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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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장단점
2.1. 장점
2.2. 단점
3. 민둔
4. 실시 예
5. 매체에서의 묘사
5.1. 삼국지 11에 나오는 특기
5.2. 가상 배경 작품
6. 지명


1. 개요[편집]


둔전()은 국가에서 재정 확보등을 목표로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투입해서 땅을 경작하는 제도. '차전차경(且戰且耕), 차경차수(且耕且守)'의 이념하에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인들을 동원해 만드는 군둔(軍屯)이 유명하다.


2. 장단점[편집]



2.1. 장점[편집]


둔전은 병사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여 자급자족을 꾀하는 것이다. 현대에는 득보다 실이 많아 비상식으로 여기지만 고대부터 꾸준하게 시도했으며 전근대시대까지도 많은 장점이 있었다.

  • 군량미 걱정을 덜어준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식량을 소비할 뿐 생산하지 않는 집단이다. 그런 집단에서 식량을 생산할 경우, 둔전만으로 군량미를 완전히 충당할 수는 없더라도 일부나마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면 국가나 영주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군량을 보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려고 할 때는 더욱 요긴하다. 가까운 예시로 북한이 있다. 내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에서 전시도 아닌데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굳이 그러고 싶다면 둔전이라도 시켜야 한다.

  •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대개 군대가 주둔하는 곳은 국경 등 국가의 외곽 지역이므로 백성들의 수가 적고 황무지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곳을 병사들을 이용해 개간하면 그 자체로 이득이고, 이 병사들이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 자연스럽게 주변에 정착하면 인구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 이 경우 군둔 뿐만 아니라 민둔도 같이 사용한다. 조선이 북방 영토를 개척할때 둔전으로 상당한 이득을 봤고, 충무공 이순신도 녹둔도에서 둔전을 관리한 적이 있다.

  •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현대식 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는 시대에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고 험해지면, 운반하는 자들의 식량으로 그 이상이 소진될 수 있다. 이 경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양곡이 아무리 많아도 그 양식을 전달할 수가 없으니 소용이 없어진다. 게다가 접전지의 병졸들에게 보급하려면 전투로 피난가는 백성들은 민심도 흉흉한데다가 도적의 습격을 배제할 수 없고, 만약 적병사들이 보급로를 예상하고 습격을 해와 군량을 고스란히 넘겨줬다간 오히려 아군에게는 독이되고 적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버린다. 그럴 바에야 세금을 수취하여 군대에 지급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적당한 곳에 농사 지을 땅을 지급하는 것으로 보수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농토는 군 복무의 대가이기에 면세되었다.[1] 이는 둔전제 뿐 아니라 봉건제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다.

  • 농사를 통해 훈련을 일부 대체할 수 있다.
육도삼략에서 농사짓는 것을 병기 다루는 것과 연결하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무기의 기원은 농기구에서 발전했다. 과(戈)의 경우가 그런 것. 서양의 경우도 폴암이라 불리는 무기들의 대부분이 농기구에서 유래했으며 동양에서도 편곤은 사용법이 도리깨질과 비슷해서 조선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둔전제라면 군사 편제가 그대로 농사 작목반이 될테니 팀워크 훈련에도 제격일 것이고, 무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게 아니더라도 기초체력 단련으로도 매우 쓸만하다. 도시에서 운동 좀 한다는 청년도 농촌에서 농사로 잔뼈가 굵은 중장년과 체력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농촌이 기계화 등의 이유로 노동강도가 많이 약해졌는데도 그렇다. 옛날에는 농사를 위해 소를 몰고 끌면서, 자연스럽게 군마를 다루는 법과 군마를 먹이는 법도 배운다고 볼 수 있겠다.

  • 백성들을 땅에 묶어둘 수 있다.
전쟁이 나면 당연히 피난을 가겠지만, 사람이 몸과 재산까지는 들고갈 수 있어도 땅은 떼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되기 싫으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자기 땅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주민들이 되돌아오면 당연히 자기 살 마을 정도는 다시 가꾸어놓을 것이므로 변경지역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효과는 주로 동로마 제국테마 제도에서 많이 나타났다.

