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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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저술 목적
3. 왜 완성되지 못했는가?
4. 구성
4.1. 전해지는 내용
4.2. 동양평화를 위한 5대 구상
5. 평가


1. 개요[편집]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기다리며 뤼순감옥에서 저술한 미완의 저서. 서론과 목차만 쓴 상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2. 저술 목적[편집]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부터 자신의 거사가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위였음을 역설해 왔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이러한 그의 사상과 동북아 정세에 관한 식견, 미래구상을 담고자 했다.


3. 왜 완성되지 못했는가?[편집]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을 언도받은 후, 항소하지 않는 대신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위한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고, 판사도 이에 동의했다. 안중근은 이 말을 믿고서,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를 먼저 옥중에서 쓰고서, 이후에야 동양평화론 저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이 자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정계 거물, 유신지사였던 이토를 암살했다는 점, 그리고 오래 살려둘수록 한반도 내부의 항일 여론과 세계적인 동정 여론이 고조될 가능성을 의식하여, 최대한 빨리 그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려 했다.[1] 결국 안중근은 사형이 언도된 지 40여일 후인 3월 26일에 처형되었고, 이때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초반 일부분(서론과 전감 초반)만을 겨우 쓸 수 있었을 뿐이었다.


4. 구성[편집]


1.서론 2. 전감(前鑑)에 이어 그 다음 차례는 3. 현상(現狀) 4. 복선(伏線) 5. 문답(問答)으로 이뤄지는 구성으로 이미 머리속에 전문에 대한 구상을 마쳤음을 알수있다.


4.1. 전해지는 내용[편집]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 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 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事物)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牲物 :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韓), 청(淸) 두 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겟는가.

그러나 한, 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이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는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대문에 한 · 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 사랑 무리(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창춘(長春) 이남을 조차(祖借)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名聲)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 · 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謨)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西勢東漸) 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 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극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蚌鷸之勢)[2]

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 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 · 청 두 나라 사람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뤼쑨구(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뤼쑨 옥중에서 쓰다 -



4.2. 동양평화를 위한 5대 구상[편집]


비록 완성되기 전에 사형이 집행되어 본인이 담고자 했던 내용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안중근은 사형 직전에 일본측 간수와의 회견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자신의 5대 구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동양평화론을 통해 주장하려던 구체적 실천 방안을 유추할 수 있다.

  •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협력을 위한 기구를 설치할 것.
  •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사용할 것.
  •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이 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양 열강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설 것.
  • 대한제국과 청은 일본제국의 지도 아래 경제 개발에 힘쓸 것.
  •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을 것.[3]



캡션



5. 평가[편집]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시한 내용들은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제시하는 초국가적 통합, 협력 이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구체적으로는 1) 국제기구를 통한 다국적 협력, 2) 경제통합, 3) 집단안보 등이다. 그것도 UN이나 EU같은 국제기구가 나오기 수십년 전에 말이다.[4] 이 점에서 동양평화론이 갖는 선구적 의미는 더욱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동양 지배, 패권'이 아닌 '한중일 3국의 주권 존중,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자국 중심의 아시아 패권을 추구하려 했던 일본과 비교할때, 안중근이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쉬운 면도 있다. 공동은행, 공동화폐는 분명 선구적인 주장이었으나 당시의 경제력상 중국 아니면 일본, 그나마도 근대화에 가장 앞섰던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유럽연합이 실상은 독일의 제4제국이 아니냐는 일각의 말을 듣는 이유도 독일이 무역과 금융을 바탕으로 유럽연합 내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연합군 창설 이것도 역시나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일, 여기까지만 봐도 결국 경제, 군사적 부분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실시되는 건데 경제개발도 일본 주도로 하자는 주장은 이를 확정짓자는 주장이다. 물론 당시 한중일 3국 중에서 성공적으로 근대화되고 있는 국가는 일본뿐이었기에 3국 공동으로 경제개발에 나서면 그 주도국은 일본이 될 수 밖에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중국의 경제력은 성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대일 의존도, 종속도는 높아질 것이 필연이다.

만일 이러한 우려가 단지 우려로만 끝나기 위해서는 일본이 안중근 의사식 아시아주의를 충실하게 표방하고 따르며 이를 위해 상당한 기간동안 자국의 역량만으로 유럽 열강들로부터 중국과 한국을 지켜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은 그럴 생각도 없었고, 일본은 열강 중 약체급이던 러시아와의 전쟁마저도 겨우 이길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러시아와의 전쟁마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이길 수 있었다.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 한 체급 이상의 열강들과 대결하기에는 어려웠다.

여기에 중국의 면적과 인구, 그리고 중국에 눈독을 들인 열강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 많은 영토와 인구를 다 살피기에는 일본의 국력과 역량이 부족하고, 중국에 비상한 관심을 갖던 서양 열강들도 가만히 구경만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일본이 이러한 구상을 따르면 세계 열강과 대립해야 하는 외교적 고립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상당히 많이 한다. 성공하면 그래도 한국과 중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어 사실상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과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들여야 할 재원이나 소요 시간이 일본에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 된다.

이러한 비판과 한계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쓸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 열강들과 맞설 정도의 국력을 보유했던[5] 일본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팽창/패권세력이 아닌, 역내의 책임있는 지도국가로 행동하기를 촉구했으며, 그의 하얼빈 의거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고, 나쁘게 말하면 일본의 선의 및 변화 가능성에만 의존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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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앞서 재판을 맡은 판사의 약속과 어긋나는 내용인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1) 판사도 애초부터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다 쓸 때까지 기다릴 생각 없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혹은 2) 판사 개인은 기다려줄 의향이 있었으나 일본 정부가 거부했을 가능성 등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 것이다.[2]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 이 때 어부가 나타나면 힘 안 들이고 잡아가게 된다고 해서 어부지리라는 말이 생겼다.[3] 이는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인이었기에 로마 교황을 중재자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세계적 패권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신뢰를 확인하는 방법은 전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인 천주교의 수장인 교황을 통한 방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중근세시기 교황은 유럽 국가들간 중재에 나서는 등, 유엔 사무총장과 비슷한 역할과 지위를 가졌다. 진영에 관계 없이 보편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교황 앞에서 한 맹세를 지키지 않는 행위는 자국의 입장에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4]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창립된 국제연맹과 비교해도, 10년 앞선 주장이다.[5] 일본도 타 열강들과 비교하면 제일 약소한 축이었지만 그래도 아시아 내에서는 최강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