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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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영토분쟁
3.2. 무역 전쟁
4. 해결
5. 후폭풍



1. 개요[편집]


1925년 1월부터 1934년 3월까지 독일국폴란드 간에 벌어진 무역전쟁.

2. 배경[편집]



2.1. 베르사유 조약[편집]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독립을 쟁취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에는 베르사유 조약에 이들 패전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패전국으로 수출하는 물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일방적으로 면제해야 한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이 조항은 영국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1차 대전의 패전국들, 특히 독일은 매우 치욕스럽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2.2. 폴란드[편집]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립한 폴란드(폴란드 제2공화국)는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였으며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특히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승전으로 폴란드의 영토가 2배로 급증하면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소수민족이 대량으로 늘어났다.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폴란드인은 전체의 2/3를 조금 넘는 정도였다. 특히 폴란드 제2공화국 인구의 17%를 차지한 우크라이나인과 인구의 3%를 차지한 독일인은 당시 폴란드의 최대 난제였다.[1] 폴란드 제2공화국 땅에 사는 독일인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정부 전복을 시도했으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인구 수를 담보로 폴란드 의회에 의석을 확보하며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폴란드의 실권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2]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소수민족 포용정책을 펼쳤지만, 폴란드의 내각은 피우수트스키의 생각만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폴란드 제2공화국 주요 정치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와 반독일 정서가 매우 강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과의 무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폴란드의 산업시설들에서 나오는 공산품들은 당연히 독일로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폴란드의 농산물 수출에 대해서는 폴란드가 워낙 주변국과 전쟁을 많이 해서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나쁘다 보니 소련,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뭐 하나 수출하기 만만한 나라가 없었고 이 나라들은 당연히 폴란드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어 폴란드 제품에 대대적인 관세장벽을 걸었다. 그나마 폴란드와 사이가 좋은 헝가리 왕국이나 루마니아 왕국은 애시당초 농산물 수출국이었기에, 굳이 쌩돈 들여 폴란드에서 농산물을 수입할 리가 없으니... 결국 폴란드의 농산물과 공산품은 폴란드와 가깝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무관세가 보장되는 독일로 흘러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2.3. 독일국[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후 수립된 오스트리아 공화국헝가리 왕국은 워낙 할양한 영토가 많고 약소국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무관세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독일은 사정이 달랐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와 달리 세계 대전 이전에도 독일인단일민족국가에 가까웠던 나라라[3]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소수민족 거주지역을 일부 떼어냈음에도 아직 저항할 만한 국력이 충분했던 국가였다.

당시 독일의 목표는 폴란드가 차지한 옛 독일 영토를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되찾고 나아가 폴란드 전토를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초반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권을 잡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가톨릭 중앙당 등 사실상 독일의 모든 정파가 언젠가는 폴란드를 멸망시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폴란드를 고깝게 보는 상황에서 독일이 폴란드에 물건 팔 때 관세가 부과되고, 반대로 폴란드의 물건이 독일로 들어오는 데에는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는 베르사유 조약은 폴란드에게선 이득이 되어 매우 좋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당연히 손해이기에 그야말로 속이 터지며 천부당 만부당한 조항이었다. 무관세를 적용한 베르사유 조약 경제조항에 대해서 독일 입장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격렬한 반대가 터져 나오는 시점이었다.

3. 전개[편집]



3.1. 영토분쟁[편집]


결정적인 위기상황은 상부 실레시아(슐레지엔/실롱스크/슬레스코) 분쟁에서 터졌다. 상부 실레시아 영토 분쟁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상부 실레시아의 73%를 독일에, 25%를 폴란드에, 나머지 2%를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시켰다.

독일 입장에서는 이때 폴란드에 넘어간 25% 지역이 인구의 40% 넘게 살고 상부 실레시아 전체 산업시설의 80%가 위치한 핵심지역이었고 그 중에는 카토비츠와 쾨니히스휘테, 루블리니츠 등 독일 쪽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이 있었다는 점이 억울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계가 더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들은 독일 표가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도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농촌 지역은 폴란드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대다수가 독일에 잔류하게 된 것이 불만이었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주민투표 결과 때문에 주민투표를 주도한 협상국도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국제연맹의 중재를 통해 1922년 제네바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자 간의 합의로 겨우 이뤄낸 결과였으나 양국이 모두 만족할 해결책은 아니었다.

1924년 10월 26일,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에서 처음으로 폴란드에 대한 무역 공격 사설이 나왔다. 해당 사설에서는 '폴란드의 무례함을 짓밟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매기고 이를 통해 폴란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한스 루터 독일 수상은 1924년 11월 비밀리에 폴란드산 물건에 대한 수입거부 조치 준비를 지시했다.

3.2. 무역 전쟁[편집]


상부 실레시아의 73%만 차지하게 된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1925년 1월 6일부터 폴란드의 석탄, 철광석강철에 대해 무관세를 철폐하고 수입을 거부했다.