위의 장점들이 유효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고대 시대의 군대라는 것이 요즘의 군대에 비하면 굉장한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의 영향으로 고대 군대도 갑옷을 입고 금속 무기를 들고 진형을 맞춰 싸웠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고대 시대의 군대는 그냥 농민들을 대충 모아둔 무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극소수의 무사, 귀족 계급 지휘관들을 제외하면 체계적인 훈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줄을 맞춰 걸으며 진형을 유지할 수 있기만 해도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이런 시대였기에 그저 농사일을 하며 팀워크를 기르고 농기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유효한 훈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며 어차피 농사 안 짓는다고 그 시간에 대단한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니 둔전을 해서 식량이라도 제대로 보급하는 군대가 더 유리했던 것이다.


2.2. 단점[편집]


  • 훈련량 감소
시대가 흐르며 무기와 전략전술이 점점 발달함에 따라 둔전제의 효율성은 점점 떨어져갔다. 현대전을 준비하는 군대라면 무기 조작과 전술 체계가 매우 복잡해 교육과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므로 오늘날의 군대가 둔전을 시행한다면 제대로 전투에 나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훈련이라는 게 개인 체력이나 무기 사용법을 익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제대로 군대가 기능을 하려면 집단전술, 기동훈련 및 정신교육이 필수인데, 거기에 투자할 시간이 매우 줄어들게 된다.

  • 이중고
농사를 지으면서 훈련도 받아야 하니 고달픔이 더해진다. 다만 생각이 있는 상부라면 위에 말한 장점들과 같이 둔전에 따른 보상을 더해주거나 훈련을 농사일로 대체하는 식으로 하기에 병사들이라고 마냥 싫어하진 않는다.

  • 농사 부적합 지역이 많다.
게다가 둔전의 상당수가 위치하는 국경지대의 대부분은 보통 농사에 부적합한 황무지나 사막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농사의 난이도가 엄청나므로 농사 짓기도 힘들고 생산량도 적어서 둔전을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농사에 부적합하지 않다면 이미 민간인들이 마을을 차렸을 것이므로 둔전으로 인구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
또한 둔전의 상당수가 위치하는 국경지대는 맨날 치고 박고 하기 때문에 거기서 농사를 지어봐야 전쟁 피해로 인해 굉장히 많은 부분이 유실되는 경우가 잦다.

  • 농사 비전문가의 농경
전근대의 농경사회라면 군인 역시도 사회에서는 농사 짓다가 온 사람이 절대다수이므로 이러한 비효율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촌향도와 도시화로 인해 선진국이나 어느 정도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개발도상국에서는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보다 훨씬 많아져서 농사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군인으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오늘날 농업은 고도화된 기술을 필요로 하므로 농경에 특화되지 않은 직종이 농사를 짓게 되면 비효율이 커진다. 둔전이 전문 농부의 생산성을 따라잡으려면 군대 내 각종 농기계의 도입과 최신 농법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3. 민둔[편집]


군사적 목적이 아니어도 둔전이라 불린다. 이럴 경우 주로 민둔(民屯)이나 관둔(官屯)이라 불린다.

평시에는 일반 농민들이 둔전 따위에는 접근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먹고 살길이 막막한 난세 같은 시대에는 둔전이라도 하겠지만. 실제로 민둔의 경우에는 황무지를 개간한 농민에게 소유를 인정해주고 다년간 면세를 해준다든가, 소를 빌려준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유랑민을 정착시켜 국민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2]


4. 실시 예[편집]



4.1. 한나라[편집]


한무제는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땅을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4.2. 중국 삼국시대[편집]


중국 삼국시대모개, 한호, 유복 등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조조는 둔전을 하면서 난세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떠돌던 유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여 병력을 많이 늘렸다. 더 자세한 내용은 둔전(삼국지)으로.출전(出典)


4.3. 명나라[편집]


명나라 건국 초기 당시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둔전을 하면 민간인에 대한 수탈도 줄이고 농경지도 새로 복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중원의 농경지가 충분히 개간되고 병사들이 변방에 주둔하면서 문제가 달라지는데, 상술한 것처럼 명나라는 무리하게 설원이나 사막, 정글에 둔전을 설치하는데 이런 지역에서 둔전을 짓는다고 식량이 충분히 자급될 리가 없었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감숙성과 섬서성에 기근이 들면서 둔전병들이 기근에 시달리다가 나중에가면 무기를 훔쳐들고 뿔뿔이 흩어지며 집단탈영하는데, 이렇게 탈영한 사람들 중에는 이자성도 있었다.


