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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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사마사와의 대결
3. 전개: 252년 동흥에서의 대격돌
3.1. 왜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한 것일까?
3.2. 사마사 측의 전략
3.3. 제갈각의 성공, 대승을 거두다.
4. 결과: 제갈량의 북벌 이상의 피해를 입혔지만.



1. 개요[편집]


동흥제 전투는 252년 조위사마사손오제갈각이 지휘한 위나라오나라 간의 전투이다. 제갈탄의 난에서의 제2차 동흥전투와 구분하여 제1차 동흥전투라고도 한다.

2. 배경: 사마사와의 대결[편집]


251년, 고평릉 사변으로 위나라를 휘어잡은 태부 사마의의 죽음으로 장남 사마사대장군으로 승진하여 사마씨의 대권을 승계했다. 공교롭게도 위나라의 2세대 사마씨인 사마사가 권력을 물려받은 시점에 오나라의 2세대 제갈씨제갈각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격이었다.

두 권신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 둘 다 황제 다음 가는 높은 직위에 오른 건 물론 사마의제갈근이라는 각국의 거물을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동생으로 각각 사마소, 제갈융이 있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권력을 물려받은 셈인 사마사와는 달리, 제갈각은 6년 연상이긴 해도 스스로 여러 공적을 세워 그 자리에 올랐다. 『진서』 「경제기」와『삼국지』 「제갈각전」을 비교해봐도 제갈각은 대권에 오르기 전부터 신동 일화 외에도 여러 군사적 / 정치적 활약을 기록한 반면 사마사의 첫번째 활약이자 유일한 군공은 쿠데타고평릉 사변이었다.

어디까지나 탁고 대신으로 어린 손량을 보좌했고 손준 등 견제세력도 있었던 제갈각과는 달리 사마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훨씬 권세가 강했지만, 사실 완벽한 건 아니어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한 조방이 훗날 하후현 등과 친위 쿠데타를 획책하는 등 이래저래 불안정하긴 했다. 이러한 권력의 취약함 덕분에 두 2세대 권신들은 결국 권위를 굳건히 세워줄 뛰어난 업적을 세우는데 여념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의 제갈각과 위의 사마사가 맞붙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

제갈각은 건흥 원년(252년) 10월, 동흥에 사람들을 모아 다시 큰 제방을 만들어 왼쪽과 오른쪽은 산으로 이어지고, 그 제방을 낀 형태로 두 성을 쌓았다.

『삼국지』 「제갈각전」

첫번째 도발은 제갈각의 몫이었다. 제갈각은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했다.

3. 전개: 252년 동흥에서의 대격돌[편집]



3.1. 왜 동흥제의 재축조를 명한 것일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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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제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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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군의 지도
230년, 일찍히 손권은 동흥에 제방을 쌓아서 소호의 물을 막게했다. 그러나 오나라군이 회남 지역에 쳐들어가자 오히려 소호에 있던 위나라의 배 때문에 패배를 겪자 손권은 제방을 철폐하고 다시는 수리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동흥제는 근본적으로 물이 풍부한 양주 지역의 수로를 활용하기 위해 지은 제방이다. 일찍히 위나라의 등애는 대운하를 개발해서 합비 측면의 농업을 늘리는 동시에 국경의 장강허창회수가 연결된 덕분에 공세와 방어 모두 용이해졌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았던 호삼성의 경우에도 양주의 수로를 활용하기 위해 동흥제를 건설하려 했다고 해석했다. 즉, 이 동흥제의 건축 목적을 '수군 운용에 이익을 얻기 위해'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소호가 유수를 통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다면 호수는 불어날테고, 수군의 활동범위도 더 넓어지게 되는게 맞기는 하다.

그러나 동흥제 건설은 양날의 칼이었다. 소호의 물이 느는 것은 확실히 수군의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으나 230년의 사례처럼 위나라에서도 역이용할 수 있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합비를 통한 주요 통로인 유수의 물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즉, 유수오와 소호의 수군이 쉽사리 퇴각하거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수로가 완전히 막힌다고 볼 수 있다.

