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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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1. 개요[편집]


동계(東界)는 고려행정구역 5도 양계 중 하나이다.


2. 내용[편집]


일반 행정 구역인 도(道)와 달리, 계는 군사적 목적의 행정 구역으로 북방-동방 변경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병마사가 파견되었다. 특히 동계는 여진 해적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따라 길쭉하게 펼쳐진 모양을 갖추고 있다. 대강 지금의 함경남도 남부, 강원도 영동 지역, 경상북도 일부(울진군)에 해당하며 통일신라명주 지역에 해당한다.

고려초기 10도 행정구역 체계당시는 삭방도[1]에 포함되어있었다. 고려의 다른 행정구역들과 달리 현재까지 내려오는 조선 팔도 체계에는 이에 정확히 해당하는 행정구역은 강원도 내의 강원동도 정도다.[2]

지금처럼 도로가 잘 닦이기 전만 해도 태백산맥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8선 분단 이후에는 강릉시에 사는 사람이 서울을 가려고 하면 먼저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서(...) 거기부터 부산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택할 정도였으며[3] 그러다가 군사정권 시절 때는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포항시(...)까지 배를 타고 간 다음 포항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4] 따라서 옛날에는 이런 구획이 실제 생활권과 더 맞았다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우회 루트로 시간과 품을 절약하는 것도 어느 정도 육상교통이 발달했을 때고, 철도고 뭐고 없을 때는 닥치고 산으로 걸어가야 했으니 조선시대 기준으로 완전 어이없는 행정구역은 아니다. 이동속도가 크게 차이 없으면 서울에서 강릉 가는데 그냥 산을 넘고 말지 뜬금없이 동래를 왜 가는가.

그러나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현 국사교과서와 주류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것이고, 실제 문헌인 <<高麗史 권58 志 권제12 지리3>>에 따르면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10]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원문1]라고 분명하게 적혀있다.[12] 심지어 본 내용 중에는 〈고종〉46년(1259)에 충청도의 영월(寧越)·평창(平昌)을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충청도로 되돌렸다.~충렬왕 16년(1390)에 영월·평창을 다시 내속(來屬)시켰다.[원문2][13]라는 영서지역 일부까지도 예속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14]

원 간섭기 때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북부가 원 직속령이 되었으며 고려 말에 수복되어 남쪽 길쭉한 부분이 영서의 교주도와 합쳐져 '교주강릉도'가 되었다. 이 시기 교주강릉도의 영역은 현대의 강원도와 거의 같다. 위 지도를 보면 그럼 동한만 근처 일부만 남은 동계가 너무 작아지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고려 말에 동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면서 동계(=동북면)도 훨씬 커졌다. 이 시기 동계는 동북면으로 지칭하기도 했고,[15] 훗날 고려를 무너뜨리는 조선 태조(조선) 이성계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이 동북면은 이후 함경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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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교주도와 하나였었다.[2] 지금의 영동 남부에 속하는 영월, 정선, 평창 역시 이 지역에 속해 있었다. 강릉의 속현이었기 때문이다.[3] 분단 이전에는 원산시로 간 다음 경원선을 타는 것이 정석이었다.[4] 1970년대가 되어서 비로소 영동선의 개통으로 영서에서 영동으로 직접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5] 속빈(速頻)·실적멱(失的覓)·몽골(蒙骨)·개양(改陽)·실련(實憐)·팔린(八隣)·안둔(安頓)·압란(押蘭)·희랄올(喜剌兀)·올리인(兀里因)·고리한(古里罕)·노별(魯別)·올적개(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公嶮鎭) 경내【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地面, 原係本國公嶮鎭境內】-고려사 세가 권제46 공양왕4년(1392)-[6] 옛 공주(孔州)로서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칭하는데,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城)을 수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인신(印信) 1개를 얻었는데, 그 새긴 글에 ‘광주 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되어 있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 도호부-[7] 선춘현(先春峴)이라고도 표기하며, 조선 초기 세종 때까지도 함길도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6]의 동북쪽 700리에 위치함. 경원도호부의 동림성(東林城)<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21보(步)나 되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태종 원년 신사에 그 성을 수축하여 경원부(慶源府)의 산성(山城)으로 삼았다. 남쪽에 아오지 고성(阿吾知古城)이 있고, 그 남쪽에 공주성(孔州城)이 두만강 가에 있다.>을 출발해 북쪽으로 5리쯤에 소다로의 영기(所多老營基)가 있고, 다시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고, 거기서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그리고 북쪽 90리 되는 곳의 산상(山上)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거기서 다시금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 다시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 그 동북쪽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으로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60리에 선춘현에 이른다.-세종실록지리지-[8] 수빈강(愁濱江)【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세종실록지리지-, 백두산(白頭山) 천지에서 발원해 동북으로 흐르는 두 강 중 하나이고, 다른 강은 솔빈강(率賓江)/속평강(速平江)이다. 솔빈강은 현재 수이펀하(綏芬河) 혹은 라즈돌나야 강(Раздольная)이다.-위키백과-[9] 선춘현(先春峴)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城基)가 있고, 소다로(所多老)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於豆下峴)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동건리(童巾里)가 있고, 그 북쪽으로 3리쯤의 두만강탄(豆滿江灘)을 건너서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그 북쪽으로 1백 리에 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尹瓘)이 설치한 진(鎭)이다.-세종실록지리지-[10] 공험진(公嶮鎭)[5]은 예종 3년(1108)에 성(城)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예종〉6년(1111)에 산성을 쌓았다.【공주(孔州)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혹은 선춘령(先春嶺)[7] 동남쪽·백두산(白頭山) 동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혹은 소하강(蘇下江)[8]변에 있다고도 한다.】[9][원문1] 一分一合, 雖沿革稱號不同, 然自高麗初, 至于末年, 公嶮迆南, 三陟迆北, 通謂之東界云.[11] 화주(和州)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혹은 장령진(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당문(唐文)이라 불렀고【당(唐)은 당(堂)으로도 쓴다.】,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화주(和州)라고 하였다.~공민왕 18년(1369)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키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조선 시대 이후로는 영흥군(永興郡)이라 불렸다.[12] 다만 문종 이후에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되었다.라는 내용이 존재하며, 고종 45년(1258) 조휘와 탁청이 화주(和州)[11]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골에 투항하여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가 설치되었다.[원문2] 四十六年, 以忠淸道之寧越·平昌, 來隷, 後還其道.~忠烈王十六年, 以寧越·平昌, 復來屬[13] 본 내용의 충청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양광도로, 사실 성종 14년 10도로 만들때에 양주(楊州)·광주(廣州) 등의 주현(州縣)은 관내도(關內道), 충주(忠州)·청주(淸州) 등의 주현은 충원도(忠原道), 공주(公州)·운주(運州) 등의 주현은 하남도(河南道)로 되었다가 예종(睿宗) 원년(1106)에 하나로 합친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명종(明宗) 원년(1171)에 2개로 나눈 곳 중 하나이다.[14] 당장에 태백산맥이 문제였다면 조선이 강원도라는 행정구역을 우리가 아는 형태로 만들 이유가 없다.[15] 사실 문종 원년(1047)에 이미 동계를 동북면(東北面)【혹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고도 불렀다.】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