4.4. 중국[편집]


생산건설병단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한다. 이름만 보면 무슨 부대 이름 같고, 실제로도 군부대로 시작됐지만 지금에 와서는 군사, 행정, 사법, 생산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조직으로, 현대판 둔전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산 면화와 과일 상당량을 생산하며, 농업 외에도 토목건설, 유통 등 다양한 사업체를 굴린다. 구성원들은 민간인에 가까운 신분인데, 자치구 한족은 거진 여기 소속된다. 과거 10여곳이 존재했지만 현대에는 신장 지역에 1곳만이 존재하며, 계급상으로는 성과 대등하지만 중앙정부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명령을 동시에 따르는 2원 영도제를 갖추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 수준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며, 3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준군사조직이다.


4.5. 한반도[편집]


한국에선 나당전쟁 당시 설인귀문무왕을 협박하기 위해 보낸 편지에서 신라어린이가 둔전을 경작할 정도로 위태한 상황이라고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군이 웅진도독부의 둔전을 짓밟은 기록 등 삼국시대에도 중국의 둔전을 접할 기회는 직간접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정황상 비슷한 제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강제병합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대유둔전을 만든 정조가 시행한 일시적인 제도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아래 서술된 바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경우 중앙정부로부터 이렇다 할 보급을 받지 못해 대부분을 자급자족한 사례도 있다.

조선시대 둔전은 군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뉠 수 있다. 군둔전은 세조시기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가 진관 체제로 변화함에 따라 종전에 북방에 한정되었던 것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관둔전은 각 관아의 재정마련을 위해 시행했으며 원칙상 관아의 노비가 운영했다. 이러한 관둔전은 임진왜란 이후 재정마련을 위해 (그리고 원래 땅주인들이 죽어나가서 빈땅이 보인 김에)널리 시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둔전제도는 원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아 부작용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농민을 강제로 동원한다든지, 둔전을 사유화한다든지, 조세의 세율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조선의 둔전제도는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 내장원에 귀속되었다가 다시 탁지부에 마지막으로 일제의 통감부에 귀속되어 1920년 역둔토특별처분령에 의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민간에 불하되어 소멸한다.(참고로 향리층 일부는 토지조사 사업때 이 국유지를 본인 사유지로 등록했고, 지금까지 토호로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도 왜란 당시 한산도 일대에서 둔전(농, 어업)을 운용한 예가 있다. 게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중앙에서 보급이 오지 않아 대부분을 병사 및 피란민들이 생산하는 것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순신은 둔전 운영에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궁핍해져 있던 조정에 여유 물자를 종종 보내서 선조가 더 내놓으라고 닦달하고 이순신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3][4] 농담이 아니라 군함 수백 척에 군인이 1만 명 이상이나 되는 대함대는 대규모 농장을 지어야 겨우 유지가 된다. 당연히 조선 수군은 농사만 지은 게 아니라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어선에서 고기를 잡고, 선박들에게 유료 통행증을 발부하는 등 다양한 수익산업을 굴렸다.


4.6. 동로마 제국테마 제도[편집]


