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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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지리
4. 교육
5. 기타



1. 개요[편집]


東小門洞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속한 법정동. 지하철 한성대입구역부터 성신여대입구역 사이의 동소문로 좌우에 있으며, 동쪽의 동선동, 서쪽의 성북동, 남쪽의 삼선동, 북쪽의 산 능선을 따라 돈암동과 접해 있다.

현재 동소문동의 면적은 0.29㎢이다.

2. 역사[편집]


애초에 경성 동소문[1] 밖에서 그 동쪽에 있는 고개 앞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갑오개혁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崇信坊) 동문외계(東門外契) 돈암리(敦岩里)라 하였다.

1911년에는 경기도 경성부(京城府) 숭신면(崇信面) 돈암리 삼선평(三仙坪)이라 하였고, 1914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돈암리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지역이 새로운 주택단지로 부상하여,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돈암리 일대에 급속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졌다. 국권피탈 뒤에 실시된 조선 토지조사사업의 시행과정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경성 인근에 토막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원래는 평산목장이라는 초목지와 그 주위에 토막을 짓고 살던 빈민들이 다수 거주할 뿐이었으나, 자연경관이 워낙 수려하고[2] 도심지와도 가까워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1936년에 경성의 최초 구획 정리사업지구로 영등포와 더불어 돈암지구가 선정되면서 이곳이 서울의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다.

재개발 당시 이곳에 살던 토막민이라고 지칭했던 도시 빈민층을 내쫓는 게 큰 문제였다. 토막민들은 지면을 파서 그 단면을 벽으로 삼거나 혹은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적 등으로 벽을 삼고 양철이나 판자로 지붕을 만든 원시 주택 즉 토막에 거주하고 살았다. 이들에 대한 철거는 1939년에 추진되기 시작하여, 7월에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200여 호를 경관 30여명이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 수십 명에 의해 일시에 철거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리된 토지를 분양하고 새로운 건물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경성 총독부는 내선일체라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일본식 문화주택한옥을 50대50으로 하여 건립하게 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살도록 하려 했다.[3]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패했다. 이곳에 거주한 주민 전체의 98.6%가 한국인이었으니,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한옥 단지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1939~1944년 일제에 의해 서울에서 가장 먼저 주택단지로 개발된 곳이 바로 이곳 동소문동을 비롯한 돈암개발지구였다. 그래서 일제에 의해 반듯이 정돈된 동소문동의 마을길은 모두 일직선이다. 명륜동이나 성북동의 마을길 같은 미로가 없다.[4] 이때 명칭도 돈암정(敦岩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4년에는 돈암초등학교와 돈암시장이 조성되었다.

1963년 돈암동 지역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돈암동,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으로 4분될 때 돈암동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때 동소문동은 동소문동1가~동소문동4가 일원 및 돈암동 가운데서 돈암초등학교 앞을 기점으로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에 이르는 소로 이남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돈암동에서도 알짜 지역을 다 차지했다는 평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일제강점기에 반듯이 정돈되어 주로 중산층 이상의 주택이 있었던 곳을 차지했기 때문이다.[5]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의 한성대입구역 자리에 전차역이 있었다. 이 전차역은 다음 역인 미아 종점까지 통행하는 남북관통 전철 노선에 속해 있었다. 그 후 1968년까지 한성대입구와 성신여대입구 사이의 동소문로에는 전차가 운행되었다.

1970,80년대에는 이곳에 아카데미과학 본점 및 전시장이 있어서 프라모델과 완구의 메카로 꼽혔다.[6]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북천은 악취로 유명해서 복개 요구가 많았고, 1.21사태 이후 안보문제까지 더해져 1971년 성북천에 복개천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천 복개+주거문제 해결+유사시 방어진지 목적이다.[7] 이 아파트는 2000년대 중반 청계천복원으로 불어온 하천복원 분위기때 철거되었다.

