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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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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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신라 7성


파일:동래 정씨 엠블럼.png
東萊 鄭氏
동래 정씨


관향
부산광역시[1][2]
시조
정회문(鄭繪文)
중시조
정지원(鄭之遠)
집성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울특별시 중랑구
대구광역시 달성군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북도 군위군
경상북도 예천군
경상남도 거창군
전라북도 김제시
강원도 판교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인구
474,506명(2015년)
1. 역사
2. 집성촌
3. 분파
4. 항렬
5. 주요 인물
5.1. 전근대 인물
5.2. 근현대 인물
5.2.1. 29세손
5.2.2. 30세손
5.2.3. 31세손
5.2.4. 32세손
5.2.5. 33세손
5.2.6. 계보불명[3]



1. 역사[편집]


동래 정씨(東萊鄭氏)고려문벌 귀족(門閥貴族)으로,
이후 명문가(名門家)로 성장하였다.
부산(釜山廣域市) (Busan) (Busan Metropolitan City)
동래(東萊)를 본관으로 명문거족(名門巨族)이자,
명문가(名門家)명문자제(名門子弟)최다 배출한,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대표로 하는 성씨

현대에는 미국(美國) (United States of America)
하버드대학교(大學校) (Harvard University)의 요청으로,
우리나라의 족보를 연구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자료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미보 오류본(誤謬本)을
활용하고 있다고 하여,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에서 3大譜복원영인을 하여 하버드대학교와 국내외 연구기관에 기증하였다.
이에,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HarvardYenching Library 사서가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으로 감사 서신과 소장을 보냈다.
번역문(飜譯文)
[[On behalf of Harvard-Yenching Library, I would like to express my sincere appreciation for your donation of your family genealogy books to the Harvard-Yenching Library, Harvard University.
하버드-옌칭 도서관을 대표해서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족보를 기증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합니다.
Your generosity has enabled us to expand our collection in the Korean Studies field,
and is very much appreciated by students, scholars, and faculty, especially in the Korean Studies Program.
귀하의 관대한 아량으로 우리는 한국학 분야의 소장도서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특히 동래 정씨(東萊鄭氏)에서 기증한 도서는
한국학 프로그램의 학생, 학자, 교수단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Donations such as your case will have a direct and immediate impact on the University’s teaching and research activities.
동래 정씨(東萊鄭氏)와 같은 경우의 기증은 대학의 교육과 연구행위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I truly appreciate your donation to us, and am looking forward to receive your publications in the future. If possible, please send future publications continuously to us.
저는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저희 대학에 기증해 주신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앞으로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간행하게 될 책(족보)을 받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가능하다면 부디 앞으로의 간행물들도 저희에게 지속적으로 보내주십시오]].
하버드대학교 Harvard University, ─大學校
미국(美國)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로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하는 미국 동부지역 8개 명문 대학교
가운데 하나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는 신라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회문(鄭繪文) 회문은 신라 경애왕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정완(鄭玩)의 아들이며,
경애왕 말년인 927년 견훤의 난으로 피신하였다가, 931년에 돌아와,
동래호장(東萊戶長)을 지내며, 민심과 민생이 흉흉할 시기마다,
사색당파(四色黨派)에 치우침없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안일호장(安逸戶長)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정회문(鄭繪文) 이후 몇 대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後孫) 정지원(鄭之遠)을 1세(1世)로 한다.
고려시대에 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안일호장(安逸戶長),
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동지공거(同知貢擧)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으며,
항의 아들 정서(鄭敍)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로 유명.

