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외인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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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존재했던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 소속 외국인 병력에 대한 문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혼자서 싸웠다[1] . 당연히 전쟁 내내 독일군은 병력 부족에 시달렸고,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가리지 않고 외국인 장병들을 다수 입대시켜 독일 편에서 싸우게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병력 자원을 두고 각군간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외국인 부대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강제 전속시키는 사례도 잇따르게ㆍ 된다. 이는 국방군이 주도한 7월 20일 쿠데타로 인해 국방군이 정치적으로 열세에 처하게 된 영향이 크다.

독일군에 복무한 외국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당연히 먼저 거론되는 이들일수록 선발 우선순위였다.
  • 주로 동유럽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 이들은 독일어로는 폴크스도이체(Volksdeutsche), 영어로는 에스닉 저먼(ethnic German)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애초에 "징병"된 경우가 많다.
  •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네덜란드계 벨기에인[2] 등 북유럽계 외국인: 독일인과 동족인 게르만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역시 전쟁 초기부터 우대받았다[3]. 나치는 장차 유럽을 정복하면 이들을 그냥 독일인으로 취급할 예정이었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 국민이므로 징병은 하지 않고 자원 입대자만 받았다. 다만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합병되어 청년들이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 기타 서유럽, 남유럽,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계 외국인: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병력 부족 문제 때문에, 또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상징적인 카드로 받아들인 병력이다. 국가별 항목에서 후술한다.

그 외에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군이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 프랑스의 밀리스 프랑세즈, 그리스의 타그마타 아스팔리아스, 알바니아의 발리 콤버타르 등은 나치 독일의 괴뢰군이지 독일군에 속하는 외인부대가 아니다.

2. 국가 및 출신지역별 상세[편집]



2.1. 서유럽[편집]



2.1.1. 프랑스[편집]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먼저 항복한 후 독일에 병합된 알자스-로렌 출신자가 주를 이루었는데, 순수 독일계거나 부계 또는 모계 중 어느 한 쪽이 독일계인 경우가 많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 기 사예르에 따르면, 프랑스인 부모를 둔 자들은 전후 분류 과정에서 반역자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지만 자신처럼 독일인 어머니, 프랑스인 아버지를 둔 자들은 처형 대상으로는 분류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재입대하는 선에서 처분이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혼혈이 아닌 진짜 프랑스인들도 상당수 독일군에 참여하였다. 독일군에 입대한 프랑스인들은 원래 극우 파시스트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그저 군대에 다시 들어가 전투를 하고 싶어서 입대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에 등장하는 한 프랑스인 장교는 "어느 군대건 상관없다! 내 휘하에 다시 포병 중대가 들어온다는 게 중요해!"라는 멘트를 남긴 바가 있다.

전쟁이 끝날 때 샤를마뉴 사단 소속 무장친위대원 12명과 국방군 소속 프랑스인 대원 1명이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프랑스군 2기갑사단 병력에게 포로가 되었다. 르클레르가 이들을 심문하면서 "왜 독일 놈들 옷을 입고 있나!"하고 질책하자, 이들은 도리어 "그러는 댁은 왜 양키 놈들 옷을 입고 있소?"라고 패기 있게 대꾸했고, 이에 르클레르는 12명에게 재판이 없이 즉결 총살형을, 즉 포로학살을 저질렀다.[4] 시체도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 버려둬서, 사흘 후에 지나가던 미군이 보고 묻어줬다고.

무장친위대 57/58 무장산악엽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1.2. 벨기에[편집]



2.1.2.1. 플란데런[편집]

무장친위대 66/67/68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1.2.2. 왈롱[편집]

무장친위대 69/70/71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1.3. 영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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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유군단 Britisches Freikorps

영국과 영연방 출신으로 구성된 독일의 선전용 부대였다. 독일의 처칠 암살 음모를 다룬 《독수리는 날개치며 내렸다》에도 영국계 친위대가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2.1.4. 네덜란드[편집]


무장친위대 48의용장갑척탄병 연대 "자이파르트 장군", 49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드 로이테르", 83/84 의용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2.2. 북유럽[편집]



2.2.1. 노르웨이[편집]


나치 부역자이자 매국노인 비드쿤 크비슬링이 주도하여 편성. 무장친위대 23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노르게"로 편성되었다.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2.2.2. 덴마크[편집]


무장친위대 24의용장갑척탄병 연대 "단마르크"로 편성되었다. 또 Frikorps Danmark 라는 외인부대도 만들어져서 운용됐다.

