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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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4. 진행 과정
4.1. 농전정책
4.2. 둔전책의 시행
4.2.1. 무엇을 할 것인가?
4.2.2. 둔전의 조건
4.2.3. 분전지술의 성공
4.2.4. 조지의 죽음과 그 후 대책
4.3. 둔전책의 발전
4.3.1. 국연의 방안
4.3.2. 원환의 제안
4.3.3. 조조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5. 세율
6. 관리체계
7. 조조가 시행했던 둔전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
7.1. 식량 문제 해결
7.2. 소비를 생산으로
7.3. 권력기반 확립
7.4. 조조의 둔전과 그 한계
7.5. 군둔의 경우
7.6. 결론
8. 기타 창작물


1. 개요[편집]


조조가 실시한 토지 제도(둔전제).출전(出典)

2. 배경[편집]


후한 말에 이르러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사회적 기반은 대부분 파괴되고 경제상황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토지는 황무지로 변하고. 인구도 격감했다. 그 주요 원인은 전쟁을 피해 수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떠난 탓도 있지만, 때마침 발생한 오랜 가뭄과 전국을 휩쓴 전염병의 창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삼국지』 「무제기」[1]의 기록을 보자.

가뭄과 전란으로 양식은 바닥이 났다. 군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굶주린 사람들은 도적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배를 채우고 나면 남은 사람들을 버리고 사방을 떠돌았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생산기반이 급격히 와해되었다. 원소가 웅거하고 있던 하북에서조차 군인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뽕나무에서 버섯을 채취했다. 원술이 웅거하고 있던 강과 회에서는 창포와 달팽이를 식량으로 삼기도 했다.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각 주에서는 그것을 금지하라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보다시피 달팽이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식인을 할 정도의 상황에까지 이르었는데 조조가 관할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유리걸식을 하는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상황이 역시 상당한 정도로 악화되었다. 연주를 점거한 여포와 싸울 당시에는 식량을 위해서 황소, 하의, 하만, 유벽의 황건적을 공격해 식량을 충당했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조는 여러 차례 군사행동을 펼쳤지만, 식량의 부족으로 더 이상 적극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연주를 다시 찾았을 때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자, 당시에 수장령으로 있던 정욱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현을 모두 뒤져서 3일치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사람의 시신으로 만든 육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2]

삼보의 난으로 인해 장안을 탈출 한 헌제를 영접하려고 조조가 서쪽으로 갔을 때에도 1천여 명의 장졸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낙양에 들어가자 황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담장 사이에서 굶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3.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편집]


조조는 당면한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민심도 안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지도 못한다. 조정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그는 부국강병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했다. 조조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황제에게 표를 올려 여러 사람들과 정책의 손익에 관한 토의를 하자고 건의했다.

둔전(屯田)은 그가 당시에 주청한 14개의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둔전에 대한 시책과 실행은 당시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인구가 감소한 것은 농업 노동력의 사망, 도주, 군대의 징집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인구의 감소는 농경지의 야생화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군사들과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한 생각은 조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위정자들이 가진 생각이기도 했다. 다른 군주들을 보도록 하자.

  • 서주목 도겸진등을 전농교위로 임명하여 농경지를 살펴보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상당량의 벼를 확보했다는 표를 올렸다.

  • 공손찬도 195년에 원소에게 패한 다음, 본거지를 옮겨서 둔전을 설치하고 자급자족을 할 수가 있었다.


4. 진행 과정[편집]



4.1. 농전정책[편집]


  • 관련 인물: 모개
  • 농전정책(農戰政策): 군사가 농사 짓는 것, 군농이라고도 함.
도겸하고 공손찬도 이런 행동을 하는데 조조군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192년 모개조조에게 경작지를 보수하여 군용 물자를 비축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잔혹한 현실을 목전에서 체험한 조조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초평(190~193년)과 흥평 년간(194~195년)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대책으로 둔전을 실시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한 번 「무제기」를 보자.

대체로 국가를 안정시키는 방안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르고 식량을 풍부하게 확보하는 데 요점이 있다. 진나라 사람들은 농업의 발전을 통해 천하를 평정했으며, 효무제(한무제)는 둔전을 개척하여 서역지방을 평정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대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다.


