다케시마'도 당시에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1]대부분의 독도 기록은 그 내용이 두리뭉실하게 서술되거나 아예 독도가 아닌 것처럼 서술된 지도도나 문헌도 많은데, 그 원인은 공도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에 대한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2.1. 12세기 이전: 우산국[편집]


독도를 발견한 것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하던 울릉도 주민들이 처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에서 독도는 날이 맑으면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이러한 섬을 울릉도 주민들이 발견하지 못 했을 리 없고, 삼국사기이사부가 현 울릉도까지 130km를 대규모 인력을 이끌고 정벌한 사실에 근거하여 당시 울릉도에서 90km 떨어진 독도로 항해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독도가 간접 언급된 첫 문헌으로 추정되는 것은 한국 측의 삼국사기(1145년)로 지증왕 13년에 있었던 이사부의 우산국(于山國) 정벌을 다룬 내용이 독도가 편입된 첫 시기로 추정된다. 이는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이다"라는 문구에 기초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우산국에 관음도, 죽도, 독도 등의 부속섬이 포함되었다는 직접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그 영유 인식이 문헌상 인과적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자들은 고대의 독도가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통치하던 땅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에는 울릉도 이외에 현재의 독도를 뜻하거나 암시하는 묘사가 없다. 게다가 일본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의 영토에 독도가 포함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산도라면 본토인 울릉도를 놔두고 미쳤다고 살 수도 없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일컬었겠느냐고 반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산도=독도를 가장 명확히 밝힐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고 그 세종실록지리지조차 일설에는 우산도=울릉도라 카더라 할 만큼 우산도에 관한 기술은 가지각색이다.[2]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의 땅이었다.'라는 최초 기록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이 기술도 안용복 사건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우산국은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에 동북방 여진족들의 원정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2세기 즈음에 이르러 끝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울진군 지역에 이주했다. 웬 뜬금없는 여진족인가 싶을 수 있지만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함경도에서 살고 있던걸로 추정되고 함경도 또는 연해주에서 동남쪽으로 항해하면 울릉도와 독도가 그렇게 멀지는 않으며, 이 11세기 초반에는 여진족 해적이 일본 서부 일부 지방까지 가서 약탈을 할 정도로 극성이었음이 일본 기록에서도 교차검증되는데 그 사이에 끼인 우산국은 충분히 여진족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2.2. 12세기-14세기:무릉도와 우산도[편집]


우산국이 사라진 뒤 고려에서는 의종이나 최충헌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또 국가의 통제를 피해 울릉도로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극성을 부리는 왜구에 맞서고, 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섬 지역에 대한 인구 쇄출(刷出)을 단행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태종은 1425년(세종 7)에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고 울릉도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조처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에는 한 섬인 것처럼 인식하던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가 짝을 이루어 기록되기 시작한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3번째 기사


쇄출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가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1번째 기사


바로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에 2차 쇄출, 1423년(세종 7)에 3차 쇄출, 1438년(세종 20)에 4차 쇄출이 거듭되었고, 이와 더불어 요도(蓼島)라는 섬의 존재를 탐문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차츰 동해에 있는 섬들의 존재를 실사해나가게 되었다. 더욱이 본토로 쇄출된 울릉도민에 의해 울릉도에 대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우산도는 무릉도와는 서로 다른 두 섬으로 개념이 분리되어 나갔다. 여기에 무릉도가 오늘날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3] 우산도는 울릉도 외의 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쇄출을 집행하는 사람의 직함도 1차 쇄출의 '무릉등처안무사'에서 우산도와 무릉도가 나열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확장되었고, 3차 쇄출 이후에는 이 가운데 무릉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4차 쇄출에서는 다시 '무릉도순심경차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을 겪으면서 확장된 지리적 지식은 이후 편찬된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여기에 울릉도가 있다.(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무릉이라고 하고, 일설에 우릉이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지증왕 12년에 항복해 왔다. ……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2섬인데,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김종서 등, 『고려사』「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1년

문제는 고려사는 우산도-울릉도 1도설을 본설로 채택하고 2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울릉도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지증왕 12년 이사부가……)

김종서·정인지 등,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4년

여기서는 2도설을 본설로 하고 1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가와카미 겐조는 고려사를 잘못 베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우산도가 독도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 중이다, 다름아닌 우산도에 대한 묘사 때문인데, 우산도의 묘사를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되어 있고, 당시 울릉도는 공도, 즉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기 때문이다. 90km라는 먼 거리를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인지도 의문이다.[4]

또한 이후 우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에 걸쳐 등장하는 일이 굉장히 적은데, 당장 조선왕조 실록을 펼쳐서 우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그리고 고종1건이 나온다. 그 사이 실록에 등장한 적이 아예 없다는 뜻. 이 원인 해당 실록에 등장한 이유인 울릉도의 쇄출정책과 공도정책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 말인 즉슨 조선 조정이 우산도라는 존재를 실감하지 않거나 아예 까먹은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공도 정책 이후 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가 전부인데[5], 만약 중요도가 있었다면 우산도 또한 올라왔겠지만 중요도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을 끈 건지 아예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사이 조선이 이 섬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2.2.1. 세종실록지리지[편집]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 도호부 울진현》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김종서로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울릉도, 독도라는 두 섬을 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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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울릉도는 안개가 잦고 삼림에 덮여 있으므로 오르기 힘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는 무려 984m고, 울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나리분지만 해도 250m에 달한다. 게다가 고려사엔 1157년에 이미 명주도감창 김유립이 울릉도 정상에서 사방을 답사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5월 병자일

○ 동해 가운데 있는 우릉도(羽陵島)는 옛날 주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땅이 넓고 기름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을 왕이 듣자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해 살펴보게 했다.[6]

김유립이 돌아와서, 땅이 바위투성이라 백성들이 거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백성을 이주시킬 계획을 포기했다.

王聞東海中, 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영(令)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바로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렀는데,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하며 땅은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1년(510)에 신라에 투항했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방물(方物: 특산물)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거에도 주·현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 만하다는 말을 왕이 듣고는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살펴 보게 했는데 김유립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으며, 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8,000여 보 갈 수 있는 넓이입니다. 촌락의 터가 7곳이고, 석불(石佛), 철종(鐵鍾), 석탑(石塔)이 남아 있습니다. 시호(柴胡), 호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결국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일설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 권58, 지제12, 지리(地理)3, 동계, 울진현 ##


다만 위의 주장과 반대되는 증거도 많은데, 대표적인게 다름아닌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이다.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 33권 ,17년 2월 5일 임술 3번째 기사


현재 독도의 인구는 12명이다. 식수와 먹을 것도 풍부하지 못한 독도의 자연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우산도를 86명이 사는 거대한 섬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무리가 있다.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33권,17년 2월8일 을축 1번째 기사


동일하게 독도라면 사람이 살지 않아야 할 우산도에서 주민들을 쇄출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이 아뢰기를,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사오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沿海)의 사면에 석벽(石壁)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청컨대,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 6월 20일 갑신 6번째 기사


여기선 더 가관인데, 독도는 당연히 돌섬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은 그런 섬이 아니란 뜻이다.

때문에 우산이 가리키는 장소가 죽도라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완전히 억지 주장은 아닌 것이 위에 있는 글을 해당 문서가 적혀 있는 "울진군", 즉 본토에서 바라보면 울릉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설에 한 섬으로 취급하는 것, 청명한 날에는 보인다는 묘사와 위에 적은 우산도와의 혼란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2.3. 15세기: 삼봉도 오류[편집]


삼봉도라는 이름은 독도가 한국에서 불려온 여러 이름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전에 전교(傳敎)를 받으니, ‘강원도의 해중에 삼봉도(三峯島)가 있는데, 오는 임진년169) 봄에 사람을 보내어 찾겠으니, 그 절목(節目)을 상의하여 아뢰라.’ 하였으므로, 이제 행해야 할 사건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 『성종실록』 3년 2월 3일 경오 3번째 기사


세종때(2건)처음 언급된 삼봉도는 동해에 있는 섬으로써 부역을 피한 이들이 도망친 곳으로 묘사되었다. 이 문제는 성종때 재 부각되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건수만 42건으로, 총 45번 등장한 삼봉도 서술의 90%이상을 차지한다.[7]

이때 삼봉도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계손(李繼孫)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아뢴 바를 다 알았다. 그 삼봉도(三峯島)에 투왕(投往)한 자는 부세(賦稅)를 피하고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정범(情犯)807) 이 심히 악하니...

─ 『성종실록』 1년 12월 11일 갑인 4번째 기사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정난종(鄭蘭宗)에게 유시하기를,

"김한경(金漢京)의 말이, ‘경흥(慶興)에서는 청명(淸明)한 날이면 삼봉도(三峯島)를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會寧)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이레 밤낮을 항해하여 도착하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 『성종실록』 4년 1월 9일 경자 2번째 기사


양강도 경흥은 지금의 함경북도에 위치한 경흥군이다. 당연히 근처 동해 바다에 보이는 섬은 없다. 독도에는 당연히 사람도 못 산다.