2.2.3. 라트비아[편집]


무장친위대 32/33/34/42/43/44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42연대는 '볼데마르스 바이트', 43연대는 '힌리히 슐트'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2.2.4. 스웨덴[편집]


개인 자격으로 무장친위대에 지원한 반공주의자가 100~180여 명 정도 되었다. 스웨덴인 최초 무장친위대 지원자는 한스 발데마르 린덴으로, 디프테리아에 감염돼 1941년 12월 30일 우크라이나에서 병사했다.

2.2.5. 에스토니아[편집]


무장친위대 45/46/47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총 복무 인원은 3만 명에 달한다. 이중에서 4명이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의 활약이 유명하다.

처음에는 비킹 사단에 배속된 나르바 대대 하나였으나 부대 규모가 증강되면서 추가편성되고, 궁극적으로는 제20무장척탄병사단으로 확대된다. 마지막에는 체코 전선까지 밀려나서 체코 파르티잔에게 죽거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군 점령하의 다른 여러 지역이나 괴뢰국들과는 달리 에스토니아는 국군을 조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에스토니아인들이 소련군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친위대 입대 뿐이었다. 이렇다보니 에스토니아인들은 독일군 복무를 소련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나 필요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라트비아와 함께 에스토니아는 무장친위대 복무 경력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다만 소련군에 맞서고는 싶지만 끝끝내 독일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한 에스토니아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이웃한 핀란드군에 지원하여 핀란드군 소속으로 참전하였다.



에스토니아인 대대의 군가. 원곡은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독일공군 콘도르 군단의 군가인 <콘도르 군단의 분열행진곡>으로, 개사한 것이다. 가사 번역은 여기를 참조.

2015년에는 에스토니아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 개봉하기도 했다. 제목은 1944. 에스토니아 독일군 부대 뿐만 아니라 소련군 소속 에스토니아 부대 또한 다룬다.


2.2.6. 핀란드[편집]


핀란드와 독일의 협력국이긴 했으나 핀란드가 독립국인 이상 핀란드군 자체는 독일군과는 독립된 명령체계를 유지했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무장친위대인 노르트란트 사단에 소수의 핀란드인 병사들이 지원하여 복무하였다. 이들은 계속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다수가 핀란드군으로 복귀했으나, 소수의 신원 미상의 핀란드 장병들이 끝까지 무장친위대에 남아서 베를린 공방전까지 참전했다. 이들의 최후는 잘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분을 숨기고 도망친 극소수의 장병들을 제외하면 베를린에서 전원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2.3. 동유럽[편집]



2.3.1. 루마니아[편집]


SS제2루마니아 연대로 편성.

오토 스코르체니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오데르 전선에서 자기 휘하에 루마니아인 연대가 있었는데, 적진에도 소련군과 연합한 루마니아 왕국군이 있어서 루마니아인들끼리 치열하게 동족상잔을 벌였다고 한다.


2.3.2. 크로아티아[편집]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었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명목상 독립국으로 독자적인 국군과 크로아티아판 무장친위대인 우스타샤 민병대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상당한 숫자의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국방군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1개 연대가 있었다. 전쟁 중후반 무렵에는 국방군에는 크로아티아인 3개 사단, 무장 친위대에는 2개 사단이 존재했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인구규모 상으로 크로아티아계인구가 300만을 좀 넘던걸 감안하면 나치 독일은 그야말로 크로아티아의 인력을 골수까지 알뜰하게 뽑아먹은 셈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크로아티아 국군의 병력 운용에 심각한 차질을 주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패망 직후에 독일의 소련 침공이 개시되었고 이때에 크로아티아인 1개 연대가 독일국방군에 편성되어 침공에 가담했다. 크로아티아인 연대는 독일 국방군 제369 보충연대로 편성되어 독일 제100 엽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연대는 청색 작전에도 참가하였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멸한다.

