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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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師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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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참가한 명나라의 장수.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귀화했다. 왠지 민간에서는 군공보다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시인 두보의 21대손[1]으로 섬서성 두릉(杜陵)[2]에서 기주 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가 진린에게 시집갔기에 진린의 처남이 된다. 이순신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를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去同甘苦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今日一盃情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명군에서는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했다고 하며, 이순신이 죽은 뒤에 묘자리를 처음 봐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는 그가 명군의 횡포에 시달리는 조선의 서민들을 위해 자신이 찾은 명당들의 위치를 적은 예언서인 <두사충비결>(杜師忠祕訣)이란 것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아내가 조선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아내는 고향에 남겨 두었는데, 두사충이 조선에 남게 되면서 그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 곳에 남겠다."고 한 다음 압록강까지 배웅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그대로 귀화하여 정착했다.[3]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정착했으며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는데, 이것은 현재 대구 남구 대명동과 도시철도 대명역의 유래가 되었다. 경주시에도 대명동이 있는데, 이 역시 왜란 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시문용이 살았던 곳이다. 두사충은 사후 현재 수성구 만촌2동에 있는 옛 남부정류장 부근에 묻혔으며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다. 생전에 늘 단을 쌓고 매월 초하루마다 고국의 천자에게 배례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무덤 앞에는 명나라를 기린다는 뜻에서 모명재(慕明齋)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현재 두사충의 자손은 100여 가구에 달한다고 하며 모명재 앞에는 이순신의 7대손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두사충의 묘비문을 다시 베껴다가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타국에 정착해서도 자기 나라 천자를 기리는 사당까지 지을 정도면 고국을 많이 사랑했던 듯한 사람인데, 본격적으로 망국되지도 않은 시점에 귀화를 택한 이유는 아리송하다. 어쩌면 만력제 시대에 명나라에 망조가 드는 걸 보고 나라가 오래 못 갈 것을 예상했던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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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윗대로 올라가면 한의 어사대부 두연년과 진의 장군 두예가 있다.[2]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옌타구(雁塔區) 취장신구(曲江新區).[3] 그리고 몇십 년 뒤에 진린의 손자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 있던 중 아버지가 애산에서 청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나라까지 망하자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조선으로 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