함경북도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 삼봉도는 홋카이도사할린 섬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근대 지리학 발전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종종 서술되던, 상상의 섬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때문에 묘사되는 바에서도 삼봉도는 천여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성종이 경각심을 가질만도 하다. 때문에 삼봉도를 담당하는 직책이 만들어지고 삼봉도는 지속적인 탐사를 보내었으나 당연히 항로를 이상하게 잡아서 보낸 선박 중 대부분은 그냥 회항하거나 표류했다.

그러다 결국 섬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영흥(永興) 사람 김자주(金自周)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삼봉도(三峯島)를 찾는 일로써, 김자주와 송영로(宋永老), 그리고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흥(金興)·김한경(金漢京)·이오을망(李吾乙亡)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들여보냈는데, 지난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巖石)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 『성종실록』 7년 10월 27일 정유 2번째 기사


김한경과 그의 일당이 이 섬을 발견했다는 묘사가 적혀있다. 여기 있는 이 섬의 묘사가 사실일 경우, 해당 섬은 독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많은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인형 묘사가 일광욕을 즐기는 강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근데 문제는 이 주장은 후에 조정에서 다시는 섬을 찾지 못해 의심을 사고[8], 해당 발견자를 재수색시 찾지 못하면 처형하자는 기록을 거의 마지막으로[9] 이후 실록에는 등장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이 진실이더라면 한국은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다름 아닌 기록에 있는 독도를 삼봉도라 주장했고, 이후 재수색해도 동일한 섬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독도에 대해 추가적인 기록이 없으며 삼봉도를 독도라 착각, 아니면 재발견할 정도로 독도의 인식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삼봉도가 거짓 증언이었을 경우에도, 그 방면으로 가면 독도가 나오는데 독도를 지나갔다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미루어, 아예 독도 근처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였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삼봉도를 발견한 것이 조선 인식에 도움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짓된 발견으로 간주되어 계획 자체를 취소하기도 했고, 이후 삼봉도로 군사를 보내서 실질적인 영유권 행사 같은 활동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해봤자 "발견"이상의 평을 주기 어렵다. 한 마디로, 삼봉도는 조선시대 독도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아예 조선이 독도를 까먹었거나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방증사례인 셈이 된다.


2.4. 17세기: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그리고 안용복[편집]


17세기는 일본의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독자적으로 발견, 확대되는 시기이다. 1618년(또는 1625년),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는 동해 한가운데 있는 다케시마[10]라는 섬에 도항하기를 요청했고, 허가를 받아 운행을 하게 되었다.

호키국(伯耆国)[11]

요나고(米子)에서 몇 해 전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도항했다고 합니다. 이번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와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의 도항 청원을 장군님께 여쭙자 승인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어 도항 허가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 1618년


문서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이미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발견한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덩달아 울릉도로 가는 길에는 자그마한 돌섬도 하나 있어, 그곳도 왕래하게 되었다.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주회 20정(町) 정도의 작은 섬이 있는데 초목이 없는 바위산으로 24~25년전에 아베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님의 중개로 하사하여 도항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강치의 기름을 조금 얻고 있습니다.

─1681년(엔포 9년) 5월 오오야(大谷) 가에 숙박한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큐에몬 가쓰노부(九右衛門勝信)의 답변


이때 도항을 한 기간은 안용복에 의해 저지된 1696년까지로, 일본은 최소한 71년, 최대 78년이나 [12]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며 고기와 전복을 잡고 나무를 베어낸 것이다.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소위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을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은주)까지로 한다.

─ 『은주시청합기』「국대기(國代記)」,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13]

, 1667년


일본 측의 독도에 관한 최초의 직접 기록은 은주시청합기(1667년)으로 죽도-송도를 "이 사람이 살지 않는 두 섬에서 고려를 바라보는 것은 운주(이즈모국)에서 은주(오키국)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隠州)"로 기술하여 울릉도-독도 두 섬을 일본 밖의 섬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은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간 울릉도-독도 사이 명칭 혼란을 겪던 도중, 과거 울릉도의 이름으로 사용한 '죽도(竹島)'를 독도의 명칭으로 확정하고, 독도의 명칭이었던 '송도(松島)'를 울릉도의 명칭으로 규정함으로써 두 섬이 부속관계임을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 섬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냥 고기 잡으러 가는, 일본 밖의 무인도 정도로 취급한 듯 보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해서 조선인들의 울릉도 민간출입이 엄금되어, 근처 다른 국가들이 왔다 가지 않았기 때문. 덕분에 오야, 무라카와 가는 울릉도를 일터로 삼았으며, 본의 아니게 조선땅을 무단점거해버리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울릉도는 이미 조선의 영토로 규정되어 있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에서 발급한 다케시마 도해 면허는 처음부터 조선 측의 아무런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두 국가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태가 끝난 것은 1693년, 울릉도로 일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일본인들과 분쟁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오야 가문 사람들은[14] 조선인들의 난입(?)때문에 전복을 잡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인들에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조선인대로, 일본인들은 일본인대로 "여긴 우리땅이야"를 시전하며 분쟁이 발생하였고, 끝에 말미암아 오야 가는 조선인 2명을 일본에 데리고 가 일본 정부에 항의를 하게 되었다. 상술했듯 조선은 공도정책으로 민간출입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오히려 일본이 적극적인 반발을 실시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 때, 잡혀간 사람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안용복이다. 추가적인 정보에 대해선 안용복 문서 참조.

이 때문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울릉도/다케시마 도해를 두고 외교적으로 교섭하였는데, 조선의 답변이 가관이다.

“우리나라가 동해안의 어민에게 외양(外洋)에 나갈 수 없도록 한 것은 비록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 울릉도(鬱陵島)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에 있어서랴. 이제 이 고깃배가 귀국의 경지인 죽도(竹島)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아 보내오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이웃 나라 사이의 친선의 우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바다백성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으니 물에 표류해 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만,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혼잡하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법률로써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의거해서 죄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 규칙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하게 할 것이다.”


조선 조정은 죽도를 울릉도와 다른 섬으로 인식 한 것이다.

그러다 협상은 부결되었다.

마침내 1696년 6월, 안용복[15]은 사람을 모아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16]에서 일본인을 내쫓은 뒤, 내처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슈 번주와 담판을 지었다.

그런데 정작 에도 막부는 쟁계 사건의 여파로 쇼군이 직접 나서서, 이미 이해 1월에 다케시마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고 도해를 금지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게 이듬해인 1697년이 되어서야 조선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마쓰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郞)가 이나바(因幡), 호키(伯耆)를 다스리던 때에 청원이 있었던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앞으로 금지를 분부하는 취지의 상의가 있으므로 이해하길 바란다.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1696년


때문에 호키 주의 번주는 두 섬이 이미 조선의 영토로 인정되었음을 재차 확인하고,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를 엄금할 것을 약속한 뒤 안용복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길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마쓰시마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로 돌아갈 것이다."하므로, "송도는 자산도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하였습니다.

─ 이광좌(李光佐) 등, 『숙종실록』 22년(1696) 9월 25일

─ 이광좌(李光佐) 등, 『숙종실록』 22년(1696) 9월 25일

 

조선의 팔도: 경기도 강원도(이 도 안에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있다)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17]

─ 나카세 단에몬(中瀬弾右衛門) • 야마모토 세이에몬(山本清右衛門) 『겐로쿠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 1696년


하지만 안용복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투옥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취지가 어떻든 간에 허가 없는 외국 출입은 밀수반란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막중한 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직까지 사칭했으니 아무리 공이 크다고 해도 뒤탈이 안 생길 수는 없는 일. 법대로라면 사형이지만, 당시 영의정 남구만[18]을 비롯한 이들이 안용복의 활동이 가진 의미와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유배형으로 그쳤다. 그나마도 안용복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석방된 것이다.


2.4.1. 은주시청합기[편집]


은주시청합기는 두 가문이 울릉도를 왕래하던 중인 1667년, 은주(隱州, 오키국) 지방 번사 사이토 호센이 남긴 책인데, 독도를 직접 기록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외교 공문에 이 저서를 언급하며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이른바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을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19]

까지로 한다.

戌亥間行二日一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俗言磯竹島多竹魚海鹿 按神書所謂五十猛歟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隱州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 출처출처


로 오히려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20]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21] 현재 일본 외무성의 독도 사이트에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선박의 항해 거리라는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하며, 위의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조선시대 문헌과 다르게 은주시정합기는 첫 객관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온 첫 문헌이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셈이다.


2.4.2. 안용복 사건 진술의 신빙성은?[편집]


안용복의 업적이 영유권 분쟁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긴 일본 측은 다양한 방법으로 안용복의 진술과 행적을 부정해 왔다.