서양에서는 동로마 제국테마 제도라는 이름으로 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쪽의 경우 초기에는 아나톨리아에 먼저 설치되었는데, 툭하면 제국에 반란이 나던 상황이라 동로마 제국 정부는 가장 반란이 빈번했던 옵시키온 테마를 해체해 버리고, 다른 테마들도 크기를 잘게 쪼개서 관리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보통 테마(Theme) 제도라고 불린 동로마식 둔전 제도는 처음에는 마우리키우스 황제 때 페르시아와 아바르를 상대하면서 일시적, 부분적으로 운영하다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대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이슬람 쪽이 삼중성벽이 있는 한 정ㅋ벅ㅋ은 안 되겠구나 레이드나 뛰어야지 하고 약탈 작전으로 바뀌자, 그 지방은 니네가 지켜라라는 의미로 운영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한번 쓸고 지나가도 둔전병들은 피난 안 가고 그 지방을 지키면서 복구할 수 있었다. 다만 이후 동로마 제국이 세력이 회복되고 공세적인 확장을 시도하자 둔전 제도는 약화되었고 황제가 지방 호족 세력들의 제어에 실패하면서 호족들이 둔전을 집어삼켜 유명무실이 되어 가다가, 둔전병 제도 복구를 시도하던 로마누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의미를 잃었다.


4.7. 일본 제국[편집]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둔전병을 징집하여 파견했다. 집과 땅을 주고 개간을 시킨 다음 몇 년 동안 복무하고 나면 자신이 개간한 땅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식의 제도였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군이 쳐들어오면 총 들고 나가야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과달카날 전역 라바울의 일본군은 미군의 전략에 의해 포위당하고 보급이 끊기자 둔전을 하며 버텼다. 이마무라 히토시 휘하 일본군들은 식량 확보를 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원 예외 없이 1인당 200평을 경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마무라 대장 자신부터 실제로 200평의 경작지를 확보하여 농사를 지었다. 작물은 처음에는 타로나 얌 같은 현지 작물을 심었으나, 곧 고구마같이 더운 날씨에서 잘 자라는 작물과 상추와 배추, 무 등 각종 채소들을 심기 시작했고, 장립종인 현지 벼와는 달리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단립종 벼의 종자도 들여와서 심기 시작했다. 원래 열대성 작물인 벼가 고온다습한 원래의 환경에 놓이자 쑥쑥 잘 자라서 3-4달이면 수확이 가능했다고 하고, 식량이 풍족해지자 사탕수수도 심어서 단 음식도 마음껏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고. 실제로 라바울 지역은 농사가 아주 잘되는 곳이였다고 한다. 덕분에 다른 섬에 고립된 일본군들이 보급 부족으로 죽어나갈 때 라바울의 병사들은 배 곯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단지 단백질 식품이 부족해서 생선을 많이 잡아야 했다고.

덕분에 연합군도 일본군이 농사나 짓는 걸 보고 가끔 신무기를 실험하거나, 신참 조종사들의 폭격연습용 표적으로 쓰거나, 농작물, 또는 트럭을 불태우는 거 말고는 직접적인 침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라바울 요새는 보급도 풍족하고 식량도 충분해서 연합군이 침공했으면 큰 사상자를 냈을 거라고 한다.


4.8.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 국군도 식량사정이 좋지 못했던 1960~70년대에는 부대 내에서 간단한 채소를 키우거나 심지어 닭이나[5] 돼지를 키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무나 맡겼다간 금세 폐사하기에 농삿일을 했던 병사들이 "영농계"를 비롯한 희한한 보직명을 받고 관리했다고 한다. 물론 비인가 보직이었고, 급양 사정도 나아지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그 후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전문화되고 기계화된 전쟁의 양상과 산업 발달, 분업의 개념 도입 등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제도가 되어버려 사실상 사장된 제도다. 한국군은 일부 병사들에 한해서 대농민 지원을 통해 농사일을 돕는다.[6] 다만 이건 그 농촌에서 수확한 쌀을 군량미로 바로 땡겨오는 게 아니니 둔전제라고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대민지원의 일환인데 그 지원 내용이 농사인 것뿐이다. 그리고 산업기능요원의 한 분야로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제도 있으나, 역시 대체복무이기 때문에 둔전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고 저런 산업기능요원들이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로 내는 소출이 군량미로 땡겨오는 게 아니니 절대 대체복무가 아니다. 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다를 게 없긴 하다. 그보다도 애초에 현대 한국군의 대농민 지원이나 농/어업 후계자 대체복무는 어디까지나 '기존의 농민(민간인)'이 농사 짓는 주체이고, 군인이나 대체복무요원들은 (대민 지원이나 봉사의 목적으로) 그것을 돕는 것 뿐이니 둔전제의 정의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이 와중에도 지휘관과 그 가족이 친환경이나 신선 식품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유로 소규모 둔전은 지휘관 공관을 중심으로 음성적으로 존재하며, 주로 본부중대 또는 본부대행보관이 인원들을 차출해 손으로 거름피고, 밭 갈고,[7] 비닐 깔고, 고추나 참외, 수박 등을 심고 망 치고 나일론 줄 띄우기 등을 해놓으면 공관이나 인근에 상주 중인 병사[8] 또는 본부대에서 수시로 와서 물을 주며 관리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박찬주 대장 부부 갑질 사건으로, 70여 평 규모로 둔전을 시켰다.