동래 정씨(東萊鄭氏) 선조들은 나라민심(民心)민생(民生)
위해, 사색당파(四色黨派)에 치우침없이, [[선정(善政
)]]과 공덕(功德)을 베풀어, 대대로 나라에서 하사받은
정묘비(鄭墓碑)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금석문(金石文)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있는 명문(銘文)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고려부터 조선 이조 500년 동안, 수 많은 세력다툼으로 피의 난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동래 정씨(東萊鄭氏)명문가(名門家)에 걸맞게,
가풍(家風)을 지키며, 사색당파(四色黨派)에 치우침없이, 뛰어난 지혜와 현명한 지략을 펼쳐, 5정승 5판서 이상의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민심(民心)민생(民生)을 돌본,
옳고 바른 동래 정씨(東萊鄭氏) 선조들은
탄핵과 사약을 받지 않았다고 역사저술서에 기록되어 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조선시대에 번성하여,
문과 급제자 198명, 상신(相臣)정승) 17명,
대제학(大提學) 2명,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문형이라 평가되기도 한 대제학(大提學)은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되는 관직이 아니었다. 문과 대과 급제자이면서도 원칙적으로 문신(文臣)으로 임금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호당(湖堂) 출신만 가능하였다. 역사저술서에 의해,
세 번째로 많은 상신 17명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이다.

왕족인 전주 이씨(22명)와 조선 후기 세도정치 가문인 안동 김씨(19명)에 이어 버금가는 숫자다.
 
중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사룡(鄭士龍)을 비롯하여 선조 때 우의정(右議政) 정지연(鄭芝衍),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 헌종 때 영의정(領議政) 정원용(鄭元容), 정조 때 우의정(右議政) 정홍순(鄭弘淳) 등을 배출하였다. 17명,
대제학(大提學) 12명, 호당(湖堂) 10명, 공신(功臣) 6명, 판서(判書) 20여명, 종묘종사공신(宗廟配享功臣) 3명을 배출하였다.
종묘종사공신(宗廟配享功臣)은 조선시대 종묘에 종사된 공신을 말한다. 왕통(王通)을 상징하는 종묘에는 국왕신주와 함께 생전의 최고공로 내지는 최고 권세가를 택하여,
묘정에 종사하고 부제(祔祭)를 지냈다.
국왕신주봉안할 때 모든 종사 공신을 함께 택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 국왕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 국왕이 죽은 후에라 늦게 죽으면 그 때에 이르러 사후에 종사하였다.
종묘종사공신(宗廟配享功臣) 3명을 배출한 동래 정씨(東萊鄭氏)조선국통(國通)을 상징하는 성균관(成均館)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
경학원(經學院) 문묘 종사 대현 배출 명문가(名門家)
국반(國班)으로 명성(名聲)을 떨쳤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세거지(世居地)
부산(釜山廣域市) (Busan) (Busan Metropolitan City)
동래(東萊)를 본관이다.
2세는 안일호장(安逸戶長) 지낸 정문도(鄭文道)이다.
3세인 정목(鄭穆)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정목(鄭穆)의 아들로 그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文科)급제하면서 명족(名族)이 되었다. 정선조(鄭先祚)후손(後孫)은 계속 동래(東萊)를 본관으로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하였다.

정목(鄭穆, 1040년~1105년): 정문도(鄭文道)의 장자,
동래(東萊)를 본관으로 하는 향리(鄕吏) 출신이다.
1072년(문종 26)에 예부시(禮部試)복시(覆試)에서 병과(丙科)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기거랑(起居郞), 형부시랑(刑部侍郞),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檢校禮賓卿 行攝大府卿)에 이르렀다.

정항(鄭沆):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급제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淸道)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추밀원의 종2품 벼슬),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는데, 청백(淸白)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高麗史)입전(入傳)인물(人物)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初喪)을 치를 한 섬의 곡식(穀食)조차 없었는데, 왕(王)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직(職)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고 하며 부미(賻米)로 쌀 100섬(一百섬)과 배 200필(二百畢)을 하사(下賜)하고, 친필(親筆)시호(諡號)문안(文安)이라 내렸다.

정서(鄭叙): 정항(鄭沆)의 아들.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을 남긴 인물(人物)국문학사(國文學史)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과 동서간(同壻間)으로 내시낭중(內侍郞中)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毅宗)이 즉위(卽位)한 뒤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르는데, 그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約束)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號)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불렀다.

정양생(鄭良生): 11세손,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봉(封)해졌다.