그 전부터 서울 동북방향 버스노선의 중심지라서[8] 4대문안 도심 이동에는 별 지장이 없었으나 1985년에 지하철 4호선이 뚫리면서 한성대입구역성신여대입구역이 개통되어 이 지역 또한 지하철시대가 열린다.[9] 동선동의 성신여자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개편되고, 정원이 대폭 증원되면서, 성신여대입구가 성북구의 대표적인 상권으로 자리잡은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10]

1998년에는 송산아파트, 2004년에는 한신휴아파트, 2010년에는 브라운스톤동선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한옥 주택단지를 아파트단지가 서서히 대체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동소문동 6가의 재개발이 추진되었으나, 피터 바돌로뮤를 비롯한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08년부터는 동소문동 2가의 재개발이 추진되었으나, 현재 사업 진척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2017년 9월에는 우이신설선 경전철이 개통되었다.

3. 지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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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성북동과 함께 가장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의 동소문로를 따라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 동소문로와 복개된 성북천 지역에는 삼선골목시장과 돈암제일시장이 있고, 수도권 전철 4호선이 지나간다.

서쪽의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부터 보면 동소문로 북쪽으로 동소문동 1가, 남쪽으로 동소문동 2가가 펼쳐진다. 동소문동 1가의 동소문동사무소와 삼선중학교 사이 언덕에 있는 청룡암(靑龍庵)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좌근이 1853년에 창건한 것으로, 원래 성북동 구준봉 아래에 있었는데, 산지개발계획에 따라 터를 매각하고 1969년 현 위치에 새로 지은, 작은 절이다.[11]

한성대입구에서 삼선중학교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에는 좌우로 공동 주택들이 나란히 있다 이는 이 마을이 근대화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변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삼선중학교로 가는 큰 길을 만나는 교차로에 이르고, 거의 학교 앞까지 다다르게 되면 5층짜리 벽돌건물로 된 가톨릭 사제관을 보게 된다.[12]

거기서 동쪽에 있는 동소문동 4가로 접어들면 '돈암장'이라는 커다란 한옥건물이 나온다. 1938-1939년에 지어진 이 주택[13]은 지금 개인 저택으로 되어 있어 그 내부로 들어가 살펴 볼 수 없으나, 그 본채는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지붕면을 앞뒤로 배치하고 측면에는 삼각형의 합각벽이 생기게 되는데 여기를 길상무늬로 장식했다. 그 후원 또한 넓은 공간으로 노송 등의 수목들이 식재되어 있다. 원래는 일제시절에 광산업으로 치부한 조선타이어 사장이 소유하던 집이었으나, 1945년 10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빌려주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기에 기거하면서 해방정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어 유명해졌다. 이곳 돈암장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동소문송산아파트라는 3개동짜리 작은 아파트가 나온다.[14] 동소문동 4가의 동소문로 큰길 쪽으로는 가구 도매점과 상가빌딩들이 여러 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소문로 큰 길 건너 남쪽 편에 있는 동소문동 2가에는 성북천변을 따라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동소문2주택재개발지역이기도 하다. 동소문동 2가의 성북천변에는 삼선골목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동소문동 2가 동쪽 편에 있는 동소문동 3가 역시 성북천변을 따라 주택가들이 위치하고 있고, 도로변에는 롯데하이마트 빌딩을 비롯해 여러 상가빌딩들이 있다.

거기서 동소문로 길을 따라 계속 동쪽으로 가면, 성북구청입구 사거리가 나온다. 성북구청입구 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돈암초등학교가 나오고,[15] 거기서 쭈욱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돈암동 한신한진아파트의 거대한 단지가 나온다.

성북구청입구 사거리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돈암우체국과 성북구청이 나오는데, 여기는 삼선동 지역이다. 거기서 주욱 더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보문동을 거쳐 종로구 창신동 쪽으로 가게 된다.

성북구청입구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계속 가면 성신여대입구역이 나온다.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동소문로를 따라 주욱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동선동인데, 여기에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나온다.[16]

성신여대입구역 북서쪽에는 오래된 주택가와 빌라단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동소문동 6가). 이쪽도 대로변은 번화하여 여러 상가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특히 은행, 학원, 병원 등이 이러한 상가건물의 여러 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 북서쪽 구릉지로 올라가면 동소문동 7가인데, 여기엔 9개동 짜리 한신휴플러스아파트 단지[17]와 4개동 짜리 브라운스톤동선아파트 단지,[18] 그리고 서울정덕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브라운스톤동선아파트 바로 옆에는 샤인힐아파트라는 아주 조그만 1동짜리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19]

동소문동 5가에는 돈암제일시장이 위치해 있고, 여기엔 육류, 어류, 야채, 잡화 등을 파는 재래상점들과 맛집들이 밀집해 있다. 가격이 저렴하고 신선한 물건과 음식들을 팔기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돈암순대'라는 순대집과 '황해도떡집' 등 여러 개의 떡집, 그리고 모듬전을 파는 '평양오마니집', 그리고 '태조감자국'집이 유명하다.

