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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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국산 1위 흥행 영화
1962년
연산군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4년
빨간 마후라[1]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The Marines Who Never Retur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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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강미애
감독
이만희
각본
장국진
제작
원선
기획
전석진
촬영
서정민
조명
장기종
음악
전정근
편집
김희수
제작사
대원영화주식회사
개봉일자
1963.04.11
관람인원
227,800명
상영극장
국도극장
상영등급
국민학생이상관람가
상영시간
109분

1. 개요
2. 줄거리
3. 영상 자료
4. 사회상
5.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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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4월 11일에 개봉한 영화로 빨간 마후라와 함께 60년대 한국 전쟁영화의 양대 산맥이다. 당시 여러 전쟁 영화들 중에서 군계일학적으로 돋보이는 수작. 현재 기준으로 봐도 이 영화는 이념을 떠나 전쟁의 비극과 위기에서 보여지는 인간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이만희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제1회 청룡영화제 감독상 수상. 주연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독고성. 나중에 출연 배우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두 명이나 나왔다.[2]


2. 줄거리[편집]


한국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해병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 제1해병사단으로 추정되는(정확히는 제1해병연대전투단) 해병대의 한 소대의 이야기를, 소속 1개 분대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끌어 나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천(또는 서울) 탈환을 위한 시가전[3] 중 인민군에 의하여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인 영희[4]를 해병들이 구조하게 되고 해병들이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을 고려하여 몰래 키우게 된다.[5] 그러던 중 결국 대대장이 그걸 발견하지만, 대대장이 융통성있게 처리하여 영희는 오히려 분대의 마스코트로 승격되며, 후반에 최후의 작전 때는 같이 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대대장실에 감금하기도 한다.

그 후 잘 지내다가 사천강 전투 때[6]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퇴각이 여의치 않게 된 대대에서 가장 잘 싸우는 주인공들의 중대를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후위부대로 두고 떠난다.

그리고 분명히 소대가 있었을텐데 1개 분대만 골짜기 정중앙에 참호를 파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1명은 구조를 위한 전령으로 띄우고 나머지는 죽은 척하며 적 후방으로 들어가 숨는다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했으나, 어떤 칠칠치 못한 녀석이 쏘는 바람에 중공군 후발대가 이들을 발견하고 교전, 결국 격전 끝에 두 해병만이 살아서 귀환한다는 이야기. 전령 또한 살아남았으니 정확히는 3명.

결국 엔딩에서는 영희와 얼싸안고 우는 전령 아저씨와 후방이 된 참호에서 엉엉 울면서 걸어나오는 두 해병이 나오면서 끝난다. 제목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되었다.


3. 영상 자료[편집]





4. 사회상[편집]


  • 양공주: 미군만 상대하는 윤락업소에서 국군은 상대 안 한다고 하자 다 부숴버린 후에 파손된 기물의 몇배가 되는 돈을 주고 하려 하지만 옷벗는 와중에 소집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코미디언 구봉서와 옥신각신 하는 성깔 있는 접대부 역을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인 원로 가수 나애심이 맡았다.


  • 간첩: 후방에서 훈련 도중 간첩이 나타나는데 위 이야기에 나오는 해병이 싸다 발견한다. 이 똥싸던 해병도 역시 감초 역할인 구봉서. 인솔자인 분대장이 저격 수준의 사격 실력으로 폼나게 팔과 다리를 쏴 생포하고 포상을 받는다.

  • 마을 간의 반목: 당시 인민재판이나 여러 사상적 갈등으로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한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온다. 영희가 오빠라고 부르는 해병이 새로온 해병과 바로 멱살잡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고 보니 가족이 이념의 갈등을 겪은 케이스.