정구(鄭矩, 1350년~1418년): 정양생(鄭良生)의 아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냈고,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을 지냈으며,
정종 때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지냈고,
태종 때 예문관(藝文館) 학사(學士)를 거쳐 중군총제(中軍摠制)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판한성부윤(漢城府判尹), 계림부윤, 개성부유후(開城副留後) 등을 역임하였다.

정광필(鄭光弼, 1462년~1538년): 15세손, 조선중기 문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시대를 앞서 간 개혁가 조광조(趙光祖)
구하려 애쓴 인물유명하다.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정구령(鄭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사 [정사(鄭賜)]]이고,
아버지는 정난종(鄭蘭宗)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 공조판서(工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예가 이다.
1456년 생원 진사시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대교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 중시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뒤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난 평정에 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전임되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이시애(李施愛)는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북방민 회유정책으로 중용되었으나 세조가 북방민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정난종(鄭蘭宗)은 1469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 호조참판 한성부판윤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참찬, 이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난종(鄭蘭宗)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조맹부체(趙孟頫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 성종 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정난종(鄭蘭宗)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원각경(圓覺經)의 자체가 고르지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金石文)에도 정난종(鄭蘭宗)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塔골公園) 서울 종로구 종로에 있는 한국 최초의 공원. 사적 제354호이다. 현대에는 서울파고다공원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윤자운묘표,
연산(連山김철산비(金鐵山碑)가 있다.
또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奉先寺鐘銘),
덕수궁흥천사종명(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은 보기 어려우며,
동국명필(東國名筆) 해동명적(海東名跡)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정광필(鄭光弼의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완담향사(浣潭鄕祠)향사(香使)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고 현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익공파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정태화(鄭太和): 20세손, 1628(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 )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3(현종 14)년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후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廩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고,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陽坡遺稿)와, 1656(효종7)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가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2대조인 정문도(鄭文道) 묘는
현재 부산(釜山廣域市) (Busan) (Busan Metropolitan City)
동래(東萊)를 본관에 남아있는데 이 묘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적인
전설(傳說)(유명有名)(일화逸話)가 있다.

부산(釜山) 시민공원 안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 시조부터 14대 선조를 모셔둔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 문화재(文化財)가 있고, 동래 정씨(東萊鄭氏) 후손(後孫)들이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온화하고 불편부당한 자들과 손을 잡지 아니하며, 가풍(家風)을 지키고,
조상숭모정신후손(後孫)들의 인재양성을 위해 숭조애종을 발휘한, 국민(國民)시민(市民)의 자연생태쉼터를 마련 해 준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 소유의 도시 테마공원이다.

이런 유명세(有名稅) 덕분에 부산(釜山)의 토박이들은 거의가 정묘의 위치를 알고 있어 초행자라도 시민들에게 물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정문도(鄭文道) 묘가 있는 화지산(和池山)을 公園으로 조성 화지공원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어 더욱 찾기가 쉽다.

정문도(鄭文道) 선생의 묘는 화지공원 입구를 막고 선
현경문(顯景門)을 지나 한참이나 안쪽에 입지해 있지만 묘 가는 길 양쪽의 온갖 나무들이 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너무나 잘 가꾸어져 있어 결코 지겹지 않는 길이다.
이 도심 한가운데 이런 넓은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 공원이 정부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에서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금싸라기 같은 도심의 선산(先山)이라 경제적인 측면을 따져 일부라도 떼어 다른 용도로 개발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화지산(和池山) 주위를 둘러싼 아파트 숲만 보고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동래 정씨(東萊鄭氏) 후손(後孫)들은 오직 정문도(鄭文道) 선생의 명묘 터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선산(先山)화지산(和池山)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의 조상숭모정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고 있어, 이 시대의 엷어져 가는 조상숭모정신을 다시 일깨워주는 곳이 아닌가 여기게 한다.