둔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둔전은 조조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정책이 아니라, '전대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답습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진의 상앙이 시행했던 농전정책과 한무제가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하도록 했던 방법을 학습했던 것이다.


4.2. 둔전책의 시행[편집]



4.2.1. 무엇을 할 것인가?[편집]



  • 정전(井田) -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때 시행되었던 법으로 우물 정 모양으로 아홉 구간으로 나눈 다음 가운데를 공전으로 두고, 주변 8곳은 백성들이 가져가고 공전은 여덟 명이 다같이 경작하여 세금으로 바치는 것.

196년, 천자를 허도로 영접한 조조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고 대대적인 토론을 펼쳤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일찍이 조조가 전대의 위대한 업적에 따라서 둔전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시행하려고 했지만, 상당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상의 주부였던 사마랑은 조조에게 대란이 발생한 이후로 백성들이 흩어졌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정전(井田)'을 다시 부활시킬 때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조는 정전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를 거부한다.

역사에 따르면 당시에 정책의 손익에 대한 대대적인 격론이 벌어졌으며, 그 가운데 한호가 제시한 농지대책이 가장 시대적 요구에 부합되었으므로 조조가 크게 칭찬하면서 그를 호군으로 임명했다.

다시 한 번 「무제기」의 기록을 보면,

그해(196년/건안 원년)에 조지와 한호의 건의에 따라서 둔전을 크게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호와 조지 두 사람이 조조가 건안 원년에 둔전정책을 실행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둔전을 크게 일으키기 시작했다(始興屯田).'는 말은 조조가 196년에 처음으로 둔전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둔전이 이 때 처음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시흥(始興)'이라는 두 글자는 처음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조가 황제를 허도로 영접한 이후에 한의 정권을 잡고 다른 정책과 함께 국가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조조가 둔전을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견이 있다.[3]


4.2.2. 둔전의 조건[편집]


조조가 시행한 둔전은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된다. 민둔을 군둔보다 일찍 시작했지만, 작은 규모로 실시된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조조가 통치하는 동안 군둔은 그리 큰 규모로 시행되지 않았다. 정권을 잡은 후에 조조가 맨 처음으로 둔전을 시행한 곳은 허도였으며, 이곳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왜 하필 허도였을까? 허도는 황제가 임시 수도로 삼은 곳이었으며, 조조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지역인 동시에 둔전을 실시하기 위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도에서 둔전을 처음으로 시작한 이유는 이러한 조건 때문이었다. 둔전을 실시하기 위한 조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 주인이 없는 대규모의 황무지
  • 둔전을 개간할 수 있는 노동력

기록에 따르면 조조가 편성한 청주군은 약 30만 명이었으며, 이들에게 딸린 가족도 약 1백만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황제를 허도로 영접하기 전에 여남과 영천에서 활동하던 황건기의군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을 격파하면서 적지 않은 인력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 농사를 지을 만한 일정한 물자가 있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조조군은 황건기의군을 격파하고 허도에 수도를 정했을 때 적으로부터 상당한 물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황건기의군이 가지고 있던 소와 농기구를 의미하는 말이다. 당시에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백성들마저도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4.2.3. 분전지술의 성공[편집]


  • 계우수곡(計牛輸穀): 백성들에게 소를 나눠주고 그에 따라서 과세를 매기는 것.
  • 분전지술(分田之術): 수확량에 따라 과세를 하는 것. 현 시점 세율 20%.

