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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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1. 개요
2. 내용
3. 기타
4.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東史綱目

조선 후기 18세기실학자 순암 안정복이 저술한 역사서.
편년체, 강목체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기존의 정사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등에 대해 안정복은 잡스러운 책이라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고, 1756년에 직접 역사서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스승 이익이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주었으며, 20년에 걸쳐 20권 20책, 본편 17권, 부록 3권의 분량으로 저술하게 된다.

일단은 관찬 사서가 아니므로 야사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내용의 정밀도가 높아 당대에도 사실상 정사나 마찬가지로 보았다. 공무원 한국사시험에선 선택지로 "야사"를 모은것이다를 틀린 선지로 냈다. 그런데 이건 해석이 좀 다를 수도 있는데, 모은 것에 정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틀렸을 수도 있고, 모은 것에 역사서인 야사가 아닌 서적이 포함되어 있어서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여러 서적을 모아서 지어진 야사이다'이라고 했으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동사강목 전문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고# 발해와 관련된 부분은 규장각 소장 발해사 자료의 일부로 웹에서 열람할 수 있다.# 기관 회원의 권한이 필요하다.


2. 내용[편집]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시점으로 알려진 주 무왕 13년(기원전 1122년)부터 고려 공양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조선은 쓰지 않았는데 당연히 본인이 조선 시대 인물이므로 당대 조선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어려웠을 것이다.[1]

내용상의 특징으로는단군조선, 기자조선[2], 마한, 통일신라, 고려 순으로 한국사의 정통 왕조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마한이 저기에 들어가는 이유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3]준왕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남하해 마한왕이 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마한이 백제에게 멸망한 뒤의 삼국시대신라 문무왕이 통일할 때까지는 정통 국가가 없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았으며, 훗날 통일신라라고 불리는 문무왕부터의 신라는 정통왕조가 된다. 발해는 아래 단락에서 서술하듯 한국사와 관련성을 중시해 분량이 이전 시대 사서보다 분량을 크게 늘렸지만 정통왕조로 보진 않았고, 특이한 점으로 고려 또한 찬탈왕조 태봉에서 비롯된 왕조이므로 왕건 역시 건국 초기까지는 궁예견훤과 같은 찬탈자로 간주해서,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며 신라에 있던 정통성을 고려가 흡수하기 전까지는 정통이 아닌 참국(僣國)으로 분류했다. 천명으로 대표되는 정통성의 이동을 중시하던 전근대 동양 역사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 기존의 삼국사기가 의자왕에서 백제의 왕계가 끝났다고 본 것과 달리 백제 부흥군이 옹립한 풍왕 역시 백제의 왕으로 간주해, 백제의 멸망 시점을 사비성이 함락된 660년이 아닌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병이 나당연합군에 대패하고 풍왕이 고구려로 도망친 663년을 백제가 멸망한 시점으로 3년 늘려 잡았다. 후백제견훤을 두고 "견훤의 견(甄)은 진(眞)이다"라고 적어 진훤/견훤 호칭 문제에 대한 떡밥을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의 기존의 역사서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에서 쓴 책이니만큼 당연히 그 기록들의 부실함을 지적하고(주로 기록된 사건들에 대한 평가가 유교적 대의명분에 맞지 않는다던지) 오류를 수정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시킨 뒤에 마한을 부흥시키겠다며 거병했다가 실패하고 자살한 주근을 온조왕이 그 시신의 허리를 베고 처자식까지 다 죽였다는 대목에서,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은 모두 주근의 거병을 '반란하였다(叛)', '토벌하였다(討)', '주살하였다(誅)' 식의 글자를 써서 서술했다며, 엄연히 망한 자기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충성심으로 백제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죽은 의사(義士)인데 그걸 왜 역적놈 취급하듯이 써놨냐고 비판했다. 전쟁사가 구체적이지 않은 삼국사기나 동국통감과 달리 생각만큼 고중세 전쟁사에 대해서 기록을 덧붙이며 쓰려했으나 자료의 미비로 한계는 있었다.


3. 기타[편집]


"渤海不當錄于我史, 而本爲高勾麗故地, 與我壤界相接, 義關唇齒, 故通鑑備書之, 今從之."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본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따른다"

『동사강목』 범례


발해에 대해서 조선사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득공의 《발해고》와 대비된다.

다만 발해를 두고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는 부당하다"며 한국사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4] 발해사에 대한 분량이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삼국사절요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발해사의 주요 사건들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성경통지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이나 고려사 등을 인용해서 시간 순서에 따라 모두 적고 발해사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데는 발해의 강성함이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나 병자호란의 사례를 들어 거란의 발해 공격은 중원 공략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행 조치 차원'에서 행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다는 해석은 현대 한국 사학계의 해석과도 들어맞는다.[5] 문왕 때인 790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북국’이 발해라고 주장한 것도 의외로 안정복이 유득공보다 앞선다. 따로 '발해국군현고'라는 항목을 두어서 발해의 지리 강역 변동에 대한 최초의 총괄적 분석을 시도한 것도 동사강목이 최초이다. 동사강목에서 발해를 한국사로 다루지 않던 것이 발해고의 편찬으로 반전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동사강목에서 발해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상세하게 수집 조사해 뒀기 때문에 훗날 유득공이 《발해고》를 편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6]

단재 신채호가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길에 올랐을 때 갖고 간 유일한 물건이 동사강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채호는 안정복이 500년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평생을 역사 한 가지에 노력한 유일한 사학 전문가로써 연구의 정밀함은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고 지리지에서의 오류 수정이나 사실 모순의 변증에 가장 공이 많다고 호평하면서도, 초야에 파묻혀 살던 가난한 사람이라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1급 사료를 얻어볼 수가 없어 독단하거나 본인의 추측을 첨부한 것도 있으며, 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왕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한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자를 단군, 부여보다 앞세웠다고도 깠다.[7]


4. 외부 링크[편집]


[1] 물론 나중에 동사강목의 후속편격으로 조선 왕조의 역사를 다룬 열조통기를 저술하기도 하지만.[2] 현대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지만, 고고학이고 뭐고 없던 조선시대 당시의 관점 및 시대상의 한계성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3] 기자조선설을 부정하는 현대 학계의 관점에선 위만조선 이전 토착 고조선 왕계의 마지막 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 기자조선설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기 이전인 조선 후기 당시엔 그렇게 인식했다는 말이다.[4]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부당하다는 것도 한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기보다 신라의 삼한일통 이전의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후고구려(태봉)나 후백제처럼 ‘(유교적 도덕적 명분을 두루 갖춘) 정통성이 있는 왕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더 짙다. 마한 멸망 이후 신라의 삼한일통까지 안정복이 삼국(+가야) 전체를 ‘무통’ 즉 정통성 없는 나라로 간주한 이유가 이것이다. 발해의 경우는 견훤처럼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뒤에 신라로부터 대아찬(5위) 관등을 받는 등 잠깐이나마 신라의 신하국을 자처한 적이 있기도 했고(한때 고구려 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보덕국왕 안승은 신라로부터 소판(3위) 관등을 받았다).[5] 다만 최근에는 병자호란을 위해 명나라를 선제 공격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6] 출처: 김종복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발해사 연구 성과'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년[7] 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온 사람이 한민족 왕조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불편하게 생각해 기록이 날조되었다거나 실은 한민족 계통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의외로 신채호는 기자를 허구의 인물이라고 부정하거나 실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그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기자조선의 기록을 일단은 인정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냥 단군과 비슷한 시기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왔었구나"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출처: 조선사연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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