한 해석에 의하면 손권이 동흥에 제방을 건설하려 했던 이유는 228년에 석정 전투에서 오나라가 대승을 거둬서 양주 방면에서 오나라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229년에 건업으로 천도를 명했음으로 양주 방면의 공세를 다채롭게 변화하기 위해 내세운 강수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오나라는 합비에만 주야장천 때리기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공세를 시도했고 제갈각 또한 참여한 241년의 작피 전투에서는 한참 후방인 작피형주양양번성을 동시에 포위하는 등 상당히 이색적인 공세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작피 전투에서 전종왕릉에게 패배하는 등[1] 악재와 앞서 언급한 등애의 대운하 덕분에 양주 방면에서 위나라가 오히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동흥제는 오히려 위나라의 칼로 오나라의 공세 전략을 제한하는 악재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손권이 동흥제를 방치한 이유는 단순히 패전뿐만이 아니라 이런 대국적인 문제가 일조했다는게 이 해석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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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소호(巢湖)
이런 의미에서 제갈각의 동흥제 재건은 제갈각의 오랜 정치적 / 군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혜안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책이었다. 권위 강화를 위해 위나라와의 전쟁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제갈각에게는 동흥제 재건은 상당한 패나 마찬가지였다. 동흥에 제방을 제건함으로 한때 손권이 그랬듯이 양주에서의 우위를 다시 점하리라 내적으로도 알리는 신호였으며 외적으로도 실패의 위험없이 위나라에게 대놓고 도발할 수 있는 묘수였다.

252년 10월, 제갈각은 양쪽의 산을 기둥으로 삼아서 각각 성을 쌓고 그 가운데에 제방을 건설해서 소호의 물이 가득차도록 명령했다. 각각 성에 겨우 1천명의 병력을 놔둬서 서쪽의 성은 전단에게 맡기고 동쪽의 성은 도위 유략에게 맡기고 퇴각했다. 뜬금없이 침공당한 위나라에서는 이를 치욕스럽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제갈각의 강력한 도발은 명백히 성공한 셈이다. 이제 사마사의 반응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3.2. 사마사 측의 전략[편집]


동흥제 재건설로 인해 위의 사마사측에서도 전략회의가 시작되었다. 아직 제대로된 전공이 없는 상태에 막 사마의에게 물려받아 권위가 약했을 무렵이니 사마사 입장도 오나라와의 전쟁 소식에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진서』 「경제기」에서는 동흥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고 고평릉 사변에 대한 기록 이후에 이하생략(...)해 거의 바로 합비신성 전투로 돌입하는데 사마사 입장에서는 워낙 치욕스러운 기록이라서 아예 빼버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황상 제갈량의 승리가 분명한 노성 전투마저 사마의의 승리로 돌변시킨 『진서』의 신뢰도를 고려하면 근거는 없지만 전혀 불가능한 가정이 아니다.

진동 장군 제갈탄이 사마사에게 말했다.

"지금 오가 우리 나라 국경 안으로 침입해온 것을 이용하여 문서[2]

에게 강릉 지역을 압박하게 하고, 중공[3]에게 무창을 향하게 하여서 오의 상류에서 재갈을 물려두십시오. 그런 다음 정병을 골라서 그들의 두 성을 공격하게 하면 그들의 구원병이 이를 때쯤에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4]

제갈탄 외에도 정남 장군 왕창, 정동 장군 호준, 진남 장군 관구검 등 양주 방면의 주요 사령관들 모두 각기 오나라를 정벌할 전략을 세웠다. 이 세명의 전략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정에서는 상서 부하에게 어느 전략이 옳을지 문의했다. 부하가 말했다.