성신여대입구역 남동쪽은 동소문동이 아니라 동선동인데, 이쪽으로 가면 성신여자대학교가 나온다. 이 지역에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온갖 음식점, 술집 등이 번창해 있다(동선동 1가).

그리고 성신여대입구역 북쪽으로 가면 돈암동이 나오고, 여기에도 아리랑로를 따라 여러 상가빌딩들이 밀집해 있다.[20] 최근에는 베스트웨스턴 아리랑힐 호텔과 MG 새마을금고 건물이 이곳 대로변 동편에 완공되었다. 거기서 쭈욱 더 올라가면 아리랑고개가 나온다. 아리랑고개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정릉동이다.[21]


4. 교육[편집]


동소문동 1가에는 삼선중학교가 있다.[22] 동소문동의 남동쪽에 위치한 동선동에는 성신여자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동소문동 6가에는 성북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등학교인 서울돈암초등학교가 있다. 동소문동 7가에는 브라운스톤동선아파트 맞은 편에 서울정덕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958년부터 1998년까지는 돈암동서라벌고등학교가 위치하여 강북을 대표하는 명문고등학교 가운데 하나로 통했다.[23] 그러나 서라벌고등학교는 1998년 2월에 노원구 중계동으로 이전하였다.[24]

5. 기타[편집]