1. 안용복은 범죄자이므로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

안용복은 노비 출신 어부로서 불법 도항과 관리 사칭의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울릉도 쟁계 이후 울릉도-독도의 영유권 확보에 공이 있음이 인정되어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안용복을 범죄자로 취급한 바로 그 조선 정부에 의하여, 또한 일본에서의 문서와의 교차검증을 통해서도 그의 진술은 신빙성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안용복이 범죄자임을 탓하려면 '안용복은 범죄자이나, 진술은 믿을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일관성 있는 논리이다.

2. 안용복은 막부의 서계를 받은 바 없다 論

안용복이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다가 대마도주에게 빼앗긴 '울릉도-독도는 조선령'이라는 서계는 안용복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다는 이 주장은 어린이용 위인전 정도나 제외하고 한국 측 연구자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조선 정부도 믿지 않았다.

안용복을 심문한 유집일(兪集一)은

"근년 동래에 봉사(奉使)했을 때 안용복을 추문(推問)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호키 주(伯耆州)에서 준 은화(銀貨)와 문서를 쓰시마 사람이 겁탈했다.” 했는데, 이번 그가 호키 주에 정문(呈文)한 데에는, “쓰시마 사람이 2천 금(金)으로 나를 속(贖)바치고 본국(本國)에 내보낸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쓰시마는 본디 속은(贖銀)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壬戌約條)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竹島)가 호키주의 식읍(食邑)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했다 해서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용복의 정문 가운데는 울릉도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覈査)해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3. 안용복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마주친 적 없다 論

안용복의 1696년 왜인을 만났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의 신빙성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부정하였으나 1월 28일에 이미 막부가 도해 금지령을 내렸으므로, 그해 5월에 안용복 일행이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났다는 진술은 허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어업 중이던 일본의 두 가문에게 도해 금지 명령이 전달된 것은 그해 8월 1일의 일이라는 것을 나이토 세이츄 교수가 발견한 당시 돗토리번 공식 일지인 히카에쵸(控帳)에 기록됨으로써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2005년 겐로쿠 각서에는 자산도=송도가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안용복이 송도에 오게 된 이유를 '영주에게 소송하기 위해서'라고만 쓰여 있지, 왜인이 또 울릉도에 어업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이케우치 사토시를 비롯한 일본 학자 및 일부 한국 독도 연구가들도 안용복의 진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22] 이는 여전히 한, 일 간 논쟁 중이다.

다만 안용복이 "일본의 '마쓰시마'가 곧 자산도로 조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실제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을 만났냐와는 것과 별개로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자산도'를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라고 명확히 기록했는 데다, 일본 문서(겐로쿠 각서)에서도 확인되었으므로 전근대 영유권 주장에서 한국 측이 한발 앞서 나가게 되었다.

겐로쿠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カン(ヲン道: 此道ノ中竹島松島有之.
* 강원도: 이 도 안에 죽도와 송도가 있다.

安龍福申候ハ竹嶋ヲ竹ノ嶋と申朝鮮國江原道東萊府ノ内ニ鬱陵嶋と申島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則八道ノ圖ニ記之所持候
* 안용복이 말하길, '다케시마'를 다케노시마라고도 한다.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울릉도라고 하는 섬이 있으며, 이를 다케노시마라고 하는 까닭에라고 말해, 팔도지도에 기록해 이를 소지하고 있다.
松嶋ハ右同道之內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圖ニ記申候 참조

  • '마쓰시마'는 상기한 도(道) 중에 자산이라고 하는 섬이며, 이를 '마쓰시마'라고 하는 까닭에 이도 팔도지도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다만 해당 문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해당 담화 내용을 적은 문서라, 국가가 이 지역을 직접 관리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그러나 국가가 아닌 민간적 차원에서라도 독도가 한국의 땅임을 주장하려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은 당시 조선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의의를 지닌다.


2.5.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울릉도로의 지속적인 재파견과 독도의 인식 확대[편집]


1차 안용복 사건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대한 권리를 확정하기 위해 장한상(張漢相)을 삼척첨사(僉使)로 울릉도에 파견하고, 이후로도 3년에 한 번 울릉도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산도가 독도로 확고히 비정된 것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이때 장한상은 실제로 울릉도 성인봉에서 독도를 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것을 단지 '한 섬'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우산도라고 집어서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 개이고 구름 걷힌 날, 산에 들어가 중봉에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마주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봉입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물빛과 하늘빛이 같았습니다.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

 

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23]

 
다만 장한상이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고 기술하여 동남쪽의 '한 섬'인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명시한 것은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오히려 장한상의 보고가 기존의 울릉도 인식과 다른 점이 많았기에 혹자는 장한상이 가 본 데가 진짜 울릉도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장한상의 탐사 결과는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정보를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에서는 울릉도 성인봉 정상에서 독도를 육안만으로는 볼 수 없고 망원경 등 광학기기로 줌인을 해서야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장한상이 본 '섬'은 사실 '수평선에 걸린 구름을 섬으로 착각한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이후 18세기까지도, 조선에서 만들어진 울릉도 지도는 여전히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었다. 특히 1711년에 삼척영장(營將) 박석창(朴錫昌)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인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에는 그 동쪽 한가운데 있는 우산도에 '대나무 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여기서의 우산도는 독도보다는 지금의 죽도로 추정되기도 한다.[24] 하지만 만기요람을 비롯한 문헌에서는 일본의 마쓰시마(松島)가 곧 우산도로 조선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어서, 일본인들이 부르는 마쓰시마는 곧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못박아두고 있다.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라고 하였다.

─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 등, 『만기요람』「군정(軍政)편 4」 해방(海防) 동해(東海)조, 1808년

 
즉 조선이 일본이 마쓰시마라고 부르는 섬은 우리 울릉도에 부속된 것으로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기고, 독도에 대해서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탈이라면 탈. 하지만 전근대에 해양국가도 아닌 조선으로서는 여기까지만 해도 장한 것이다. 당장 일본만 해도 정확한 해양 측량이 불가능해 저 위에서 보듯이 '배타고 북서쪽으로 2일' 수준으로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25]


3. 근현대[편집]


근대 국제법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더라도,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상시 육안관측된다는 물리적 사실(기사, 사진)은 '지속적 발견'에 해당하는 영유권원으로 인정받고 있고, 따로 '실효 지배'한 근거를 갖추지 않더라도 6세기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가 130km(육지-울릉도 간 최소 거리) 이상 항해한 기록이 그보다 적은 90km(울릉도-독도 간 거리) 떨어진 섬에 대한 '실효 지배'의 물리적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어, 혹시 있을지 모를 국제법정에서의 영유권 분쟁 재판이 이루어 질 시 '고대 우산국의 영유권에 독도가 포함되는가'의 사항이 대한민국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상당하다.


3.1. 19세기: 서양의 측량과 아르고노트 오류[편집]


파일:일본 1806년 지도.jpg
야마무라 사이스케의 1806년 지도 『화이일람도(華夷一覧図)』.
'다케시마(죽도)'라 표기된 섬이 '마츠시마(송도)'보다 서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789년에도 영국의 아르고노트 호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아르고노트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측량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로 실제 울릉도의 위치에서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실수로 인해 졸지에 서양의 지도에는 울릉도[26]와 더불어, 존재하지도 않는 아르고노트 섬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840년에 독일인 지볼트가 이를 기반으로 지도를 제작하면서 일본의 명칭을 받아들여 서쪽의 아르고노트 섬을 다케시마, 동쪽의 다줄레 섬을 마쓰시마로 비정하면서 이 문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로써 독도를 가리키던 '마쓰시마(松島)'라는 이름은 울릉도로 옮겨가고, 정작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은 가상의 섬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9년 뒤인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Le Liancourt)가 독도의 바위로 인해 난파당한 뒤로, 독도는 서양권에 '리앙쿠르 락스(암초)(Liancourt Rocks)'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이름이 현재까지 서양권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름인데, 서양권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건 아니고 보통 한일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이 섬을 언급하려 할 때 리앙쿠르라는 이름을 편의상 사용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rocks는 암초(岩礁), 그중에서 수상암으로 섬보다 작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해면 위로 튀어나온 바위를 의미한다. 일본은 이러한 정보를 받아들여 'Liancourt Rocks'를 리얀코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ド 列岩)이라 번역해 사용하기도 하고, '리앙쿠르'의 일본화된 발음으로 '랸코(リャンコ), 란코(ランコ), 얀코(ヤンコ)'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의 아르고너트호가 울릉도 측량 과정에서 위도경도 표기를 잘못 기재하고, 서양에서는 이걸 다시 일본 명칭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다줄레(울릉도)를 '마쓰시마', 서쪽의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이것이 일본 해군성에 역수입되었다. 그런데 해군성을 제외한 원래 메이지 정부와 육군성은 여전히 에도 막부의 인식을 이어받아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 부르고 있었다.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섬의 명칭에 혼동이 생겨 다케시마는 울릉도 북서에 위치한 실존하지 않는 섬을, 마쓰시마가 울릉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나아가 언제부턴가 독도를 '리얀코' 또는 '양코'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독도의 위치에 관한 정보도 정확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이 해도를 명확히 그려 독도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18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민간에서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1901년 해도에 없는 미지의 섬을 발견했다는 소동이 일었던 것이 그 좋은 예시이다. 1901년의 일본 정부와 민간은 그들이 '양코'라고 부르는 동해 상의 섬이 대한제국의 영토에 속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하였을 뿐이다.

