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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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Kriegsmarin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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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장
수장


공군(Luftwaffe)
제국원수(Reichsmarschall)[2]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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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장
견장
칼라장
견장

1. 개요
2. 목록


1. 개요[편집]


독일 국방군원수는 다른 나라 원수들이 그렇듯이 절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성상 원수의 자리까지 올라간 독일군 장성은 총 28명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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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아돌프 히틀러, 빌헬름 카이텔, 카를 되니츠, 하인리히 힘러, 에르하르트 밀히. 각각 육군(Heer), 해군(Kriegsmarine), SS(Schutzstaffel), 공군(Luftwaffe)의 사령관이 한 자리에 모인 것과 다름이 없는 사진이다.

육군공군의 원수는 "Generalfeldmarschall(게네랄펠트마샬, 야전원수)", 해군의 원수는 "Großadmiral(그로쓰아트미랄[4])"이라고 했다. "제국원수(라이히스펠트마샬, Reichsfeldmarschall)라는 계급도 있었는데, 이는 원수보다 한 등급 위의 계급이며, 이 계급을 부여받은 사람은 육군에서는 전무하고 공군의 헤르만 괴링이 유일하다. [5]

독일군에서 원수 계급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 병력이 10만으로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일시 폐지되었으며, 당시 법제상으로 군 최고위 계급은 상급대장이었다. 이후 1936년국방장관(당시에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명예적 계급으로 부활했으며, 나치당 실세인 헤르만 괴링과 군 원로이자 크릭스마리네 총사령관인 에리히 레더도 이 계급을 받았다.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실질적인 계급으로써의 원수 계급이 주어지기 시작했던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로, 특히 프랑스 전역이 성공적으로 종결된 후인 1940년 7월 19일, 야전군사령관집단군사령관들이 대거 진급하였다.

독일 제3제국 역사상 해군 원수로 재직한 사람은 에리히 레더카를 되니츠 단 두 명뿐이다. 임명된 전체 원수 28명 중 해군 원수가 단 둘뿐이었던 이유는 해군의 최고사령관만이 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 더해 히틀러의 제3제국이 해군을 경시하여 수상 함대 재건 계획이 전시에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를 되니츠상급대장을 건너뛰고 2계급 특진하여 초대 최고사령관 에리히 레더의 뒤를 이어 2대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되니츠 제독의 후임 해군 최고사령관인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임명 당일인 1945년 5월 1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고, 되니츠가 영국군에 구속되던 날 자살하였다.[6]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 제독이 프리데부르크 제독의 뒤를 이어 4대 최고사령관에 올랐으며, 크릭스마리네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최고사령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두 사람의 계급은 원수에 이르지 못하고 상급대장에 머물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원수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나치 독일의 원수들도 원수 지휘봉을 지급받았는데, 권위의 상징으로 이 지휘봉을 들었다 내리며 거수 경례를 대신했다. 당시 영상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에 따라, 이들의 계급장 위에는 X자로 교차한 원수 지휘봉이 고유 번호와 함께 도금되어 얹힌다.[7]

파일:heer_marshal_baton.jpg
▲ 국내에 들어와 소장되고 있는 레플리카 독일 육군 원수 지휘봉. 해당 사진의 촬영자에 의하면 원수봉에는 소유자의 이름과 함께 진급일 또한 적혀있다고 한다.[8]

이들 원수 지휘봉은 그 레플리카가 세계 곳곳의 밀리터리 샵에서 판매중인데, 중국, 미국, 영국, 일본 등지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대부분 육군에서는 에르빈 롬멜에리히 폰 만슈타인,[9] 루프트바페에서는 주로 헤르만 괴링알베르트 케셀링, 크릭스마리네에서는 카를 되니츠의 원수봉이 판매[10] 되고 있다.[11]

서양권에서는 원수인 인물의 성명 앞에 Field Marshal의 약자를 딴 경칭 FM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2. 목록[편집]




아래 목록의 나열 순서는 진급일 순이다.

