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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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5] 으로 몰려들었다.
2. 상세[편집]
2.1. 이전 상황[편집]
당시 동래성[A] 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일본인들의 이상 징후를 느끼고는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에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성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공격 측 입장에서 기병 운용이 힘들며 대규모 공격과 성벽을 넘기위한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 무기의 사용, 그리고 진열의 정비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2.2. 전개[편집]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성에 도착했다.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6] 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7]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합세했지만 큰 전력이 되지는 못했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무모한 전투는 피하라. 나는 협상을 위해 조선의 도성으로 가야한다. 그대가 굳이 싸우겠다면 할수없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나무판을 보였는데, 이에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송상현은 조금이라도 더 방어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성벽 위에 목책을 쌓았다고 하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래성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병사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인생문)을[8]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동래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고침[9]
하네[10]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겁고
父子恩輕 부자의 은은 가볍도다
그 후 송상현은 다시 무장하고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마츠우라 시게노부(조선 측 기록에는 평조익平調益)라는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영규 또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동래 백성인 김상은과 그의 처와 딸이 기와를 깨뜨려주면 이를 던져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송상현이 관복을 가져오라고 하자 이를 가지러 오려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며칠간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끝내 절개를 지켰다. 이는 노예로 사느니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다.
송상현과 함께 싸운 관군인 송봉수, 김희수, 향리인 대송백, 소송백, 관노인 철수, 매동 중에서 김희수, 대송백은 전사했으며, 이 전투에서 송상현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은 신여로, 김섬, 노개방, 문덕겸 등이 있다.
이 때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각지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으며, 훗날 임명된 선무 원종 공신 중에서 이 지역 출신인 인물이 66명이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24명을 선정한 명단으로 별전 공신 또는 24 공신이라 했는데, 김정서, 정승헌, 문세휘, 정순, 김일개, 김일덕, 송창문, 김근우, 강개련, 김흘, 이언홍, 김대의, 오홍, 박인수, 김달, 송남생, 김기, 황보상, 이응필, 송계남, 이복, 오춘수, 김복, 송의남, 철수, 만동 등이 있다.
2.3. 종료와 영향[편집]
일본군 장군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는 결말인 것 같지만..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이 무너지자 예복으로 갈아입고 남문 성루에 올라 임금이 계신쪽으로 절을 한후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썼다. 왜군이 들이닥쳐 잡으려하자 걷어차며 "이웃의 법도가 이런 것이더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느냐?" 리고 꾸짖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와, 활을 들어 왜적 하나를 쏜 후 검을 집어들고 왜적들에게 뛰어들어 둘을 베고 자신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사실 일본군의 이런 습성은 전국시대 때부터 국내에서 자기들끼리 싸울 때도 하던 것인데, 당시 일본의 공성전에선 전투개시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만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성주와 가신들, 병사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11] 그래서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가망이 없는 상황이면 끝까지 저항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유교적 충 사상이 자리잡은 한국에서는 결사항전이 미덕으로 여겨졌기 때문.
임진왜란 17년 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란 글에서 전투 당일이던 4월 15일 새벽만 되면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동래 주민 중 생존자는 천 명 중 한두 명 정도였다고 한다.[12]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전해주는 기록은 숱하게 많이 있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대낮을 무색하게 했으며,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 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 <임진동래유사(壬辰東來遺史)>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는데 송상현이 순절할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 <임진유문(壬辰遺聞)>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 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
-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 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모조리 피주검으로 변하고 앞서 쌓인 시체 위에 던져져 천 명 중 한두 명만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 이안눌, <동래맹하유감사(東萊孟夏有感祠)>, 1608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의 회고.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 1731년 동래성을 보수하다 발굴한 유해를 묻은 후 지은 비문
동래부사 송상현은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했으며 부산의 군사와 백성들도 도륙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만약 부산이 그들의 땅이 었다면 도륙과 참살을 어찌 이처럼 참혹하게 했겠는가?
- <상촌집(象村集)>
조선군 장수를 비롯하여 조선인 5,000명이 죽었다.
-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참수된 조선인이 3,000명이었고 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 종군승 케이넨의 <서정일기(西征日記)>
조선군은 동래성에서 3,000여 명의 정예군과 30명의 장수들을 잃어버렸는데, 이는 당시 경상좌도에서 즉각 동원 가능한 병력 거의 전부에 해당했다. 그 바람에 조선은 경상도 방면에 동원가능한 병사의 수가 크게 부족해졌고, 결국 각지의 징집병과 북방의 병력을 급하게 징집하여 신립에게 몰아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참패하며 힘들게 모은 이 병력들을 모조리 말아먹고 자신도 전사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붕괴되었으며 선조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도미노와 같은 병력부족의 악순환은 계속 이어져, 평양에 몽진한 조선 조정이 대동강 방어선을 만들 때는 병사의 수가 장군보다 적은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대동강 방어선마저 일본군에 패배하여 붕괴하고, 선조가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몽진을 가며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고야 만다.
3. 유적 발굴[편집]
동래 읍성 참조.
4.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편집]
- 영화 난중일기에서 간단하게 나온다.
- 게임 임진록의 조선 시나리오 브리핑의 배경화면이 동래부사순절도이다.
-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는 간략하게 다루었다.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에 약 2분 반 정도 간단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고니시는 병사를 시켜 항복 권유의 글귀가 쓰여진 목간은 동래성앞에 던지게 하였고 이를 본 송상현은 결사 항전의 의지가 담긴 글귀를 활에 묶은 후 날려서 보낸다. 이후 간단한 전투 장면과 함께 내레이션 설명이 나오며 송상현은 북향 사배를 하지 않고 전투를 벌이다 일본군의 칼에 전사한 모습으로 나오며 조선군 병사들 대부분이 학살당하며 일본군이 성안으로 진입한다.
-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13화에서 간단하게 다루었다. 부산진과 다대포 등의 함락 소식을 들은 후 송상현은 이각과 합류를 청했지만 이는 무산되었고 곧 고니시의 항복 권유 글귀가 전해지자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담은 답서를 보낸다. 그 직후 일본군이 공격하자 송상현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만 나오다가 자세한 전쟁 장면은 생략한 채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 송상현 혼자서 고니시 휘하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었고 송상현은 갑옷 위에 관복을 걸쳐 입은 후 통곡을 하며 절을 올린 후 고니시를 향해 달려들지만 싸우다가 일본군 병사들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 현재까지는 1985년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이 유일하게 동래성 전투를 비중있게 다룬 사극이다. 비중있는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박영지 배우가 송상현 장군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조선군이 연전연패한 극 초기에 왜군을 동래성에서 패퇴시키는 활약을 하지만[13] , 이내 적의 총공세에 밀려 성은 함락되고, 송상현의 최후는 역사대로 전개된다. 갑옷 위에 조복을 걸치고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한뒤 왜병들을 꾸짖다가 사망한다. 그리고 첩인 이소사와 측근들도 함께 살해당한다. 다만, 1980년대 작품인 까닭에 2005년에 발굴된 동래성 양민 학살은 작품에 반영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