이어서 1854년과 1855년에 각각 러시아의 올리부차 호와 영국의 호네트 호에 의해 독도가 정확히 측량되고 아르고노트 섬의 존재가 부정되면서 이전의 잘못된 지리 지식은 완전히 바로잡혔지만, 그럼에도 지볼트의 지도가 역수입된 일본에서는 서구의 해안 측량 결과를 맹신한 나머지 이러한 잘못된 지리적 지식에 기반한 지도가 여럿 만들어져 유포되었다. 아직도 일본측에서는 상술한 잘못된 지도를 참고 했기 때문에 아르고노트는 허상의 섬이며 아르고노트=다줄레=울룽도이니깐 후술할 태정관지령의 '다케시마 외 1도(外一島)'을 두개의 실체가 아닌 울릉도 한개로만 보기 때문에 울릉도만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일본측 주장: 링크

하지만 에도 막부의 후신으로 성립된 일본 메이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전까지와 같은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 부르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 조선을 정탐한 보고서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에는 보고서의 한 항목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조선에 부속된 전모를 보고하고 있어 당시까지만 해도 마쓰시마 즉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되는 추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1876년 메이지 정부가 전 일본의 근대적 지도를 편찬하면서 내린 결정도 주목할 만하다.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으로부터 다케시마와 다른 한 섬, 즉 마쓰시마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조사 결과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짓고 이듬해 3월 17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았다. 이로서 일본은 근대적 국가로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도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외의 땅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별지 내무성 품의 :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1도(外一島) [27]

지적 편찬의 건. 위는 겐로쿠 5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구 정부가 해당 국가와 왕복한 결과 마침내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들어, 상신한 품의의 취지를 듣고 다음과 같이 지령을 작성함이 가한지 이에 품의합니다.

지령안

품의한 취지의 다케시마 외 1도(外一島) 건에 대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심득할 것.

이와쿠라 도모미 등, 「내무성질의서 및 태정관지시문서」, 1877년


다음으로 한 섬이 있어 마쓰시마라 부른다. 둘레 30정 정도, 다케시마와 동일선로에 있다.

─ 「일본 내무성 부속문서」, 1876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이 허상의 아르고노트의 실체를 알지 못했고 이 오류를 그대로 답습 했다고 한다. 후에 Daglet와 Argonaut는 중복된 실체이며 동일한 실체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울릉도 외 1도(外一島)는 사실상 울릉도 한 섬만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지침이라고 눈가리고 아웅식 억지를 부리고 있다.
허상의 섬 Argonaut는 1811년부터 꾸준히 존재를 의심 받았고 1854년 러시아의 정말측량과 계측 결과 오류는 수정 되었고 그 후에 1877년에 태정관문서가 작성 되었으니, 서양의 문서를 참고 해서 두개의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문서가 작성 되었다는 논리는 궤변이다. 또한 태정관지령에 첨부된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는 정밀한 계측을 통해 만들어진 지도이므로, 직접 답사를 하지 않으면 제작할수 없는 지도이므로 서구의 잘못된 지도를 참고해 문서를 작성 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측은 기죽도약도는 시마네현에서 정부측에 제출한 약도로써 일본 정부와는 무관하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링크

하지만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마쓰시마,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는 기존의 인식을 이어나간 데 반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에서 보이듯이 거의 '일본 내부의 국가'에 가깝던 일본 해군성에서는 서양 측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울릉도는 마쓰시마, 독도는 리앙꼬루도 열암이라 불러댔고 이러한 명칭은 『조선국동해안약기』를 시작으로 『조선수로지』와 『환영수로지』 등 해군성의 지속적인 수로지 보급으로 차츰 일반화되어갔다.[28]

일본 정부측 기록
서양 및 일본 해군측 기록
울릉도 쟁계 사건(일-에도 막부) 1696

마쓰시마: 독도
다케시마: 울릉도

부솔 호 측량(프) 1787
다줄레: 울릉도
아르고노트 호 측량(영) 1789
다줄레: 울릉도
아르고노트: X
지볼트 지도 제작(독) 1840
다줄레→마쓰시마: 울릉도
아르고노트→다케시마: X
리앙쿠르 호 측량(프) 1849
리앙쿠르 바위: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다케시마: X
팔라다 호 측량(러) 1854
리앙쿠르 바위: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다케시마: X→삭제
리트 지도 제작(?) 1873
리앙쿠르 바위: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메이지 유신(일-메이지 정부) 1876

마쓰시마: 독도
다케시마: 울릉도

아마기 호 측량(일-해군성) 1878
리앙꼬루도 열암: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다케시마: 죽도
환영수로지 제작(일-해군성) 1880
리앙꼬루도 열암: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일-메이지 정부) 1905
다케시마: 독도
마쓰시마: 울릉도


3.2.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울릉도의 재개척과 '독도'의 탄생[편집]


한편 19세기 에도 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도해 금지령의 실행이 느슨해지자, 다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가 활발해져 어채와 벌목 등이 공공연히 자행되면서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를 적발한 조선 조정은 1881년 일본 정부에 서계를 보내어 항의하는 한편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하여 현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당시 고종과 이규원의 대담 내용은 조선 조정이 울릉도와 더불어 그에 부속된 섬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상이 이르기를

"울릉도는 근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시로 왕래하며 제멋대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는 폐단이 있다. 그리고 송죽도와 우산도가 울릉도 곁에 있다는데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또 어떤 물건이 있는지의 여부를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한다. 이번에 그대가 가는 것은 특별히 가려서 보내는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곳에 읍을 설치할 계획이니 반드시 도형과 별단으로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마땅히 힘껏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우산도는 곧 울릉도인데 우산은 옛적 국도의 이름이고, 송죽도는 곧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의 거리가 삼수십 리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것은 단향과 간죽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혹은 우산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송죽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또 송죽도라고 부르는데 우산도와 함께 세 섬이 되고, 통틀어 울릉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곳 형편을 전부 검찰하도록 하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돌아가면서 수색하였는데, 모두 소홀하게 외면만 탐색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초래한 것이니,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깊숙이 들어가서 검찰하겠습니다. 간혹 송도와 죽도라고 부르는 것은 울릉도의 동쪽에 있는데, 이는 송죽도 이외에 별도로 송도와 죽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1882) 4월 7일[29]

고종
울릉도/우산도/송죽도
이규원
울릉도=우산도/송죽도
고종
울릉도/우산도=송죽도
울릉도 3도(우산도/송·죽도?)
이규원
울릉도=우산도/송죽도=송도=죽도

이규원은 왕명에 따라 맑은 날에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으나 우산도를 찾지 못하고 울릉도를 우산도라 하는 것은 제주도를 탐라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규원이 바친 「울릉도외도」에는 우산도가 표시되지 않고 죽도가 그려져있다. 그러나 울릉도에 사람들을 이주시킨 이후에는 독도가 울릉도의 가시거리 내에 있기 때문에 독도를 인식했고 당시 울릉도에 이주한 전라도인들이 독도(돌섬이라는 뜻)라고 명명하였다.

여튼 이처럼 이규원이 울릉도를 탐색하고 돌아온 뒤, 조선 정부는 공식적으로 쇄출정책을 폐기하고 울릉도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해 1883년에는 개화파의 영수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임명해 사람을 이주시키고 울릉도의 일본인들을 쇄환하였다. 하지만 울릉도에 일본인들의 침탈이 거듭되는데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에 애를 먹던 대한제국 정부는 마침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정식 편제하는 한편, 석도를 죽도와 함께 울릉도의 행정구역에 소속됨을 분명히 규정하였다.[30] 한국에서는 이 석도를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울릉도에 인접한 관음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하지만 이윽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주권은 급속도로 일본에 잠식되어갔다. 일본 정부는 한일의정서를 통해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음에도 동해 한가운데 자리한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여, 1905년에는 일전에 있었던 나카이 요사부로의 청원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1월 28일 내각 결의가 이루어져 2월 22일에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발효되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31]

내무 당국자에 따르면, 이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령일지도 모르는 일개 불모의 암초를, 여러 외국에게, 우리의 나라에게 한국 병탄의 야심이 있다는 의혹을 키울 것이다. 이익이 지극히 작은 데 반하여 상황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아무리 설득해도 출원이 끝내 각하될 형편이었다. 이렇게 좌절할 수는 없어서, 즉시 외무성으로 달려가서 당시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를 만나 자세히 설명하였다.

나카이(1910), 《사업경영개요》 中.