Generalfeldmarschall (육군,공군) / Großadmiral (해군)
이름
병과
출생년도
사망년도
진급일
사망 원인
비고
특이사항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육군
1878
1946
1936.04.20

전쟁 전 퇴역 및
2차대전 불참[12]
나치 독일 및
육군 최초의 원수
헤르만 괴링
공군
1893
1946
1938.02.04
자살
유일한 제국원수
수여자

에리히 레더
해군
1876
1960
1939.04.01

[13]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육군
1875
1953
1940.07.19

[14]

귄터 폰 클루게
육군
1882
1944
자살
[15]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1881
1948

[16]

발터 폰 라이헤나우
육군
1884
1942
심장마비
[17]

빌헬름 카이텔
육군
1882
1946
전범으로 처형
(교수형)
[18]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육군
1876
1956

[19]

빌헬름 리스트
육군
1880
1971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1885
1960



에르하르트 밀히
공군
1892
1972

[20]

에르빈 폰 비츨레벤
육군
1881
1944
처형
[21]

페도어 폰 보크
육군
1880
1945
폭격으로 사망
[22]

후고 슈페를레
공군
1885
1953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육군
1856
1941
1940.10.31

[23]
명예진급
에르빈 롬멜
육군
1891
1944
1942.06.22
자살


게오르크 폰 퀴힐러
육군
1881
1968
1942.06.30



에리히 폰 만슈타인
육군
1887
1973
1942.07.01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1891
1957
1943.01.30

[24]
항복
카를 되니츠
해군
1891
1980

[25]

에른스트 부슈
육군
1885
1945
1943.02.01
옥사
[26]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육군
1881
1954
옥사
[27]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육군
1881
1954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공군
1895
1945
1943.02.16
뇌종양
[28]

발터 모델
육군
1891
1945
1944.03.31
자살
[29]