허도에서 둔전을 크게 일으킨 조조는 조지를 둔전교위로 임명하고, 기도위 임준을 전농중랑장으로 삼아 둔전에 관한 일을 전담하도록 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해보면, 조조는 둔전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기 위해 부하들과 상당히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나중에 조조가 쓴 「조지의 아들 처중에게 작위를 내려 아버지 조지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는 명령」이라는 글에는 당시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시행 초기는 물론 시행 도중에도 여전히 견해 차이로 인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조조가 최종적으로 조지의 대책을 채택하자 둔전 정책은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둔전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서 관청의 소를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그를 근거로 조세를 징수하는 '계우수곡(計牛輸穀)'을 전과(佃科)라는 제도로 확정한다. 따라서 둔전에 참여한 농민들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은 관청에서 보유한 소의 숫자에 따라서 좌우되었을 것이다. 이 정책이 시행된 후에 조지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소를 빌려주고 세금을 걷는 제도의 폐단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분전지술(分田之術)'을 조세 정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조를 설득했다. 분전지술이란 토지를 각 개인에게 나누어주고 수확량의 과다에 따라서 조세를 징수하자는 시책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조조는 후성의 자문을 받아 드디어 조지의 대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시작 첫 해에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물론 그 해에 대풍이 들었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20%를 조세로 징수했기 때문에 둔전에 참여한 농민들도 식량 증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세 부담 20%는 전례에 비추어 볼 때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 결과 양곡 1백만 곡이 축적되었다.


4.2.4. 조지의 죽음과 그 후 대책[편집]



그러나 불행히도 조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세책을 이어받아 전국적으로 둔전을 시행하여 대규모의 성과를 거둔 사람이 임준이다. 그는 조조로부터 이미 깊이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군수 물자와 식량을 운송하는 책임자를 지냈다. 둔전정책이 시작되자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으로 임명하여 둔전에 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조조의 의중과 조지의 계획에 따라서 각 주군에 둔전을 담당하는 독령둔전사를 설치했다. 전국적인 규모의 둔전이 시행된 것이다. 조조는 몇 년 후에 창고가 가득 찰 정도의 양곡이 축적되자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했다. 역사가도 이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군국이 풍요롭게 된 것은 조지가 시작하여 임준이 완성한 둔전책 때문'이라고 했다.

둔전책이 성공하자 백성들은 기근에서 해방되었으며, 군대도 충분한 군량미를 지원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조조는 평소에 '강병은 먹을 것이 풍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대로 군대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 일이 없게 되자, 기분이 좋아진 조조는 '군용으로 풍족하리만큼 수확량이 증대되었다. 그 덕분에 여러 반역자들을 물리치고 천하를 안정시켜 왕실을 일으키게 되었다.'라고 극찬했다. 둔전은 백성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가 '사방으로 정벌에 나섰을 때 더 이상 군량미를 운반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지 않게 되었으며, 그 결과 여러 적들을 격파하여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조지와 임준이 죽고 난 후에도 조조는 그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조조는 조지를 진류태수로 추증했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지의 아들에게 작의를 내리고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조지의 공이 잊히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임준이 죽고 난 후에도 조조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것은 그들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설명해준다.


4.3. 둔전책의 발전[편집]



둔전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조조는 중요한 국가적인 정책으로 계속적인 시행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그 범위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군국에 전관을 설치하는 한 편, 둔전제도의 개혁을 서둘렀다. 제도의 개혁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주안점으로 착수되었다.


4.3.1. 국연의 방안[편집]


  • 관련 인물: 국연
  • 세금을 거둘 때 3년의 유예기간과 실적에 따른 법 적용.

임준이 죽은 후에 국연을 등용하여 둔전에 대한 일을 맡겼다. 둔전을 확대하려고 했던 조조는 국연에게 그에 관한 일을 맡겼다. 국연은 여러 차례 둔전의 장단점에 대해 보고를 했으며, 항상 현장에서 토지를 조사하고 백성들의 수에 따라서 관리를 배치했다. 그는 3년의 유예기간을 두어 세금을 단계적으로 거둬들이게 하고 실적에 따라서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자 5년이 지난 후에는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모두 즐겁게 생업에 전념했다. 토지의 규모와 백성들의 수에 따라서 적당한 조직을 구축했다는 뜻일 것이지만, 구체적인 법률 조항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둔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완벽한 조직체계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관리체계에서 설명하겠다.


4.3.2. 원환의 제안[편집]


  • 관련 인물: 원환
  • 둔전에 억지로 참가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발전이 이루어졌으니 원환의 의견대로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억지로 둔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한 것. 대규모의 둔전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조조는 패국남부도위 원환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요한 정책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둔전민의 모집은 정책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상당히 강압적이었다. 둔전민이 확보되어야 둔전의 범위를 획정하여 수확량을 예측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둔전민의 구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 원래 그 지방에서 살고 있던 농민.

