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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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전개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베리아 반도 전쟁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평가




1. 개요[편집]


War of the Fourth Coalition (영어)
Guerre de la Quatrième Coalition (프랑스어)
Vierter Koalitionskrieg (독일어)
(1806 ~ 1807)

나폴레옹 전쟁의 다섯 번째 국면. 독일·폴란드 원정이라고도 한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구성한 주요국으로는 영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작센 왕국, 스웨덴 등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의 참패 이후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어 동맹에서 빠졌다. 동맹 주요국들은 제3차 대불동맹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했고, 프로이센 왕국의 참전 이후부터를 제4차 대불동맹으로 친다.


2. 배경[편집]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친나폴레옹 성향의 서남부 독일어권 국가들을 모아 라인 동맹을 결성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세력은 독일 중부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는 북독일의 강자였던 프로이센 왕국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원래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때도 상황이 프랑스에게 기우는 게 보이자 가장 먼저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전쟁에서 빠졌으며,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트리아가 군사 통행권을 요구했을 때도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등 전쟁속에서도 중립을 지켰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의 설득에 선전포고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이 처참하게 격파당하자 곧바로 프랑스에게 축하 사절을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3차 대불 동맹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나폴레옹이 라인강 일대의 국가들을 모아 라인 동맹을 형성하면서 프로이센의 세력권을 침범해오자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하노버 문제였는데, 프로이센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열정적인 러브콜을 어정쩡하게 무시하며 중립을 지킨 것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주면 영국의 동군연합인 하노버 선제후국을 할양하겠다고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영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지배자인 프로이센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하노버를 영국에게 반환하겠다는 이야기가 돌자 안 그래도 라인 동맹 등으로 심기를 거스르던 프랑스에 대해 프로이센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무자비한 행보를 지켜봤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당시 막 전성기를 누리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부담스러워 했으나, 루이제 왕비와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태자의 강력한 설득으로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쟁을 결심했다. 결국 1806년 8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동맹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며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와 적대하던 대영국 선박 금지령을 해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프랑스 동맹에 동참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완벽하게 격파된 상황에서 참전하기에는 최악의 시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프로이센에게는 나름대로, 아니, 상당한 자신이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겨준 최강의 프로이센군을 가졌다는 군사 국가로서의 자부심과 이를 뒷받침하는 170,000명이라는 프랑스 대육군에 비견되는 숫자의 군대가 그 근거였다.

문제는 선전포고를 감행하기는 했으나, 정작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과 싸울 준비는 조금도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로이센군은 100년 전만 해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휘 아래 유럽 대륙 최강의 군대로 이름을 알렸으나,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7년 전쟁으로 인한 장교단의 손실이 회복되지 않았고, 농노제의 폐해로 인해 산업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프로이센군은 질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 당시보다 저하되어 있었으며, 무기의 수요도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융커 중심의 프로이센 사회 특성상 직위는 실력이 아닌 연공으로 정해졌는데, 이때문에 샤른호르스트 같은 유능한 장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귀족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문제점은 곧바로 나타났는데, 일단 군을 동원은 했지만 프랑스 군과 충돌할 때까지도 어떻게 싸우겠다는 작전 계획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1806년 9월 26일, 프로이센은 독일 내에서 모든 프랑스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전쟁을 감행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이미 나폴레옹은 9월 25일에 파리를 출발한 상황이었다(...)


3. 전개[편집]


결국 10월 9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통보하고 150,000명의 병력을 튀링겐 지역에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즉시 20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에서 작센 방면으로 진군해 10월 10일, 잘펠트에서 장 란의 제5군단이 프로이센군의 선봉인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태자가 이끄는 군대와 충돌했다.(잘펠트 전투)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패배했고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태자가 전사했다.