페르디난트 쇠르너
육군
1892
1973
1945.04.05

[30]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공군
1892
1945
1945.04.25
자살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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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해군정복에는 칼라장이 없으며, 수장만 있다.[2] 헤르만 괴링만이 받은 계급이며, 서방군의 대원수에 상응하는 계급.[3] 원수에 임명되었다가 히틀러나 괴링등의 미움을 사서 쫓겨난(형식상은 예편) 사람도 있어서 28명 모두가 원수에 동시에 재직하고 있던 적은 없다.[4] 일본 쪽 역서에서는 원어를 그대로 직역해서 '대제독'이라고도 씀[5] 원수에는 1938년 2월 4일, 제국원수에는 프랑스 침공이 성공적으로 끝난 1940년 7월 19일에 진급하였다.[6] 되니츠 제독 사진 밑에 해군 정복을 입고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찍은 사진은 서양권에선 크릭스마리네의 몰락의 상징으로 통한다.[7] X자로 엇갈린 모양은 영국군 원수 계급장도 마찬가지. 소장에서 대장까지는 지휘봉과 예도가 교차한다.[8] 네이버 카페 WoT 한국커뮤니티의 한 회원이 소장 중이며 당연히 레플리카다. 아무리 나치 독일군의 원수 지휘봉이라지만 후손들이 그걸 팔리도 없고 따지고 보면 역사적 유물이다. 원수봉에 새겨진 이름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9] 육군 원수 약식 지휘봉은 특이하게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약식봉도 판매하는 곳이 간간히 있다.[10] 에리히 레더의 원수봉을 파는 곳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11] 가격은 판매하는 곳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600 달러 ~ 2300 달러까지 다양하다. 구글 검색창에 german marshal baton이라고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쏟아져나오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보를 구할 수 있다.[12] 그 이유는 1938년의 블롬베르크-프리치 스캔들에 연루되어서였으며, 이후 히틀러에게 복귀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하고 전쟁 기간 내내 야인 신세였다. 참고로 같이 퇴역한 프리치는 다시 복귀 하였으나 폴란드 침공에서 전사한 데다, 사후에는 폴란드에 있던 무덤까지 파괴되고 말았다.[13] 크릭스마리네가 활동하던 당시에 군종 내 최선임 장교였다.[14] 독일 국방군 육군이 활동하던 당시에 군종 내 최선임 장교였다.[15] 발퀴레 작전 소극 가담자. 훗날 이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16] 블롬베르크 숙청 후 육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역시 숙청되었다.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 있는 젊은 장교를 대거 발탁, 전간기에서부터 독일군 무적 신화의 기틀을 쌓았다.[17]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원수 지휘봉을 거머쥐었지만, 장군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열성적인 나치였다.[18] 1차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고참 장교이지만, 사실 정치꾼에 더 가깝다. 모나지 않은 인품을 지녔으나, 히틀러의 예스맨으로서 독일군 최악의 졸장이었다.[19]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히틀러의 학살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임했다고는 알려져 왔으나 예비역 생활 중에도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참여하였고 사적으로 히틀러에게 수십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선물 받고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3년 형을 선고되었으나 기소 기간이 3년이 되었기에 실질적인 수감 생활은 하지 않았는데,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 '학살보다 굶겨 죽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논조로 이를 두둔한 것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20] 유대인 출신 장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과 다르다. 항목 참조.[21] 발퀴레 작전 적극 가담자. 후일 이로 인해 처형당한다. 그것도 피아노 갈고리줄에 묶여서... 여담으로 히틀러는 이들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찍게 했으며 그것을 보고 즐거워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22] 중부집단군 사령관 재임 당시, 클루게 원수와의 통화에서 학살 명령에 반대하는 내용이 부하 장교들의 진술로 확인되었다. 동부전선의 다른 집단군에 비해 중부집단군 점령 지역에서 인종 범죄가 적었고, 오히려 카틴 숲 학살을 밝혀내게 된 것도 중부집단군 사령부이다.[2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원수였으며 체코 합병 후 국방군의 명예원수로 임명된다. 임명 후 28 보병 명예연대장을 맡았다.[24] 독일 역사상 유일하게 항복한 육군원수라기 보다는 최초로 항복한 원수. 그 전까지는 원수가 항복한다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싸우다 죽으라고 내던지다시피 수여한 계급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너무 노골적이라 파울루스는 "보헤미안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순 없다"는 말을 남기고 진급 직후 바로 항복한다. 그러나 원수 계급장을 패용하지 않았으므로 파울루스를 본 소련군 장군들은 그가 여전히 상급대장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빡친 히틀러가 파울루스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장남인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교환하려 했다는 말이 있는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에서 언급된 얘기지만 증명된 바는 없다. 파울루스를 히틀러가 직접 잡아 죽이기 위해 교환하려 했다는 썰에 대해서는 아예 근거가 없다.[25] 히틀러의 정치적 유언에 의해 총통의 권한 중 대통령 직책을 물려받은 인물. 히틀러는 되니츠가 전쟁을 계속하길 바랐으나, 그는 신속하게 항복 절차를 진행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민간인들을 서방 점령 지역으로 이동시켰다.[26] 타지에서 옥사한 사람 중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계급이 가장 높다.[27]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 것이 오히려 소련 수뇌부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인종 범죄에 동조하지 않았음에도 '소련 인민을 이간질한 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 달에 한 번 가족들에게 엽서를 쓰는 것조차 마지막 7개월 동안에만 허락되었다. 사후 매장 장소조차 기록이 없다.[28] 독일군 최연소 원수로 그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 동생. 2차 대전 독일 공군에서 최고의 지휘관으로 손꼽힌다. 더운 여름에는 군복 상의를 벗어둔 뒤 셔츠 차림으로만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야전에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는 등 무척 활동적인 기상의 소유자. 그가 뇌종양에 걸려 일찍 예비역에 편입되지만 않았으면 독일 공군 전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후배 조종사인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각하께서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었으면..."하고 탄식했을 지경.[29] 전공 만큼이나 사진도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인데, 정작 원수 지휘봉을 든 사진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식 지휘봉은 모델이 원수 진급 이후 단 한 번도 '군 예식 행사'에 참석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휴가 한 번 받지 못하고 북부, 남부, 중부 집단군 사령관을 2개월 간격으로 겸임하며 최전선을 달렸다. 서부전선에서는 총사령관까지 겸임) 사진이 없고, 약식 지휘봉은 모델 자신이 들고 다니는 게 귀찮다며 방치(…)했기 때문. 다만, 아르덴 대공세 당시 몸소 교통 정리할 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찰봉≧원수 지휘봉[30] 정식 원수 지휘봉은 제작 기간이 오래 걸려서 쇠르너와 하단의 폰 그라임은 하사 받지 못하였고, 이들 두 사람의 원수 진급은 한창 계급 인플레가 심각하던 종전 말, 히틀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전사학자에 따라서는 독일 국방군의 마지막 원수 진급은 발터 모델이라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31] 진급날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진급은 히틀러가 벙커 안에 있을 때 이루어졌다. 이유는 괴링이 배신을 때렸기 때문. 그래서 나중에 그는 난 공군 원수지만 내가 지휘할 공군이 없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한다. 직후 카를 되니츠 원수와 만남을 가진 지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 되니츠는 이 마지막 만남에 대해, 1958년 펴낸 그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우리는 매우 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라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