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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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구든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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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86
2000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8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릭 서클리프
(시카고 컵스)

드와이트 구든
(뉴욕 메츠)

마이크 스캇
(휴스턴 애스트로스)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년)

드와이트 구든
(뉴욕 메츠, 1985년)


로저 클레멘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7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대별 최저 ERA

짐 파머
(2.58/1970년대 )

드와이트 구든
(2.64/1980년대)


그렉 매덕스
(2.54/1990년대)




파일:Dwight Gooden.png

뉴욕 메츠 No. 16
드와이트 유진 구든
Dwight Eugene Gooden

출생
1964년 11월 16일 (59세)
플로리다 주 탬파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8cm / 94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5번 (NYM)
소속팀
뉴욕 메츠 (1984~1994)
뉴욕 양키스 (1996~199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8~1999)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0)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2000)
뉴욕 양키스 (2000)

1. 개요
2. 선수 시절
2.1. 리즈시절
2.2. 날개 잃은 에이스
3. 은퇴 이후
4. 피칭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6. 이야깃거리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통산 16시즌 430경기(410선발) 194승 112패 2,800.2이닝 3.51ERA/111ERA+ 68완투/24완봉 2,293K/954BB 3.33FIP 1.256WHIP 48.1bWAR.[1]

뉴욕 메츠에서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그 이후 양키스를 시작으로 별의 별 팀을 다 돌아다녔다. 별명은 "Dr.K", 그리고 이걸 줄인 "닥터" (Doctor, Doc).


2. 선수 시절[편집]



2.1. 리즈시절[편집]


파일:투수 최고 시즌.jpg
파일:1984~6 구든.jpg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메츠의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2] 입단 후 바로 다음 시즌인 1983년은 싱글 A에서 보내게 되었고, 27경기에 등판해서 19승 4패를 거두며 <베이스볼 아메리카>지의 "올해의 마이너리거"로 뽑히면서 메츠 구단을 설레게 만들었다.

마침내 1984년, 구든은 고작 19세의 나이로 콜업되어, 218이닝 276K 17승 9패 2.60ERA 1.69FIP 8.3fWAR 5.5bWAR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냈다. 1.69의 FIP는 당시 역대 13위에, 1911년 이후의 기록으로는 1968년 밥 깁슨의 1.77을 경신하는 라이브볼 시대 1위 기록이었다. 이는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1.39[3]라는 독보적 기록을 작성할 때까지 1위를 유지했다. [4][5] 이 엄청난 활약으로 신인상은 받았지만 사이영상은 2위에 그쳤다. 이 해 수상자 릭 서클리프는 시즌 중간에 클리블랜드에서 컵스로 넘어와 NL에서 150.1이닝 16승 1패 2.69ERA 155K 3.9bWAR을 기록했다는데 릭의 AL 성적까지 합쳐서 비교해도[6] 이닝과 승수를 빼면 구든의 압살이었지만 당시엔 사이 영 상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필이면 이닝과 승수였기에 아쉽게 2위에 그쳤다.

그리고 맞이한 두 번째 시즌에는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무시하듯 24승 4패와 1.53[7][8]의 평균자책점을 거두면서, 만장일치로 표를 받아 사이 영 상을 받는다. 이 시즌 구든은 16경기나 완투를 하고 276이닝을 던졌으며, 다승 / 평균자책점 / 탈삼진에서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다. 이닝과 완투 수는 내셔널리그 1위였다.[9] 이 시즌이 바로 1968 깁슨, 1999~2000 페드로와 함께 최고의 단일 시즌으로 꼽히는 1985 구든이다.[10][11] 그리고 메츠 팬들은 구든이 톰 시버를 넘을 수 있을 거라며 설레기 시작한다. 심지어 '구든은 300승을 넘어서 400승을 거둘 투수다!'라는 말까지 나오기까지 했었다.


2.2. 날개 잃은 에이스[편집]


하지만 혹사로 인한 패스트볼의 구속저하와 새 구종인 체인지업의 장착에 실패했고 게다가 마약이라는 늪에 빠지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1986년 월드 시리즈 직후 마약을 본격적으로 복용하기 시작[12]한 구든은 다음해인 1987년에는 스프링캠프 때 마약을 복용한 것이 들통나 재활센터에 입소하면서 시즌을 두달이나 날려먹었고, 그 뒤로 구든의 성적은 계속해서 저조했다. 1992년에는 마침내 10승 13패로 5할 승률도 넘기지 못했고, 1994년 다시 연속으로 코카인 양성 반응이 나오면서 처음에는 60일 출장 정지였다가[13] 1995년에는 아예 시즌에 참가하지도 못하도록 중징계를 받기에 이른다.