“옛날 부차(夫差)는 제(齊)나라를 누르고 진(晉)나라를 이겨서 위세를 중원에 떨쳤지만 고소대(姑蘇臺)에서 최후를 만났고, 제(齊)의 민왕(閔王)은 영토를 병합하고 변방을 개척하여 국토가 천 리나 확대되었지만 몸은 국가의 전복을 밟았습니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에 증명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은 친히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병합한 후에 야심에 차고 욕망이 가득해져 흉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선문후(宣文侯)는 원대한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손권은 죽었고, 어린 아들은 제갈각(諸葛恪)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끝까지 안정을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손씨는 장강(長江) 밖(형주)에서 멸망의 시기를 연장하여 생명을 길게 할 수 있었겠지요.

의론하는 사람들은 간혹 배를 띄워 장강을 건너 형주를 소탕하려고 하고, 간혹 사방의 길로부터 동시에 진격하여 그 성이나 보루를 공격하기를 원하며, 간혹 변방지역에서 대규모의 둔전을 행하여 기회를 타서 행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모두 적을 공격하여 취하는 일상적인 계책입니다. 정병이 출발하였을 때부터 물러날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적을 침략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군주와 신하를 거짓으로 칭하고, 길흉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며, 또 그 총대장(손권)을 잃어서 상하가 국가의 위기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설령 중요한 나루터에서 배를 나란히 하고 성을 공고히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할지라도, 장강을 가로지르는 계책은 아마 승리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커다란 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나와서 침입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쌓아놓은 곡물을 먹고 운송하는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며, 적군을 습격하여 원정하는 노고와 비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당면한 급한 일입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10만 병사로 흉노(匈奴) 땅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했는데, 계포(季布)에게 당면하여 그러한 단점을 지적당했습니다. 지금 장강을 넘어 적의 영토를 밟으려는 책략 또한 번쾌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법령을 밝히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 같은 상황 하에서 계책을 펴고 뛰어난 계책을 펼쳐서 적의 패잔병을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는 필연적인 방법입니다.”[5]


"의논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를 띄워서 지름길로 건너는데, 장강밖으로 가로질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여 그들의 성루를 공격하자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변경에 둔전을 확대하고 있다가 틈을 봐서 움직이자고 하였는데, 진실로 모두 적을 잡을 수 있는 정상적인 계책입니다.[6]

그러나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들락날락 하기를 3년 동안이나 하였지만, 몰래 습격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적들이 노략질한 지는 거의 60년[7]

동안에 군신들이 서로 보위하며 길흉을 함께 걱정하였고, 또한 그들의 원수를 상실하여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걱정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으니, 설령 나루의 요새에 배를 늘어놓거나, 성을 굳게 하면서 험한 곳을 점거한다면 가로질러 건넌다는 계획은 승리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변경을 지키는 군사는 적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적들이 연락망을 늘어놓고 특히 비밀을 중하게 여기고 있어서 간첩 행위를 시행할 수 없으니 우리의 귀와 눈에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무릇 군대에 이목이 없고 살펴보는 것이 자세하지 않으면서 많은 무리를 들어 큰 위험이 있는 곳으로 다가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요행히 공로를 세우자는 것이고, 먼저 싸워보고 나서 나중에 승리해보자는 것이니 모든 군대가 취할 훌륭한 계책은 아닙니다. 오직 군사를 앞으로 내보내어 둔전을 확대하는 것이 비교적 완전한 계책입니다. 왕충호준 등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지역을 선택하여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살펴가며 조치를 취하여 두는데, 세 방향에서 일시에 진전하여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서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것이고, 병사들이 나아가서 백성들의 밖에 있게 되면 적군들이 범접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이며,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품으면 항복하여 귀부하는 사람이 매일 이를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멀리 초소를 벌려놓으면 간첩들이 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이고, 적들이 그 지키는 초소로 물러나면 벌려놓은 것은 반드시 얕아질 것이고, 둔전의 농사 짓는 일이 쉬워질 것이니[8]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앉아서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사병들은 곡식을 운수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여섯 번째이고, 틈이 생기는 곳을 때때로 소식을 들으면 쳐서 습격하는 것을 신속히 결정할 것이니 일곱 번째입니다. 무릇 이 일곱 가지는 군사에 있어서 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점거하지 않는다면 적들이 멋대로 자원으로 삼을 것이고, 이것을 점거하여 처리한다면[9]