  • 민둥산: 신경 쓰고 보면 극중의 야외 풍경에 민둥산이 참 많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무라고 해 봐야 키작은 소나무 정도가 대부분이다. 옛날에는 생활 전반에 목재가 필요했으므로 남벌이 일상적이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각종 폭격과 전투에 많은 산이 황폐화 됐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숲들도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목재 채취에 탈탈 털려야 했다. 영화가 제작된 60년대 초반은 이런 모든 악조건들이 갖춰진 그야말로 민둥산의 절정기였다. 심지어 지리산에 남아있는 산림을 '도벌'하다 적발되는 것이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될 정도. 지금은 웬만큼 높이가 있는 산이라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것이 당연시 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황량한 민둥산들이 꽤 많았다. 다행히 60년대부터 시작된 녹화사업과 사회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30년 후에는 푸른 숲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점은 북한도 비슷했는데, 남한과는 달리 여기는 21세기까지도 민둥산이다. 게다가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려고 다락논까지 만들었다. 중국 쪽에서 보면 숫제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름마다 심해지는 풍수해는 덤이다.

  • 중공군: 영화의 배경인 사천강 전투는 1952년 3월부터 시작된 해병대와 중공군 사이의 공방전이었다.[7] 만약 북한군을 출연시켰다면 반공 메시지를 위해 북한군을 까는 묘사가 나왔을 것이고, 21세기 현재에 엄청난 비난을 받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8] 여기선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중공군을 등장시켜 단순히 싸워야 할 적군 이상의 역할을 주지 않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시에나 현재에나 연출적인 면에서 신의 한 수였다. 반공적인 메시지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용공적 메시지를 모조리 차단할 수 있기 때문. 이래저래 좋은 선택이었다.

5. 기타[편집]


촬영 당시 국내에서는 가짜 총보다 진짜 총을 구하기가 더 쉬워서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써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9] 이 때문에 촬영 당시 엑스트라 한 사람이 진짜 폭발에 휘말려서 그만 다리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이 보상금으로 강남 지역 농지 7마지기[10]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 강남 개발 당시 엄청난 값으로 팔려서 그 엑스트라는 거액을 벌었다는 후문이 있다. (씨네21 참고) 물론, 이건 카더라 통신이다. 아무튼 이 덕분에 사격 장면들 하나만큼은 정말 실감난다. 공포탄을 쏘는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총을 쏘면서 반동을 받는 게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신을 보면 당시 방한복을 비슷하게 맞춰서 입혀놓고 아무 무장도 없이 맨손으로 공격해온다. 아무래도 적성국 무기는 구하기 어려운데다 예산마저 열악했을 당시 사정상 그 많은 중공군 엑스트라들에게 총을 들려줄 여유까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인걸로 보인다. (사실 당시 중공군은 보급이 열악하였고 인해전술에서 중공군은 세명에 총한자루씩 주었다한다)그러나 중공군의 묘사가 뛰어난 편인데 중국말을 쓰거나 총기도 영국제 스텐 기관단총이나 소련제 pps-43이 나온다.[11]

다만 보통 총 쏠 일이 없는 엑스트라들에게는 나무를 깎아서 대충 비슷하게 만든 목총이라도 만들어 들려주거나 하는데, 딱히 총 쏘는 장면이 없고 멀리서 잡아주어 목총이 티가 안 날 법한 장면에서도 역시 엑스트라들이 총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예산이 워낙 열악하긴 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이 총쏘는 모습을 잘 보면 볼트액션 소총을 들려줬는데 스프링필드 M1903으로 보인다.[12]

권선징악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제였던 당시의 한국 전쟁영화와는 달리 전쟁의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애와 전우애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분대장(장동휘 분)이 살아남은 두 명의 해병에게 남긴 말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증인이 돼라.

수 많은 사람이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고.

인간은 반드시 전쟁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또한, 이 뿐만 아니라 영희가 작전에 같이 가겠다고 하는걸 못가게하고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연대장 방에 가둬놓고 가는데 지금 현재 전쟁터에서 영희만한 나이의 아이들을 강제로 징집해 총들려주고 전쟁터로 내모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의미를 알수 있다.

아무튼, 당시 서울관객 22만을 기록하여 당시 기준으로 꽤 흥행 대박을 거둬들였다. 지상파에서도 여럿 방영했으며 1990년 6월 23일 일요일 오후 2시 20분에 MBC에서 방영했다.