구든은 1996년 FA로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하기에 이르는데, 1996년 시즌에 1991년 이후 잃어버렸던 5할 이상의 승률을 다시 되찾는데 성공한다.[14]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우승반지를 따는 데도 성공. 하지만 그 뒤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고향 팀인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등을 전전하다 2000년 양키스로 돌아오는데, 우승반지 까지 얻어내지만 그해에 양키스에서도 방출당한다.


3. 은퇴 이후[편집]


그렇게 쓸쓸히 2001년 은퇴를 선언한 구든은 이후 한때 몸담았던 양키스의 프런트로 일했고, 그 후 양키스의 올드 타이머 데이에 몇차례 나오기도 했다. 한편으론 은퇴후 오만 사건으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2002년에는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면허를 정지당했는데 2003년에는 면허정지중에 운전을 하다 발각되었고 2005년에는 전처의 안면을 가격하는 폭행사건을 일으켰으며 2006년에는 보호관찰중에 마약에 손을 대는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2019년에 또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현재는 문제 없이 생활하는 듯 하다. 트위터에서 근황을 살펴볼 수 있다.

2020년 11월에 마약 소지로 집행 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구든은 유죄 인정 후 마약중독 재활 치료보호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갱생 의지를 키웠다. 재판부도 구든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4. 피칭 스타일[편집]


1980년대를 대표하는 파이어볼러 중 하나이며[15] 1980년대 버전 제이콥 디그롬으로 꼽히는 투수이다. 전형적인 투피치 투수로, 빠른 포심과 커브를 이용하여 삼진을 잡아내는 스타일이었다. 마른 체구에도 불구하고 당대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패스트볼 구속과 강력한 파워커브를 보여준 선수이다. 또한, 동 시대의 대릴 스트로베리와 함께 당대 메츠 최고의 투타 선수로 활약하며 1986년 메츠의 두 번째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16]

그런데 당시 메츠의 투수코치였던 멜 스토틀마이어는 구든이 롱런을 하려면 여러 구질을 써야 한다면서 구든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쳤는데,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때 스토틀마이어가 구든의 투구폼까지 억지로 바꾸어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구든은 새 투구폼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체인지업은 발전하지 않는데 점차 구든의 주무기였던 포심의 구속이 떨어지기에 이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1984년 ~ 1986년 단 3시즌 동안, 포스트시즌에서의 등판을 포함하여 770이닝이나 공을 던졌다는 것.[17] 95경기에 등판해서 35경기나 완투를 했을 정도로 혹사가 심했다.[18] 구든이 파이어볼러형 투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란 라이언급의 초인이 아닌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


5.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드와이트 구든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84
NYM
31
17
9
0
0
218
2.60
161
7
73
2
276
1.073
137
8.3
5.5
1985
35
24
4
0
0
276⅔
1.53
198
13
69
2
268
0.965
229
8.9
12.2
1986
33
17
6
0
0
250
2.84
197
17
80
4
200
1.108
126
4.8
4.5
1987
25
15
7
0
0
179⅔
3.21
162
11
53
2
148
1.197
119
4.5
3.7
1988
34
18
9
0
0
248⅓
3.19
242
8
57
6
175
1.204
101
6.0
3.4
1989
19
9
4
0
1
118⅓
2.89
93
9
47
2
101
1.183
113
1.8
1.5
1990
34
19
7
0
0
232⅔
3.83
229
10
70
7
223
1.285
98
6.8
2.5
1991
27
13
7
0
0
190
3.60
185
12
56
3
150
1.268
102
4.0
3.3
1992
31
10
13
0
0
206
3.67
197
11
70
3
145
1.296
96
3.5
2.3
1993
29
12
15
0
0
208⅔
3.45
188
16
61
9
149
1.193
116
3.7
3.5
1994
7
3
4
0
0
41⅓
6.31
46
9
15
1
40
1.476
67
0.1
-0.6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6
NYY
29
11
7
0
0
170⅔
5.01
169
19
88
9
126
1.506
100
2.1
2.6
1997
20
9
5
0
0
106⅓
4.91
116
14
53
7
66
1.589
92
0.4
1.2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8
CLE
23
8
6
0
0
134
3.76
135
13
51
9
83
1.388
127
1.8
2.7
1999
26
3
4
0
0
115
6.26
127
18
67
9
88
1.687
80
0.5
-0.7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0
HOU/TB/NYY
27
6
5
2
2
105
4.71
119
23
44
3
55
1.552
104
-0.4
0.7
MLB 통산
(16시즌)
430
194
112
2
3
2800⅓
3.51
2564
210
954
78
2293
1.256
111
56.7
48.1