이 조치에 폴란드는 반발하며 난리가 났고,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Władysław Dominik Grabski) 수상이 독일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독일의 빌헬름 마르크스 수상도 이에 질세라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 며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시아 전체[4][5]를 폴란드가 독일에게 돌려줄 때까지 수입거부와 관세를 유지한다." 고 발표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단 한 뼘의 영토도 줄 수 없다며 버텼다. 특히 독일이 무역 전쟁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이 명백해지자 폴란드 역시 가만있지 않고 1925년 5월 독일산 공산품에 대해 대대적인 보복관세를 매겼다. 그러자 독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1925년 6월 폴란드의 모든 제품에 대해서 최소 50%~최대 200%에 달하는 수입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국가 무역의 40%를 독일에 의존하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반발했으나 독일의 조치에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25년 7월이 되자 폴란드는 독일에게 영토 문제에 대한 협상을 할테니 무역 전쟁을 철회하자고 제안했지만 독일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시아의 즉각적인 전체 반환 없이는 일체의 협상도 없다." 며 단칼에 거절했다. 1925년 8월 당시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제국은행)의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는 "폴란드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약간이라도 늦춘다면, 독일이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고 당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한테 진언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폴란드와의 협상 시도 자체를 중단할 것을 내각에 요청했고, 이는 그대로 승인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폴란드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청했다. 마침 1926년에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혹독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동정적이었고, 때문에 국제연맹은 "독일과 폴란드의 평화적 해결을 주문한다"며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국제연맹에서는 세계 대공황 때까지 무역 전쟁의 결론을 못냈다(...).

3.3. 대공황[편집]


1929년 9월 대공황이 터지자 결국 무역 전쟁은 돌이킬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독일, 폴란드 둘 다 대공황으로 인한 후폭풍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 더욱 더 보호무역 조치를 강화했고, 이 때문에 양국의 무역량은 바닥을 치게 됐다. 결국 독일과 폴란드는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 더욱 큰 GDP 하락을 보이게 된다. 특히 독일보다 폴란드가 심각해서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총액 GDP는 20.7% 감소했고 실업률은 47%까지 증가했다.

대공황이 터지면서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나치당독일 공산당의 세가 급격히 커지고 독일 사회민주당가톨릭 중앙당은 정치력을 상실한다. 결국 독일 내부에서는 '폴란드와의 협상? 그거 먹는 건가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4. 해결[편집]


놀랍게도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비해 폴란드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이 재군비도 안 한 상황에서 폴란드와 무역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당시 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한테도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먼저 당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폴란드 국가원수 앞으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해결하자는 전보를 보내고, 이를 받은 피우수트스키가 즉시 폴란드 정부에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1933년 10월 먼저 독일이 최고 200%까지 매겼던 폴란드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고, 폴란드 역시 11월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췄다. 그 상태에서 독일과 폴란드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고, 부속 조약으로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은 1934년 3월 2일부로 효력을 발휘했고,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무려 9년 2개월만에 해결이 됐다.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공산품에 대해서는 상호 무관세, 농산물에 대해서는 상호 5%의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5. 후폭풍[편집]


독일과 폴란드 모두 무역 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단 독일은 끝내 폴란드에게서 요구한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다. 무역 전쟁을 9년이나 지속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 땅에서 사업을 하던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도 무역 전쟁으로 외화 수입이 끊기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어 1920년대에 시작하려 했던 공업화를 한참 뒤로 미뤄야 했고, 1933년까지 농업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폴란드는 독일과의 무역 전쟁이 해결되고 나서 '히틀러가 장기적으로 폴란드와의 화평 분위기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히틀러를 진정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폴란드가 시간은 벌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던 게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총리들은 아예 폴란드와의 무역 협상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우치 - 르부프 라인에 이른바 '중앙 산업지구'라고 하는 대대적인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또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주데텐란트를 뜯어낼 때도 가담해서 한입 뜯어먹는 등 독일과 협조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이지만 필요하면 협조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독일은 폴란드를 집어삼키겠다는 목표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히틀러에게도 폴란드는 1차 세계대전으로 갑자기 생겨난, 없어져야 할 나라에 불과하였다. 결국 1939년, 히틀러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1939년 3월 1일부로 파기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폴란드에서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불가침조약 파기를 유지했다. 그런데 정작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은 계속해서 유지했다(...). 6개월 후에 폴란드를 통째로 먹으면 되기 때문

아돌프 히틀러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소련 모스크바에 보내서, 1939년 8월 24일 이오시프 스탈린폴란드를 나눠먹자는 조약을 맺었다. 폴란드의 운명은 독소 불가침조약이 발표된 그 순간 정해져 버렸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당연히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고, 이는 곧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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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외로 제2민족인 유대인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면 적대적인 이웃민족에 둘러싸여 눈칫밥 먹으며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지배 국가에 충성하며 어떻게든 안전을 보장받는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폴란드가 유대인을 잘 보호하거나 우대한 것은 아니었다.[2]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1926년에 발발했다.[3] 독일인이 90% 이상, 최대 소수민족인 폴란드인은 5% 정도였고, 그 외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덴마크인이나 프랑스인도 소수민족으로 일부 존재했다.[4] 다만 포젠(현 포즈난)은 이미 독일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인이 더 많이 살았기에 딱히 독일도 반환 요구를 하지 않았다.[5] 전후 폴란드가 가져간 카토비츠 지역은 오버슐레지엔의 주도다. 이 지역을 빼앗긴 이후 독일은 오버슐레지엔의 주도를 오펠른으로 옮겼으니 자신들의 영토의 주도를 빼앗은 폴란드에 대한 악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