이익은 나라로 돌아올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릇 주둔하고 있는 보루가 서로 압박하게 된다면 형세는 이미 엇갈리고, 지혜와 용기 있는 사람을 벌려놓을 수 있으니, 재주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계책으로 하면 득실의 계산을 알게 되며, 이것을 비교하면 남는 것과 부족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오랑캐의 허실이 장차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무릇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면 하는 일은 번거롭고 힘은 다 쏟게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대적한다면 부렴이 무거워지고 재물이 궤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적이 편안하면 거들을 수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배부르다면 그들을 배고프게 할 수 있어야 한다.'[10]

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11]


상당히 길지만 요약하자면
1. 제갈각의 도발은 결국 손권을 잃은 불안함을 타파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2. 이에 침공으로 대응하지 말고 대규모 둔전으로 전략을 수정해서 장기전을 노려야 한다.
3. 결국 장기적으로 손해보는 쪽은 먼저 도발하고 국력이 더욱 약한 오나라이다.
4. 장기적으로 틈이 생기는 순간 바로 공격해서 쳐부숴야 한다.
즉, 부하의 전략은 지휘관들이 내놓은 동흥제 공략법을 아득히 뛰어넘은 제갈각의 총체적 전략에 대한 파훼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원수를 상실하여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걱정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고 있으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부하는 제갈각의 동흥제 축조가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는 점을 느슨하게나마 꿰뚫어보고 있었다.

234년의 제갈량의 5차 북벌의 일환으로 벌어진 촉군의 오장원 점거도 결국 제갈각과 동일한 전략적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적을 도발하고 더 유리한 지형에서 버텨서 선제 공격의 폭탄을 떠넘긴다. 제갈량은 둔전을 벌이며 장기간 오장원에서 버티고 농서의 여러 거점을 찔러보며 위의 내부 불만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조예사마의의 인내심에 도전했는데 반대로 오보다 훨씬 더 큰 전력[12]을 보유한 위나라가 둔전을 하면서 진득히 장기전에 임한다면 제갈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도발이라는 이점이 오히려 목앞에 칼로 돌변해서 제갈각은 내부 불만을 떨치기 위해라도 대군을 앞에 두고 선제 공격을 지시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전쟁을 회피했더라면 오나라 내부의 제갈각의 권위가 폭락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사마사는 부하의 훌륭한 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추측되는데 불안한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한 가시적인 군사적 업적이 어찌보면 탁고 대신이라는 확실한 입지에 이전의 전공이 존재하는 제갈각보다 불완전한 권력을 승계받은 사마사가 더 필요한 입장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제갈각이 대놓고 도발한 것도 아마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사마사가 "감히" 장기전으로 떨쳐내지 못했으리라는 예측이 동반했을 가능성이 높다.

252년 11월, 사마사는 왕창, 관구검, 호준, 제갈탄에게 세 길로 나누어 동흥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사마사가 반타의 반자의로 제갈각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3.3. 제갈각의 성공, 대승을 거두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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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군의 삼로침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왕창, 관구검, 제갈탄 · 호준 순서다.
252년 12월, 왕창은 남군을 공격하고, 관구검을 무창을 향했으며 호준과 제갈탄은 대군 7만을 이끌고 동흥을 공격했다. 호준과 제갈탄은 여러 부대에게 부교를 만들어 건너게하고 제방 위에 진을 치고 병사를 나누어 전단과 유략이 각각 천명씩 수비하는 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지형이 험준하고 성이 높아서 실패했다.