『삼국지』 「정혼전」의 내용을 보자. 그 지방에 살고 있더라 하더라도 농사를 안 짓고 있던 경우가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모두 경박하였으므로 생산이나 번식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아이를 낳아도 기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기르지 않았다. 정혼은 임지에서 백성들 수중에 있는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는 기구를 빼앗아 밭을 갈고 뽕을 따도록 하는 동시에 또 밭을 개간하도록 하고, 자식을 고의로 버리는 행위에 대해선 무거운 법령을 적용시켰다. 백성들은 처음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였으나 후에 생활이 점점 윤택해졌기 때문에 낳은 아이를 기르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 황건기의군[4]의 일부 또는 그들의 가족.

  • 농지를 잃고 떠도는 유민.

『삼국지』 「유복전」에는 유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 산을 넘나들며 유민이 되었다가 귀순한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모아서 학교를 세우고 둔전을 널리 개척했다. 작피에서 시작하여 여피, 칠문, 오당에 이르기까지 제방을 쌓아 관개를 하게 되자, 벼농사를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


  • 기타 지방에서 강제로 모집하거나 심지어 대규모의 강제이주를 통해 둔전민을 확보하기도 했다. 「장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성들은 자기의 고향땅을 마음에 두고 있으므로 이주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장제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는 십만여 명의 농민들이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둔전을 경작하는 백성들의 신분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자유민이었지만, 둔전에 소속되게 되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고향을 떠나서 둔전을 개척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조의 명령이 시행되자마자 무장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삼국지』 「조엄전」에는 둔전민 여병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면서 무리를 모아 진창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둔전에 강제로 동원된 백성들은 이와 같은 무장반란 외에도 도망이라는 방식을 통해 반항을 하기도 했다. 사서에 따르면 당시에 새로 모집하여 둔전에 투입하자 대부분의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원환은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자신이 대대로 살고 있었던 땅에서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그들에게 변화를 주게 되면 무리가 따르게 됩니다. 순리를 쫓아서 정책을 시행하면 쉽겠지만 거스르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둔전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억지로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조는 원환의 견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조가 원환의 건의를 받아들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변화는 실제로 크지 않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제 12회 중국도서상 수상도서인 천추흥망 분열과 통일의 시대,삼국·양진·남북조[5] 둔전객이 여전히 강제로 국유지에 얽매이고 신체의 자유가 없는 농민들이라는 주장을 했다.


4.3.3. 조조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편집]


둔전민들의 반발이 저항으로 이어져 조직화되자 조조는 강압적인 방법을 버리고 적극적인 보상책을 포함하는 회유책을 써야 했다. 이러한 유연성이 정치가로서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는 국연의 건의를 받아들여 3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두었다가 단계적으로 세금을 거둔 것이 그 사례이다. 조조가 국연의 건의를 채택한 지 5년 만에 창고가 튼실해졌으며 백성들은 모두 즐겁게 생업에 종사했다. 원한전에 원환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고 서술이 있다. 허나 천추흥망이 지적했듯이 여전히 강압적인 부분을 많이 존재했다.


5. 세율[편집]


맨 처음에 조지가 시행했을 때의 세율은 20%였다. 그렇다면 나중의 세율은 어떻게 됐을까?

'명공과지법'은 둔전에 소속된 백성들의 책임과 조세부담을 규정한 법률로 여겨진다. 조조는 국연이 제출한 명공과지법을 채택하여 둔전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면적과 그에 따른 조세부담을 확정했다. 구체적인 수치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위의 각주에서도 말한 바 있는 고민[6]은 거연에서 발견된 한대의 죽간을 연구하여 '5가구에 둔전 65묘를 경작하도록 했다. 이것이 한대의 규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1가구당 13무를 경작지로 받았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유사추에서 발견된 죽간에 따르면 군인들이 경작했던 둔전은 1인당 14.6무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24무를 지급받기도 했다. 고민은 1인당 지급받은 둔전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둔전을 밭은 책임으로 부담해야 하는 조세는 일치했다고 말했다. 고민의 견해가 사실과 비교적 일치될 것이다.