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영토의 변화에 관련된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령으로 의심되는 섬을 강탈함으로써 발생할 열강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 지도부의 뜻에 따라 언론에 공시되지 않았고, 독도의 군사 망루 또한 비밀리에 설치되어 대한제국 정부는 다시 이듬해인 1906년 3월 28일이 되어서야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일본의 독도 편입 사실을 접한 대한제국에서는 참정대신이자 을사오적의 일원인 박제순이 "전속무근(全屬無根)", 내부에서 "필무기리(必無其理)"라 지령하며 그 정당성을 부정하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관련 기사를 전재하였으며, 동시대 황현은 저서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울릉도 소속의 독도가 침탈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분개하는 뜻을 보였지만, 이미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있었으므로 이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시마네 현 고시의 '무주지 주장'이 있으나, 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라는 이름으로[32] 독도를 근대적 영토에 편입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해당 칙령이 가리키는 "석도"가 독도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석도=독도'인지가 쟁점인데..

'독도'라는 명칭의 섬이 문헌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04년 9월 25일 일본 해군함 니이다카(新高)의 <행동일지(行動日誌)>에서이다. 동 일지는 "리안코르드 바위를 실제로 본 일본인으로부터 청취한 정보"라 하면서 "조선인은 이를 獨島라고 쓴다"고 했다. '독도'가 다시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06년 4월의 일이다. 동년 4월 4일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도사(島司) 일행이 울릉도를 찾아와 독도가 일본령에 편입되었음을 알린 다음, 울릉도의 인구와 산업에 관해 묻고 돌아갔다. 이에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이 강원도관찰사 이명래(李明来)에게 "본군에 소속한 獨島가 바깥 바다 100여 리에 있는데, 지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이렇게 1904~1906년이면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맑은 날 아침이면 동쪽 바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그 바위섬을 한자로 '獨島'라고 부르고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독도라는 이름은 그 어원이 현재의 돌(石)에 있다는 것과 최소 1895년 이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사용되어 온 고유 명칭임을 민국일보 1962년 3월 19일 김윤삼 翁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한일 사이에 교차 증명된다.

또한 1899년 일본 해군 발행 조선수로지 전라남도 소안항 조에 석도(石島)의 발음을 'トヽクソム(토토쿠소무=>독섬)'로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현재의 ‘돌’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이전의 ‘돍’으로 지역차를 두고 발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니타카 호와 조우한 한인이 이를 한자 独으로 표기해 일본인들에게 알려 주었고, 이 표기를 1906년 오키섬의 일본 행정관리들이 울릉도에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사용하고, 심흥택이 일본인들이 사용한 명칭을 그대로 공식문서에 옮겨 적으면서 독도의 한자 표기로 굳어지게 된다.

다만 울릉도민들은 1950년이 넘어서까지 '독섬'이라는 한자표기 이전의 고유발음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대한제국은 1906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시도를 뒤늦게 전해받고 독도 점거에 대해서도 항의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준 식민지로 접어든 상태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여 조선총독부 치하로 파악하였고, 그 이전부터 대한제국은 1901년 9월 내부대신 이건하의 울릉도 관할 문서, 1902년 4월 내부의 ‘울도군절목’[33] 문서 등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즉 행정 관할을 구체적으로 실행했다.

울도군절목 내용 중 출입하는 화물은 독도에서 잡은 바다사자를 포함한 일본인의 수출화물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다. "울릉도 수출품목에는 독도에서 잡은 바다사자가 포함되어 있고, 일본인들은 이 수출품에도 수출세를 납부했다. 일본인들이 수출세를 납부했다는 기록은 일본 외무성 기록에 보이며, 울릉도의 바다사자 수출통계 역시외무성 기록에 보인다. 울릉도의 일본인들이 독도 바다사자에 대한 세금을 울도군에 납부했다는 것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울릉도의 산물에 대해서만 세금을 냈을 것이다. 당시 수출세는 물품에 따라 세금을 내는 이른바 ‘종가세’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竹島問題100問100答』에 대한비판적 검토,그리고 우리의 대응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독도 주소는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으며, 영유권을 보유하지 못한 일본 또한 그 주소를 오키섬에 부속(島根県 隠岐郡 隠岐の島町)시킴으로써 독도가 사람들의 인식속에서 자연스럽게 모섬의 부속섬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독도는 다시 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근현대 일본 공문서의 독도 관련 기록

3.3. 20세기: 일제의 패망과 독도의 행방[편집]


1900년의 울릉도의 인구는 1,400여 명이었다. 조선인이 1000명, 일본인이 400명이었다. 조선인의 주요 생업은 농업이었다. 울도군에 대한 대한제국의 기본 관심도 농업국가의 그것이었다. 대한제국의 내지부가 감자, 보리, 밀의 연간 생산량을 소상하게 보고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의 주요 업종은 어업이었다. 일본 어민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전복과 미역을 채취하여 부산항으로 출하하였다. 조선인도 어업에 종사했는데, 독자적인 어선이 없었기에 주로 일본인에 고용된 형태였다. 1903년부터는 독도 인근에 풍부하게 서식하는 강치를 잡는 강치잡이가 수익성이 높은 사업으로 부상하였다. 그 강치잡이가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계기였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의 어부 나가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에 의해 제공되었다. 1903년 6월 그는 거금을 들여 독도에 강치잡이 시설을 하였다. 그런데 다른 일본 어민과의 경쟁이 너무 심하여 이윤을 낼 수 없었으며,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강치 자원마저 고갈될 형편이었다. 당시의 그는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고 믿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에다가 독도에서 강치를 잡는 사업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고자 했다. 그는 그럴 계획으로 도쿄로 올라와 농상무성의 어느 관료와 상의하였다. 그의 소개로 농상무성 수산국장과도 면담을 했다. 나아가 그들의 소개로 해군의 수로부장과도 면담을 했다.

이들 일본의 고위 관료들은 당시 일본이 '리얀코(Liancourt)' 또는 '양코'라고 부르는 그 섬이 정말로 대한제국의 영토인지가 확실하지 않다고 조언한다. 이에 나가이는 대한제국에 특허를 청원할 당초의 계획을 접고 1년 뒤 1904년 9월 일본 농상무성에 강치잡이 특허를 출원한다. 한편, 그는 일본 내무성, 외무성, 농상무성에 리얀코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할 것을 청원한다. 이에 내무성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이 시국에 대한제국의 영토일 가능성이 있을 작고 황량한 암초 하나를 영토로 삼아 국제사회로 하여금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익이 극히 적은 반면 (앞으로 벌어질) 상황은 결코 쉽지 않다"면서 반대의견을 내지만, 외무성과 농상무성은 적극 찬성하였다.

나가이의 행동에서 보듯이 당시까지 일본 정부나 민간에서는 독도를 대한제국의 소속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부턴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일본 내각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제시한 사유는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 섬(隱岐島)으로부터 85해리에 있는 이 섬은 타국에 의해 점령된 사실이 없는 무인도로서 1903년 이래 본국인 나가이 사부로가 어사(漁舍)를 설치하고 인부를 파견하여 강치잡이를 시작하였다. 나가이가 이 섬의 영토 편입과 대하(貸下)를 출원하였기에 섬의 이름을 다케시마(竹島)로 정하고 시마네현 소속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력해진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모든 주권을 상실했지만, 그 뒤로도 일본은 지도에서 독도를 분명히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하여 조선총독부 치하에 표기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판도에서 제외하는 지령으로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를 발효함에 따라 독도는 다시 국제법상 한국의 영토가 되었다.[34]

이후 1948년, 독도는 주일미군의 폭격 장소로 지정되게 되어 폭격을 당하는데, 당시 사망자 수는 12명 정도로 보도되었으나 근래 와서는 수 백으로 보도되고 있다[35]. 다행스럽게도 근해에서의 폭격이라 독도 자체에 일어난 지반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36]

한국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맥아더 라인이 해체되자 일본 어선들이 한국쪽 해역으로 넘어와 수산 자원을 남획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회담의 주관자인 미국에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분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미 국무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독도가 어디에 있는 섬인지를 물었다. 어디에 있는 어떤 섬인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미 국무부 고위 관리인 딘 러스크는 일본의 주장을 두둔하는 러스크 서한을 한국에 보냈다. 한편 1952년 1월 대한민국 정부는 평화선을 공표하여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표되기 3달 전의 일이었다. 이후 한일 간에 본격적인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다. 정작 미국은 두 나라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 일본과의 관계가 모두 중요한 가운데 영토 분쟁이 이성과 법리의 문제라기보다 소모적인 감정 싸움과 흥분의 대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해양 주권 선언으로 그어진 평화선(平和線)을 넘어온 일본 어선과 어부를 나포했으며, 이들을 부산 일대에 강제 수용하였다.

그러나 해당 정책은 국제 조약을 반쯤 무시하는 조약이었던 탓에[37] 이 정책은 지금도 두고두고 일본이 불합리한 조약이었다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써먹는 내용이지만[38], 한국은 그 이전부터 독도에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기억하자.