12월 19일, 제갈각은 4만의 대군을 거늘고 밤낮을 강행하며 구원에 동흥을 구원했다.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적들은 태부(太傅=제갈각)께서 오신다는 것을 들으면, 해안으로 올라가 반드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정봉 혼자만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들은 저들의 경내를 뒤흔들어 허도와 낙양의 병사를 다하여 크게 일으켜 왔으니, 반드시 세워 논 계획이 있을 것인데, 어찌 헛되이 돌아가겠습니까? 적들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믿지 마시고 저를 믿으시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제갈각은 본인이 도착하기 앞서서 정봉, 여거, 유찬, 당자를 선봉부대로 삼아서 산의 서쪽을 올라서 유략과 전단을 구원하게 했다. 정봉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이제 여러 부대의 행군 속도가 더딘데 만약에 적들이 편리한 지대를 점거하게 되면 싸우기가 어려우니 내가 청컨데 그곳으로 빨리 가시오"

이에 제장들은 정봉을 위해 길을 열어놓고 아랫길로 내려갔다. 정봉은 3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지름길로 나아갔다. 북풍이 불어오니 정봉은 돛을 달고 2일만에 동관에 도달하고 서당[13]을 점거했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호준은 병사들의 몸을 덥힐 생각이었는지 술을 놓고 연회를 열었다.

적의 선봉이 적은 것을 파악한 정봉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후작에 책봉되는 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병사들은 갑옷을 벗고 모극을 버리되 투구만 쓰고 큰칼과 방패만 무장한 채로 맨몸에 둑을 기어올라갔다. 취한 위군은 이 광경에 크게 웃을 뿐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유찬과 정봉 등의 병사들은 둑에 올라가서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베어버리니 위의 주둔지를 크게 깨뜨리고 여거의 지원군도 뒤를 이어서 도착했다. 위의 군사들은 놀라서 도망쳤는데, 서로 다투면서 부교를 먼저 타려고 했다. 결국 부교가 파괴되었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물안에 빠졌고, 위군의 병사들은 서로서로를 밟았다. 「주이전」에 의하면 주이는 소호에서 수군을 이끌고 부교를 공격해 파괴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혼란속에 한종[14]환가 등 여러 위의 장수들이 죽고 도합해서 죽은 위군은 총 수만 명이었다.

왕창관구검은 동쪽방면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둔지에 불을 사르고 모조리 다 도망쳤다.

제갈각은 일찍히 오나라를 배반한 한종의 머리를 보내서 대제(손권)묘당에 아뢰었다고 한다.

수레와 가마, 소와 말, 노새와 당나귀를 각각 수천씩 노획했고, 물자와 병기가 산처럼 쌓였다. 제갈각은 부대를 정돈하여 오군은 귀환했다. 큰 승리를 거둔 제갈각은 양도후로 봉해지고, 형주와 양주목을 겸양했으며, 독중외제군사로 삼아서 안팎의 여러 가지 군사적인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더불어 금 1백 근, 말 2백 필, 비단과 베 각각 1만 필씩을 하사받았다.

4. 결과: 제갈량의 북벌 이상의 피해를 입혔지만.[편집]


제갈각의 절묘한 도발은 그야말로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대패로 위군에게 수만의 피해를 입히는 성과는 제갈량의 북벌에서조차 달성하지 못한 업적이었다. 제갈각 이후로부터 위군에게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힌 인물은 강유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강유조차도 공세의 입장에서, 그것도 지휘하에 있는 전군을 쏟아부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비해 제갈각은 방어전에 본인이 지휘하는 주력조차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오직 선봉만으로 이룬 업적으로 강유의 도서 전투에 비해 훨씬 적은 피해와 물자를 요했을 것이다.[15] 제갈각은 전략 구상, 수립 그리고 실행 면에서 깔거리없이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동흥제 전투까지의 활약상 놓고본다면 제갈각은 오나라 2세대는 물론 삼국의 2세대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영걸 중 한 명으로 과감하게 평할 수 있다. 이로부터 몇년 전에 있었던 촉한의 흥세 전투도 위가 관중이 텅텅 비었다고 표현할 정도의 대패를 입은 전투지만 이는 왕평, 유민조상, 하후현의 대군을 지연시키고 그 사이에 비의의 중앙군이 후방에 들이닥쳐 위의 대군을 몰살한 것으로, 성격 자체가 촉한의 여러 거물들이 유기적으로 합작한 전투라 혼자서 전략 수립 및 실행까지 완전하게 해낸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와 단순 비교할 순 없다. 물론 동흥제 전투의 실행 측면에서 선봉으로 나선 정봉과 퇴로를 끊은 주이 등의 활약을 고려했을 때 제갈각의 원맨쇼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이긴 하나, 스스로 쳐들어온 적에 대처한 왕평, 비의, 강유와 비교했을 때 제갈각은 스스로 고안한 기발한 도발로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이고 정봉, 주이 등을 선봉으로 보내는 결정마저도 제갈각의 결제에 따라서 이뤄진 것이기에 업적에 대한 지분 자체는 제갈각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아직 여러 불안 요소가 있었던 제갈각의 입지는 완전히 다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사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인 탁고 대신 입지 + 위대한 군공 + 원수 한종의 죽음 + 성공적인 내치로 인한 백성들 사이에서의 인기의 결합은 권위의 절정이었으며 양주 / 형주 자사에 독중외제군사 책봉까지해서 후일 내부의 반대에 불구하고 20만[16]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엄청난 지지도와 동흥제 전투에 등에 업은 강력한 권위 덕분이었다.