하마정(下馬停)
고려 시대부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의 동래 정씨 시조 묘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려 머물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
말이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던 전근대 시기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말에서 내려 머무는 곳을 하마정(下馬停)이라고 하였다.
1413년(태종 13) 종묘(宗廟)의 궐문 앞에 표목을 세웠는데,
뒷날 비석을 세워 하마비(下馬碑)라고 하였다.
하마비(下馬碑)는 왕이나 성현 또는 명사,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선열에 대한 숭앙의 표시로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도록 하는 표식이었다.
따라서,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인 정문도(鄭文道)의 묘소가 있는 화지산 자락 아래의 정묘사(鄭墓寺) [화지사(華池寺)]]를 지날 때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의미에서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게 되었고, 여기서 하마정(下馬停)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화지사(華池寺)는 고려 시대의 유서 깊은 사찰이며, 부산 동래 지역의 토착 세력인 동래 정씨(東萊鄭氏) 시조를 봉안한 사당으로, 부산의 전통과 지역사를 돌이켜 보는 유적지로서 의의가 있다. 본래의 이름은 영호암(永護庵)이었으며, 이후 만세암(萬世庵), 정묘사(鄭墓寺)로 불리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화지사라고 칭한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사찰.
화지사(華池寺)는 1959년 태풍 사라호로 산신각(山神閣)이 붕괴되어 종중에서 재건하였고, 이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명복과 후손들의 복록을 기원하고 있으며, 인근 주민들을 위한 사찰의 본래 기능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현재, 화지사(華池寺)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상주하는 승려는 1명이다.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 화지 공원 내에 위치한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의 시조 묘역인 화지 공원의 정문 현경문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추원사(追遠祠)가 나오는데, 추원사 옆 대밭 길로 화지산을 오르면 화지 연못과 화지사가 있다. 화지 연못을 지나면 화산재의 대문이 나오고 그 안으로 화수정과 화산재, 영호암, 영호암 종각, 영호암 산신각, 그리고 관리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의 하마정(下馬停) 교차로 일대에 자연 마을인 하마정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래 하마정 교차로 일대의 양정동 땅은 동래 정씨 문중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고, 1980년대 거제로 확장 공사를 하게 되어, 이때 동래 정씨(東萊鄭氏)문중에서 보관 중이던 하마비(下馬碑)를 후원받아, 지금의 도로변에 안치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하마비(下馬碑) 뒤편의 동해 남부선 철로 너머에 부산광역시 교육청, 부산정보고등학교와 대규모 아파트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동해 남부선 거제역에서 동쪽 아래 간선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굴다리 못 미친 지점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일대를 하마정(下馬停)이라고 불렀다.
하마정(下馬停)에서 굴다리 아래를 지나 하야리아 부대 터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화지산에 동래 정씨의 시조 묘인 정문도 묘(鄭文道墓)가 있다.

하마정 관련 내용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고 구전 설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하마비 곁에 구전 설화를 옮겨 놓은 ‘하마비의 유래’라는 비석이 있는데,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중략] 구전 설화에 의하면 고려 때 동래 정씨 2세 휘 문도(文道) 공의 묘소가 화지산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 입구인 이곳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하마비를 세우게 되었고, 하마정이라고 하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거제로 확장 공사로 동래정씨종약소(宗約所)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이제 늦은 감이 있으나 동래 정씨 종중의 후원을 받아 문화유적을 영구히 보전하고자 본 위치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특히 정문도(鄭文道) 묘는 그의 생전 벼슬이 아전임에도 불구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문도는 읍에 속한 아전이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묘는 현의 서쪽 7리에 있다”라고 성명과 묘의 위치까지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후 우리나라에서 저술된 많은 음택(陰宅)풍수 연구서에 언급될 정도다.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和池山 또는 華池山:142.4m)자락에 터 잡고 있는 동래정씨시조 정문도(鄭文道)선생의 묘는 동래정씨문중에서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익장(益庄)마을에 터 잡은 조선 초기의 문신 정사(鄭賜)선생의 묘와 더불어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묘 중 하나다. 후손들은 이들 양대 정묘(鄭墓)를 전국에 있는 명혈 중의 으뜸이라 여기고 있고, 많은 풍수연구자들도 필답코스로 찾아보는 유명한 묘들이다.