거기다가 평화선이 선포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일미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어민들의 위령비가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팻말을 꽂고 가던 일본 어민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지면서[39], 강경적인 도발로 판단한 정부가 근처를 지나가는 어선들을 죄다 영토침입으로 간주, 전부 나포해버렸다. 평화선이 유지되는 동안 일본 어선 나포를 통해서만 수 천 명의 일본인이 체포되고, 접근하는 일본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기까지 사용하는 와중 44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40]

그리고 1953년 7월 6.25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고, 휴전선 이남에 있는 독도는 자연스레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3.4. 1953년-1956년: 독도의용수비대[편집]


6.25 전쟁이 휴전에 가까워질 당시 대한민국 해군경찰이 빈약하던 시기,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41]가 독도를 지켰다.


3.4.1. 일본과의 교전 및 침입 기록[편집]


이때 일본과 독도 의용 수비대는 3차례 충돌 및 교전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하였다.[42]

3년 동안 독도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과 세 차례 총격전을 벌였다(수기 98)

1954년 7월에서 동년 10월 사이는 매월 일본 순시선이 23일에서 25일 사이에 1척 내지 3척이 독도에 나타나서 세 번의 총격전이 있었고(수기 105)

제 1차 : 1954. 5.23 10:00 해상보안청 소속 “즈가루”호 격퇴

제 2차 : 1954. 8.23 08:00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 격퇴

제 3차 : 1954. 11.21 05:00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와 “헤꾸라”호 격퇴


처음 조우한 것은 독도 의용 수비대가 서도에 온 지 약 1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이 경비정은 독도에 순찰을 왔던 듯하다.

(1953년) 5월 23일, 약 150m 전방 해상에 천 톤급으로 추산되는 흰색 일본 경비정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속의 그 모습은 육안이나 쌍안경으로 보아도 차이가 없었다. 전원 전투태세를 취하고 M1소총으로 공포탄 세발을 쐈더니 '나가레데 기다까?' (표류 했느냐?)라고 확성기 소리가 났다. 한참 있다가 안개가 걷히자 일본 경비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의 태극기와 바닷가에 설치된 천막으로 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판단했던 것 같았다. 이때가 일본 경비정을 사실 최초로 본 것이다.[43]

수비대 수기 212~213 중


이후 일본은 낚싯배를 보내 불법 어로 행위를 하려다 적발된 적도 있었다.

1954.5.28 오전 3시경 일본 어업시험선인 “다이센”호가 독도에 정박하여 하선하려고 하는 것을 목격한 정원도, 이규현, 하자진, 양봉진 등 4명이 전마선을 타고 가서 즉시 퇴각할 것을 통보하여 바로 떠나도록 했다. 이 때 무기는 사용하지 아니했다. (정원도, 이규현 등 증언)


1954년 7월 28일 일본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나가라”와“구즈류호”가 독도영해에 침범하였다. 이들의 침범을 보고 서도의 물골 앞에서 천막을 세우고 있던 6명의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즉시 전투 태세를 취하고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순시선들은 상륙을 포기한 채 그대로 도망쳤다.


실제로 일본 함선에 사격을 가한 적도 있다.

1954년 8월 23일(수기 34, 1953년 7월 23일 새벽 5시) 오전 8시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경비정 PS 9 おき(오끼)호가 동도 500m 지점으로 접근 했다는 동초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쌍안경으로 확인하니 일본경비정은 계속 접근을 하고 있었다. 거리 300m에서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후미 쪽에 몇 발이 맞자 일본 경비정은 진로를 바꾸어 도망을 갔다.[44]

수비대 수기 221


이후 독도 의용 수비대는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나무로 가짜 대포를 만들어 해안포 진지로 속여 쫓아냈던 기록도 있다.

1954년 10월 2일 아침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 와 “나가라”호가 독도에 접근하였을 때 동도에 새로이 설치된 포진지에서 포구(砲口)를 선박 쪽으로 지향[45]

하여 실탄 없이 적을 위협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 가짜 대포가 생각났다. 대원들과 의논했더니 모두들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했다. 시작한 지 한 1주일 만에 아주 멋진 대포가 완성되었다. 포구 직경이 20cm[46], 포신이 자유롭게 빙빙 돌고 미제 에나멜로 단장된 신형 대포였다. 소위 이것이 독도의 목 대포인 것이다. 다음 달(11월) 24일부터 함정이 나타났는데 이제는 근접치 않고 먼 곳에서 배회할 뿐 함정의 번호 조차 식별하기 힘든 정도였으니 필경 목대포의 위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47] 일본 잡지에 난 사진을 보았을 때 우리도 식별이 어려울 만큼 진짜와 흡사했다.

수비대 수기 76


1954년 11월에는 일본의 상륙전 시도도 있었으나 필사적인 전투 끝에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1954.11.21(수비대 수기 1954.4.22) 아침 일찍 전방 1km 해상에서 일본함정이 독도를 향하여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좌우를 보니 오른쪽, 왼쪽, 이것은 완전히 포위상태에서 독도를 공격함을 직감했다. 즉시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 비상을 외치고, 쌍안경을 들어 확인하니, 1,000톤급의 일본함정 PS 9, PS 10. PS16 이었다. 평상시 훈련한 대로 대원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일본함정이 500m 쯤 접근했을 때 권총으로 신호를 한다. 일본 함정이 700m에서 600m로 다가오고, M1소총 유효 사거리에 들어왔다. ”탕!“ 한발의 신호와 함께 일제히 독도가 떠나갈듯 한 총성이 울려 퍼지고, 6․25 때 명사수 특무상사 출신 서기종이 쏜 박격포 1발이 PS 9 함에 명중하여 뱃머리에서 몇 사람이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일본 함정은 불의의 총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PS16함에 구조요청을 하였고 PS9함에 접근한 16함은 예인 시도를 하려고 로프가 9함에 건너가고 중기에 치명상을 입은 PS9함은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동쪽으로 도망했다. 비행기만 계속 독도를 선회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수비대원들은 대공사격자세를 갖추고 사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공을 비행하던 일본비행기도 일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48]

수비대 수기 71


독도 의용수비대 중 9명은 경찰로 채용되어 그 뒤로도 독도를 지켰다.

이후인 1956년 12월 3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경찰에게 모든 장비를 인계하여 현재는 경찰이 독도를 지키고 있다.


3.5. 1960년대 이후[편집]


일본은 어떻게든 평화선을 무력화 시키려고 했고, 결국 1965년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평화선을 무효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평화선을 한국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근거로 들고 있고, 한국은 평화선이 독도의 영유에 대한 자위권 행사의 근거라고 맞서고 있다.

앞서 말했듯 휴전선이 독도보다 북쪽에 위치하며 독도는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이후의 분쟁 문서는 독도의 역사적 기록보다는 외교적인 분쟁이 더 많기에 독도/논란 문서에 더욱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조.


4. 옛 지도의 독도[편집]


  • 고지도상의 우산도는 독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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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49]
조선시대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현 독도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는 위성, 사진 기술, 근대적 측량 기술이 부족하고, 현대인과 인식 체계도 사뭇 달랐던 시대에 제작된 고지도를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읽으려 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란이다. 예를 들어 1530년에 제작된 「팔도총도」의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거나, 1711년 박석창이 보고한 「울릉도도형」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소위 우산도(所謂 于山島)'는 해장죽전(海長竹田)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죽서도라는 식의 도맷금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이 보유한 수많은 독도 관련 사료를 트집 잡아 무용한 것인양 만들려는 일본 측의 전략적 폄하에 기인한 면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고지도의 해독은 매우 고차원적인 일로 「울릉도도형」 '소위 우산도'의 경우 죽서도보다 남쪽인 저전동(현 저동) 저동항보다 더 남쪽에 그려져 있고, 1937년 그보다도 더 남쪽인 도동에서 발견된 수토관 박석창의 묘방(정동쪽) 각석입표를 고려하면, '소위 우산도'는 현 울릉도 동남쪽의 독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참조
우산,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50]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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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 작성된 정상기의 동국지도
독도가 직접 언급된 첫 문헌으로 추정되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기록으로, 울진현에서 등장하는 무릉과 우산도가 각각 울릉도와 독도로 추정되는 첫 기록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의 정확성은 현대적 수준 측량에서 성인봉의 약 600m 지점부터 육안으로 독도를 식별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에서 드러나며, 이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지리학자 및 관리들이 독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팔도총도」의 경우에도 지도를 실제 제작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울진 정동쪽 바다에 우산-무릉 이라는 두 개의 섬이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문자 정보만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섬이 더 육지에 가까이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섬의 위치를 해당 기록 순서인 우산, 무릉 순으로 동쪽 바다에 나란히 임의로 배치시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15세기 「팔도총도」 이후, 자료의 축적에 따라 18세기 작성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무릉은 왼쪽, 우산은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서양에서 제작된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특히 2021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의 스페인 순방 중 실물 공개되어 화제가 된 '조선왕국전도'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울릉도를 Fan-ling-tao로[51], 우산도를 Tchian-chan-tao로[52] 적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실측 후 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외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이용해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관련 기사
실제 고지도는 이러한 미비함과 난해함 때문에 국제 법정에서도 판결에 직접 인용되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고지도를 직접 인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그 고지도가 해당 분쟁에 직접 활용되는 경우[53] 등에 한한다. 또한 자국의 영토에서 누락시킨 지도의 증명력보다 타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의 증명력을 더 높이 평가[54]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 혹은 민간의 지도보다 정부 공인-공식 지도의 영향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고지도는 예는 태정관지령문에 첨부되었던 기죽도약도이다.