위의 대장군 사마사는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은 본인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했다. 다만 묘한게 아무리 봐도 제갈각의 전략에 대한 맞불로는 부하의 둔전이 가장 좋은 파훼법이다. 결국 제갈탄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을 봐선 사마사가 전략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감군으로 총괄하던 동생 사마소와 자신 외에는 작위를 깎지 않은 덕분에 부하들의 신뢰도를 얻는 등 급한 불은 껐다.[17] 하지만 결국 사마사의 권위를 강화해줄 군공없이 황제 위에 군림한다는 문제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순되어 있는 내부 입지가 약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상식적으로 볼 때 최대한 위와의 전투를 회피하고 내치에 힘쓰면서 촉한의 재상 비의와 함께 위에서의 상황을 주시하는 게 합당하다. 내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군공에 궁핍해진 것은 사마사이고, 칼을 쥔 것은 각각 내부 지지도가 높았던 촉오의 재상들이었다. 사마사는 군공을 세우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취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병먹금 빌미를 주지 않거나 아니면 다시 안전한 요충지에서 도발을 취해 계속해서 위군이 꼴아박도록 강요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을 것이다. 부하의 전략에 임하려 해도 내부 지지도가 안 따라주니 수년간의 장기전은 커녕 내부 불만을 억누르지 못해 도발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고, 사마의를 있는 힘껏 서포트 해준 조예와 달리 황제 조방사마사의 영향력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이었다. 결국 내부 권위를 위해 군사 모험을 멈출 수 없는 악순환에 갇힌 사마사 정권은 언젠가 붕괴할지도 모르는 처지였으며 일이 비교적 잘 풀렸음에도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의 봉기를 맞서야했던 사마사사마소 형제의 미래를 고려하면 이 상태에서 사마사는 더 이른 시점에 훨씬 더 심각한 정변을 맞서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제갈각이 동흥제에서 대승을 거둔 이유가 사마사 및 조위의 정황을 잘 파악하고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갈각 역시 이러한 점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위에 언급된 대로 조위의 정황을 좀 더 지켜 본 다음에 행동을 취했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조위의 정황이 혼란하다면 이를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한편 국력을 키워 상대를 하면 되는 것이고, 안정을 찾을 기미가 보이면 그 때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다는 소리.

동흥에서 대승을 거둔 제갈각은 다시 위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노렸다.