조선의 일부 왕릉보다도 더 너른 선생의 묘역에 들어서면 곡선의 미를 한껏 살린 전순(氈脣) 앞 명당에 있는 작은 연못이 가장 먼저 방문자를 맞는다. (眞結大地)의 증거이며 필시 (大富貴顯)이 기약되는 吉水인 진응수(眞應水)가 모인 연못인 듯하다. 진응수란 입수도두 뒤에서 分水한 수기가 혈장 옆과 아래를 감싸 혈의 생기를 보호하고도 그 기운이 남아 지상으로 물을 분출하게 되는데 이 샘물은 맑고 깨끗하고 사시사철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으며 물맛이 감미롭다고 알려져 있다.

전순 앞 명당을 지나 혈장에 오르면 단단한 토질에 정성을 다해 가꿔진 잔디가 펼쳐진다. 혈장 맨 위는 생기를 정축(停蓄)해 놓은 두툼한 입수도두가 대혈을 짐작하게 한다. 천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밝고 깨끗하다. (子坐午向)을 한 선생의 묘는 소쿠리 속같이 오목하게 들어간 형상의 혈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한눈에 (와혈(窩穴)임을 알아볼 수 있다. 와혈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모양이라 하여 개구혈(開口穴), 손바닥을 젖혀놓은 모양과 같다하여 장심혈(掌心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룡이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입수하여 오목한 양혈(陽穴)와혈(窩穴)을 결지한다. 와혈은 입수도두에서 양쪽 현능(弦陵)이 팔을 뻗어 혈을 품안에 안는 것 같은 형태여야 하며, 전순에는 횡대(橫帶)가 가로 놓여있어야 한다.

혈은 품안의 오목한 부분 중에서도 약간 돌출한 부분인 와중미돌(窩中微突)한 곳에 있다. 이곳은 오목 들어간 부분이 넓은 활와(闊窩)로 혈을 둘러 안은 두 현능 끝 사이의 간격이 넓은 장구와(長口窩)에 해당한다. 조금은 인위적으로 사성(砂城)을 쌓아 만든 것 같지만 좌우 현능사(弦陵砂)가 혈을 잘 감싸 안고 있고 역시 인위적으로 쌓은 것 같은 횡대가 전순에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횡대 양끝은 잔디가 드문드문 보일뿐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원인이 횡대 바로 앞 전순에 심어 놓은 나무그늘 때문인 듯하다. 정문도(鄭文道) 선생의 묘 지키고 있는 800년이 넘는 배롱나무 2그루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로 꽃이 100여 일 동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도 부른다. 수령이 약 800년이나 된다는 노거수로 선생의 묘를 개수할 때 식수하여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원줄기는 고사하고 수간만 남아 있으나, 새로운 움이 여러 갈래로 나와 뿌리에서부터 측간을 이루고 있다고 안내판에 적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 있는 배롱나무로선 필자가 아는 한 (最古)이고 또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유일하다고 알고 있어 잘 보존되어야 할 나무다. 당초에 조금만 더 아래에 심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든다.

우리나라의 명묘로 알려진 거의 모든 곳에는 그 터를 하나의 신비 영묘한 명혈로 격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物적인 터에 靈적인 내용을 보탠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 정문도(鄭文道) 예외는 아니다. 이곳 정묘 터는 고려 초에 이곳에 묻힌 선생과 그의 아들 목과 후에 목의 장인이 된 고익공 간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익공은 선생께서 동래(東萊)지역의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로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화지산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하나…"라고 하면서 뒷말을 잇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를 몇 차례 들은 선생과 그의 아들 목은 궁금했지만 그 사유를 끝내 듣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후 고익공이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개경으로 전출하고 선생은 유명을 달리하여, 아들 목은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려니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서 망설이다가 결국 지금의 자리에 쓰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을 묻은 다음날 동생과 같이 묘소에 가 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단다. 형제는 다시 목관을 묻고 과연 누가 묘소를 파헤치는지를 알기 위해 감시를 하는데, 밤이 깊어 삼경에 이르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하면서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날이 새자 형제는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묘소를 감시하였는데, 이번에도 지난밤의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는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백발노인의 말대로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묘소를 쓴 그 해 여름 어느 날은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렸다고 한다.

