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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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敦煌, Dunhuang
중국 간쑤성 주취안시의 현급시.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1,850km, 서울에서 서쪽으로 2,800km 떨어져 있다. 고대~중세 시기 중원에서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 관문 도시로 번영하였다. 현재는 막고굴(돈황석굴)과 월아천, 옥문관, 양관 등 고대유적들로 유명하다.
2. 역사[편집]
오랜 시간이 지나 풍화된 한나라 대의 장성
시가지 서남쪽 40km 지점의 복원된 양관 유적
기원전 2세기, 한무제대에 건설된 도시로 실크로드에 속한 주요 상업 도시의 하나였다. 한나라는 강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둔황 북쪽 외곽에 장성을 설치했다. 장성의 관문은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네 개 군에서 수도로 보내는 호탄산 옥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옥문관(玉門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다 남쪽에는 양관(陽關)을 설치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전량(前凉)은 이 지역에 사주(沙州)를 설치한다.
전진 시기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불교 관련 물품들을 막고굴을 만들어 보관했다. 수나라 대에 위구르나 튀르크 등 이민족들의 아래 있었고, 당나라 대에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무역 거점으로 번영했다. 그러나 안사지란 때 하서, 농우 일대를 지키던 당의 군대 상당수가 반란 진압에 투입되자 토번의 군대가 하서, 농우를 점령하였고 781년에는 토번 왕국의 명재상 상치싱얼의 군대가 월아천에서 당, 회흘 연합군을 대패시킨 뒤 돈황을 점령한다. 이후 851년에는 장의조가 돈황 일대의 토번군을 몰아내고 량주를 제외한 농우도 대부분을 당에 바쳐 귀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장의조 사후 농우도는 다시 회흘인들에게 빼앗기고, 귀의군 절도사의 영역은 돈황 일대로 축소된다. 이후에는 서하의 지배 아래 있다 원나라로 넘어간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서 문화대혁명으로 피해를 볼 뻔 하기도 했다. [1]
3. 생활[편집]
과거에는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세운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당허(党河)라는 저수지의 물을 끌어 수로로 둔황 시 중심부로 보내고 있다. 둔황 시내는 때문에 전혀 삭막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무를 볼 수 있다. 둔황 시 도심 밖의 향(乡)급 행정구에서는 밭농사도 짓는다. 밭농사를 위한 저수지나 제방, 오아시스 등이 여기저기에 있다. 사막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들어선 얼둔춘(二墩村)에서는 품종이 개량된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한다.
간쑤성 둔황 시의 경계는 꽤나 넓지만 이는 산맥과 사막을 포함한 것으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은 둔황 시 중심지와 그 주변, 황쉐이바(黃水坝) 저수지를 수원으로 하는 둔황 시 양관젠(阳关镇) 등이다. 옥문관 터는 황량한데 반해 양관 터 옆에는 행정구 진(镇)이 만들어졌다.
막고굴과 사주성 고성, 오래된 관문과 모래산, 사막 등 관광 산업도 진행하고 있다. 둔황 시에 둔황 공항이 있어 관광지에 접근하기도 편리하다. 국도와 성도(省道), 고속도로와 철도가 지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아예 이름이 '막고 톨게이트(莫高收费站)'.
4. 기타[편집]
양관 인근의 한나라 대의 돈대 유적
시가지 남쪽의 주요 관광지인 명사산(鸣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의 모습
시가지 서북쪽 50km 지점의 옥문관 (玉门关, 위먼관) 유적
주취안 시 하위의 현급시로 위먼 시(玉门市)가 있는데, 실제 옥문관이 있던 둔황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다.
일본의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이 도시와 돈황석굴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역사 소설을 1959년에 집필했다. 우연과 찰나의 선택에 의해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인생무상이라는 불교적인 주제를 다룬다.돈황 1988(敦煌: The Silk Road)이라는 중일합작영화로 제작, 세트장은 관광지가 되었다.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4에서는 서하, 몽골 제국, 원나라, 명나라의 도시 중 하나로 나온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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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리가 워낙 멀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문혁 시기 둔황을 방문한 공산당 인사는 고작 2명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