그러나 단양 평정과 이궁지쟁에 이은 동흥제 전투의 성공으로 여태까지 성공만 맛본 제갈각은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여서 이러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인물이 더 이상 아니었다. 결국 제갈각은 제5차 합비 공방전에서 대패하여 연달아 실정을 저질렀다가 몰락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흥제 전투는 제갈각의 전성기를 열고 동시에 그의 몰락의 단초를 심은 승리였다.
[1] 이전까지는 별 성과를 못내기는 했어도 큰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2] 왕창의 자.[3] 관구검의 자.[4] 「조방전」에 배송지주로 인용된 『한진춘추』에 의하면 사마사가 이 간언을 택했다는데 같은 『한진춘추』의 다른 구절을 보면 오히려 사마사가 제갈탄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문책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상충되는 부분이 같은 『한진춘추』내에서 있다는게 문제점인데 정황상 사마사는 제갈탄의 간언을 따랐으나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고 보는게 맞는 듯하다. 『자치통감』의 경우에는 『한진춘추』로부터 인용된 제갈탄의 간언과 다른 기록에서 출제된 부하의 간언을 수록하고 사마사가 둘 다 따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 항목은 『자치통감』의 정리에 의거해서 작성한다.[5]위서』 「부하전」에서 발췌한 기록으로 아래에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사마표의 기록으로 추측되는 발언이 더욱 자세하지만 이 또한 번쾌에 대한 언급등이 내제되어 있음으로 같이 기재한다.[6] 즉, 왕창, 호준, 관구검의 전략을 부하가 모두 읊은 셈인데 누가 누구 것인지 구분하지 않았기에 헷갈린다. 삼국전투기의 경우에도 각 인물의 전략을 구분해서 그리지 않았다. 쉽게 말해, 알 수 없다.[7] 적벽대전으로부터 55년이었는데 아마 이를 언급한 것이다.[8] 여기서 칭하는 물러나는 것은 오군이고 둔전하는 군대는 위군이다.[9] 둔전할 영토를 점거하는 것을 뜻한다.[10]손자병법』에서 나온 말이다.[11] 『위서』 「부하전」에 배송지주로 수록되어 있는 사마표의 『전략』 에서 발취한 부하의 간언이지만 해당 부분이 아직 미번역이기에 대신해서 『자치통감』에 수록된 부하의 발언을 인용한다. 다만 원래 기록에 비해서 이래저래 편집된 부분이 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본래 사마표의 기록에 수록되어 있는 번쾌이신의 일화가 없어졌다.[12] 후일 터지는 동흥제 전투만해도 제갈각이 고작 4만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양주 방면에서만 7만을 출격했고 신성 합비 전투에서도 오나라가 20만의 대군을 출격하자 위도 20만을 양주 방면으로 보내고 동시 촉한까지 대처했다.[13] 동관의 부근에 위치한 지명[14] 오의 명장 한당의 아들로 위에 투항하여 오를 번번히 침략했다.[15] 허나 역으로 방어의 입장에 험한 지형을 낀데다가 함정으로 위군이 그대로 들어가서 퇴로를 끊는 것만으로도 수만의 피해를 초래한 동흥제 전투에 비하면 강유의 도서 전투는 난이도 면에서 넘사벽급의 어려움을 자랑했다. 피해와 요구된 물자 자체로만 비교하자면 동흥제 전투의 우위라 할 수 있지만 난이도라는 측면에서는 도서 전투가 넘사벽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동흥제 전투를 낮춰 볼 필요는 없는 것이, 손자가 어려운 전장을 이기는 장수보다 가장 유리한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여 적은 피해로 섬멸하는 이가 더 훌륭하다고 한 것처럼 판을 만들고 적을 끌어들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16] 권중달 교수 역 자치통감 주석에 따르면 '대체로 이때에 오나라의 인구를 가지고 볼 때에 20만명이란 인구 10명 가운데 두 명을 군사로 징집한 셈이며 이것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이었다.'라고 했다.[17] 근데 「제갈탄전」에 의하면 제갈탄은 제갈각에게 패배했기에 진동 장군에서 진남 장군으로 전임되었다고 서술하고 임지 또한 관구검과 맞바꿨다고 한다. 소소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야 말이 되긴 하는데 웃긴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한진춘추』내에서 제갈탄의 전략을 따랐는지에 대한 여부가 엇갈리는 상황에 사마사가 제갈탄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고 부하들을 문책했다는 점은 확실한데도 정작 올바른 계책을 냈다는 제갈탄을 처벌했다는 것은...? 이래저래 정사 삼국지 최고 미스테리중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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