4.9. 북한[편집]


파일:attachment/nkarmy2.jpg
파일:attachment/nkarmy3.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다른 나라들이[9] 진작에 둔전제를 폐지한 지 오래인 지금도 북한에서는 둔전제를 유지 중이다.


5. 매체에서의 묘사[편집]



5.1. 삼국지 11에 나오는 특기[편집]


항구, 관에 해당 특기를 가진 장수가 부임했을 시에, 해당 거점에 소속된 병사들의 병량 소모가 사라진다. 단, 병량이 0인 상태에서 집어넣으면 의미가 없다. 병량 자체가 하나도 없을 경우 병량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병사가 줄어들기 때문에 최소 병량 1은 있어야 한다.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이 특기 하나면 항구나 관에 틀어박혀 쌀 한 톨 안 먹고 살아갈 수 있으니 대단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항구나 관문의 최대 수용 능력은 3만 명이며, PK에서 연구하면 최대 6만 명으로, 거점에서는 매 턴마다 주둔 병사의 2.5%만큼의 병량이 소모되는 것을 생각하면 한 턴에 최대 1500의 병량을 절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1500이면 15000명 부대가 한 턴에 소비하는 병량과 동일하므로 조금이나마 병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변칙적인 활용법으로, 적 도시에 소속된 관이나 항구에서는 금과 병량 수입이 없기 때문에 장수나 병력을 주둔시키기 힘든데, 둔전 특기가 있다면 병량 걱정 없이 대군을 주둔시킬 수 있으니 적 도시 근처의 관이나 항구를 경유하여 적의 도시를 공격하고자 할 때 효과적인 활용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삼국지 11의 AI 알고리즘 자체가 도시를 공격할 때는 도시의 병사를 기준으로 공격대를 편성하기 때문에, 도시에는 2,000명~3,000명 정도의 병사만 남겨두고 나머지 병사들은 도시 소속의 항구, 관에 둔전특기 보유자인 장수와 함께 보내두면 컴퓨터 세력은 바보같은 AI 알고리즘 덕분에 기껏해야 육, 칠천 남짓한 부대만 보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적의 공격을 몇 번 막아낸 뒤에 항구에 모아둔 병력으로 적 도시 공략을 반복하면 어떤 시나리오라도 대부분 클리어가 가능하다. 삼국지 11의 난이도 자체가 너무 낮아 유저가 만든 가학적 난이도의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클리어는 가능하지만, 유저가 만든 가학적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시나리오에서는 빛을 본다. 단, 정석적인 공략법이 아니고 AI의 허점을 이용한 일종의 꼼수이므로 평범한 플레이에서 추천할 만한 공략법은 아니다.

참고로 영수를 제외한 모든 둔전 특기 소유 장수는 정치력이 84가 넘는 A급 내정관이다. 삼국지 11에서 정치력 84 이상인 무장은 혼자서 시장이나 농장을 30일만에 건설할 수 있으므로 도시에 시설물이 제대로 건설되지 않은 초반에는 둔전 특기의 활용보다는 도시 시설물 건설을 우선하는 게 좋다.