부친의 묘소를 쓰고 일어난 여러 일들이 모두 고익공이 "좋기는 하나…"라고 하고는 잇지 못한 뒷말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목은 개경에 있는 그를 찾아 부친을 화지산에 모셨다고 하자 이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은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집에서 무조건 내쫓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친의 묘 터가 역적이 배출될 터이기 때문에 역적이 될 가문의 사람과 한자리를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단다. 그래서 목이 부친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내용을 소상히 밝히자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를 하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정씨 가문의 화근이 사라졌다"라고 하면서 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전설에서 뇌성벽력이 부셨다는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정씨문중에서는 역적바위로 상정하고 지금은 그 이름을 천파암(天破巖)으로 지어 압승(壓勝)하고 있는데 분묘의 내청룡 너머로 멀리 바라보이는 황령산정상의 바윗돌이 바로 그 것이라 한다.

‘명혈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풍수 금언(金言)에 바탕을 둔 전술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 또한 정씨문중에서 명묘로 인식하고 있는 정묘는 과연 명묘일까?

많은 풍수연구자들이 이곳을 찾아 쓴 글들을 보면 그 의견은 제각각이다. 풍수의 현장교과서라 할 정도로 훌륭한 장소에 터 잡고 있다는 의견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 않다는 의견들을 보면 뚜렷한 주산이 없다, 내룡이 일직선이다, 멀리 10여 km나 떨어진 봉래산 앞에는 산이 전혀 없어 안산이 없다, 수구가 열려있다, 子坐午向을 한 坐向이 잘못되었다는 등으로 그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 때문에 명묘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라면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의견들을 낸 사람들이 과연 정묘의 내룡맥을 따라 화지산까지라도 올라가 보았는지, 안산에도 올라 용맥의 흐름을 살펴보았는지, 정묘에 와보기나 하고 쓴 글인지가 의심스럽다. 특히 좌향이 잘못되어 명묘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은 천년 가까이나 된 분묘를 지금의 좌향론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불성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도 당시에 있었을 법한 좌향론도 아니고 한참 후대에 나온 좌향론임을 문헌이 확실히 밝혀주는 것을 들이대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뚜렷한 주산이 있고, 내룡은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사룡이 아니며, 안산도 있으며, 수구는 열려있지 않고 잘 관쇄되어 있다.

이곳을 제대로 살피려면 묘역에서만 살피지 말고 안산에도 올라가서 살펴보라. 뚜렷한 주산이 없다, 안산이 없다, 수구가 열려있다는 소리는 아예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묘역에서 내룡맥을 밟고 주산까지라도 올라가보라. 내룡맥이 쭉 뻗어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사룡(死龍)이 아니라 생기발랄하게 지현굴곡하며 살아있는 용처럼 힘 있게 내려오는 생룡(生龍)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은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주택들이 점령했을 뿐이다. 화지공원 앞으로 난 큰 도로 건너에 있는 현대아파트 우측 봉우리가 바로 정묘의 안산이다. 이곳에서 보면 낙동정맥의 천성산(千聖山)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한 지맥이 금정산(金井山)의 만덕고개를 지나 금정봉에 이르는 산줄기는 보이지 않지만, 금정봉에서 양변으로 어깨를 벌려 개장(開帳)한 왼쪽 줄기 하나가 남동으로 길게 뻗어 내려와 일으킨 봉우리가 화지산(和池山) 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정묘의 주산은 화지산(和池山)이다. 혈장 뒤로 가장 가깝게 근접된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이기 때문이다.