그렇다면 둔전민이 부담해야 할 조세의 양은 얼마나 되었을까? 앞에서 조조와 조지가 과거의 방식대로 관청에서 보유했던 소를 빌려주고 그 대가로 조세를 부담하도록 했던 '계우수곡(計牛輸穀)'에 대해 토론했던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자. 계우수곡은 둔전민들이 관청으로부터 빌린 소의 숫자에 따라서 조세를 내야 했다. 그러나 조지는 계우수곡 대신에 '분전지술(分田之術)'을 제시하여 먼저 일정한 조세 목표를 결정하고, 둔전을 배정한 다음 생산량과 관계없이 조세수입을 올리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역사 자료를 검토해보면, 둔전민들이 부담해야 했던 조세가 한 번 결정된 대로 계속 시행되지는 않았다. 조지와 국연 등이 토지를 기초로 둔전을 실행했던 결과를 토대로 조조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규정을 확정했다.

  • 둔전민의 조세 부담은 수확량의 50%(見稅什五)가 평균이었다. 절반을 관청에서 수닙한 것이다.

학자들은 후대의 기록을 토대로 이러한 수치를 밝혀냈다. 『진서』 「모용황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를 가난한 가정에 빌려주고, 원중에서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그 가운데 80%는 관에서 수납하고 20%만 개인이 가져가도록 했다. 소만 있고 토지는 없는 사람들에게도 원중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가운데 70%는 관에서 수납하고 30%를 개인이 가져가도록 했다. 모용황의 기실참군 봉유가 이렇게 간했다.

"위진시대는 비록 도가 땅에 떨어졌지만, 백성들로부터 70%~80%를 가져가지는 않았습니다. 관청에서 소를 빌린 경우에는 관청에서 60%를 가져갔으며 나머지 40%는 백성이 차지했습니다. 자기의 소로 관청의 토지에 농사를 지을 경우에는 절반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백성들이 즐겁게 농사를 짓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조가 둔전민들에게 토지세로 징수한 수치는 실제로 50%였을 것이다. 관청의 소를 빌렸느냐에 따라서 10%를 가감했으니 소를 빌리는 대가가 10%였다. 그러나 소의 숫자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다.

군둔의 경우는 모두 소속 부대의 수입으로 들어갔다. 군사들의 의식주를 모두 국가에서 제공했기 때문이다.

  • 둔전을 새로 신설한 경우에는 당해연도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2년차에는 규정보다 반을 거두었으며, 3년차부터 전량을 거두었다.

『진서』 「식화지」에는 동진 초기의 후장군 응첨이 원제(元帝)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표가 있다.

유랑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농관을 다시 부활하여 공로에 따라서 포상을 해야 합니다. 위나라의 경우에는 1년차에는 수확량의 전부를 백성들에게 주고, 2년차에는 절반을, 3년차에 모두 거두어 사용했습니다.


어느 정도 백성들에게 여유를 줌으로써 둔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유인책이었겠지만, 세월이 상당히 흐른 후까지도 이 규정은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 둔전에 참여한 백성들은 농업과 양잠에 전념하도록 했다.

『삼국지』 「사마지전」에 따르면 사마지가 조예에게 올린 표에서 둔전의 백성들이 다시 상업에 참여하면서 둔전의 일을 등한시하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는 조조가 특별히 둔전을 관장하는 관리를 두어 농업과 양잠에 전념하도록 했기 때문에 건안 년간에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삶도 풍족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마지의 말대로라면 조조는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서라도 둔전에 참여한 백성들을 다른 일에 징발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6. 관리체계[편집]


앞서 국연에서 얘기할 때 정확한 관리체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전국적인 둔전조직을 구축하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책임자를 임명했던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공(조조)은 녹봉 2천 석에 해당하는 전농중랑장을 설치했으며, 그 외에도 녹봉 6백 석 또는 4백 석의 전농도위를 두었다. 또 녹봉 2천 석에 해당하는 전농교위를 두었는데 이는 중랑과 같은 일을 관장했다. 그 외에도 별도로 교위를 보좌하는 교위승을 두었다.