전쟁 중반인 쿠르스크 전투의 실패 이후 독일은 완전히 수세에 내몰리게된다. 병력 보충을 위해 독일군은 크로아티아 국군으로부터 인력을 넘겨받아 제369[5], 373, 392의 세개 보병사단을 편성한다. 각 사단은 크로아티아인 약 8,000명과 독일군 간부 약 3,000명 수준으로 구성되어 사단 인원이 12,000명 정도 되었다. 앞선 크로아티아 보충연대는 대부분 이념적인 이유로 소련 침공에 자원한 의용군이어서 전투의욕이 높았다. 이에 반해 새로 편성된 크로아티아 사단들은 독일이 수세에 몰린 전쟁 중반부 이후에 편성되었고 전투의욕이나 능력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 사단들은 원래 동부전선에 투입하려 했다. 하지만 전투력이 신통치 않다보니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에서 다른 크로아티아 국군 및 우스타샤와 함께 대파르티잔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무장친위대에서는 제13무장산악사단이 "크로아티아 1사단"으로 불렸으나 주력은 보슈냐크인들이었고 크로아티아인은 일부에 국한됐다. 예하에 27/28 무장산악엽병 연대가 크로아티아 연대라는 깃발을 달고 있었다. 한트샤르 사단의 편성은 무장친위대에서 최초의 비독일, 비게르만계 사단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장친위대가 점령지 현지민들 및 포로들을 대거 받아들여 급격하게 양적팽창을하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장친위대 55/56 무장산악엽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우스타샤는 파르티잔과 소련군을 상대로 광신적이기까지 한 저항을 최후까지 이어갔다. 반면에 독일군 내 크로아티아인 부대들은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며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으로 치닫자 대부분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항명이나 탈영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심지어는 군사반란까지도 일어나기도 했다. 이들 크로아티아계 부대는 종전 이전에 해산되거나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파르티잔과 유고슬라비아로 송환되었고 상당수는 포로 인계 직후에 학살당했다.

지상군 외에도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공군 및 대공포부대가 독일국방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2.3.3. 알바니아[편집]


무장친위대 50/51 무장산악엽병 연대, 21 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알바니아 1사단)로 편성되었다.


2.3.4. 불가리아[편집]


SS제1불가리아 연대로 편성함.

2.3.5. 헝가리[편집]


무장친위대 61/62/63/64/65/85 무장척탄병 연대, 제1헝가리 돌격엽병연대로 편성되었다.


2.4. 남유럽[편집]



2.4.1. 스페인[편집]


스페인 내전을 지원한 독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 그리고 공산주의 맹주 소련을 치는 데 대한 공감의 표시로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스페인인 부대는 높은 전투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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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은 청색사단 문서 참조.

루프트바페에는 일부 조종사들이 의용비행대를 결성하여 참전하였다. 5차에 걸쳐 총 89명의 조종사가 참전했고 출격 3천회, 159기 격추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은 전원 동부전선에서 싸웠는데, 소련군에 속해 있는 옛 공화정부군 소속 망명 파일럿들과 조우하여 서로 스페인어로 욕지거리를 퍼부어 가면서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크릭스마리네에 입대한 인원들도 있다. 해군 함정 승조원으로 복무, 수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원사 이상 상급 부사관까지 진급한 경우도 있다.


2.4.2. 이탈리아[편집]


해군 장병 일부가 복무한 사례가 있다.
무장친위대 81/82 무장척탄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2.5. 소련 출신[편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은 동부 전선의 소련 점령지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력을 징발하였다. 또한 소수민족탄압이나 공산정권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자발적으로 독일군 편에 선 소련출신들도 많았다. 독일 국방군무장 친위대 모두 소련출신 인력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무장친위대를 제외하고 국방군에서 복무하거나 편입된 장병 및 군속만 해도 600,000명에서 1,400,000명까지 추산된다. 독일의 인력이 점차 한계로 치닫던 전쟁 중반 무렵쯤 부터는 독일군의 일선 사단 하나하나에도 수백 수천의 소련군 포로 출신 또는 현지인 군속이 배치되어 있었다. 비러시아계의 경우에는 동방 대대나 별도의 동반 군단으로 편성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많은 점령지 주민이나 소련군 포로들이 독일의 산업체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2.5.1. 러시아[편집]


소련 포로 출신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 조직한 육군ROA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외에도 카민스키 여단 등 독일군 편에서 싸운 러시아인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전쟁 내내 독일군은 대부분의 러시아인 포로를 처형하거나 방치해서 죽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독일군에 지원하는 이들은 받아들여 활용했다. 다만 이들을 별도 부대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미군카투사를 쓰는 것처럼 독일군 부대에서 보조요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히비(Hiwi, Hilfswillige힐프스빌리게(부역자)의 약자)라고 부른다. 후방에서도 방공부대의 대공포 조작요원으로 투입된 수도 많다.