사실 이렇게 쓰면 꽤 괜찮은 특기 같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이런 장수들을 관이나 항구에 박아놔야 한다는 것. 관, 항구에서는 쓸 수 있는 명령 자체가 사실상 없다. 등용이나 계략도 쓸 수 있지만 인재부나 계략부를 써서 행동력 할인 받아서 도시에서 쓰는 게 낫다. 결과적으로 6만명의 병사를 주둔시켰을 때 기준으로 1년에 최대 54000의 병량을 아끼는 셈인데 그 대신 1년간 이 장수를 안 쓴다는 조건이 걸린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 둔전 특기를 가진 장수들이 내정에선 최소 B+급은 먹고 들어가는 인물인데 기회비용 측면에서 영 적절치 못하다. 54000이란 병량도 미도나 징수 기준으로 하면 잘 지어진 도시에서는 한 계절 만에 뽑아낼 수 있는 수치라 따지고보면 그렇게 큰 수치도 아닌데 그 댓가가 장수 1명을 1년 내내 못 쓰는거라는 건 좀... 둔전 특기를 굳이 활용하겠답시고 관이나 항구에 이런 장수들을 주둔시키는 건 당장의 약간의 이익을 얻자고 장기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소유 장수는 한호, 유복, 국연, 영수, 소하(고대무장).


5.2. 가상 배경 작품[편집]


C&C3에 등장한 스크린 부대도 병력 충원을 자급자족한다는 점에서 둔전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본디 제대로 된 전투를 상정하고 구성된 전투부대가 아니라, 타이베리움을 채취하는 광부들과 불의의 사고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경비부대에 가깝다.

드래곤 라자로 유명한 이영도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의무병 제도중 가장 지독하다고 신랄하게 디스했다. 자국보다 훨씬 강하고 큰 페인 제국을 선제공격하여 정복하려고 하니 20만이라는 엄청난 군대가 필요하고, 당시 다벨의 국력과 규모에서 그 정도의 군대를 뽑아내기 힘드니 둔전제로 한 가족이 병사 한 명씩을 부양하게 하는 아이디어다. 이 제도를 구상한 바탈리언 남작은 동시에 "한 가족에 병사 한 명, 문화도 예술도 술 한 잔도 없이 군대만 뽑아낸다"며 신랄하게 디스하며,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문화와 여가를 구상안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사실 가족 하나 당 병사 한 명을 부양하는 제도는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있던 제도다. 봉토가 세대를 거칠 수록 점점 분할되자 12세기 무렵에는 기사 한명이 받는 봉토가 농민 가족 한명 분량으로 줄어들 지경이 되었다.


6. 지명[편집]


이들은 모두 위의 둔전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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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의 단점에서 나오겠지만 어차피 둔전으로 일군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그렇게 많지 않으며 또한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결국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고 둔전을 설치했는데 그 둔전에서, 변방 같은 먼 곳에서 나는 수확물을 세금으로 거두자니 또 운송 비용 문제가 벌어진다... 이러니 선심쓰는 셈 치고 면세 때리는 수 밖에. 반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조의 둔전은 굳이 변방이 아니더라도 영토 내 이곳저곳에 설치되어서인지 무려 50~60%나 되는 세금을 때렸다.[2] 과거에는 지금보다도 황무지나 유랑민이 많았는데 이런 땅과 사람을 놀리기는 아까운데 민간 자체적으로 개척은 힘들다면 국가가 나설 수 밖에 없고 그럼 어떻게 되든 둔전과 비슷해진다.[3] 다만 당시 조선 조정은 짐작조차 못했던 10만이상의 대규모 외침에 대해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해 왜란직전 24~26만석에 달하던 전세가 반토막이 나버렸고 반토막 나버린 전세로 지원 온 명나라군도 먹여살려야했다는걸 감안해야한다.[4] 출처:https://www.gsnj.re.kr/forum/board.php?no=10&page=1&code=essay2&kind=TRAVEL2&stext=&stitle=[5] 2012년 영화 미운 오리 새끼 참조.[6] 워낙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기에 시행된 제도다.[7] 상술했듯 정정당당한 둔전이 아니기에 트랙터도 동원할 수 없고 심지어 옛부터 둔전 부지도 아니라면 돌이 꽤 많이 나오니 삽과 곡괭이는 필수다.[8] 후술할 박찬주 대장 사건 전까지는 이를 공관병이 맡았다.[9] 당연히 대한민국도 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