전농과 관련된 조직에 속하는 관리들은 일반적으로 군국의 행정조직의 관할에서 벗어난 독립행정조직이었다. 녹봉과 직급을 달리한 것은 관할구역의 크기에 따랐기 때문이다. 전농중랑장은 비교적 둔전이 넓고 인구도 많은 지역을 관할했으며, 작은 군에는 전농교위를 설치했다. 전농교위는 둔전교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령/현장과 같은 지위였을 것이다. 전농교위는 생산단위인 하나의 둔전을 직접 관리했다. 둔에는 사마라는 실무책임자를 두었으며, 둔마다 50명이 배치되었다. 민둔을 관장하는 이들 둔전관은 국 군국의 통상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다.

군둔은 원래 군사조직에서 출발했으므로 기본 조직을 둔영이라 했으며, 둔영마다 60명이 배치되었다. 중앙과 지방에 별도로 군둔을 관장하는 관리를 두었지만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군둔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 되었다. 전한시대에는 서역인 윤대와 거려에 군둔을 설치하고 사자교위호령으로 하여금 업부를 관장하도록 했다. 한선제 시대의 시랑 정길은 겨려에서 둔전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여 도호가 되었다. 이 외에도 전한은 초기에 장둔장군을 설치하여 각 군국의 상국이나 군수 또는 기타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둔전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후한 시대에는 의화도위가 둔전업무를 총괄했다.

조조가 설치한 군둔의 기구와 관직은 한대(漢代)보다는 발전된 형태였을 것이다. 『삼국지』 「창자전」에는 건안 연간에 회남에 둔전을 열고 창자를 수집도위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집도위란 조조가 군둔을 관리하기 위해 편성한 관직이었을 것이다. 조조는 생전에 군과 민이 협력하여 경작하는 둔전제도를 확립했다.


7. 조조가 시행했던 둔전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편집]


조조의 둔전은 역사적 시대적 산물이다. 대체로 역사적 산물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일정한 작용을 하게 된다.


7.1. 식량 문제 해결[편집]


조조의 둔전정책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식량 부족이라는 난제를 해결했다. 기록에 따르면 둔전을 실시했던 제1차년도에 상당히 풍족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러한 추세가 몇 년 동안 이어지자 둔전을 설치했던 주군의 창고는 5년 동안 양식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건안 중기에 식량이 쌓여서 창고마다 가득 찼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건안 말기에 이르러 위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는 군둔으로 발전했다.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군둔을 건의한 사람은 사마의라고 한다. 그는 천하에 경작을 하지 않는 군사들이 20만 명이나 되므로 이들에게 상황에 따라서 경작과 수비를 하게 함으로써 농사를 열심히 짓게 하자고 건의했다. 결과적으로 나라에서 필요한 양보다 많은 수확을 거둘 수가 있었다고 한다. 건안 연간에 군사행동을 실시했던 조조가 군량미 부족으로 곤란을 겼었던 것은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송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둔전의 시행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둔전민의 조직적인 반발이었다. 예를 들어서 양릉교위 두송의 부민 영모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여병이 무리를 모아 기병을 한 것처럼 지방의 무장반란과 부분적인 농민기의가 발생한 것은 기근과 같은 식량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조조의 통치 지역에서는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한 소요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둔전으로 통치지역 내의 식량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7.2. 소비를 생산으로[편집]


수많은 유민과 황건군 수십 만명을 비롯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했던 군사들을 모두 둔전으로 끌어들여 생산에 참여시킴으로써 사회적 불안정 요인을 제거하고 통치질서를 크게 안정시켰다. 둔전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식량 부족이라는 가장 근본전이고도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수많은 유민들과 이미 군사집단화된 경험을 겪었던 황건군을 비롯한 농민군의 이탈이 뒤따랐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량미의 부족으로 이어져 조조의 군대 궤멸로 이어졌을 것이다.