당연히 전투 중 독일군에 투항한 소련군 포로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독일군에 자원한 자들은 특수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처음부터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 망명해 살고 있던 백계 러시아인들이나, 아니면 소련군 포로 중 정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2.5.1.1. 타타르[편집]

크림 타타르: 동방부대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1.2. 다게스탄[편집]

동방부대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1.3. 레즈긴인[편집]

동방부대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1.4. 잉구시[편집]

동방부대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1.5. 체르케스[편집]

동방부대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1.6. 체첸[편집]

동방부대캅카스 무슬림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2. 우크라이나[편집]


우크라이나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국방군에서는 특수작전을 맡은 브란덴부르크 사단에 속한 우크라이나인 장병들이 많았다, 무장친위대에서는 주로 서부 우크라이나 출신의 지원병으로 1개 보병사단 '갈리치엔'을 편성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29/30/31 무장척탄병 연대가 포함되었다. 상세한 사항은 제14무장척탄병사단 항목 참조.

그 외에 강제수용소 경비원으로 복무하거나 우크라이나 방위군 등 현지인들이 조직한 군사조직에 속해서 독일군에 협력하여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한 우크라이나인들도 많다. 이 "치안 유지"가 빨치산 토벌이나 유대인 학살 임무인 것이 문제. 동방부대자유 우크라이나 군단으로 편제된 인원도 5만 명에 달하며, 무장친위대만큼 잔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 650명이 국방군 첩보부 휘하의 롤란트 대대에서 근무하였다.


2.5.3. 카자크[편집]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에 의해 탄압받았던 카자크들은 처음에는 독일 국방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였고[6] 백군 출신 카자크인들은 나치 독일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포로가 된 붉은 군대의 장교들 가운데서도 카자크 출신 반공주의의 장교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이반 코노노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우크라이나 방면에서 포위당하자 항복하고 자신의 병력을 독일과 함께 반공투쟁에 참여하고 싶은 의사를 내비쳤다.

카자크들 또한 슬라브인의 일종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카자크뿐만 아니라 동유럽계열 민족의 지원자 부대를 회의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령지의 파르티잔의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중부후방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막스 폰 셴켄도르프 보병대장의 지원으로 이반 코노노프의 부대를 바탕으로 600 카자크 기병연대를 창설, 파르티잔 토벌에 활용하였고 파르티잔을 상대로 카자크 특유의 무자비한 방식으로 토벌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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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카자크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괴벨스

이후 파르티잔 토벌에의 카자크 기병대의 적합성 등의 이유로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카자크 부대의 정식 창설을 허락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괴벨스에게 카자크인 부대의 창설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괴벨스는 선전용에 적합할 것을 고려하여 동의하였었다. 괴벨스는 선전을 위해서 카자크들은 물론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러시아 해방군을 조직하는 데에도 동의한 바 있었다.

적백내전의 패배 이후 독일로 도피·추방되어왔던 백계 카자크인 표트르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시쿠로 장군의 도움 속에서 헬무트 폰 판비츠 소장의 지휘 아래에 1943년, 제 1 카자크 기병사단을 창설한다. 이때 코노노프의 기병연대도 사단에 포함되었고 코노노프의 부대를 제외하고 제 1카자크 기병사단의 대부분이 일선 부대 지휘관은 카자크인이 맡았지만 연대장 이상은 독일인들이 맡았었다. 부대 구성은 거의 15000 여 명의 카자크인과 5000 여 명의 독일인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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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nCossack.png
1 카자크 기병사단 마크
돈 카자크 기병부대의 깃발과 부대마크
파일:코자키.png파일:코자키-시베리아.png
돈, 테렉, 쿠반, 시베리안 카자크의 마크
동유럽권에서 나치에 협조한 부대는 방패+X자형 디자인을 채용했다.
  • 제 1 카자크 기병사단
    • 제 1 카자크 기병여단 "돈(Don)"
      • 제 1 돈 카자크 연대
      • 제 2 세르비아 카자크 연대
      • 제 4 쿠반 카자크 연대
      • 제 1 카자크 기마 포병 대대
    • 제 2 카자크 기병여단 "코카서스(Caucasus)"
      • 제 3 쿠반 카자크 연대
      • 제 5 돈 카자크 연대 - 연대장 이반 코노노프 중령
      • 제 6 테렉 카자크 연대
    • 사단 직할대 - 55 정찰대대, 55 포병대대, 55 공병대대, 55 통신대대, 55 보급대대, 55 의무대대