  • 2017년에 발간된 책 '놀이의 천국'에는 1960년대의 동소문동이 '아름다운 고향'이자 '놀이의 천국'으로 묘사된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 2학년까지 성북구 동소문동에서 살았던 저자 최성철은 가난했지만 유년의 순수와 가족의 사랑이 가득했던 곳으로 동소문동을 기억한다.#
  • 돈암초등학교 후문 앞에 한국사학진흥재단이 지난 2017년부터 행복기숙사 공사를 시작했으나, 2022년 현재까지 공사에 진척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교통 혼잡과 사고 위험으로 인근 돈암초등학교 학부모와 주민들의 민원들이 폭주하면서 공사 중단이 장기화된 것.[25] [26] 이로 인하여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엄격한 교통 법규 준수가 필요한 곳임에도 사전에 교통영향평가나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서 공사를 강행시킨 유은혜 교육부 장관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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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소문은 혜화문의 속칭인데, 일제강점기에 헐렸으나, 1992년에 복원되었다.[2] 당시의 이 곳 정경을 기록한 문헌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성내의 혼잡함은 찾아 볼 수 없는 한적하고 공기 맑은 지역이다 새로 닦은 아스팔트 큰 길 평지는 드문드문 소나무가 서있으며 야외이기는 했으나 올라가 놀기 좋은 나지막한 산 그 산 밑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곱게 고이는 맑은 우물 살기도 좋으려니와 걷기도 더 좋은 곳이다 길의 흙까지도 깨끗한 흰 모래 동네 전체가 햇빛을 듬뿍 담아 언제나 밝은 곳이다."[3] 같은 시기, 인근에 경동고등학교를 세우면서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50대 50으로 입학시켰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중학교)과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고등보통학교, 내선일체 시기 중학교로 변경)가 다른게 일반적이였다.[4] 이는 지적도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어디가 개발지구이고 어디가 아닌지.[5] 이는 동선동, 삼선동도 마찬가지로, 동선동, 삼선동 또한 돈암개발지구로 정리된 곳이며, 돈암개발지구 당시 임야(산림)로 남았다가 해방 직후 및 한국전쟁 이후 혼란기에 무허가 판자집들이 난립한 달동네는 돈암동으로 남았다. 나중에 이 돈암동 불량주택지역의 남쪽 지역, 경동고등학교 남쪽은 삼선동에 편입되었지만.[6] 지금이야 그런식의 프라모델을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지만 그시절에는 전시장은 커녕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많았으니.[7] 서대문구 유진상가아파트도 비슷한 시기 같은 이유로 건설되었다. 서울의 동북, 서북 방향 최종 방어선 목적으로.[8] 지금도 1권역 버스의 거의 다수가 동소문로를 통과한다.[9] 교통과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곳은 미아사거리역 북쪽이다. 그쪽은 과거 버스만 있었을 시대에는 도심진입 하려면 낮에도 한시간 이상은 잡았어야 했으니. 동소문동은 일단 4대문안 진입은 버스만으로 충분했고 (애시당초 동명(洞名) 자체가 8대문 중 하나인 동소문에서 온 만큼 4대문안에서 고작 300 m만 가면 나오는 동네이니 당연하다), 지금도 환승저항으로 인해 종로, 광화문, 안국동 방향은 4호선보다는 버스가 더 편리하다.[10] 4호선 개통 이전에는 언급한 대로 미아사거리 북쪽의 교통이 불편해서 대규모로 개발되지도 않았고, 또 조그마한 지역상권으로 분산되었었다. 그러나 4호선 개통과 그로 인한 교통편리로 인해 미아사거리 북쪽이 집중 개발되어 인구가 늘고, 그 늘어난 인구들이 4호선을 이용, 성선여대입구역의 상권으로 찾아오는 관계, 즉 유동인구가 늘어난 관계로 거대상권이 되었다.[11] 당초 이 청룡암은 현재 삼청각이 있던 위치에 있었다. 대웅전과 요사 채를 갖춘 제법 큰 사찰이었으나, 당시는 그곳이 숲이 우거지고 짐승이 오가는 깊은 산속이었다고 한다. 한 때 춘원 이광수가 여기에 머물며 작품을 쓰기도 했었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던 그 암자가 이렇게 변해 이 곳으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12] 빨간 벽돌색과 대비되는 하얀 베란다, 부드럽게 구부린 유리창과 더불어 전체적인 벽체도 유려한 곡면으로 몇 번에 걸쳐 변화를 주고 있다. 측면이나 후면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음직한 높은 첨탑 중심으로 붉은 계통의 슬레이트 지붕을 한 건물을 양편으로 붙여 두었다.#[13] 돈암장의 한옥 건물을 지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었다. 창덕궁 대조전을 지은 목수의 제자로 무형문화재 74호였던 이 사람은 생전에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건축 전문가에 의하면 돈암장은 가운데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온돌방의 3면을 마루가 돌아가는 형식으로 보아 궁궐의 침전을 본뜬 형태다. 조선왕조가 망한 후 궁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14] 총 345세대. 1998년 6월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다. 이 아파트에 영문학자이자 클래식 애호가였던 안동림 선생이 2014년까지 거처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클래식 음악의 교과서로 통하는 '이 한 장의 명반' 시리즈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15] 그 근처에 이름난 사교육 학원들이 밀집되어 있다[16] 점집과 무당집이 매우 많다.[17] 총 409세대. 2004년 7월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된 곳이다.[18] 총 194세대. 2010년 11월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된 곳이다.[19] 총 12세대. 2004년 9월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된 곳이다.[20] 이불 파는 집과 피자가게들이 유난히 많다.[21] 미아리고개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길음동이다.[22] 이 학교는 특히 농구부가 유명한데, 전희철, 우지원, 양동근, 문성곤 등 유명선수들을 배출했다. 작곡가 유재하, 배우 최민식의 모교이기도 하다.[23] 많은 예술계통 인재를 배출하였다. 작곡가 이영훈, 가수 이치현, 가수 김흥국, 배우 임동진, 배우 임채무, 개그맨 전유성 등이 서라벌고 출신이다. 1982년에는 98명을 서울대에 합격시키며 당시 평준화 일반고 가운데 최고의 성적을 내기도 하였다.[24] 서라벌고가 있던 자리는 현재 돈암동부센트레빌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25] 아파트 주민들은 기숙사 건립 이후 생길 공사현장의 소음과 위험요소 등을 이유로 건립을 반대하였다. 행복기숙사 건립예정 부지 앞 인도가 근처 아파트 등 주택가에 사는 돈암초등학교 학생들이 등교하는 길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26] 단, 현재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