7.3. 권력기반 확립[편집]


조조의 입장에서 볼 때 군벌을 격파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가장 큰 계기로 작용했다. 둔전정책의 성공으로 그는 '여러 반역자들을 제거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 왕실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조의 이러한 술회는 대단히 사실적인 표현이다. 둔전은 군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임과 동시에 군현과 같은 공식적인 통치조직 외에도 둔전조직이라는 별도의 특별한 조직을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조는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조직을 양 손에 장악하고 권력 창출 전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가 있었다. 조조가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군사적, 경제적 실력자로 부상한 것은 둔전의 성공이라는 성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7.4. 조조의 둔전과 그 한계[편집]


결론적으로 조조의 둔전정책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둔전 그 자체에는 여러 가지의 폐단이 있었으므로 사회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서 내부에 잠재된 위험 요인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것은 둔전정책이 생산력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유와 경쟁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한 일종의 집단농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제한을 해도 끊임없이 늘어난다. 둔전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일을 해도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영농민에 비해 소득이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비의 통치시대에 이르면 이미 둔전은 상당히 쇠락하게 되었으며, 조예의 통치시대에 이르면 거의 유명무실할 지경으로 와해되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 민둔은 기본적으로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었다. 원래 자유민이었던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의 토지에 정착시켰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착한 지역의 농업환경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아무리 동기 부여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강제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전란의 후유증으로 인해 토지가 황무지로 변하여 백성들이 생활의 터전을 잃어 버렸으므로 자립을 할 정황이 되지 못할 때라면, 이러한 생산방식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면 백성들은 항산을 생각하게 되어 이러한 강제적인 금고형 생산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둔전은 그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삶의 터전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속박하는 체제일 뿐이다.

  • 조조가 시행했던 둔전은 원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생성된 특수한 경제조치였으므로 그 목적은 군대의 식량 문제의 해결이라는 명확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량미를 특별히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면 정부에서도 저절로 그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여러 가지 자료에 따르면 조조의 집권 후기와 그 다음 시대에도 여러 차례 민둔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심지어 둔전의 토지를 분할하여 점유하려고 하거나 이미 분할 했던 경우도 있었다. 『삼국지』 「제하후조전」에 따르면 조상사마의가 집권을 했을 때 하안, 등양, 정밀, 이승, 필궤 등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낙양과 야왕 일대에서 전농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뽕나무밭을 구백 경씩 나누어 가졌으며 탕목지를 파괴하여 그들의 수입원으로 삼았다. 둔전객들에게는 상으로 공경에 해당하는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 진서 왕순전에 따르면 당시 위의 정부는 공경 이하에 해당하는 관리들에게 각각 차등을 주어 지급했다고 한다.

  • 전농이라는 조직이 다시는 농업과 양잠만을 전담하지 않았으며, 생업을 다스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유리한 일이라면 두루 관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생성되자 황초 원년 이후로 사마지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기도 했다.

왕의 다스림은 근본을 숭상하고 말업을 억제하는데 있기 때문에 농업에 힘을 써서 양식을 확보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왕제》에서는 '삼 년 동안 먹을 양식이 비축되어 있지 않으면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관자 구언에서 양곡을 모아두는 일이 급하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손권유비의 세력이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있으므로 군사들은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이므로 오로지 양곡과 비단을 축적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무황제께서 특별히 둔전을 담당하는 관리를 두어 농업과 양잠에 전념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건안 년간에는 천하의 창고가 튼실해지자 백성들의 삶도 풍족해졌습니다. 황초 이래로 여러 전농들이 생업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여 각자 부하들에게 그 계책을 내도록 했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대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릇 왕도를 펼치는 자는 해내를 자신의 짐을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역전》에서는 '백성들이 풍족하지 않은데 어떤 군주라서 풍족할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농업 생산량이 풍족해지려면 시기를 놓치지 말고 지력을 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상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면 비록 그 이득이 배가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손실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답을 개간하여 1묘에서 얻는 이득보다는 못합니다.

무릇 농민들이 해야 할 일이란 정월부터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하여 호미로 밭을 갈고 양잠에 힘을 써야 하며, 짚을 태운 후에는 보리를 심었다가 추수를 하여 곳간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10월이 되면 이러한 일이 모두 끝납니다. 창고를 관리하고 교량을 건설하여 조세를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도로에 계단을 쌓고 다리를 놓아야 하며 수로를 뚫어서 주택과 연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농사일이 끝난 후에 연말까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이 농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의 우둔함으로는 상업적인 일로 국가의 대업이 흔들리는 일이 다시는 없어지고, 오로지 농업과 양잠에 힘쓰도록 해야 하는 것이 유일한 국가의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예는 그의 말에 따랐다.