  • 시마네현 고시는 없다?
일본은 독도의 영토 편입을 시도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서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며 원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서는 시마네현청에서 지방 촌 사무소로 배부된 사본 중 남아 있는 것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55] 이에 대해 사본에 시마네현 지사의 날인이 없고, 내부 용도로 사용되는 '회람' 도장이 찍혀있는 등의 근거로 애초에 고시문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라는 추정과 고시(널리 알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다.

  • 하치에몬 사형 이후 설립된 도해 금지 팻말
1837년 2월에 에도 바쿠후의 명령으로 다카다번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가에 세운 도해 금지령 팻말에 있는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독도 중 어느 섬을 지칭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팻말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번에 하치에몬이 '다케시마'(竹島)에 도해한 사건을 검토한 결과, 오른쪽의 섬(右島)은 겐로쿠 시대부터 도해 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항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 오른쪽 섬(右島)을 '죽도(당시 울릉도)', 독도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할 것인지 엇갈리는 것이다.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를 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팻말의 왼쪽으로 문장을 연결하는 구조상 최초 등장한 '죽도(竹島)'에 대한 지칭대명사로 '오른쪽 섬(右島)'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음으로, 이는 '오른쪽에 지칭 한 섬', 즉 죽도=울릉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입장이다. 반면 독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向後 右島之儀も 同様相心得 渡海致間敷候(향후 오른쪽 섬도 같음을 명심해 도해하지 않도록)'의 문장을 근거로 여기에서 지칭된 오른쪽 섬은 'も(~도)'가 붙어있고, 바로 앞 문장에 울릉도가 도해 금지 된 이력을 말하고 있음으로 '울릉도의 오른쪽 섬', 즉 독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팻말은 2010년에 한국인 사업가가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참조

  • 울릉도사적

  • 근대 문서의 논쟁점
18~19세기는 조선(대한 제국)이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문서 면에서 여러 가지 논쟁점이 생긴다.
  1. 대한지지
최남선의 대한지지는 독도와 울릉도의 경도를 잘못 표기하여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 지지에는 "이 책은 일본인이 저술한 한국 지리 관계 도서를 주로 하고 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여 역술하였다.” 고 되어 있다. 그리고 현채는 '대한지지'의 후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했다."며 일본의 문서를 가져왔다고 했다.
  1. 대한신지지
"대한신지지"에는 울릉도만 있고, 독도가 없고, 위치편에 '조선의 동쪽의 경계는 두만강이며, 그것은 130도 58분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당시 독도는 조선령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지연은 분명히 "于山島는 其東南에 在하니라(우산도는 울릉도의 동남쪽에 있다)"고 서술하였고, 대한신지지"는 일본의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1905)를 참조한 것이다.
  1.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울릉도 동편 바로 옆에는 죽도(죽서도)라고 불리는 별개의 섬이 존재하여, 후에 우산도가 죽서도이냐 독도이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울릉도 옆에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섬'은 죽서도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아, 혹여 고지도에 상관된 문제를 접한다면 이를 알아두는 편이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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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한국/일본 문헌에서 독도의 명칭은 다양하게 표기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于山島), 안용복 관련 기록의 자산도(子山島), 성종시대의 삼봉도(三峰島), 정조실록의 가지도(可支島), 에도 막부메이지 정부의 '마쓰시마/송도(松島)', 때로는 '다케시마(竹島)', 조선 말 고종이 말한 송죽도(松竹島), 대한제국의 석도(石島) 등등... 이 때문에 한국 측이 '이 섬은 독도다'라고 하면 지칭하면, 일본 측에서는 '이 섬은 독도가 아니다.'라며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대개 죽서도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 근대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영토를 파악하는 범위는 호구의 거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본토와 멀리 떨어진 독도를 정부 차원에서 명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1876년까지는 '다케시마(竹島)'가 울릉도였다는 것이다. 정작 독도는 '마쓰시마(松島/송도)'라고 불렸다고 한다. [56]

울릉과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왜에서 송도라 부른다. 《만기요람》, 조선


일본에서 1박 2일 거리에 송도가 있고 다시 거기서 1일 거리에 죽도가 있어 고려가 보인다. 《은주시청합기》, 일본


한국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추정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5세기 초엽에 처음 나타난다. 특히 조선 태종 치세에 이루어진 일련의 울릉도 쇄출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그 외의 섬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우산도라는 이름이 본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다소간 울릉도와 우산도의 구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본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확증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중반에 처음 나타난다. 이는 오오야·무라카와 양 가문의 '다케시마' 즉 울릉도 출어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마쓰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 위치나 거리 등의 표현에 따라 이것이 독도임을 부동의 사실로 확증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한국의 '우산도'와 일본의 '마쓰시마'로 인식되었던 독도의 존재는 17세기 후반의 쟁계 사건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울릉도의 영유권을 두고 한국의 조선 조정과 일본의 쓰시마 번이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이 사건을 통해 이전까지 모호한 면이 있던 한국과 일본의 울릉도 인식이 완전히 정립되었는데, 이로서 한국은 울릉도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 독도의 존재를 다시금 인지하였고 일본은 '다케시마'와 그 부속 도서인 '마쓰시마'의 영유권이 조선 측에 있음을 명확히 규정하였던 것이다.