이들은 지속적으로 소련군의 카자크 포로들 가운데서 충원되었으며 사상적으로 반공사상이 아닐지라도 불합리한 포로처우보다는 본업인 말이라도 타는 게 좋았기 때문에 투항한 이들도 있었고, 엄연히 국방군 소속 군인이기 때문에 월급도 나오므로 자발적으로 부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대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3만 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주로 파르티잔 토벌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공산 파르티잔의 수장이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추적하는 기사의 도약 작전(Unternehmen Rösselsprung)[7]이 대표적인 참가 작전이었다. 역시나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마을들을 황폐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무자비함을 다시 한번 떨쳤으며 나중에 이러한 전쟁 범죄로 인해서 대부분 처벌 받는다. 다만 별개로... 전후 대부분 모스크바로 송환되어 대조국을 배신한 댓가로 죽는게 더 큰 이유였지만.

1944년이 되면서부터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즉 독일군이 점차 서부로 몰려가면서 제 1 카자크 사단을 마냥 파르티잔 토벌에만 투입시킬수는 없었고 결국 크로아티아의 피토마차라는 곳에서 소련군 제 233보병사단과 교전을 펼쳐서 거의 궤멸상태로 방어에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44년 11월, 전쟁이 독일의 멸망으로 흘러가는 즈음 SS은 독일 국방군 내의 외국인부대를 SS 휘하로 두면서 1 카자크 기병사단을 2개 사단으로 증편하면서 15 SS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재편한다. 하지만 사실상 SS에 속했던 기간은 2개월 정도에 불과하고 그 때문에 제복이나 계급체계 또한 기존의 국방군 예하에 있던 그대로 유지하였다. 1945년 4월, 다시 러시아 해방군의 소속으로 편제가 옮겨지면서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변경되고 러시아 해방군 산하에 15 카자크 기병군단에서 분할되어 러시아 출신 니콜라예비치 도마노프 소장이 지휘하는 독립 카자크 군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거의 2차대전의 마지막 단계인 와중에 부대의 증편, 지휘 체계의 변동 속에서 별다른 활약없이 종전을 맡이하게 되고 저마다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서쪽으로 가서 영국군에 체포되었으나 얄타 회담에서 어느 정도 사전 협의를 봐뒀던 영국과 미국은 결국 카자크들을 대부분 소련으로 송환하였고 조국을 배신한 죄목으로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굴라크에서의 노동교화형을 받는다. 소위 "카자크의 배신" "린츠 대학살" "카자크의 비극"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2.5.4. 아르메니아[편집]


동방부대아르메니아인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5. 아제르바이잔[편집]


동방부대아제르바이잔인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6. 조지아[편집]


동방부대조지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7. 우즈베키스탄[편집]


동방부대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8. 카자흐[편집]


동방부대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5.9. 투르크멘[편집]


동방부대투르키스탄 군단으로 편제되었다.


2.6. 아시아[편집]



2.6.1. 인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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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 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이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입대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구성할 숫자는 당연히 되지 못했다. 이에 독일군 당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을 한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000명 규모로 부대가 편성되었다.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가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자유인도군단은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다.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대원의 2/3는 무슬림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으며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

이들 인도인 부대는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으로 대서양 방벽을 지키는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무장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간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자유인도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된다. 인도국민군 장병들도 이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2.6.2. 아랍[편집]


  • 독일-아랍 교도대대(Deutsche-Arabische Lehr Abteilung): 1941년 6월에 그리스 소니움(Sonium)에서 편성했다. 구성원은 주로 포로수용소에서 지원한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소속 아랍인 병사들이었고, 이 부대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아민 알 후세이니와 전직 이라크 총리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갈등을 벌였다.
1942년에는 287 특수임무부대(Sonderverband 287)에 편입되어 아랍 국가에 침투하는 작전을 위해 9월에 코카서스로 배치되었으나,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11월에 시칠리아팔레르모로 이동했다. 1943년 1월에는 다시 튀니지로 이동해서 경비나 공사작업에 투입할 아랍인 보조부대[8]를 모병하는 임무를 받았다. 5월에 튀니지 교두보가 항복할 때 이들도 모두 항복했다.