1970년에 나온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 영화와 아무 연관이 없다. 단지 장동휘가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DVD는 처음에 레터박스가 들어간 비 아나몰픽 포맷의 열악한 화질로 출시되었는데, 2010년에 이만희 컬렉션 DVD 박스셋에 포함되어 재발매 된 것은 제대로 된 아나몰픽 DVD이며 화질이 많이 좋아졌다. Blu-Ray는 출시되지 않았지만 TV에서 HD급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대륙의 P2P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김은식 작가가 임수혁을 추모하는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 제목을 여기서 따온 듯하다. 후에 동명의 책도 출간되었다. 전작 야구의 추억의 후속작 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다 역습 상황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 '돌아오지 않는 윙백', '돌아오지 않는 센터백' 등으로 비꼬기도 한다.

90년대 중반 한국 케이블 TV의 초창기에 컨텐츠 부족으로 같은 영화/방송을 수십 차례 재방송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시 이 영화도 엄청나게 재방송되자 견디다 못한 한 시청자가 케이블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돌아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한국 영화 역사상 별난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엉덩이 노출이 나온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구봉서 선생 되시겠다. 다만 의외로 워낙 코믹한 남성 캐릭터의 노출이다 보니 보수적인 당시 사람들도 웃고 넘어갔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의 2세인 이혜영은 현재 배우로 활동중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한 최무룡, 허장강, 독고성, 조항의 2세들인 최민수, 허준호, 독고영재, 조형기는 이 영화가 개봉하고 30년 후인 1993년에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 다 같이 출연하였다. 기사

오프닝에 나오는 곡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오래된 영화라 음질이 썩 좋지가 않으므로 자막을 켜고 봐야하는데, 해당 곡은 가사마저 나오지 않아 아예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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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설도 있다.[2] 최무룡,이대엽.[3]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2차대전에 관한 영화를 봐도 당시 국군이 가진 한국전쟁시 장비들이 모두 현용, 배우가 모두 군필자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부합하여 액션씬은 여느 외국 영화 못지 않다. 요즘의 태극기 휘날리며 이상.[4]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역을 비롯해서 아역 스타로 인기 절정이던 전영선 양이 깜찍한 연기를 선보인다.[5] 행군 중엔 마대자루에 담아서 둘이 지고 다닌다.[6] 52년도에 있었던 전투, 판문점에서 한강 하구로 흐르는 강이다.[7] 한국에선 전쟁 내내 북한군과의 전투를 치렀다는 식으로 연출되는 매체가 많은데, 실제로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은 사실상 전멸했기 때문에 중공군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것이 맞다.[8] 사실 극초반에 북한군도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딱히 중요한 역할들도 아니고, 말 없이 소총 좀 쏘다가 죽는 잡졸들로 나오고 끝.[9] 80년대 최무룡이 모 스포츠지에 연재했던 회고담에 따르면, 한창 촬영하는데 지프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장교가 실탄을 쓰는 촬영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에 촬영 협조를 하던 군 당국에서도 사고 우려 때문에 크게 고민한 듯. 결국 특등사수들을 전 군에서 차출한 후에 모두 의도적인 오조준을 해서 "절대 맞히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10] 마지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경기도 및 서울에서는 1마지기가 150평 정도라고 하니 7마지기는 1,000평이 넘는다. 다만, 나중에 거액을 벌었을지 몰라도 1960년대에는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기때문에 강남 지역 땅값은 쌌다. 보상이 하나마나라고 할 수 없으나 없는것보다는 나은 정도였다. 강남지역의 땅값이 비싸지게 된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11] 사실 중공군은 일본군과 싸우느라 군벌 상태에서 급하게 편제 상으로만 통일된 국민혁명군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동양판 소련군 그 자체였던 북한군과 달리 서구 장비를 대거 사용했기 때문에 영화의 묘사가 틀린 것이 아니다.[12] 물론 고증에는 별 지장이 안간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군은 미제나 영국제 등등 서방권 무기도 혼용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