주산인 화지산(和池山)은 다시 양변으로 어깨를 벌려 개장(開帳)하여 두 팔은 청룡백호를 만들고 그 중간에서 중출맥(中出脈)으로 천심(穿心)주룡(主龍)이 정묘의 혈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산에서 개장한 왼팔은 한줄기로 뻗어 내청룡을 만들었으나, 오른팔은 한줄기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하나의 지맥을 뻗어내려 내백호를 만들고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뻗어나가 정묘의 외백호를 만들며 안산을 일으킨다.

그래서 혈장을 잘 감싸고 있는 한 줄기의 내청룡을 내백호가 다시 둘러싸서 1차로 수구를 관쇄하고, 다시 외백호와 안산이 둘러싸서 2차로 수구를 관쇄하는 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수구가 넓게 열려있을 수가 없는 곳이다. 자연히 내청룡 자락에서 득수한 내당수는 혈장을 왼쪽과 앞쪽을 감싸며 흘러, 내백호 자락에서 득수하여 혈장 오른쪽을 감싸며 흘러온 내당수와 합수하여 내백호 끝자락인 미(未)방에서 좁은 수구를 이루어 빠져나간다.

하지만 3년 구산(求山)에 10년 점혈(點穴)이라는 풍수 금언이 있듯이 아무리 국세(局勢)가 훌륭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분묘가 자리한 위치이다. 이곳 형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本身 용호가 청룡은 혈장 가까이에서 좀 짧게 팔을 벌렸고 백호는 훨씬 길고 크게 팔을 벌려 안산까지 이루며 청룡을 겹쳐 감싼다. 풍수의 형국론으로는 천자문의 맨 끝의 글자로 한자를 마무리하기 위해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有終을 상징하며 후손들이 으로 이름을 떨칠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하는 也’字형국이다.

也’字 형국에서는 첫 번째 획(ㄱ)은 청룡이 되며, 두 번째 획(|)이 내룡맥으로 혈처가 이 획에 있으며, 세 번째 획(ㄴ)이 백호 및 안산이 되는데, 처음 이 터를 정한 정목이 풍수형국을 따져 분묘를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도 也’字의 두 번째 획에 정확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 분묘를 감싸주는 사신사(四神砂) 즉 주산과 안산, 청룡백호가 적당한 거리에서 적절한 높이로 감싸고 있어 전혀 허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답답하지도 않는 자리에 절묘하게 터 잡고 있어 중심점이라는 인식을 쉽게 가질 수 있다. 전혀 다른 방법에 의해 분묘 터를 잡았는데 우연히 자형국의 두 번째 획에 해당되는지는 몰라도 어떻든 정혈처에 입지했음이 분명하다.


2. 집성촌[편집]