  • 독일-아랍 845대대(Deutsche-Arabische Bataillon Nr 845): 북아프리카로 보내지지 않은 독일-아랍 교도대대 잔여병력을 기간으로 편성했다.

2.6.3. 중화민국[편집]


장제스의 둘째 아들인 장웨이궈가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1936년에 졸업하고 독일 국방군에서 복무했다. 산악전 부대로 훈련을 받았으나 안슐루스에는 전차대를 지휘해서 참가했고, 폴란드 침공에도 투입 명령을 받았으나 출동하기 전에 본국으로 소환되어 독일군에서 나갔다.


2.6.4. 한국인 독일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르망디의 한국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7. 미국[편집]


독일 국방군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독일계 미국인이 있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등장한 독일군 포로처럼 미국이 참전하기 전, "조국인 독일이 싸우고 있으니까" 귀국하여 참전한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게 문제였다. 이중에는 육군 제320보병사단 소속인 뉴욕 태생의 보이 리커머 보병소위[9]처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용맹히 싸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에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다. 1940년 5월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SS대원 5명이 있었던 것이 문헌으로 확인되나 그 이후에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SS에 소속되어 있다가 전사한 미국인은 최소 8명은 된다고 한다. 무장친위대 소속 미국인으로는 프랑스 의용군 부대 LVF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1945년에 전사한 루이지애나 출신 피터 델라니[10]같은 사례도 있다.

독일군, 특히 무장친위대 복무자의 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미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무장친위대 복무자들을 색출해낸 영국 정부나 거의 다 죽여버리거나 굴라그로 보낸 소련과 달리 달리 나치 독일에 대해 별다른 원한이 없던[11] 미국 정부는 이 문제로 전후 독일인들의 반감을 필요 이상으로 살 생각이 없었고, 애초에 핵심 전범들이나 반인륜 범죄에 자발적으로 가담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적당한 선에서 징역 한두 해 살리고 다 사회로 보내버리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석방했고, 나중에 미국으로 귀국해도 모른척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복무했는지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다만 무장친위대 내 미국인 부대로 잘 알려진 조지 워싱턴 여단은 영국 자유군단이랑 다르게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고, 미국인 부대 자체가 편성된 적이 없다. 별도 부대를 편성할 만한 인원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어차피 다 독일계니 그냥 독일인 부대에 섞은 듯하다.


3. 말로[편집]


대개 조국에 대한 배신자들이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경우라도 그 말로는 대개 좋지 못하다. 조용히 숨어서라도 살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국이 히틀러 때문에 쑥대밭이 된 나라라면 반역자로 처형당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영국 의용군과 프랑스 의용군들은 대부분이 처형되었고, 100만이 넘는 소련군 출신 독일군 부역자와 전향한 의용군들도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끌려갔다가 스탈린 사후에야 사면되었다.

다만 소련측의 부역자 처벌은 미국을 빼면 연합국 중에서는 놀랍게도 생각보다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에스토니아에서는 지금도 무장친위대 출신자가 존경을 받는다. 소련 시절에 목숨을 건져서 살아남았다는 그 말이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3국은 소련/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군에 입대하는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 나라들은 무장친위대 복무 경력을 자랑스럽게 떠벌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에스토니아 영화 1944를 보면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무사히 살거나 독일, 미국등 타국으로 이민을 간 의용병들도 적잖다. 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는 했으나 전쟁범죄나 원한 살 짓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해당되는데, 냉전시기 깃발 바꿔 다는 데 성공한 자들은 이전의 지위까지도 유지한다. 잊혀진 병사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고국으로 돌아가 회고록 집필을 하고 만화가로 살았으며 비킹사단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핀란드인 올로프 라구스는 1943년 고국으로 귀환하여 핀란드군으로 계속전쟁에 참전하여 돌격포병으로 활약, 후엔 은행가로 생을 마쳤다. 심지어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했던 핀란드인 라우리 퇴르니는 미국으로 귀화해 래리 알란 쏜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MACV-SOG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12]. 그 외 상당수의 의용군이 처형당하지 않고 평범한 말년을 보내고 생을 마쳤다.