민둔이 쇠락하게 되자 나중에는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하여 묘당 수확량이 고작 수곡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종자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위원제 조환은 264년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둔전관을 없애고 이들을 모두 정무에 종사하게 하라. 전농은 모두 태수로 임명하고 도위는 모두 영장으로 임명한다.


이로써 조조가 주창했던 둔전은 그의 사후 40년 만에 막을 내렸다.


7.5. 군둔의 경우[편집]


군둔도 역시 조조가 주창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곳은 회남과 회북이었다. 건안 14년 조조는 수군을 합비로 끌어들여 작피에서 둔전을 설치했으며, 창자에게 회남에서 둔전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위나라 말기에 민둔이 쇠락하게 되었지만, 사마의가 관장했던 군둔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서 등애의 회북 둔전과 사마부의 상규 둔전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진서 식화지에는 "수춘에서 경사에 이르기까지 관병들이 경작하는 농경지가 이어졌으며,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진서 사마부전에는 "관중의 군국에서는 군량미가 남아돌아서 충분히 적을 방어할 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자료는 창자의 경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그 사상적 원류는 조조로부터 시작되어 서로 이어져있을 것이다.


7.6. 결론[편집]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실시한 것은 결국 위왕조 시대로 끝났는데, 진나라가 들어서고 264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조는 선대의 좋은 방식을 바탕으로 둔전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새로운 조치를 가미했으며, 그가 주창한 군둔은 국경지역을 개간하여 전쟁에 대비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오랫동안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양진시대에 둔전을 시행하거나 둔전에 대한 논의를 했던 사람들은 모두 위무제의 둔전을 모방했으며, 그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었다.


8. 기타 창작물[편집]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가끔 둔전제 관련 이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삼국지 12에선 아예 조조진영 기본기법으로 둔전제가 있어서 쌀 걱정을 덜 수 있다.

의외로 진삼국무쌍 6에서도 간략하게 다룬 적이 있는데, 시기가 엄청 앞당겨져서 조조가 연주에 정착할 때 쯤에 시작한다. 연주의 황건 잔당들이 농사지을 땅이 없어 다른 땅을 뺏기 위해 도적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없어 혼란이 벌어진다.'[7]는 사실을 깨달은 조조는 허, 낙양 일대의 주인없는 풍요로운 땅들을 황건 잔당들에게 주고 청주병으로서 부렸다는 내용이다. 허저도 여기 껴서 땅 받았다고 엄청 좋아한다. 무쌍 시리즈의 특성상 역시나 미화가 심해서 땅을 받은 농민들이 얻은 고초는 하나도 묘사되지 않고, 그냥 땅 받은 것만으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한호가 병사들이 여유롭게 놀고 있는 꼴을 못봐주겠다는 행보관스러운(…) 이유로 농전정책을 펼쳐서 병사들에게 '한호 ㄱㅅㄲ' '한호 ㅅㅂㄹㅁ' 등의 욕을 얻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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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제는 조조의 시호이다.[2] 정욱은 이때의 일로 두고두고 조조의 원망을 들었다. 사람의 고기로 만든 육포를 자신에게 먹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정욱이 공(公)이 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정욱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세설신어인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하자.[3] 1987년 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고민의 <위진남북조시대의 사회경제사에 대한 탐구와 토론>에는 초평과 흥평 년간에 실시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의 사료로 보아 대체로 타당한 주장으로 여겨진다.[4] 너무 위에 있던 내용이라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황소, 하만, 하의, 유벽의 황건적.[5] 중국 역사학의 권위자이며 중국 역사지리 연구소 소장과 주임을 재직하는 거지엔슝이 총편집한 천추흥망 시리즈.[6] 사람 이름이다. 누군지 모르겠으면 다시 한 번 각주를 보도록 하자.[7] 이 깨달음은 무쌍 시리즈상 꽤 중요도가 높아서, 이후 시리즈의 조조는 이 이치를 기반으로 패도를 휘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