6. 이야깃거리[편집]


  • 같은 팀에서 뛰었던 대럴 스트로베리와 많이 엮인다. 공교롭게도 스트로베리, 구든은 둘 다 1980년대 메츠 최고의 투타 에이스였는데, 둘 다 1990년대 들어 마약을 비롯한 자기 관리 문제로 몰락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 데뷔하자마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굉장한 임팩트를 선사했으나,[19] 마약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빠르게 추락했다는 점에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단기 임팩트의 상징 중 한 명으로 꼽힌다.[20]

  • 또한 역대 최고의 꾸준함 및 훌륭한 누적 성적과 약물 복용 논란이 공존하는 투수인 로저 클레멘스와 계속 비교되는 선수인데, 둘 다 1980년대 리그 최상위권이었으며, 패스트볼의 구위로 타자를 찍어누르는 투수라는 점에서 비슷하다.[21] 사실, 25세 이전의 커리어만 따지면 구든이 더 낫다. 스테로이드 같이 운동력을 증강시켜주는 약물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반면 클레멘스는 1980년대 반짝하기는 했으나, 구든은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이었고 클레멘스는 MVP, 사이 영 상을 탈 수 있는 꾸준한 활약을 하는 선수였다. 허나, 보사구팽 당한 뒤로 약을 먹고 약켓이 되는 바람에 토론토 이후의 커리어는 점점 흑역사가 되었다. 물론 구든도 마약 문제 때문에 이미지가 좋진 않다지만 클레멘스보단 이미지가 훨씬 나은 편이다.

  • 마약과 지독하게 싸운 사람. 1999년 "HEAT"라는 자서전에서 마약과 싸운 자기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는데, 은퇴 이후 마약을 빨고 운전을 하다 두번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 후로도 몇년간 마약 중독으로 고생했다. 마약은 한번 시작하면 절대 끊을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경우인 조시 해밀턴 역시 마약중독을 극복하고 현역으로 복귀한 사례가 될 줄 알았으나 결국 마약에 다시 손을 대었다.


  • 경기 중에 삼진 잡으면 K 라고 적힌 카드를 구장에 거는걸 유행시켰다.