4. 창작물에서의 등장[편집]



  • 잭 히긴스의 소설인 독수리는 내리다에는 하비 프레스턴이라는 영국인 출신 무장친위대 소위가 등장한다. 영국인 부대인 영국 자유군단소속으로, 됭케르크 철수작전 때 낙오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했다. 독일의 승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진짜 부역자다.
작중에 등장하는 가공의 작전인 처칠 암살작전에 "진짜 영국인으로 보일 대원"이 더 필요하다는 힘러의 판단에 따라 차출, 팔슈름예거 특공대와 함께 투입되지만 원래 쓰레기에 가까운 인간이라 작전 중에 동료나 주민과 몇 차례나 트러블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자기가 괴롭혔던 마을 주민에게 목이 졸려 죽는다.
  • 후속편인 독수리는 날아오르다에서는 조지워싱턴 여단[13] 소속 미국인 조종사가 등장한다. 본래는 웨스트포인트까지 졸업한 미 육군 항공대장교였으나 술집에서 상급자인 소령을 구타하는 바람에 불명예 제대당하고, 집에서 놀다가 2차 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유럽으로 갔다. 상관을 폭행한 전력 때문에 영국군에서 입대를 거절당하자 겨울전쟁을 치르는 핀란드로 가서 의용군으로 참전, 소련기 7기를 격추한 에이스가 되었다.
분명 핀란드 공군 소속이지만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독일군에게 넘겨진다. 결국 동부전선에서만 복무한다는 조건부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했고, 조종솜씨가 너무 좋아서 전선 비행단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대신 높으신 분들을 태우는 연락 임무만 맡다가 차출되어, 전편의 처칠 암살작전에서 죽지 않고 포로가 되어 런던탑에 갇혀 있는 특공대 지휘관 쿠르트 슈타이너 중령을 구출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작전을 성공시킨 후 슈타이너와 함께 독일을 탈출, 아일랜드로 간다. 그 뒤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상륙전에서 벙커에서 나와 살려달라고 하는 독일군 병사들이 체코인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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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같은 추축국 세력인 이탈리아나 헝가리, 루마니아 같은 국가들 외에도 크로아티아 같은 민병대까지 다양하게 독일과 함께 싸웠지만 연합국 같은 열강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나라는 독일 뿐이였고 대부분 루마니아처럼 전선만 채우거나 이탈리아 처럼 괜히 쓸모없는 전선만 늘려 오히려 밥 값도 못하는 나라들 이였다.[2] 왈롱계는 네덜란드계와 구별되어 차별을 받았다.[3] 단 우대한다고 해도 여전히 점령지에서의 반발이 거세었고, 전쟁 말기에는 무차별적으로 징집 할려고 해서 노르웨이 독립군들이 징병소를 불태우는 등 호락호락하게 따르지 않았다[4] 자기 친구 아들이었던 1명은 빼돌려서 살려줬다고 한다. #[5] 앞서 전멸한 제369 보충연대의 단대호를 계승했다.[6] 물론 이후 독일군이 해방자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자 앞다퉈 소련군에 입대하거나 게릴라가 되었다. 이는 소련 내 타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7] 오토 스코르체니도 이 때에 참여하였다.[8] 이들은 비시 프랑스군 군복과 소총을 지급받았다.[9] Boy Rickmers, 1895~1957. 이 사람은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해서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8년에 국방군으로 옮겨간 골수 나치이기도 했다. 1943년에 기사십자장을 수훈할 당시 소속 연대는 586 척탄병 연대였다.[10] Peter Delaney. 조상이 프랑스계라고 해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Pierre de la Nay du Vair라고 바꾸고 입대했다. SS-Haupsturmführer(상급돌격대지도자. 국방군 대위에 상당한다)까지 진급.[11] 애초에 두 나라와 다르게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이 아닌 일본이 제공했다. 물론 그 전에 독일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었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미국인들의 직접적인 원한 자체는 독일보다는 일본에 더 극심했다.[12] 다만 침투작전 중 실종, 사망처리되었다.[13] 실존하지 않는 부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