잘펠트 전투의 패배와 왕태자의 전사로 기가 꺾인 프로이센군은 철수를 생각했지만 정작 작전회의에서는 철수냐 원군을 기다리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 보냈다. 이런 가운데 다부의 군단이 나움부르크를 장악하자 더이상 있다간 포위될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군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철수를 결심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를 승인하여 프로이센군 주력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월 14일,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의 후위부대 약 60,000명이 예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40,000명의 프랑스군과 맞닥뜨렸고 나폴레옹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물리친 부대가 프로이센의 본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본군은 아우어슈테트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당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이끄는 60,000명의 프로이센 본군이 다부의 프랑스군 27,000명에게 대파당한 것이다. 17일에는 할레에서 베르나도트의 프랑스군이 뷔르템베르크 공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굳혔다.(할레 전투)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전사하고 가까스로 도망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1]까지 도망쳤다. 그리고 10월 25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다.[2] 그리고 포츠담 위수 교회(Garnisonkirche)[3]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를 방문한 뒤

"가 살아있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11월 6일에는 마그데부르크의 수비대가 항복해 사실상 프로이센 국내의 병력은 동프로이센으로 도망간 일부를 제외한 전군이 무력화되었다.[4]

삽시간에 프로이센이 패망 위기에 몰리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100,000명의 원군을 급파했다. 나폴레옹은 동쪽으로 도망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러시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3분할된 폴란드로 진격했다. 이때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의 동진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기 전에 프로이센과 러시아령 폴란드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민족의 해방자'로 추앙했다.

1807년 1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임시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월 7일, 아일라우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전투를 치루게 된다. 이 전투는 혹한의 눈보라 때문에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국 근위대 정예기병인 기마척탄병 11,000기를 투입하면서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자 러시아군이 먼저 철수하면서 나폴레옹이 신승했다. 프랑스군은 일단 철수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르페브르가 지휘하는 군대가 3월 18일, 단치히로 쳐들어가 5월 27일 단치히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군도 전열을 재정비한 후 6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하이에스부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싸우기보다는 거점을 타격하는 방식을 택해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했다. 러시아군은 다시 란의 군단에게 전투를 걸었으나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주력군에게 동향이 포착되었고, 6월 14일에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5] 프리틀란트 전투 이틀 후인 6월 16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되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은 마무리되었다.


4. 결과[편집]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의 틸지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엘베강 서편의 영토를 내놓게 되었고, 폴란드내의 프로이센령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게 되었으며 프로이센 육군은 40,000명으로 제한되었고 1억 2,000만 프랑의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이 완납될 때까지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내에 주둔하게 되었다.[6]

프로이센 왕국이 잃은 엘베 강 서편의 영토에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새로 생겨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으로 등극했다. 또한 폴란드는 바르샤바 공국으로 부활해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공작이 되었다.[7] 그리고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8] 러시아의 핀란드 영유를 허용했다.


5. 평가[편집]


많은 역사가들이 전쟁에서 명예롭게 나폴레옹이 발을 빼고, 외교적 타협 등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다질 수 있었던 최적이자 최후의 시점으로 꼽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어진 전쟁에서 큰 이득도 보지 못하면서 전력을 차차 소모하여 몰락의 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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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러시아칼리닌그라드. 알다시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소련 영토가 되어 소련 붕괴 후 고스란히 러시아 땅이 되었다.[2]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면서 프로이센은 한 가지 굴욕을 남기게 되었는데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처음으로 개선식을 진행한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다.[3] 지금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포츠담 상수시 궁전 끝자락에 묻혀있지만, 당시에는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삼촌의 유언을 씹고(...) 위수 교회라는 곳에 매장했다. 이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불타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4]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직후 나폴레옹은 도망가는 프로이센군을 전례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추격했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힌 프로이센군 부대와 그 지휘관들은 곳곳에서 포위된 후 항복했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활약했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도 이때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분석상으로는 프로이센군의 포로만 10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멀리 후방에 있었던 약 20,000명의 수비대 만이 호엔촐레른 왕실과 귀족들을 호위해서 동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으로 도피했다.[5] 프리슬란트가 아니라 현재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일어난 전투이다.[6] 이 금액은 프로이센의 몇년치 GDP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 이래 프랑스군의 전통이자 나폴레옹의 특기인 현지조달을 생각했을 때 독일의 문화재 보물은 다 뜯기고, 서민들도 탈탈 털려 절대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참고로 나폴레옹도 약탈대열의 선봉에 서서 몇가지 물건을 챙겼는데, 바로 평소에 존경하던 명장 중 가장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칼과 회중시계였다. 나폴레옹은 이 두 가지가 자기 최고의 전리품이라며 히히덕거렸다고.[7] 그 덕분에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전선에서 죽기 살기로 나폴레옹을 위해 싸웠다고 한다.[8] 이는 친(親) 영국가인 스웨덴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