* 동래정씨 본관은 시조와 선조님들을 모셔둔 부산광역시 동래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 경상남도 통영시 범골마을 [산모양이 범의 모양을 닮아 범골마을로 불리우며, 이 마을에서는 유명한 효자할아버지가 계셨다고 한다. 처사 동래 정공 휘(이름)윤현지묘
선망조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그 효심에 탄복해, 산에서 호랑이들이 내려와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후손으로 동래정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한의사, 법관, 박사, 교수, 경제기업인 등 이 있다.]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양원보금자리 개발로 철거되면서 사라져버렸다.
참고로, 서울 마포구 성산동 풀무골에도 있었으나,
월드컵경기장을 조성하면서 역시 사라졌다.
이곳은 원래 김자점이 살던 곳으로 우물골이라고도 불리웠으나,
반란 이후에 공이 있던 전주이씨와
동래정씨가 들어와서 살았었다.]
[6.25 이전에는 동래정씨가 지역의 유지로 많이 살았으나 6.25때 인구가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분파[편집]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派: 6세)
*양도공파
*전서공규파(典書公規派: 12세)
*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
*설학재공구파(雪壑齋公矩派: 12세)
*현령공파
*진사공위파
*기우자공파
*문경공파(文景公派)
*문경공흠지파(文景公欽之派: 13세)
*정절공파
*참의공파(參議公派)
*참의공절파 (參議公節派: 12세)
*평리공리파(評理公釐派: 13세)
*정절공파
*충청공파
*굉파(宏派: 13세)
*참판공파(參判公派)
*참판공개보파(參判公介保派: 13세)
*첨사공필파(詹事公弼派: 6세)
*학생공위파(學生公派)
*호군공회종파(護軍公會宗派: 13세)
*학생공윤창파(學生公允昌派: 9세)
*동지공진파(同知公軫派: 12세)
*호군공회종파(護軍公會宗派: 13세)
*사수정공파/수찬공파
*수찬공옹파(修撰公雍派: 13세)
*관북감사공파(關北監司公 哲: 16세)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직제학공사파(直提學公賜派: 13세)
*참봉공파(參奉公 彦寯: 18세)
*서계공파(西溪公 彦宏: 18세)
*매오공파(梅塢公 榮後: 19세)
*낙빈공파(洛濱公 沚: 18세)
*석문공파(石門公 榮邦: 19세)
*집의공파(執儀公 蘭孫: 14세)
*군수공파(郡守公 蘭秀: 14세)
*삼가공파(三嘉公 光隣: 15세)
*고령공파(高靈公 光翼: 15세)
*동래부원군파(東萊府原君 蘭宗: 14세)
*창원공파(昌原公 光輔: 15세)
*문익공파(文翼公 光弼: 15세)
*안산공파(安山公 光佐: 15세)
*첨정공파(僉正公 蘭元: 14세)
*부사공파(府使公 蘭茂: 14세)
*학생공(유)파(學生公(游)派: 13세)
*처사공유파
*춘곡공파
*참봉공급파(參奉公伋派: 13세)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대호군공인파(大護軍公 絪: 11세)
*호장공(송제공)선조파(戶長公先祚派: 3세)
*녹사공파

4. 항렬[편집]


29세손
인(寅)○, 진(鎭)○
30세손
○모(謨), ○운(雲)
31세손
진(鎭)○, ○수(秀)
32세손
○영(泳), ○하(夏)
33세손
상(相)○, 용(用)○, 우(愚)○
34세손
○희(熙), ○구(九), ○봉(鳳)


5. 주요 인물[편집]




5.1. 전근대 인물[편집]


  • 정서: 정과정의 지은이.
  • 정창손: 조선 초기의 문신.
  • 정광필: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조광조를 구하려 애쓴 인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익(文翼)이고 현 동래정씨의 문익공파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그를 포함해 아래의 정태화 등의 13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 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이다.
  • 정여립: 기축옥사 참고.
  • 정태화: 조선 역사상 판서, 참판, 참의를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
  • 정원용: '경산일록'의 저자.

5.2. 근현대 인물[편집]



5.2.1. 29세손[편집]



5.2.2. 30세손[편집]



5.2.3. 31세손[편집]



5.2.4. 32세손[편집]


*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
  • 사이먼 도미닉: 본명은 정기석[4]
  • 정수영: 배우, 정한모의 손녀.
  • 정동영: 국회의원
  • 정찬우: 코미디언[5]
  • 정호영: 요리사


5.2.5. 33세손[편집]



5.2.6. 계보불명[6]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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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래도호부, 동래군. 현재의 동래구.[2] 여기서 동래는 현재의 동래구 뿐만이 아닌 현재의 부산광역시 전역(기장군, 강서구제외)을 이르는 말이었다.[3] 요즘은 돌림자를 쓰면 작명에 한계가 생겨서 피하는 경우가 많고, 한글 이름이거나 본명은 따로 두고 족보에만 돌림자로 올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불명으로 정리해둔다. 또한 여성의 경우, 딱히 계보에 따른 돌림자를 신경쓰지 않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4] 아버지가 31세손 항렬을 사용한다.[5] 아버지가 31세손 항렬을 사용한다.[6] 요즘은 돌림자를 쓰면 작명에 한계가 생겨서 피하는 경우가 많고, 한글 이름이거나 본명은 따로 두고 족보에만 돌림자로 올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불명으로 정리해둔다. 또한 여성의 경우, 딱히 계보에 따른 돌림자를 신경쓰지 않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