파일:Gooden-Signed-Mets-K-Korner.jpg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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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수 48.1+타자 4.8= 52.9[2] 메츠는 1981년 드래프트에서 로저 클레멘스를 지명했으나 클레멘스가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을 가버렸다. 다행인건 1980년 드래프트에서 데리고 온 대릴 스트로베리가 구든이랑 같이 터지면서 80년대 메츠의 주축 선수가 되었다는 거.[3] 시대 불문 3위, 1911년 이후 1위.[4] 구든은 이 시즌 메이저리그 신인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웠다. 뿐만이 아니라 이 시즌 구든의 K/9는 11.39였다. 그러니까 9이닝 동안 11개의 삼진을 잡았다는 거. 그리고 2경기 동안 32탈삼진, 3경기 동안 43탈삼진을 잡는 기록을 세우는데, 전자의 기록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최다 타이 기록.[5] 그리고 구든이 미친듯이 셰이스타디움에서 삼진을 잡아내자 메츠 관중들은 스타디움 한쪽 벽에 구든이 삼진을 잡을 때마다 "K" 카드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곧 이게 메이저리그 전체로 퍼졌다.[6] 사실 릭은 AL 성적을 합치면 더 불리해진다. 클리블랜드에서 94.1이닝 4승 5패 5.15ERA를 기록하고 컵스로 넘어왔다.[7] 이 기록은 1968년 1점대 평균자책점 투수가 7명이 나오는 사상최악의 투고타저로 인해 메이저리그 마운드가 15인치에서 10인치로 낮아진 1969년 이후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 기록이다. 참고로 1968년에는 위에도 나온 밥 깁슨이 무려 1.12(!)의 정신나간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현역 메츠 선수 중에서 한시즌 기준으로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선수다.[9] 메이저리그 1위는 아닌데, 왜냐하면 당시 아메리칸 리그의 버트 블라일레븐이 구든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지고 완투를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24완투, 293이닝)[10] 이 시즌의 bWAR 12.2는 라이브볼 시대 이후 투수 최고 기록이다. fWAR의 경우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11.6이 역대 1위다.[11] 의외로 이 해 구든의 fWAR는 8.9밖에 안 된다. 1984년도 그렇고 fWAR-bWAR 격차가 꽤 크게 나는 케이스. 근데 1984년은 fWAR가 bWAR보다 3 정도 높다.[12] 어느 정도였느냐하면,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메츠 구단 측에서 개최한 축하 파티조차 불참할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는 '월드시리즈에서 너무 쌔빠지게 던져서 쉴래요'라고 핑계를 댔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마약하느라 못 간 걸로[13] 7경기에 출전해서 평균자책점 6.31로 성적도 처참했다.[14] 노히트노런도 이 해에 거둔다.[15] 전성기 시절, 공식 최고구속이 100마일로 무려 놀란 라이언, 구스 고시지와 비슷했다. 허나 놀란 라이언은 100마일에 육박하는 공을 현역 내내, 즉 무려 27년이나 던졌기 때문에 역사상 최고의 파이어볼러로는 당연히 놀란 라이언한테 압도적으로 밀린다. 게다가 마약으로 빠르게 추락한 구든과 다르게, 놀란 라이언은 현역 내내 자기관리도 잘 했고, 부상도 거의 없었다. 구스 고시지와 비교하자면 구스 고시지가 조금 더 앞 시대 선수이지만 그 선수는 마무리 투수였다.[16] 게다가 둘 다 마약 문제 및 부실한 자기 관리로 인해 폭망했다는 점도 유사하다.[17] 게다가 1986년은 메츠가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한 시즌이었다.[18] 당시 KBO나 NPB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NPB의 경우 애초에 등판 간격 텀이 길어서 완투율이 높은 것이다.[19]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와 유사하다. 이 두 투수 모두 80년대 최고의 임팩트를 가진 투수로 꼽히지만 전성기가 짧아서 명전에 못 갔다. 다만 드와이트 구든은 데뷔한 지 좀 되어 터졌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데뷔 직후 유명해졌는데, 이로 인해서 성적은 더 나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에게 덜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구든보다 일찍 유명해졌는데, 발렌수엘라는 1980년대 초에, 구든은 1984~1986년에 최전성기를 맞았다.[20] 사실 승수만 보자면 아슬아슬하게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 수준이지만 WAR이 명예의 전당에 가기에는 너무 낮다. 또한 200승만 채웠어도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들어갔던 것처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논해볼 수 있었으나 200승도 못 채워서 명예의 전당에 광탈했다. 물론 관리 같은 거 없었던 80년대 선수들의 명전행 기준은 지금보다 훨씬 높으므로, 현대의 투수들의 기준으로 보면 WAR, 승수 모두 비벼볼 만한 수치이지만, 구든의 압도적인 데뷔 당시의 임팩트와 마약으로 인한 몰락 과정으로 인하여 이미지를 많이 깎아먹어서 성적 대비해서도 표를 많이 못 받은 축에 들어간다. 대표적인 임팩트형 명전 투수인 디지 딘샌디 코팩스의 경우엔 구든 쪽이 누적은 좀 더 낫고 심지어 임팩트도 구든과 비슷하지만 딘은 한 시즌 30승을 달성한 상징성이 있고 코팩스는 정점에서 은퇴해서 이미지가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다.[21] 1986년 올스타전에서 타석에 들어선 클레멘스가 구든의 패스트볼을 체험해보고 포수였던 게리 카터에게 '저 공이나 네 공이나 누가 낫고 못한 수준은 아니고 비슷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구위에 확신을 가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