[1] 물론 안용복은 오가는 김에 독도도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2] 한국의 문헌에 나타나는 우산도에 관한 기술은 우산=울릉, 우산=독도, 우산=죽도(울릉도 바로 옆)으로 결코 독도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삼국사기 우산국 운운하면 바로 털리니 조심하자.[3] 고려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고, 울릉도가 본토에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인식 또한 높았다.[4] 울릉도와 경상도 사이 거리가 이쯤된다. 제주도를 가로지를만한 거리로, 당연히 한반도에서는 독도를 보지 못한다.[5] 검색하면 총 40건, 세종때(15건)가장 많으나 선조, 숙종, 경종 등 역사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6] 본래 울릉도는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에서 알 수 있듯 적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11세기 초 여진족 해적의 침공을 받아 한반도로 대부분 이주하고 거의 빈 섬이 된 상태였다.[7] 삼봉도라는 이름의 한자는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그냥 글자만 바뀐 것이지 같은 섬으로 유추된다. 동일인물이 발견하거나 위치가 비슷하게 묘사되는 등, 서술이 이어지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8] 당연하겠지만 해당 섬은 존재하지 않는 삼봉도였다. 더 찾으려 했지만 이후 발견되지 못했을 거다.[9] 영조 때 한 번 언급된 적이 있어 마지막은 아니다.[10] 현 울릉도[11] 현 돗토리현[12] 20년을 한 세대로 보았을 때 3세대~4세대에 이르는 긴 기간이다.[13] 사이토 호센(斎藤豊仙), 사이토 간스케(斎藤勘介)라고도 한다.[14] 울릉도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은 오야가와 무라카와가가 1년씩 돌아가며 실시했다. 당시에는 오야 가문 차례.[15] 안용복은 이보다 앞선 1693년에 이미 한 번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납치되었다가 조선으로 송환된 전적이 있었다. 이때 츠시마 번에서 안용복을 돌려보냄과 함께 '조선 사람이 다케시마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청을 넣은 것이 '쟁계 사건'의 시작. 울릉군/역사 문서 참고.[16] 처음 조선왕조실록의 조선 측 취조기록만 가지고서는 대개 이것을 우산도의 오기로 봤지만 이후 발견된 일본 측 취조문서에도 자산도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산도가 맞다. 학자들 중에서는 자산도가 우산도를 안용복이 잘못 읽어 발생한 해프닝으로 보고 있지만, 이를 통해 어쩌다 조선왕조실록의 정확성까지 함께 검증된 셈이다.[17] 다만 이 문서는 상황 기록을 목적으로 한 성격이 더 강해, 실제로 인정했다고 하기에는 증거로써의 효력이 미약하다. 그래도 안용복이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되어주는 셈이다.[18] 조선 후기의 문신. 서인(西人) 소론(少論)의 영수이다. 1680년 경신환국 이래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강릉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1701년 은퇴하였다. 울릉도 쟁계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울릉도를 지켜내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19] 이 주라는 문장이 논란이 많다. 한국 측에서는 오키(은주)로 해석하며, 일본 측에서는 울릉도 자체를 주로 분리하여 보았다고 한다.[20] 은주시청합기는 일본의 서북한계를 오키섬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21] 조선령이라는 것까지는 무리가 있는 것이, 실제로 울릉도에 대한 두 국가의 직접적인 영토 분쟁 사건이 발생하는 '안용복 사건'이 이보다 30여년 뒤인 1693년이기 때문이다.[22] 안용복이 실제로 일본 어부를 만났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는 일본 측 근거는 오오야, 무라카미 가문도 그전 울릉도 쟁계로 조업이 막혀 손해만 보다, 출어를 위한 자금도 구하지 못해 출어할 상황도 아닌 데다, 일본 어부를 정말 만났다면 그런 중요한 내용이 왜 겐로쿠 각서에는 쓰여지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도일 당시 일본 측은 '죽도일건(울릉도쟁계)는 끝났는데 왜 또 왔냐?'라는 어이없는 반응이었고, 이런 뜬금없는 도일에 명분을 가지려면 당연히 '여전히 남의 땅에 왜인들이 조업하고 있다'라고 해야 하는데, 도일의 이유가 대마번에게 당한 냉대를 호소, 소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만, 재일 독도 연구가 박병섭 선생은 안용복이 1695년에 만난 것을 1696년에 만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695년 또 일본이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오는데 이미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철포와 칼로 무장하고 그들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해 울릉도 조업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는데, 그 무장 조선인들이 안용복 일행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울릉도 쟁계는 이미 안용복의 1차 도일(실제로는 일본에 납치)로 조선 영토임이 일본의 인정으로 끝났는데, 새삼스레 왜 또 안용복이 2차 도일을 감행했느냐의 이유가 조금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단순히 안용복이 1차 도일 때 일본에게 받은 냉대에 대해 칭얼대기 위함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어차피 울릉도는 공도 정책으로 조선인들도 도항할 수 없으므로 안용복은 또 울릉도에 불법 조업을 하긴 했으나 1차 도일 때 당한 괴로운 기억과 울분으로 1695년 때는 자기들도 만일을 위해 무장하고 있던 판에 또 일본 어민들이 오자 참다 못해 1차 도일 때의 냉대에 대한 항의도 겸해서 철저한 준비(관직 사칭, 지도 준비, 소장 작성 등. 실제로 안용복의 독도(자산도)에 대한 지식은 2차 도일 때 훨씬 더 정교하게 된다.) 끝에 1년 후 2차 도일을 감행한 것이라는 가정이다. 다만 2차 도일 자체도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중죄인데 1차 도일 때 사면받고도 얼마 안 돼 또 울릉도로 갔다고 진술해 봤자 자신에게만 더 불리해지므로 1696년이라고 진술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어차피 2차 도일의 명분을 위해서는 울릉도에 또 갔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가정일 뿐이며, 1695년의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23] 이상 본 인용문의 해석은 유미림의 논문 「‘우산도=독도’설 입증을 위한 논고」에서 가져옴.[24] 독도는 당연히 대나무가 숲으로 우거질 만한 공간이 없다. 반면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위가 6만여 평으로 평평한 죽도는 이름부터가 대나무 죽(竹)일 정도로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25] 애시당초 영국에서 최초의 정밀한 해양 측량, 즉 경도 측정이 이루어진 것도 1761년이다. 그보다 반세기 전의 조선에서 근대적 측량 기록을 바라기는 무리다.[26] 진짜 울릉도는 이보다 2년 앞선 1787년에 이미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측량하고 다줄레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상태였다.[27]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이 울룽도(다케시마) 이외(外一島)의 1도를 두고 울룽도 인근의 죽도를 지칭 한 것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같이 부록으로 첨부된 지도에서는 정작 울룽도와 독도 밖에 없는게 모순이다.[28] 더불어 1876년에 무토 히라타카라는 일본인이 '동해 가운데 조선의 울릉도가 아닌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며 일본 외무성에 마쓰시마 개척을 신청하는 사건이 있었다. 무토 히라타카는 아르고노트=울릉도=다케시마라는 생각이었다. 이에 해군성은 1878년에 군함 아마기(天城)를 보내어 조선 해안을 측량하고, 무토 히라타카가 발견했다는 마쓰시마가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개척 신청은 당연히 기각.[29] 이상 본 인용문의 해석은 '한국고전종합DB'와 '네이버 블로그 승정원일기'에서 참조함.한국고전종합DB 네이버 블로그 참조 [30] 안타깝게도, 석도에 대한 언급은 이 칙령이 거의 전부라 할 정도인데다, 언급 마저도 울릉도의 속하는 섬에 묻어가는 식이라 '석도' 두 글자로 끝나버렸다. 일본 학자들이 이를 놓치지 않고 증명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덤.[31] 다만 발견된 문서가 죄다 사본에다 관청 내 회람용이고, 신문 보도도 지역신문밖에 확인되지 않아 이견이 많다.[32] "漢文으로 작성되어야 하는 敎書의 전통을 이은 勅令에 사용되는 어휘는 언제나 漢字語이어야 한다. 따라서 차자 표기인 ‘獨島’가 아닌 ‘石島’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반면, "吏讀로 작성되는 牒呈의 傳統을 이은 보고서 에 사용되는 어휘는 한자차용표기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므로" "한자어(훈차 표기) ‘石島’가아닌 이두(음차 표기) ‘獨島’를 사용"한다. '獨島'․'石島'의 地名 表記에 관한 硏究[33] 절목이란 시행세칙을 의미한다.[34] 해당 내용은 2011년도 우리역사 만들기 대회 연구보고서 「한국과 일본의 독도 인식」에서 참조함.[35] 희생자 수에 대해서 1948년 6월 11일자 <조선일보>는 16명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는 훨씬 컸다. 이때만 해도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사건의 내막이 충분히 알려지고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나온 1999년 10월 11일 치 <한겨레신문>은 150명이라고 보도했고, 2015년 2월 6일자 <대구일보>는 200명이라고 보도했다.#[36] 1907년 사진,1934년 사진과의 대조. 섬에 있는 암석의 위치와 경사, 그리고 명암이 일치하며, 현대와의 유일한 차이점은 동도에 있는 암석 꼭대기 하나가 잘려나간 정도다. 그마저도 미군 공습이 아니라 한국 측의 헬리콥터 착륙장 건설이 목적이었다.[37] 국제적으로 3해리로 정해진 영해를 60해리까지 잡아늘였다. 심지어 전쟁중이라 미국에 대한 의존이 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의 포고를 묵살했다[38] 그도 그럴것이, 일본의 입장은 무주지 편입이기 때문에 1905년 이후 한국이 점령하게 된 계기를 평화선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다. 연합국 점령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인 것은 덤.[39] 해당 위령비는 추후 발견되어 다시 복원[40] 1945년부터 1965년까지 20년 동안 나포한 일본 선박이 대만은 51척, 중국은 181척, 소련은 무려 1,164척이다. 한국은 평화선 정책 시행 당시 총 327척을 나포하였다.[41] 1953년 4월 20일에 독도에 상륙하여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한 33명의 의용수비대원이 결성한 단체를 말한다.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제2조 제1호)[42] 참고로 침입 당시 일본의 함선들은 10여 년 전 일본제국 시절에 비해 매우 약소하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는 종전 직후부터 거의 모든 군함을 연합국에 의해 스크랩 처리했기 때문이다.[43] 이 배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즈가루'호라고 한다. 출처: 일본외무성 각서 (1954.7.14, 95/A5)[44] 이 중 1발이 선교 우현 축전실을 관통하였다고 한다. 출처는 일본외무성 각서(1954.8.26,140/A5)[45] 일본외무성 각서 1954.10.21 No 185/A5[46] 약 8인치다.[47] 중순양함 주포 구경만한 해안포를 설치한 것으로 보였을 테니 일본이 경계했을 만도 하다.[48] 이날 독도의용수비대 소모 탄약은 박격포탄 9발, 중기관총 500여발 경기관총 500여발이라고 한다.[49] 현존하는 인쇄본 단독 지도 중에 독도(우산도)가 그려진 최초 지도이다.[50] 무릉(武陵)은 울릉도의 별칭이다.[51] '鬱(울)'을 '攀(반)', '礬(반)', '範(범)', 또는 '菀(완)'으로 오식. 검색 결과가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아직 정설은 없는 듯하다.[52] '于(우)'를 '千(천)'으로 오식.[53] 예를 들어 안용복이 항의를 위해 일본에 가져간 조선팔도지도,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의 프레비 히어 사원 판결에서 언급된 지도 등[54] '페드라 브랑카 사건(2008)'판결과 독도 영유권[55] "'독도 편입' 시마네현 고시 제정은 거짓말"[56] 그런데 웃기는 건 당시 일본군 육군과 해군이 독도와 울릉도를 부르는 명칭이 각각 달랐다는 거다. 자세한 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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